인스턴트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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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으로 대변되는 인스턴트 식품은 현대 사회를 상징한다. 바쁜 일과, 쉴 새없이 돌아가는 산업 현장, 복잡한 생활 속에서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만든 음식보다는 간편하고 실용적인 인스턴트 식품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른 채 먹는 인스턴트 식품이 살로 갈 리는 없다. 우리의 신체는 이 인스턴트 식품에 의해 점점 고갈되고 있다.그러나 우리의 정신을 고갈시키는 인스턴트 문화도 있다. 오랫동안의 노력과 깊은 생각을 동반해 감상하는 문화가 아니라 인스턴트 식품처럼 포장되어 나와 반짝 사람들의 흥미를 끌다가 사라지는 인스턴트 문화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이 사람 저 사람의 짧은 말들을 모아 놓은 명언집, 이 책 저 책에서 조금씩 발췌해 묶어 놓은 논술 고사용 참고서들, 30분짜리 대곡(大曲)들을 3분짜리 디스코로 편곡해 메들리로 묶어놓은 음반, 만화로 보는 삼국지, 영화로 보는 세계 문학, TV 드라마로 공부하는 역사 등등을 보라.최근에 드디어 이 인스턴트 문화가 학문의 세계에까지 침범해 들어왔다. 만화로 보는 미셸푸코, 소설로 읽는 철학,일주일 만에 동양 고전을 완파하자는 어처구니 없는 선전과 더불어 등장한 만화 동양 고전 등이 그것이다.더 이상 생각하지않는 인간, 더 이상 깊이 느끼지 않는 인간이 이 인스턴트 문화를 통해 배출되고 있다.이러한 인스턴트 문화가 성행하는 것은 학교에서 진정한 문화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읽고 생각하고 느끼고 쓰고 토론하는 교육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이러한 학교 교육의 허점을 상술(商術)이 교묘하게 파고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학교 교육이 지식 교육이 아니라 진정한 문화 교육으로 전환하지 않는 한, 이러한 사태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이정우 서강대교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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