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 인간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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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를 방문했을 때, 집회 중에 잠시 시간을 내어 바닷가에 나가봤는데 아주 장관을 볼 수 있었다. 때마침 연어 떼가 모여드는 것이었다. 연어 떼가 저희 태오난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다. 3년 전에 여기서 조그마한 연어로 부화되어 흘러들어가서 태평양 넓은 바다를 헤쳐 다니다가 어느덧 25파운드나 되는 큰 연어가 되어서 이제 저희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좌우간 얼마나 많은 떼가 모여서 올라가는지 참으로 대단한 장관을 이루었다. 특별히 재미있는 것은 큰 폭포 위의 연못에서 태어난 것들이라 그 연못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런데 그 폭포 및에 얼마나 많은 연어가 모여 있는지 모른다. 그 많은 연어 떼가 번쩍번쩍하면서 물을 휘젖는데, 물보다 연어가 더 많은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낚시질을 한다고 해서 낚시대에다 미끼를 먹여 낚시질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낚시대가 아니라 갈쿠리였다. 갈쿠리를 던져가지고 당긴면 아무 데나 걸려가지고 나오는 것이다. 아무튼 미록 미물 물고기이지마는 그 폭포 낙수를 역으로 거슬러 오르는 것을 볼 때에 적이 존경스러웠다. 이것이 본능이라는 것이다. 누가 가르치기를 했는가 누가 끌어당기기를 하는가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 같은데 그 본능으로 모든 동물이 살아간다. 먹는 것, 움직이는 것, 이동하는 것, 어느 한 가지 예외없이 본능에 이끌려서 생명들은 움직이고 그 생명을 스스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동물이다. 본능주도적 생명이다.그런데 동물 위의 높은 차원에 인간이라는 것이 있다. 그 차원은 이성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여기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도 그것을 먹어서는 안된다, 하는 이성의 지시가 있다면 아무리 먹고 싶어도 먹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이다. 육체적 본능이 원하는대로 다 해서는 안된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해도 되느냐, 해서 안되느냐가 문제이다. 그래서 마땅한 도리에 입각해서 옳은 일을 취하고 이성의 판단과 양심에 이해서 동물성이 지배를 받는다. 여기서 수양이 된 인간과 수양이 낮은 사람의 모습을 분간해 볼 수 있다. 가령 여기에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이 있다. 그런데 계속 먹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먹지 말라는 걸 더 먹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먹지 말아야겠다, 하는 생각과 먹고 싶은 욕망이 갈등을 일으킨다. 계속 갈등을 일으킨다. 이런 갈등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사람은 수준 낮은 인간이다. 수양이 잘된 사람은 먹어선느 안되는 음식에 대해서는 입맛이 동하지도 않는다. 이쯤은 도달해야 인간이랄 수 있는 것이다. 해서는 안되는 일에 계속 끌리면서 안된다고 하는 가책에 끌려서 갈등에 빠지는 인간은 아직 수양이 덜 된 것이다. 가서는 아니될 길은 아예 가고 싶지 않고,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은 먹고 싶지도 않은, 이런 인간이 수준급에 도달한 인간이라는 말씀이다.그런가 하면 그리스도인은 좀더 높은 차원에 있다.(->그리스도인의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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