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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대한 예화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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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대한 예화 모음




보이지 않는 성령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우리의 본질적인 변화로 형상화된 것


영성생활은 성령을 통해 계속 변화하고 성숙하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을 의미한다. 영성생활은 우리 안에 있는 영을 통해 자신이 변화해가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세상을 변화시켜 가는 삶이다. 그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진리의 영을 나의 영으로 영접(靈接)하고 있는가 물어야 한다.


성령과의 만남과 소통 없이 그리스도의 삶을 체현해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현존을 어디서, 어떻게 감지하는가? 보이지 않는 영이신 성령을 어떻게 느낄 수 있단 말인가? 곧 성령의 드러나심을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발견하고 또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성령의 현존을 체험하고 그와 더불어 살아갈 때 성령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두 가지 양태가 바로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다. 성령은 우리의 온 존재를 안팎에서 휘감고 계시는데 성령의 열매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성령의 은사는 우리를 둘러친 거룩한 영의 기운으로 말미암는다. 물론 이 두 영역 간에 긴밀한 관계가 존재한다.


성령의 현존으로서 성령의 열매


우선 우리 밖에서 우리 안으로 침투해 오셔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은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켜 영의 사람이 되게 하신다. 그 성령은 우리의 영혼에 자신의 씨앗을 심으시고 거름을 주시어 생명력 있는 존재로 변화시켜 나간다. 우리 영혼의 토양에 심기어진 영의 씨앗은 우리 영혼 밭에서 길러지고 맺혀져 하나의 영적인 열매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철저하게 안에서 변화된 존재의 드러남이다. 바울은 이 성령의 열매를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아홉 가지로 표현한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가 바로 그것이다(갈 5:12). 바울이 성령의 깊은 교제로 말미암아 깨달은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 모습들은 하나의 윤리적 덕목이 아니며 소진되어가나 소멸될 수 없는 샘처럼 우리 존재 안에서 솟아나는 영의 드러남이다.


나의 수양(修養)이나 수행(修行)으로 형성되는 하나의 인격적 요소가 아니라 나의 영이 새롭게 변화됨으로 말미암은, 곧 존재의 변화의 열매들인 것이다. 이것은 나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통해 맺게 하신 성령의 소산물이다. 우리 스스로 자문해보면 이 뜻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전한 사랑을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은 결코 이해타산이나 사사로운 관계에서 그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은 우리 존재가 사랑의 존재로 변화될 때 가능한 사랑이다. 이러한 존재로서의 사랑은 결코 하늘로부터 오는 영의 기운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우리는 하늘의 샘솟은 기쁨을 스스로 누리거나 전할 수 있는가? 우리를 둘러싼 일상의 삶 속에서 참 기쁨의 닻을 달고 항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삶의 걱정과 근심, 불안 속에서 어느덧 기쁨은 그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신기루 같은 감정으로 이해된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기쁨은 근원적인 기쁨이며, 자유함에서 오는 기쁨이다. 평화도 마찬가지다. 성령의 평화는 외부의 어떤 영향에도 요동하지 않는 평화스러움이다.


우리 안의 평화는 결국 삶에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힘이며 토대다. 이런 성령으로 이뤄지는 평화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어느 정도 인내할 수 있는가를 자문해보면 우리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참기는 참되 그 참음은 다만 밖으로 분노를 드러내지 않을 뿐 자신의 욕심을 버린 기꺼운 인내가 아닐 때가 많다. 인내는 무조건 무턱대고 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적극적인 표현이다. 남에 대해 보답을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행하는 친절과 선행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진정 진실을 알고 또 드러낼 수 있는가? 온유함은 또 어떠한가? 남을 업신여기거나 자기를 비하하지 않는 온유를 가식 없이 지닐 힘이 있는가? 모든 일에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중용을 이루는 절제의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


인간의 노력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적어도 그리스도의 온전함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이 아홉 가지 중 성령의 기운 없이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 드러낼 수 있는 열매란 없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열매라고 부른 것은 이 열매는 우리의 본질적인 변화를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성생활 속에서 맺히는 열매이지만 이 열매는 궁극적인 존재의 변화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신적이고 근원적인 생명나무의 열매들이다. 이 엄연한 사실 앞에 우리는 마음을 비우고 겸손해야 한다. 이때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이 모든 열매가 나의 바람이나 욕심 혹은 별다른 노력으로가 아니라 내 영에 성령이 임재함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혹시나 그 열매들이 우리 영 안에서 맺혀 있음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임을 고백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전한 사랑과 기쁨 속에서 성령의 현존을 체험한다. 완전한 평화와 인내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느끼며, 마음 깊은 친절과 선행 속에서 성령의 힘을 체현한다. 순수한 진실과 온유와 절제 속에서 성령의 뜻을 발견한다.


