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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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각급 학교에서 책을 떼면 후학에게 물리는 것이 관례였다.특히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읽었던 책을 물려받고자 벼슬아치나 권력층을 동원하고 책바리라 하여 책을 얻고자 바리짐을 갖다 바치기까지 했다. 책을 떼는 것을 책씻이(세책)라 하는데 물려주기 위해 책을 깨끗이 손질하는 습속에서 생겨난 말이라 한다.고서를 구해 보면 맨 끝장의 여백에 이 책으로 공부한 사람의 대물림이 적혀 있음을 볼 수 있다. 같은 책으로 공부했다 하여 이를 책손이라고 한다. 연줄을 좋아하는 우리 선조들인지라 이 後學이 先學을 찾아가 의사혈연을 맺고 관혼상제에 찾아 다니고 죽으면 심상까지 입었으니 대단한 물림 철학이 아닐 수 없다.밥상 물림은 상식이었다.개화기때만 해도 각 관아에서는 점심상을 들여다 먹었는데 네물림하는 것이 관례였다. 판서와 참판 등 당상관이 먹고 나 면참의 정랑 좌랑이 물려먹고 이를 아전이, 아전은 종들에게 네단계 물림한 것이다. 상물림은 더불어 일하는 사람들이 한 밥상의 밥을 더불어 먹음으로써 동심일체를 다지는 결속 수단이었던 것이다.밥물림하는 집은 화목한 가문으로 혼사에서 접고드는 조건이 되기도 했다."소리 없는 데서 듣고 형상없는 것도 본다" 던 중종때 명상 정광필은 어릴적에 싹수가 있는 자손에게만 밥을 물렸는데 이 밥물림을 받은 자손이나 외손치고 정승이 되지 않은 이가 없었다.옷도 물림 철학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30여년전 한 명문가의 사당에 5대 물림의 누더기옷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는데 가난해서 물린 것이 아니다. 조손 결속의 정신적 수단을 옷이 대행한 것이요 그래서 5대 물림의 누더기 옷이 가문의 자랑이 된 것이다.여느 집에서도 아버지가 입었던 옷을 형제간이 차례로 물려입는 것은 상식이었다.그토록 가난하고 부모가 해준것 없어도 효심이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했었던 정신공작이 바로 물림옷이었다. 요즈음 아이들은 옥이야 금이야 그토록 잘 길러 주었는데도 아비 어미 죽이고 버리길 다반사로 하는 것도 옷물림 문화의 단절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교복 자유화니 낡은 패션이니 하여 버린 전통 교복을 유일하게 54년이나 고수해온 여학교가 있다. 서울 경기여자고등학교다. 이 학생중에는 어머니의 교복을 물려입는 미풍이 형성되고 또 그것을 자랑으로 삼는 풍조가 일고 있다 한다. 물질 만능에서 상실한 아름다운 정신의 싹을 보는 것같아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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