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목회자가 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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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목회자가 되는 길
노만 빈센트의 필 목사의 목회 초기 시절, 어느 할머니 한 분이 설교가 끝난 후에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본받으려고 했었더라면 훨씬 더 훌륭한 목사님이 되셨을 겁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성경 말씀속에서 올바르게 성장하며, 이럴 때에 하나님의 지식은 놀랍고도 빠르게 얻어진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의 올바른 목적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라는 빌립보서 3:10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
화분 돌보기
교인이 교회 사무실에 화분 셋을 가져다 놓았다. 목사는 그 식물을 감상하기는 했지만 물을 주는 것 외에는 별로 한 일이 없었다. 얼마후 하나가 죽었고, 다른 두 개의 화분도 누렇게 시들었다. 만약 비료를 주고 분갈이를 하고 가지를 쳐 주었더라면 식물들은 계속해서 번성했을 것이다. 그래서 뒤늦게 화분에 거름과 비옥한 흙을 덮어 주고 햇볕에 며칠 동안 내어 놓았더니 다시 소생하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크리스천으로 사귐을 갖게 하면서도 그들을 돌보지도 않고 그들의 삶 속에 개입하지도 않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먹이지도 않을 때, 어떤 비극적인 결과가 오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교회학교 공과에서 얻는 깊은 진리를 접하지 못하고,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듣는 것을 사람들의 삶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되면 처음에 뿌리를 내렸을 때는 잘 자라던 식물이 나중에 소홀하게 되었던 것처럼 초신자들도 크리스천들의 생활에서 얻는 참신함과 강력한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 랜디 화이트
차라리 목사가 되지 말 것을...
서울 대광고등학교에서의 일입니다. 한 학생이 왜 성경공부를 해야 합니까? 왜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까? 하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 학교는 기독교 학교입니다. 전통 있는 학교입니다. 서울에서 예전엔 5대 사립학교 중 하나였습니다. 학교에서는 1인 시위를 하는 이 학생에게 많이 권면했습니다. 이 학생은 교육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했습니다. 그는 학칙에 의해 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 교목이 문제였습니다. 신앙지도를 위해 있는 교목이 학생 편을 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부인했습니다. 또 성경에 나타난 이적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이외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했답니다.
결국 통합 측 노회에서 면직을 했습니다. 지금은 방송에 보니 수염을 기르고 길가에서 노점상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차라리 목사가 되지나 말 것을 하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 박충웅 목사
성도들이 원하는 목회자
어떤 목회자세미나에서 강사 목사님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교회 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문 닫는 교회가 하루에 10개도 넘는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고민을 하다가 이 자리에 오신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하시도록 기회를 주지 않고 내가 하려고 하다가 지쳐 나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딱 정지하고 3개월동안만 강대상 앞에 자리 펴고 밤낮 기도할 수 있습니까? 기도 제목은 '하나님, 당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오직 당신 한 분만을 구합니다.' 하나님 자신만을 구하는 기도를 3개월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3개월 후 다시 만나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서로 이야기합시다"
3개월 후 몇몇 목회자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여자목사님 교회에서 놀라운 일이 있어났습니다.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었던 여자목사님이 정말로 모든 인간적인 방법을 올스톱하고 강대상 앞에 자리를 폈습니다. 그리고 밤낮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기도만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자 그나마 있던 성도들마저 교회를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고 구하자 어느 한 순간 찬란한 빛이 비추면서 하나님의 선명한 임재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달콤하고 깊은 교제가운데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교인들이 등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너무 많이 보내시면 하나님과 교제할 시간이 줄어드니 적당히 좀 보내 주세요" 하고 기도했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간증을 했습니다.
요즘 성도들은 인간적인 재능이나 능력이나 수단이 뛰어난 목회자보다,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인격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목회자와 그런 교회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최용우
어느 무공해 목사님이야기
우리 교회에 채소 도매상을 하는 분이 있다. 이분이 얼마전 상추를 보내 오셨다. “목사님, 우리집 옥상에서 키운거니 안심하고 드셔도 돼요”, “아니 채소가게 하시는 분이 왜 옥상에서 키워요?” “아유, 목사님도! 요즘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게 어딧나요?” 그분은 자기가 먹는 채소만큼은 집 옥상에서 직접 키워 먹는다는 것이다. 농약 등 공해독으로 인해 믿고 먹을 것이 없다는 소리다.
