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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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작가 스타인벡은 `미국론'이란 그의 저서에서 `미국사람들은 그의 일생의 3분의 1을 줄서서 기다리는 데 낭비하는 바보들이다.'고 했다. 너무 끈질기게 줄서 있음을 비꼬기 위한 과장표현이긴 하다. 한데, 이번 미국인 생활조사에서 밝혀진 바로 미국 사람들은 일생동안 평균 5 년간을 줄서는 데 소비하고 신호대기하는 데 6 개월을 낭비한다고 조사 보도되고 있다. 인생이 허망해지는 기다림이다.잘 기다리고 못 기다리는 데도 확연한 민족차이가 드러난다. 같은 유럽 사람이라도 라틴계통 나라들보다 게르만 계통 나라 사람들이 훨씬 줄을 잘 서고 잘도 기다린다. 이런 조크가 있다.`영국 사람이 혼자 있으면 행렬이 생기고, 이스라엘 사람이 둘 있으면 세 개의 정당이 생기고, 일본 사람이 셋 있으면 네 개의 상사(商社)가 생긴다.'개화기 때 영어 한 마디도 못 하고 영국에 외교관 생활을 떠나는 사람이 꼭 한마디 말만 외 갖고 가는 것이 상식이 돼 있었다 한다. 그 말이 다름아닌 `애프터 유!'였다고 외부에서 관리생활을 했던 분의 문집에 나온다. 당신뒤에 줄을 서겠다는 이 말과 이 말뒤에 숨은 정신만 지키면 영국에서는 살 수 있었을 만큼 줄서 기다리는 것이 생존조건이 돼 있다. 이 기다리는 문화를 계승한 미국사람들인 것이다.오일 쇼크 때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주유소 앞에서 평균 10-15 시간 줄지어 서 있어야만 기름 한 초롱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가족이 번갈아 가며 줄을 서는 행렬전쟁이었다. 그 무렵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이런 글이 실렸었다. `전 시민의 3분의 1이 이 행렬전쟁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 대열에 한국사람이 끼여있는 것을 본 사람은 없다'고.우리 한국사람은 외출하지 않고 들어앉아 있으면 있지 15 시간씩 줄서 기다리지는 못하게끔 구조적으로 심정이 돼 있다.망부석처럼 기다리다가 돌로 굳어버릴 만큼 우리 한국사람도 혼자 기다리는 데는 도사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줄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데는 철부지다.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생각난다. 해방 직후 관청에서 물자배급을 주는 데마다 줄을 섰지만 새치기통에 어느 한 번도 차례가 돌아오질 않는다. 홧김에 너 죽고 나 죽고 할 셈으로 칼을 들고 관청에 달려갔더니 이미 그곳에도 칼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는.줄서서 기다린다는 것은 많은 사람과 공존하는 공적(公的) 공간에서 가장 이타적이면서 가장 이기적인 사적(私的) 위상이다. 아무리 화려한 문화를 지니고 경제가 발달되어 잘 살더라도 이 흐트러진 위상의 노출은 국제화 사회에서 가장 쉽게 드러난 치부임을 알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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