또한 성령의 변화로 말미암는 변화된 사람됨, 변화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면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다. 이 열매의 핵심에 사랑이 있다. 아홉 가지 열매가 일직선으로 나열되어 있지만 사랑은 다른 여덟 가지에 존재이유와 가치와 생명력을 부여하는 뿌리이자 줄기다. 왜냐하면 성령이 사랑의 영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토대 위에서만 다른 열매들이 자라날 수 있다. 사랑 없는 기쁨, 사랑 없는 평화, 사랑 없는 인내, 사랑 없는 친절, 사랑 없는 선행, 사랑 없는 진실, 사랑 없는 온유, 그리고 사랑 없는 절제는 한낱 도덕 항목이나 교리조항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 그분 자신이 사랑이신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의 존재 자체가 사랑으로 변화되기를 희망한다. 그 사랑은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며 동시에 하나의 열매로 드러날 수 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권능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흥분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을 향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수님은 약속하셨다. 항상 약속들을 잘 지키시는 하나님은 능하시다. 당신은 오늘 하나님의 권능을 받아 모든 일에 활용할 수 있는 권능의 소유자가 되어 있다.


하나님이 가능하시므로 나도 가능함을 믿는다.


 


성령충만


우리가 매일 수염을 깎아야 하듯 그 마음도 매일 다듬지 않으면 안된다. 한번 소제했다고


언제까지나 방안이 깨끗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도 한번 반성하고 좋은 뜻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늘 우리 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제 먹은 뜻을 오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우리를 떠나고 만다.


마르틴 루터


 


거듭날때 성령이 들어옵니다


우리가 중생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습니까.


먼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게 됩니다.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삼위일체의 제3격인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시게 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죄를 이길 능력도 없었고,신령한 것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날 때 성령이 들어오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매일 우리와 동행자가 되어 주십니다(고린도전서 6장19절).


거듭난 사람은 세상을 홀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사랑하는 친구와 같이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변화됩니다(갈라디아서 2장20절).


부자 죄인이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불러 나무에서 내려오라 하시고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실 때,삭개오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자원하여 말했습니다.


그의 회심은 하나님과도 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과도 바른 관계를 맺게 했습니다.


한 젊은이가 어머니의 마음을 찢어놓고 아내의 생활을 망쳐놓곤 했습니다.직장을 얻었다가는 술과 도박으로 도로 잃곤 했습니다.가족들이 아무리 도우려고 해도 안되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예수 믿는 친구에게 『나는 남미로 가서 생활을 새로 시작해 볼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네가 그 곳에 가도 네 옛사람 그대로 가지고,옛 사람의 습관과 죄를 짓게 되면 아무 소용없어.외부적인 조건이나 새로운 환경이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해.자네가 승리할 수 있는 길이 한가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거야.그러면 분명히 다시 태어나게 될거야』라고 했습니다.


이 때 이 말이 화살처럼 그 젊은이의 가슴을 꿰뚫었습니다.그는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아 죄를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중생만이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중생하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요한일서 5장4절).


세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우리가 거듭날 때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셔서 힘과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남을 사랑하게 됩니다.거듭난 사람의 확실한 표적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요한일서 3장14절).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순종하고 그를 위해 살게 됩니다.정말로 거듭나서 심령상태가 바로 서게 되면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교인으로서 주님께 순종하며 매일 매일 주를 위해 선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영생을 얻게 됩니다.세상적인 복을 받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영생을 얻는 것은 더욱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천국과 하늘의 영광과 그 복락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거듭나기 전에는 결코 이것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좋은 학위들을 받았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BA학위,즉 Born Again(중생)의 학위를 못 받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사랑....