어느 분은 채소의 숨이 살아있게 보이기 위해 농약탄 물을 채소에 뿌린다고 한다. 그리고 무공해 자연산으로 위장하기 위해 배추벌레를 사다 채소위에 올려 놓는다고 한다. 약에 취한 배추벌레가 졸도하여 뚝뚝 떨어지면 대기중인 배추벌레로 임무교대시키며 그러길 반복한다는 것이다. 아! 무공해 채소를 언제나 맛볼 수 있을까?
난 2번의 선교사 시절을 보낸적이 있다. 내가 사역했던 하와이나 일본 동경은 딴건 몰라도 음식만큼은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 공해독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농약친 콩나물도 횟가루 넣은 두부도 없다. 채소건 과일이건 껍질채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 먹는 음식으로 장난치지 않으므로 거의 모든 음식이 무공해 식품이라 보면 된다.
얼마전 지구촌 최대의 선교축제가 우리 교회에서 있었다. 주님의 명령따라 전 세계로 흩어진 선교사들이 매년 이맘때면 본부교회로 돌아온다. 선교보고와 함께 세미나, 금식기도 등을 통하여 순복음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교회는 그들의 생생한 간증을 통해 많은 축복을 받는다. 내가 섬기는 구로순복음교회도 몇 분의 선교사를 초청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중의 한분은 나와 절친한 사이이다.
그 목사님은 언어와 국경을 초월하여 4개국을 드나들며 6번이나 명령따라 움직였다. 가까운 동네 이사하는 것도 아니고 바다 건너 이사한다는게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아이들 교육도 있고 변화된 문화적 충격을 극복하는 일이나 새 임지에 적응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닐진데 그는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순종의 자세를 일관되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를 무공해 목사라고 부른다. 그를 볼때마다 순수함이란 단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분도 나를 보고 같은 표현을 쓰지만 나는 그럴 자격이 조금도 없다.
요즘 세상은 온 천지에 공해가 가득하다 보니 세상의 공해독이 교회안이라고 비껴갈 수는 없는 모양이다.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은 사라지고 자신을 과대포장한 모습만 가득하다. 사명보다 요령이 판치고, 성실보다 아부가 앞서며, 온유함보다 카리스마를 가장한 난폭한 리더십이 판치는 세상이다. 뒷짐지고 으흠하면 인자해 보이고 성인군자처럼 보이지만 양의 탈을 쓴 늑대도 있고 목자의 지팡이를 든 도적도 있다.
진짜와 가짜를 고르기가 하늘의 별 만큼이나 어려운 세상이다. 가짜일수록 식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때 일수록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바른 신앙을 회복하여야 한다. 욕심없는 마음, 성실하고 정직한 마음,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공해에 찌든 세상의 독을 말씀과 성령으로 제거해야 한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한다. 순수한 마음,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이다. 투명한 마음,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이다. 위선과 가식으로 포장되지 않은 마음, 그것은 무공해 마음이다. 무공해 목사님, 그분을 떠올리면 난 기분이 상쾌해 진다.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 이런 목사님이 우리 주위에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
(김봉준 목사, 구로순복음교회)
좋은 설교자의 열가지 조건
루터가 말한 좋은 설교자의 열 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다.
