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
본문
백제의 서울 부여에 가보면 서기 650년 백제 유적으로서 남아있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궁이나 절이나 탑은 커녕 달밝으면 눈물지을 황성 옛터도 없다. 길가다 보면 주춧돌이나 기왓장만이 발부리에 채일뿐이다. 망국때 나당 연합군이 콩가루처럼 가루내어 없애버렸기때문이다.굳이 찾아본다면 전쟁과 살육만을 위해 태어난 사나이라는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이 백제 평정의 전승 기념탑으로 세운 평제탑이 전부요 굳이 더 찾아본다면 두들겨 부수기엔 너무 벅찬, 망국의 한이서린 바위들 뿐이다. 궁녀들이 투신한 낙화암이 그것이요 의자왕이 꽁꽁 묶여 당나라로 떠나가는 것을 통곡하며 바라보았다는 유왕산 바위가 그것이다.지난주에 부여에선 의자왕이 구인되는 포로선단 광경을 재연하는 유왕산 추모제가 있었다. [당서]에 의자왕과 태자인 융은 소정방에게 붙잡힌 몸이 되어 그의 신료 58명과 더불어 당나라 서울인 낙양으로압송되어 왔으며 당나라의 고종은 칙천문루에서 굴복의 예를 받고 묶인 몸을 풀어주었다.그런지 얼마 후에 의자왕은 심신의 병을 못가누어 세상을 떠났는데 [손호와 진속보의 무덤 옆에 장사를 지내주었다]는 당서의 기록에유의할 필요가 있다. 손호는 삼국지의 오나라를 세운 손권의 손자로16년간 재위하면서 주지육림속에서 살다 죽은 망국의 임금이다.진숙보도 진나라 선제의 후주로 6년간을 재위하는 동안 주색에 묻혀 나라를 망친 임금이다. 의자왕을 그 묘역에 묻은 것은 의자왕이 말년에 주색에 빠져 망국을 유도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서 당나라의 침략을 정당화 하려는 저의를 드러낸 것이다. 의자왕은 서자를 41명이나 두었다는 기록이 있긴 하다.이로 미루어 보아 여색을 좋아하긴 했으나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로 불리었으며 정사에 웅용담결하여 국토를 확장한 명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국제역학에 밀려 망국했고 망국의 왕은 후대 사관에 의해 누명을 쓰게 마련이며 그 피해를 입은당사자가 의자왕이다.유형문화재라곤 남은게 아무것도 없는 백제의 옛 서울에서 재연한 무형문화재란 것이 기껏 의자왕에게 맺힌 백제의 한이어야만 했던가 싶다. 차라리 의자왕의 누명을 벗기고 지금의 중국땅 치욕적 묘역에서 1330여년을 안절부절못한 혼백을 백제땅에 모셔오도록 자치단체에서 발의하는게 후손의 도리라고 본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