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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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람들에게는 프란체스코-프랑시스-프랑수아-프랑코…하는 이름이 많다.미테랑 프랑스 전대통령,여류 작가 사강,영국의 철학가 베이컨 그리고 이승만 박사의 부인이 그렇다. 이 모두 이탈리아 공화국의 수호성인인 프란체스코에서 비롯된 이름들이다.이 성인이 묻힌 이탈리아 중부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성당이 두번의 지진으로 원형천장이 무너지고 지구의 보물들로 손꼽히는 13세기 벽화들에 금이 갔다. 서양의 많은 사원중 하나가 금이 갔다는 것 정도로여기겠지만 서양 사람들은 금년도 10대 뉴스의 하나로 충격받고 있는것 같다. 그만큼 그들의 정신세계에서 프란체스코가 차지한 비중이 큰때문일 것이다.아씨시의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깡패 두목으로 옥살이까지 한 프란체스코는 폐허가 된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그림판의 그리스도가 걸어나와 [무너져가는 나의 집들을 다시 세우라] 는 계시를 받는다. 계시를 준 그 그림판을 지금 아씨시의 성키아라 성당에 가면 볼수 있다.이에 갈색의 농민복장에 [청빈-순결-순종]을 상징하는 세개의 매듭을 한 새끼 허리띠를 두르고 맨발에 샌들 차림으로 탁발을 시작, 헤아릴 수 없는 교회재건을 한다. 그 연장으로 프란체스코회를 만들어 전도에 나섰다. 그가 44세로 흙침대위에서 죽었을 때는 전세계에 3만명의 수도사가 1천1백개소의 수도원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프란체스코와 한국의 관계도 유구하다.1253∼1255년 기욤이라는프란체스코 수도사는 몽골 전도를 자청하고 죽음의 대륙을 신앙심으로횡단, 몽골의 서울에 이르고 그곳에서 [고려인의 추장]을 만났었다는기록을 남겼다. 당시는 몽골이 고려에 침략중이었으므로 인질로 잡혀가 있는 고려의 왕족이었을 확률이 높다.기독교와 한국인의 최초 만남이 프란체스코를 통해 이루어진 셈이다.두번째의 만남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잡혀간 한국 피로인으로 프란체스코회에 입신한 복자 가요의 순교를 들 수 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서양 선교사들을 숨겨주고 지하교회를 영위했다 하여 두손이 묶인채 화형을 당했다.현대인들이 청빈 순결 순종의 프란체스코삼계를 어기길 너무 혹심하게 한데 대한 지하의몸부림으로서 아씨시의 시민들은 이번 지진을 합리화하고 있다고 외지는 전한다.신이 가장 믿는 심복으로 가까이두고 있는 프란체스코가 잠든 곳에 지진을 있게 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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