그는 평이하고 논리 정연하게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훌륭한 두뇌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는 훌륭한 말솜씨와 좋은 목소리 좋은 기억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확신하고 있어야 하며,
그 진리를 위해 몸과 목숨, 재물과 영광을 걸 태세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는 어느 때 중지할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는 착실히 연구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참견과 심판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설교 이야기
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계시의 성문화된 성경, 선포되는 말씀인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했다. 목사의 사역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설교사역이다. 특히 한국 교회 목사의 경우 설교 횟수가 많기로 유명하다. 한 주간을 예로 들면 매일 새벽,주일 낮?밤,수요일 밤,금요일 낮?밤, 결혼식, 회갑연, 대소 심방 등 평균 20여회 이상의 설교를 하게 된다. 대학에서 강의해보면 수강 학생들이 1년이 지나면 썰물 나가듯 빠져나가고 다시 새로운 학생들로 강의실이 찬다. 수강자는 바뀌지만 강의 내용은 바뀔 필요가 없다. 물론 보완과 새로운 연구를 필요로 하지만 설교의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설교의 경우는 전하는 사람도,듣는 사람도 변함이 없다. 필자의 경우 30년째 한 교회 강단을 지키고 있다. 설교를 듣는 사람쪽에서는 30년 동안 동일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30년 동안 주일 낮?밤,수요일 밤 등 세 차례 설교를 들었다면 4680여회의 설교를 들은 셈이 된다. 거기다 매일 새벽기도회를 나오는 사람이라면 30년 동안 1만3680여회의 설교를 듣게 된다. 그런데 설교 이후 변화되고 달라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한국 교회 설교자들의 고충은 설교 기회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각종 영상 전파매체의 발달로 설교가 노출된다는 것,그래서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 평가와 비교의 기회가 폭넓게 제공되고 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럴수록 전하는 사람들은 정제된 설교,부식되지 않은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는 신학강의처럼 경직화해도 안되고 시골장터 약장수처럼 떠벌려도 안된다. 흔히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을 쓰곤 하지만 꿩도 아무렇게나 잡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 선포인 설교는 지켜야 할 자리가 있고 넘어선 안될 선이 있다.
전달되지 않는 설교도 문제지만 듣고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도 문제다. 돌고래나 물개는 1년 정도 훈련과 조련 과정을 거쳐 쇼를 벌인다고 한다. 1년 정도 훈련 끝에 스위트 홈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물개를 본 일이 있다. 그런데 20∼30년 동안 1만3000여회 이상의 설교를 듣고도 변화가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탓해야 할지 답답하다. 풍년에 밥 굶는다는 말이 그들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열량공급을 위해서라면 음식을 맛보는 것으로는 안된다. 먹어야 살이 되고 피가 된다. 수십년 동안 설교를 들어도 변화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말씀을 먹지 않고 맛만 즐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뒷얘기가 많다. 설교품평회를 하기 마련이고 심사대에 올려놓고 도마질하기 마련이다.
예배가 끝나고 교회를 빠져나가는 태도도 가지가지이다. “은혜로운 예배였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큰 은혜 받았습니다” “말씀이 너무 짧았습니다”라며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술난 사람처럼 째려보고 나가는 사람도 있다. 설교는 듣고 깨닫고 행하라는 데 본뜻이 있다. 결코 군것질이 되어선 안된다. 설교는 전인적 응답으로 반응해야 하며 삶을 통해 올곧게 구현되어야 한다.
/박종순 <충신교회 목사>
설교의 미래 ‘맑음’
한국 교회 설교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흐린 후 맑음이다. 호응도가 높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설교는 어떤 유형인가? 그것들은 과연 바람직한가?
첫째는 위인전기형이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무용담,성공담,인간승리를 모델로 제시하는 스타일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인물의 모델링은 역사속에 무진장하다. 성경속의 인물보다 더 많고 다양하며 더 영웅적이고 모범적이다.
둘째는 윤리강화형이다. 문제는 인간의 선행을 강조함으로써 은혜와 믿음을 희석시킨다. 율법주의의 덫에 걸린 유대교의 아류를 경계해야 한다.
셋째는 기복형이다. 이는 구약시대의 패턴이다. 그리스도는 현상적인 복을 신령한 복으로 완성하셨다. 불건전한 기복신앙은 샤머니즘과 차별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와 같은 설교 경향은 산업사회 분위기의 성장신드롬,그리고 성공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제 그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지식정보사회에 진입하면서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구속사적 설교’가 제시되고 있다. 구속사적 설교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말한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약과 신약을 통전적으로 석의하고 적용하는 설교로 복음중심 은혜중심의 설교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미 목회현장에서 구속사적 설교의 원형이 복원되고 있다.