겸손하고 섬기는 마음.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마음


소외를 주지 않고 덮어주고 감싸는 마음


시기 질투하지 아니하는 진리를 기뻐하는 마음


희락


항상 기뻐하는 마음


범사에 감사하고 만족감을 느끼는 마음.


매사에 긍정하는 마음


좋은것과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창조하는 마음


화평


모든 사람과 평화하는 마음


이것도 저것도 가한 양면성있는 마음


내가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 맞추는 마음


믿음에 맞추지 않고 상대에게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좆아 은혜를 가지는 마음


마땅한 법도를 좆아 불편을 주지않는 융통성있는 마음


나를 드러내지 않고 걸림이 없는 마음


언행에 편벽이 없는 마음


오래참음


모든일에 성급하지 않는 마음


언행에 조급하여 그릇치지 않는 마음


꾸준하고 지속적인 마음


순간적인 실망을 하지 않는 마음


고통과 시험 환난에 요통치 않는 변함없는 마음


자비


겉으로 상대를 판단,정죄하지 않는 마음


긍휼과 구제의 마음


언행에 경솔하지 않는 마음


모든 사람에 관대한 마음


상대를 지적하지 않는 마음


상대에게 성공을 주는 마음


양선


들레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는 마음


상한 갈대를 꺽지 않는 마음


상대를 무시하지 않고 상처를 주지 않는 존중의 마음


분명하지 않는 일에 나서지 않는 마음


충성


매사에 근면하고 적극적인 마음


온집에 충성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


온유


솜털과 같은 마음


넓게 포옹할 수 있는 마음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마음


포근하고 부드러운 마음


절제


중용 조화 질서를 추구하는 치우침이 없는 마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온전히 이룰 수 있는 꼭 필요한 마음


 


성령의 인도하심을


신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1. 지혜 없는 줄을 알고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2.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마음과 순종할 마음이 간절해야 한다.


바울은 그러므로 인도 받음(행16:6-10)


3. 분명하게 구하여야 한다.


초대교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분명히 구하여 얻었다.


4.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의심없이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5. 한 걸음 한 걸음씩 인도함을 따라 나아가야 할 것이다.


흔히 하나님께서는 먼 장래까지 보여 주시지 않고 한 걸음씩 인도하신다(민9:17-23).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 사는 우리들은 구약시대의 사람들처럼(삿6:36-40), 어떤 징조를 요구할 것이 아니며, 또 인도하는 방법도 지정할 것도 아니라 다만 성령께서 임의대로 인도하시기를 구하고 순종할 것이다(고전12:11)


 


성령의 능력


인간의 힘으로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위대한 신앙인이었던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 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고 탄식을 했습니다


.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극복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해 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주여, 제 육신의 모든 죄악의 요소를 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의지가 강화되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 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성령을 통해 강한 의지력을 얻지 못하면 세 상의바람이 부는대로 끌려 다니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허망한 말로 를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영혼의 구원뿐 아니라 죄악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죄악의 도전이 다가 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도전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로 마서 12장1절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시는 중요 한 권면입니다.


 


성령으로 지배된 사람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아본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어느 날, 프란시스 사비에르가 일본의 한 도시에서 설교하고 있을 때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치 그에게 은밀히 말할 것이 있는 것처럼 다가왔습니다. 그 남자가 하려는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을 때 그는 선교사의 얼굴에 침을 뱉았습니다. 한마디 분노


의 말이나 조그마한 표정도 없이 사비에르는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중요한 말씀의 증거를 계속했습니다. 청중의 비난은 이제 칭찬으로 돌아섰습니다. 당시 그 도시의 가장 학식있는 박사 한사람이 우연히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그러한 덕을 가르치고 그와 같은 용기를 북돋우며 다스리게 하는 법이란 하나님외에는 나올 수 없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같은 행동이 가능한 것입니다. 더구나 그러한 행동은 말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믿지 않는 세상을 더 많이 이끌며 감화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코랄海를 성령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아 사이를 배로 지날 때는 코랄해의 좁고 험한 통로를 지나가야 한다고 한다.


