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TOP
DOWN


한국사회지배 최고가치관 인정

본문

제주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 선원 하멜의 표류기에 보면 제주도를떠나 전라도를 거쳐 서울에 이르는 동안 관민으로부터 받은 정답고 이해를 초월한 인간적인 대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우리 일행은이 세상 어느 나라의 기독교 신자들로부터 받은 대우보다 이 우상 숭배자들로부터 받은 대우가 보다 인간적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한국인의 정은 면식이 없는 낯선 외국사람에게도 강력하기 이를데 없는 파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근세 조선에 와서 활동했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보고를 토대로 저술된 달레의 [한국교회사 서설]에 이 한국인의 정의 파워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또 잘사는 사람이건 못사는 사람이건 밥때 밥을 주고 잠잘 때 잠자리 주는 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수치스런일이다. 길가에서 참을 먹고 있는 가난한 농사꾼도 행인을 굳이붙들고 모자라는 밥을 나누어 먹인다.크고 작은 잔치가 벌어지고 있으면 생면부지라도 백년지기처럼 융숭한 대접을 한다.그러기에 한국사람은 여행을 떠날 일이 있을 때 노자나 준비물이 필요가 없다.지팡이와 담뱃대 그리고 갈아입을 옷가지만 꾸러미에 구겨 담고 나서면 숙식은 인정이 해결해준다.이렇게 유숙하는데 날이 궂어 떠날 수 없으면 사나흘 묵어도 되고 또 앓는 일이 있어도 미음을 끓여내고 약까지 달여내는 것이 도리다.그렇게 머물러 있다 하여 눈치를 보인다는 법도 없고 또 염치 없다고 탓할 사람도 없다.].경제적 이해와 타산이 용해된 따끈한 정, 그 정의 네트워크에 온 조선팔도가 거미줄처럼 엉키어 있었기에 그토록 못 먹고 못 입고 못살았으면서도 전혀 각박하지 않게 훈훈하게 살아날 수가 있었을 것이다.달레의 [한국교회사서설]에서 다른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혼례나 상례 같은 대사에 한국사람들은 제각기 일을 당한 집안일을 돕는것을 의무로 여긴다. 어떤 사람은 장보는 일을 맡고 어떤 사람은 음식 장만하는 일을 맡는다.아무 것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없는사람은 멀리 사는 친지들에게 그 대사를 통지하는 일을 자청하기도 한다. 어떤 집에 불이 나 타버렸다면 이웃의 어떤 이는 돌을, 어떤 이는나무를, 어떤 이는 짚을 들고 와 제밥을 먹어가며 사나흘씩 무료봉사를 한다.타관사람이 그 마을에 이사오면 모두들 그를 도와 조그마한 집을 세워준다. 어떤 사람이 먼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거나 숯을 구우러 가게 되면 그 인근 마을에 먹고 잠잘 곳을 반드시 얻게 마련이다.그저 양식만 들고 가면 된다.그럼 그 마을 사람들이 밥을 지어 주고 반찬까지 차려다 준다. 앓게 되었을 때 이웃에 약이있는 사람은 달라고 하기 전에 갖다주는 것이 상식이며 논밭갈이 연장이나 소까지 빌리러 오면 전혀 대가 없이 빌려준다.].이를 본 서양사람이면 한국사람의 서양사람에게 없는 어떤 요인이 그렇게 하는가 고민하게 된다고 했다. 고민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한국사람의 그 많은 정이 그렇게 하고 있고 정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지상지고의 가치관이기 때문인 것이다.이 아름답던 정이 왜 현대사회에서 증발되었는가를 따져보면 크게 다음 세가지로 갈라 볼 수가 있다.그 첫째가 우리 한민족이 역사상 최초로 겪는 도시화가 그 원흉이다.농촌의 생업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정으로 맥락되지 않고는 살아날 수없게 돼있는데 도시는 그 사이를 단절하고 살 수 있기때문이다.둘째가 기계화다.전화, 컴퓨터, 팩시밀리, TV 등등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할 일들을 기계가 모조리 대행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를단절해 왔다. 곧 기계화의 진행과 인간 단절의 심도는 고스란히 비례해온 것이다.셋째가 핵가족화다.핵가족화된 가정에 태어나 자란 전후세대는자기중심적으로 양육돼왔기에 독선적 자아가 비대돼 있어 남들과의 상대적인 존재로서의 자아를 파악하는데 미숙하며 그것이 단절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3,499 건 - 125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