구속사적 설교의 시각으로 다윗왕의 이야기를 조명해보자. 다윗의 공적은 화려하다.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리친 무용담,주변 족속 정복과 영토 확장,예루살렘 정복과 언약궤를 옮겨온 것,한 장소에서의 제사,성전건축 준비 등이다. 이런 다윗을 본받자고 하는 것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불의와 폭정 앞에서는 갈등을 갖게 된다.
그는 예루살렘 정복시 여부스족의 비무장한 시각장애인과 지체장애인을 대량학살하였다. 주변 족속을 무찌를 때도 양민을 학살하고 적의 말은 뒷발의 힘줄을 끊어서 군마로 쓸 수 없게 만들었다. 유부녀를 간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남편을 계획 살인한다. 암논이 다말을 겁탈하는 데 기회를 제공했고 그후 왕자의 난을 유발시켰다. 장정을 계수한 교만으로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고 말년에는 우상숭배를 묵인하는 자세를 보였다. 또한 임종 직전 아들 솔로몬에게 군사령관 요압을 살해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참으로 잔혹하고 비정하며 불의한 폭군이다.
이런 다윗을 사무엘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자’라고 말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용했다. 무엇 때문인가? 바울의 해석은 투명하다. 곧 하나님의 뜻은 다윗의 씨에서 메시아를 세우셨다는 것이다(행 13:22∼23). 이 언약은 다윗의 선정이나 폭정과도 무관하며 그의 후손의 선악간 행위와도 아무 상관없이 성취되었다. 곧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일방적인 은혜언약인 것이다. 다윗은 성군도 영웅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속사의 무대에서 그분께서 잠시 쓰셨던 소도구일 뿐이다. 구속사의 선한 주인공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조물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구속사 이야기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오라,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자.
/박 종 구 <월간목회 발행인> (mok12@chol.com)
순음(純音)과 역음(逆音)
반갑다고 꼬리를 치는 강아지에게 활짝 웃으면서 "너를 올 여름에 잡아먹을 거야" 하고 말해보십시오. 강아지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웃는 표정만 보고서 계속 꼬리를 흔듭니다.
반대로 아주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면서 "강아지야. 사랑해. 아이 예뻐~" 하고 말해 보세요.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해도 강아지는 화가 난 표정을 보며 으르렁거릴 것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로 그 소리보다는 소리의 감정파장에 의해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고 짜증을 내게도 하고 졸리게도 합니다. 아무리 명문장으로 된 기가막힌 설교를 유창하고 거침없이 쏟아내도 거기에 '진정성'이 없으면 사람들은 감동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눌한 언어로 더듬거리며 설교를 해도 거기에 '진정성'이 있으면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립니다. 심장에서 생산되는 피의 약 ⅓은 두뇌활동에 사용되고 그 중에 반은 언어활동에 사용됩니다. 언어는 1초에 14000개의 신경근육을 움직이게 하고 뇌는 적절한 언어를 표현하기 위하여 호흡, 발성, 공명, 조음, 성대, 횡경막, 폐장, 기관, 후두, 인두, 구강, 비강, 눈, 귀를 종합적으로 마치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듯이 조정합니다. 현상과 머리의 인식이 똑같은 동일한 소리는 뇌가 여러 가지 기능을 잘 조화하여 '순음'을 내니 듣는 사람 귀에 부드럽게 들립니다. 그러나 현상과 머리의 인식이 서로 틀리면 뇌가 깜짝 놀라 적절한 소리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역음'을 내게 되니 듣는 사람들의 귀에 거슬리는 파장이 전달됩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하고 설교를 했을 때, 그 설교와 설교자 자신도 똑같이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뇌는 금방 '순음'을 냅니다. 하지만, '사랑합시다'하고 설교를 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에 전혀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뇌는 그 이중성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역음'을 내는 것입니다.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똑같은 설교를 해도 어떤 사람의 설교는 감동을 주지만 어떤 사람의 설교는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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