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골퍼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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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축구에서는 골 문도 없어 키퍼의 키를 어림해서 넘기면 골인으로 쳤다. 골포스트를 처음 세운 것은 배재학당이다. 소나무를 잘라 세우고 나무 둘을 엮어 크로스바로 삼고 흰칠을 했다. 이 흰 골포스트가 검은 색으로 돌변한 것이다. 축구 골문을 세울때 학당장 아펜셀러는 민족지도자 이상재 등과 상의했다.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이 날로 심해가는 마당에 학생들로 하여금 축구를 통해 자주 민족정신과 투쟁정신을 함양시키고자 축구 골문을 세우고백의민족을 상징, 그 축구 골문에 흰칠을 했던 것이다. 그후 기미를 알아차린 일본 경찰이 축구 골문을 철거하려 들었다.타협안으로 흰칠을 검은 칠로 바꾸는 조건으로 철거를 방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검은 축구 골문 안에 공을 차넣는데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증오라는 정신적 무게가 얹히게 된 것이다. 한-일 축구의 공식적인 최초대전이 1926년 도쿄에서 있었다. 조선 대표팀이 바로 검은 골포스트 정신으로 무장된 배재고보팀이요, 일본 대표가 전국대회에서 9연패한 고베다.3대 0으로 배재가 패했지만 당시 일본 신문들은 체구나 체력이 아닌데서 우러나는 듯한 슛, 맹렬한 태클은 일본팀에서 볼 수 없는 가공한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바로 검은 골게이트의 힘인 것이다. 일본팀과 붙으면 번번이 패배를 안겨준 평양 축구가 민족감정과 직결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 당국이 전국대회는 총독부 허가로 일본 축구단체 주관아래 열수있다는 축구탄압을 시작했다.이에 당시 관서체육회장이던 민족 지도자 조만식은 총독부에 강력 항의, 검은 골게이트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광복후 비록 선수일망정 일본사람이면 한국땅 밟는 것을 거부했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당시 이기붕은월드컵 예선을 위한 한-일전을 성사시키고 있다. 이기지 않으면 임원 선수들이 현해탄에 빠져죽고 돌아오지 않는다는 조건부였다.일본이 우리에게 그렇게 밉지 않았던들 이길 수 없는 경기였다고 당시정상희 단장이 말했었다. 한국의 대일전에서는 실력 이상의 비범한 힘이얹히게 마련이며 월드컵 예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의 대일전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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