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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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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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골에선 이발을 하려고 해도 버스를 타고 40리 길을 나가야 합니다. 머리가 덥수룩해진 터라 이웃 면소재지에 있는 이발소로 나갔습니다.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제 순서가 되기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는데 기다리는 그 시간이 제겐 굉장히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발사가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다정다감하고 친절하며 자상한지, 그리고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머리를 깎아 내는지 그 모습을 지켜 보노라니 시간가는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손님, 손님께는 이 스타일이 더 어울릴 것 같아 조금 더 쳐 올렸습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감사합니다. 어르신께서 언제나 저희 집을 이용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네, 안녕히 가세요], [아 네네, 손님께서 거울로 보시기엔 양 옆 머리를 더 쳤으면 싶으시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이렇게 하는게 나으니까 그냥 두시는게 좋을 것입니다].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쩌면 그렇게 자상하게 깎듯이 대할 수 있는지….! 자신의 일을 그저 돈 받고 그 돈만큼 서어비스 해주는 돈벌이로 생각지 않고, 이웃을 섬기는 기회로 알고 그처럼 정성을 다해 감당하는 이들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드디어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발의자에 올라 앉자 이발사가 제게 말했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당황했습니다. 죄송하다니 뭐가 그는 제 앞의 두 세 사람 머리를 깎느라 정신없이 일했고, 잠시도 게으름을 부린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기다린 시간이 좀 길긴 했지만 앞 사람들보다 늦게 온 저로선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발사가 왜 무엇을 잘못했기에 제게 사과를 하는 것입니까게다가 저의 삼십여년 평생에 진정한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로 [용서해 주시겠습니까]하는 이발사는 처음 보았습니다. 설령 의례적인 인사라 하더라도 말입니다.제 머리를 손질하며 그가 제게 이것 저것 물어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어디에 사십니까"아 저요 저-기 부항 대야에 삽니다" "대야 혹시 학교에 계시는 분 아니십니까" "예, 맞습니다" "거기에 계시는 목사님도 저희 집에 자주 오시지요" "그곳을 아십니까" "거기에 사시는 분들이 다 너무 좋으신 분들이라서 소문이 나 있지요" "원 별 말씀을!" "저도 요-기 순복음교회에 나갑니다" "....예에 그.. 그래요"그가 그리스도인이란 사실에 깜짝 놀라 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그가 저의 앞머리를 다듬으며 이야기했습닌. "하지만 아직은 엉터리이지요. 교회에 나간지도 얼마 안 되었고... 사실은 교회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옆에 사시는 그 교회 목사님께서 저희를 이웃으로 얼마나 친절하게 잘 대해 주시는지! 그러면서도 한번도 제게 [예수]이야기는 안 꺼내시는 겁니다. 원래가 저희같은 사람은 누가 내놓고 [예수 믿어라] 떠드는 거 질색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면 더 싫어지는 겁니다.그런데 그 목사님은 달랐지요. 저희가 교인이 아닌데도 정말 저희를 잘 대해 주셨답니다. 결국 그 목사님의 사시는 모습을 보고 저희도 교회를 나가게 되었지요."어느 목사님의 무언(無言)의 삶을 통해 결국 그토록 혐오해 왔던 그리스도인이 되고 만 젊은 이발사. 그리고 그의 그 친절! 머리를 다 깎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이야기를 떠벌여 왔습니다. 게중ㅇ는 정말 아직까지 한번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 보지 못했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났던, 그리고 지금도 만나고 있는 주변의 사람들의 90%는 이미 [예수]에 대한,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는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분명한 하나는 저의 삶이 그들에게 '흠모할 만한 무엇'인가를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그들이 의아해하고 신기해하고 궁금해하는 [크고 놀라운 그리스도인들만의 비밀]은 고사하고서라도, 저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초보적이고도 상식적인 수준의 삶조차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을 문득 문득 깨닫게 됩니다.사실상 불신자들이 기독교인들을 그토록 혐오하고 싫어하는 이유라는 것이 무슨 엄청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불신자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대단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거라는 것입니다.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작은 친절]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따뜻한 미소'와 '한마디의 위로와 격려'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세계에서 조차도 요구되고 있는 [정직]과 [진실]정도의 것일지도 모릅니다.무슨 대단한 자선사업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셨던 그 절대적인 긍휼과 자비의 사랑을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친절의 말 한마디라도 건네 달라는 것이 그들의 기대요 요구일지도 모릅니다.이 말은 우리가 그 정도 조차도, 그 수준조차도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아닐까요[정직]이나 [친절], [자비]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직이나 친절이 뒤따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그 젊은 이발사가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베푼 그 정도의 친절과 따뜻한 마음씨는 무슨 대단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제가 그 정도의 삶도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그렇다고 그 이발사의 삶의 태도가 대단한 것은 아니다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에 대해 말로만 떠벌이는 저보다도 그 이발사가 이웃에 끼치는 영향은 수백배 수천배 더 크지 않겠습니까)이곳에서 저희와 함게 살고 있는 형제 진협이가 제일 무서워하고 제일 꺼려하는 사람이 바로 저라는 사실을 제 스스로 잘 압니다.그를 데려다 함께 먹고 자고 돌보지는 못할 망정 그를 교육하고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그에게 언제나 훈계하고 인상만 써온 제 자신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책망, 훈계는 있었어도 따뜻한 위로와 격려, 친절의 말 한마디는 없었던 제 자신을 돌아보며 많이 슬퍼했습니다.[복음]이란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 이발사의 이웃으로서 한결 같은 친절과 따뜻함을 보여 주었던 그 목사님이야 말로 '진정한 전도자'입니다.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을 그토록 정성스럽게 돌보고 섬기는 그 이발사야 말로 어떤 전도자보다도 훌륭한 전도자입니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죽음을 두려워 않으며, 영원의 소망을 지닌 천국의 사람들]이라는 소문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래도 제일 친절한 사람, 그래도 제일 존경할 만한 사람들, 그래도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만한 사람들"이라는 소문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런 면에서 제 자신을 돌아보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종일 괴로웠습니다. 이 [괴로움]은 마땅히 제가 겪어야 할 아픔입니다. 더욱 마음이 아팠던 것은 이 전에는 그나마 이런 '안타까움'이나 '아픔'조차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새롭게 시작해야겠습니다. 민족복음화, 청소년 선교, 신앙 대부흥도 중요하지만 우선 제가 더불어 살고 잇는 가장 가까운 이웃들(아내, 부모형제, 예수 마을 사람들...)에게 작은 친절, 한마디의 따뜻한 위로나 격려의 말을 베푸는 것 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주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간구한 제목이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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