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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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으로서 최초로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여 주구임을 자처한이가 있었다.그것도 창씨개명을 강요한 일제때가 아니라 개화기 때의 일이다. 노다 헤이지로-. 노다는 일본옷인 하오리만을 입고 일본 청주인 정종만을 마셨으며 술에 취하면 [도도이쓰]라는 일본특유의 코머거리 민요들 만을 즐겨 불렀다.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파 송병준인것이다.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의 승리로 대세가 일본으로 기울자 한말의 친일파들은 경쟁적으로 매국공적을 올리고자 긍긍하였다. 그 첨단주자가 송병준이다.헤이그 밀사사건을의 음모를 앞장서서 청부한 것이 송병준이다. 어전 회의에서 송병준은 고종이친히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임금에게 사과하든지 일본까지 가기 싫으면 조선 주둔군 사령관인 하세가와 대장에게 가 사죄하라고 다그친 것이다. 이 자리에서 황제는 {내가 너같은 놈한테 이런 봉변을}하고 몸을 못가누었다 한다.퇴위 전야의 각료 회의에서 송병준은 폐하께서 계속 거부하면 손을 강제로 끌어다가 옥새를 찍게 하고 시위대의 군사활동을 사전에 막기 위해 궁중 전화선을 모두 절단하며 퇴위를 품신하는 대신들은 제각기 권총을 숨기고 들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결하자는 강력 아부발언을 하고 있다.함경도 장진에서 상 경 기생집에서 심부름하다가 단골손님인 민영환에게 잘 보여 집종으로 일하게 된 송병준은 재산을 늘리는데도 수완이 비상했다. 을사조약이후 일본은 황제를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고자 황실 재산정리국이라는 부서를 만들어 송병준에게 맡겼고 송은 그의 사조직인 일진회 회원들로 하여금 그 재산처리를 마음대로 했던것이다.매국한 대가도 대단했다던 데 상전인 민충정공의 재산을 가로채 지탄을 받고 있으며 그의 친일파 동지인 이용구가 죽을때 자식 양육비로 맡긴 50원이라는 거액의 돈도 횡령하여 재판받는도중 죽고 있다.기생조합인 권번을 차지하여 화류업계의 대부로서 치부에 골몰하기도 했고--.그 송병준의 전국에 흩어진 부동산이 2천5백만평에 7천억원 어치가 된다고 한다.그 큰 재산을 셋방살이하는 그의 증손이 선조의 죄과를 비는 뜻에서 장애인 복지단체에 기증하겠다는 보도가 있었다. 물론지은 죄과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하지만 조상의 죄에 그만한 정신적연대력을 갖고 때묻은 돈을 재활의 꽃으로 피운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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