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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돌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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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때 시인 김황원이 대동강변의 둔덕에 올랐다가 경관에 도취, 시상이 떠올랐다.한데 그 시상을 시기에 담기에는 너무 벅찼다. 그래서사흘 동안을 그 자리에 머물면서 그 시상을 추리고 다듬고 졸이고 깎고해도 끝내 한편의 시를 이루지 못했다. 이에 엉엉 소리내어 울며 돌멩이를 대동강에 던지면서 내려왔다 한다.미를 창조하는 작업이 얼마나힘든 일인가를 논할 때 곧잘 인용되는 고사요, 대동강의 돌멩이 하면못다 지은 시를 뜻하거나 시 한 수 짓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를비유할 때 이 말을 썼다.평양 대동강변에 있던 숭실학원의 전통을 이은 숭실대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맞아 대동강변의 돌멩이 100t을 수입, 100돌 기념문을 만듦으로써 숭실학통을 부흥시키는 기폭제로 삼을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그 수입 대동강 돌멩이 가운데에는 고려 시인 김황원이 던졌을 돌멩이도 포함됐을지 모를 일이다.또 그 가운데에는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역류해 왔을 때 평양시민이 나와 던졌던 돌멩이도 분명히 끼여 있을 것이다.선교와 통상을 요구코자 대동강변 한사정과 만경대를 내왕했던 이 상선은 불법을 항의하는 평안 중군(사령관) 이현익을 배안에 감금, 인질로잡고 대포를 쏴 군민을 위협했다.이에 성난 평양 시민들이 강변에 나와 돌팔매질로 그 함포에 대응했다. 이 돌멩이에 맞아 선상에서 쓰러 이로써 대포와 대결할 수는 없었다. 상류에서 나무를 잔뜩 실은 낚싯배에 불을 질러 방류, 셔먼호에 점화시켜 소탕했다. 이때 평양군민이 던졌던 돌멩이도 이번 수입 돌멩이 가운데 끼여있을 것이다.분단 북한 반백년의 역사가 담긴 이 대동강 돌멩이가 잘린 반도의 허리를 넘어와 조형을 한다는 것은 분단 역사를 아물게 하는 상징적 의미가 없지않다. 더욱이 조만식 등 민족 지도자, 한경직 등 종교지도자,안익태 등 문화지도자 등이 밟았던, 그래서 그 정신을 알알이 기억하고있는 돌멩이들이다.또 이 돌멩이들은 70년 전 전조선대표로 일본 원정에 나섰던 숭실 축구팀의 최초의 한일축구전을 기억할 것이다. 일본의최강 세 대표팀과 3회전을 벌여 1회전은 11대0, 2회전은 6대0, 3회전은6대1로 일본을 대파해 민족의 울분을 승화시켰던 온 민족의 열광을 대동강 돌멩이는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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