급한 물살의 수면 아래 산호초를 헤치고 나아가는 S자형의 좁게 갈라진 틈은 고작 60피트 정도인데 그 폭은 꼭 항해하는 선박과 맞먹는 정도의 폭이라고 한다.


그 통로는 항로를 잘 알고 있는 선장의 능숙한 기술이 아니면 통과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금번 폭우로 인해 우리는 피해를 많이 입었다. 곳곳에 수마가 할퀴고 간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살아가는 삶도 코랄해를 항해하는 것 이상으로 불안하기만 하다. "비가 더 이상 않왔기에 망정이지 며칠이라도 더 왔다면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성서에는 불안한 인간의 마음에 주시는 위로의 후원자를 소개해주신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요14:18)"


성령을 의미하는 '보혜사'라는 원어의 의미는 '함께 동행해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불안정한 세상을 불안한 영혼으로 살아가는인생을 향하여 오늘도 주시는 평안의 메세지가 이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


수해에 상처가 있었는가? 이를 바라보면서 세상의 불안정과 삶의 험한 세파를 새삼 깨닫게


되는가? 내 삶의 코랄해의 선장은 누구인가?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영원토록 우리를 보호하실 능력의 선장에게 내 삶을 맡기지 않겠는가?


실수도 없고 능숙하게 험한 세상의 파도를 헤쳐 앞장서 나가실 선장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라. 그가 여러분의 삶을 안전한포구로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팀-웍을 성공시키는 성령의 법


1. 매일 그리스도의 영이 나의 전 분야의 삶을 지배하도록 하여 갈라디아서 5: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를 나의 생활 가운데 맺게 하라.


2. 서로 사랑하도록 권하는 수많은 성구를 끊임없이 묵상하라.


3. 혀로 범하는 죄에 대해 가르친 야고보서의 말씀을 기억하라.


4. 지혜의 모략과 잡담에 관해 말하는 잠언의 말씀을 기억하라.


5. 정말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므로 빌립보서 2잘 3절의 말씀을 실천하라.


6. 로마서 8;28절의 말씀을 붙잡고 생활하라.


7. 리더가 나와는 다른 사회적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자연히 그의 사고방식이 나와는 다르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라.


8. 할 일이 눈에 보이면 먼저 일을 시작하라.


9. 리더로 하여금 내가 그를 지지하고 있으며 가능한대로 모든 분야에서 돕겠다는 뜻을 알도록 하라.


10. 리더가 부탁한 모든 일을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성실히 수행하라. 나에게 크게 보이든 작게 보이든 상관없이 모든 일을 똑같이 하라.


11. 내가 볼 때 분명한 죄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을 리더가 행하고 있을 때에는 사랑과 온유함으로 찾아가 그에게 사실을 깨우쳐 주라. 그가 회개하면 함께 기뻐하라. 만일 회개하지 않으며 두 세 사람의 증인과 함께 가서 다시 말하라. 그래도 죄를 버리지 않을 때에는 상부에 있는 지도자에게 알리라. 이것이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방법과 같은 것이다.


12. 리더도 나와 같이 배우는 입장에 있다는 것과 서로가 그리스도 앞에서 배우는 제자들임을 기억하라.


13. 모세, 다윗, 베드로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중대한 죄를 범했음을 알라. 만일 리더가 집에 있으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러한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가 집을 떠나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가 실수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사람만이 무엇인가 실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14. 리더와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라. 그의 짐을 같이 질 수 있는 길을 찾으라. 이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룰 수 있다.


15. 우리는 모두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임을 깨달으라. 우리 속에 선한 것이 있다면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며, 우리 속에 악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내 안에 살아있는 "옛 성품"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서로의 잘못을 가지고 비난하지 말라. 우리 공동의 적은 형제가 아니라 사단임을 명심하라. 우리는 전쟁에서 연합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싸우는 병기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


영국의 허드슨테일러 선교사가 중국 내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중에 극도로 피곤하고 번민하여 좌절에 빠진 때가 있었습니다.


