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하게 과제를 수행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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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독하게 사랑을 노래할 뿐만 아니라 노동도 고독하게 수행한다. 우리는 노동의 과정 속에서 인격적으로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자신이 설정한 과제만을 고독하게 수행하는 것이 오늘의 문화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얼마 전에 특이한 경험을 했다. 나는 과 사무실에서 나와 연구실로 걸어가던 중에 여학생 하나가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학생이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착각한 줄로만 생각하고 그에게 말해 주었다. “학생 어디 가나 거기는 남자 화장실이야.”그런데 그 여학생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바롬 수업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서 그 학생은 계속 남자 화장실로 향했고, 무슨 양해를 구하거나 기척도 없이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때 화장실 안에 있던 남자는 너무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 했고, 그 학생은 죄송하다는 말도 없이 “세면대에 물이 나오지만 보면 돼요”하면서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리는 것이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나는 그제서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하게 되었다. 나의 짐작은 이렇다. 우리 학교에는 “바롬 교육”이라는 수업이 있다. 이 수업에서는 조를 짜서 학교 내에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연구하여 보고서를 제출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짐작컨대, 그 여학생은 화장실 세면대에 물이 제대로 나오는지 조사하는 것을 과제로 설정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남자 화장실의 세면대에 상황도 점검하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의 행동이었다. 그 학생이 과제를 수행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 그가 일을 행하는 방식은 이 시대 인간의 전형을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내가 “학생, 어디 들어가나”하고 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제가 바롬 교육을 수강하는데, 남자 화장실 세면대에 물이 제대로 나오는지를 조사하게 되었어요. 쑥스럽지만 그래도 노크라도 하면서 확인해야 하겠죠”그리고 노크를 했더라도, 당황한 남자와 마주쳤을 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저 때문에 놀라셨죠 제가 바롬 교육 수업 숙제로 수도꼭지 상태를 조사해야 하는데, 이해해주시겠어요”하지만 그 학생은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을 단 한번도 인격적으로 대하지 못했다. 그는 이 시대의 문화 속에서 자란 현대인답게 그저 고독하게 자신의 과제만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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