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나타샤
본문
말하고 듣는데 장애가 있는 한국 총각 임신종군과 러시아 처녀 나타샤양이 안동에서 오늘 혼례를 올린다. 그들은 국제 장애인 자활자립을위한 나눔 공동체에서 만나 2년동안 사랑을 해왔다. 물론 임군이나 나타샤양은 사랑한다는 단 한마디 말을 입으로 할 수도 귀로 들을 수도없었다.사랑에 있어 사랑한다는 말은 필요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순수한 사랑이 오염되거나 변질 또는 퇴색할때 사람들은 그 말로 곧잘 위장하려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람은 하루 2백번씩 거짓말을 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듯이 거짓말을 사람의 입이 하고 사람의 귀가 듣는다.그 거짓말로 오염이 된 공해의 바다에 떠있는 백사장에서의 국경을초월한 이들의 만남이다. 그래서 싱그럽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헬렌켈러가 나이애가라 폭포에 들렀을 때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그 장관과 폭음을 보지도 듣지도 못할 바에야 왜 가느냐는 것이었다.[물론 보거나 듣지는 못한다. 하지만 보고 듣는 사람에게 감지할 수없는 것을 나는 감지한다. 그 벼랑에 서서 체감되는 공기의 진동과 대지의 동요가 혼을 흔들어 외포의 공간에 나를 콩알만큼 작게 한다. 한데 왜나이 애가라에 가지 말아야 하는가.] 그러하듯이 사랑은 입으로하고 귀로 듣는 말이 하는 것이 아니라 혼이 하는 것이다.우리의 옛날 어머니들이 시집가는 날, 눈언저리에는 꿀을 바르고 귀는 솜으로 틀어막고 어금니에는 대추 씨앗을 물고 가마에 오른다. 시집가서 시집살이를 함에 있어서 보지도 듣지도 말고 또 말을 하거나 웃지도 말라는 물리적인 제재를 했던 것이다.부끄럼을 타거나 웃거나 실수하지 못하게 하는 물리적 감각봉쇄라고하기도 하나 시집살이 하면서 보거나 듣거나 말하지 말고 사는 것이 가장 신관이 편하다는 교훈이라는 설이 보다 유력하다. 곧 말하고 듣고하는것이 인생에 있어 얼마나 해독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체험방인 것이다.우리 조상들에게 벙어리통은 저금통이 아닌 처세통이었다.선비들의 사랑방에 가면 주인은 선반위에서 벙어리통을 내려 넌지시 내민다.곧 세상이 험해 무슨 말 한마디 하면 이것이 왜곡되어 패가망신하게 되니 시체에 관해선 말하지도 듣지도 말자는 묵약을 입도 귀도 없는 벙어리통으로 대행시켰던 것이다.요즘 국회 청문회에서 마구 거짓말을 뱉어대는 입과 입들, 그리고거짓말 불감증에 걸린 귀와 귀들, 이 와중에 입과 귀를 초월한 나타샤의 사랑이 너무나 신선하게 와닿는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