거룩해지려고 노력할수록 그 반대의 행동이 나오고, 믿어야 될 줄 알면서도 자꾸 의심이 생기고, 열매를 맺으려고 해도 열매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실망과 좌절에 빠졌을 때, 그의 누이한테 편지가 왔습니다. 오빠는 포도나무 가지에 불과하니까 그분에게 맡기고 의지하면서 쉬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 포도나무가지는 영양분을 끌어 올리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꽃을 피우려고, 열매를 맺으려고 힘쓸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원줄기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테일러는 자신의 인간적인 노력을 포기하고 완전히 주님께 맡기고 쉴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그는 주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많은 열매를 거두고,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케직 총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패배를 당했고 그래서 승리를 간구했으나 승리는 도무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저는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승리는 왔습니다."라고, 내가 내 힘으로 노력해서 성취하려고 헛수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취해 놓으신 것을, 믿음과 기도로 내 것을 만들고 내 힘을 빼고 주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성령의 역사


“나, 오늘 당신과 함께 교회에 가려고 하는데.”


남편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그리스도인 아내는 깜짝 놀랐으나. 그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내심으로 매우 기뻐하였다. 항상 사업과 돈버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나머지 영적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에 가는 길에, 그리스도인 아내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설교는 무엇에 관한 것일까?' '성경 말씀은 어디일까?'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은 무슨 주일일까? 어쩌면 오늘은 불길한 일요일일지도 몰라.'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예배 순서를 얼핏 보고 낙심하였다. 성경 말씀이 창세기 5장이었던 것이다. 남편은 예배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고대인들의 이름이 적힌 긴 목록을 읽어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창세기 5장에는 복음의 내용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께서 수행하실 계획이 있으셨고, 그녀의 염려도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지 못하였다.


남편은 큰 관심을 갖고서 예배 시간이 끝나기까지 조용히 듣고 있었고, 몇 주일 후에는 그리스도께로 돌아왔다. 그녀는 남편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창세기에 나오는 그 말씀이지. 한 구절이 계속 반복되는데, 나는 그것을 피해 달아날 수가 없었오. 그 '죽었더라'는 문구 말이오. 그후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오. 그래서 나에게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성령충만한 삶


길선주 목사는 항상 성령이 충만하기를 갈망하면서 자기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살았다. 매일 한 시간씩 기도하고 매주일 3 일씩금식기도를 했으며, 매해 1주일간 금식하며 기도하는 대기도를 세상 떠나는날까지 계속하였다.


그는 또한 성경 읽는 데도 열심이었다. 매일 한 시간씩 성경을 읽고 외우려고 힘썼다.


성경 연구와 집필을 하루 평균 세 시간씩 했고 하루도빠짐없이 두 시간씩 독서를 했다.


그는 일생을 통해 구약 30회, 창세기, 에스더, 이사야서는 540 회,신약 100회, 요한계시록은 10,000회, 요한서신은 500회를 통독하였다.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본문: 행 2:12-21


지난 7월 1일 날 저는 우리 학교 여학생 4개반 약 200명의 여학생들을 인솔하고 1박 2일 코스로 대성리로 갔습니다.


대성리 학생 수련원에 도착하자마자 체육 선생님이 짐을 조사해서 술부터 뺏어야 한다고 하길래 속으로 여학생들이 무슨 술을 가져왔겠는가 생각했는데 뜻밖에 술이 나오는데 소주가 50병(개)이 넘고 맥주는 그것보다 더 많이 나왔고, 양주 등도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소주를 어디다 담았냐 하면 1.5 리터 짜리 물병이나, 코카콜라 병에 담아왔는데 심지어 코카콜라 병은 뚜껑을 아예 따지도 않았는데 술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주사기로 콜라를 빼고 술을 집어넣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술을 뺏었더니 여학생들이 쫓아다니면서 반만 돌려 달라고 수 없이 찾아와서 애원을 하는데 참 입장이 난처했습니다. 목사란 사람이 술이 내어 줄 수도 없고... 심지어 같은 인솔교사 여선생님도 하도 조르니까 조금 내어주자고 하는데 저는 거절했지만 나 몰래 몇 병 내어주었나 봐요. 밤새 잠 안 자고 여학생들이 설쳐대더군요. 나는 여학생들이 이런 실태를 보고 오늘 술취하지 말라는 설교를 할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얼마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20세 이상 국민줄 음주 인구가 63.1%인데, 92년도의 52.9% 보다 5.2%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음주인구가 급증했다고 합니다.


