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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눈물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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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남쪽에 시의 고도라는 이스파한이 있다.그곳 골동품 가게에서 눈물단지(누호)라는 유리그릇을 본적이 있다. 나팔처럼 굽은 유리병으로 색색가지가 있었다. 옛 페르시아 여인들이 시집살이 하면서 흘리는 눈물을 모아 두는 단지로 세 병을 채워야 슬픔이 다하고 죽을때 더불어 묻히는 생의 동반자다. 페르시아 여인의 고달픈 일생을 단적으로대변해주는 눈물단지였다.전통사회에 있어 이란 여성과 한국 여성은 많은 공통점을 찾아 볼수있다. 첫째는 조혼이다. 한국 여성이 그러했듯이 이슬람 사회에서도 13세 이전에 시집가는 것이 관례였다. 물론 연애도 없다. 외교관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 한 왕녀가 남장을 하고 공항을 빠져나가려다 적발되어처형당한 것은 근년의 일이다.옛날 우리 나라에서 여자가 품행이 좋지 않다는 소문만으로 가문형이라고 하여 돌을 안겨 깊은 소에 빠뜨려 죽였듯이 이슬람에서도 이사를 가버리거나 명예를 보다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하기일쑤였다. 4명의 아내를 율법으로 합법화 하고 있는데 이를 둔 이런 우스개이야기가 있다.아내가 하나면 말대꾸로 남편이 주눅이 들고 둘이면 서로 싸우기 때문에 말리느라 고달프며 셋이면 2대 1이 되어 예쁘고 젊은 각시를 구박하므로 넷이어야 서로 견제하며 화목해진다는….철저한 남아존중 사회였다는 점도 흡사하다. 한국 여성이 소 한마리값으로 평가받는 노동력과 사내아이를 못낳으면 칠거지악으로 쫓겨났듯이 이란 여성들도 빵을 굽고 낙타의 배설물을 주워모아 땔감 만드는 일과 역시 사내아이 낳는 일이 존재가치의 전부였다. 이슬람 사회에서 아이몇을 가졌느냐고 물으면 [아들이 몇… ]이라고만 대답한다.남녀를통틀어 아이들이라는 보통명사가 없는 나라가 많다 한다.개화기까지 우리나라 여인들은 바깥 나들이할 때 얼굴 가리는 장옷을 입고 다녔듯이 이란 여성들도 차도르라는 검은 베일로 남의 시야에서 얼굴을 지우고 살아왔다. 팔레비 왕조때 이 차도르를 추방했으나 호메이니 혁명후 율법 원리주의에 의해 복고되었던 것이다. 이번 이란 선거에서 그 보수적 원리파를 누르고 온건개혁파인 하마티가 새 대통령이된 것은 여성의 인도적 해방이라는 성원에서 였다.그는 이미 연애없는 결혼은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으며 차도르에 진즈 차림까지 허용했던 분이다. 이제 페르시아 아가씨들의 매력적인 눈매를 차도르로부터 해방시켜 무덤에 갈때 눈물단지를 가져가지 않게 하느냐 여부에 이목이 쏠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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