또 제가 7월 2일자 신문에 나온 통계를 보니까 우리나라에 일년동안 술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이 20000여명이나 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20세 이상의 남자 84%, 여자 55%, 대학교 남학생 90%, 여학생 85%가 술을 마시며, 살인 범죄의 68%, 폭행의 62%, 살인미수의 54%, 강도의 40%, 어린이 강간의 70%가 술을 먹고 일어났습니다. 금년 1월부터 6월까지 우리나라 술집이 5만개 이상 늘었으며, 일년동안 국민 1인당 소주는 평균 59병, 맥주는 61병을 마십니다.


세계에서 술을 제일 많이 마시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값비싼 세계 최고급 양주도 얼마나 많이 수입해서 마시는지 모릅니다. 비공식 통계는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일년에 술값으로만 천문학적인 액수가 들어가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큰 손실을 가져옵니다. 여기에 생명, 가정이 파괴되어 오는 손실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범죄가 늘어가는 것은 전부 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범죄를 막으려고 해도 술이 있는 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술은 처음에는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재미로 마시기 시작하지만, 점점 술에 빠져들게 되어 나중에는 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독자가 됩니다. 알콜 중독자는 더 이상의 소망이 없는, 어떠한 장애자보다도 더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기쁨도 평안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알콜중독은 가정 전체의 몰락을 가져다 주는 무서운 전염병과도 같습니다.


잠언서 23: 29-32절을 찾아서 읽어봅시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술로 인하여 가정이 파괴되고, 자녀는 길을 잃게 됩니다. 또한 술은 인격을 무너뜨리고 파괴합니다.


술 때문에 패가 망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중국의 이태백도 술 때문에 패가 망신하였습니다.


 


중생과 성령세례


본문: 행 19:1-6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을 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나, 심지어 주의 종들 가운데도 반대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主)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주님이라고 부르면 그 순간에 성령을 받은 것인데 무슨 성령을 또 받으라고 합니까? 하면서 반대를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예수를 믿고 구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는 것과 성령의 충만함, 다시 말하면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와 같은 수제자도 비록 조그마한 계집아이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대화하시는 가운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나?"하고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는 기뻐하시며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도 못 받은 자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겠습니까? 이렇게 그 때에도 성신의 감동을 받아 신앙 고백을 바로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천국 열쇠는 베드로가 잘 나서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신앙 고백이 곧 천국 열쇠가 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내가 죽을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에수님이라고 하는 것을 믿고 시인하면 다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에도 보면 70인 전도대들이 돌아와서는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하며 굉장한 보고를 할 때에 예수님께서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써 그 때에 오순절 전에도 제자들은 이미 하늘 나라에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3장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여기서 목욕한다는 말은 죄 사함을 받고 중생하여 구원받았다는 말이요, 또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도 매일매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발에 먼지가 묻는 것과 같이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졌으면 그때 그때에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는 말씀도 열두 제자중의 한 사람 곧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 마귀의 자녀인 가룟 유다를 지적하여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열두 제자중 가룟 유다 한 사람을 빼놓고는 다 중생을 한 사람이라고 분명히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다른 뜨거운 체험, 은사같은 것들을 몰라도 중심으로 믿는다면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따라서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고 그러한 신자들이 있는 교회가 부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9장 l절부터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며 보니까 성령을 못 받은 것 같았습니다. 이 에베소 교회는 아볼로라고 하는 젊은 목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말도 잘하고 학식도 많고 성경도 잘 알고 열심도 있었으나 성령의 세례를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성령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바울이 그 교회에 가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하고 물으니 "우리는 성령이 계시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만일에 예수를 믿는 것으로 다 된다고 하면 "네가 믿느냐?"하고 물을 것이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하는 말은 또 무엇입니까? 그러나 믿어 중생하는 것과 성령 세례를 받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바울이 다시 "그러면 너희들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하고 대답하자 바울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했는데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다시 설교하며 예배드리며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며 안수했더니 성령도 받고 방언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을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안수도 해야 합니다. 방언하는 것도 성령의 은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성령을 받는다 안수를 한다 하면 반대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 목사님들 가운데도 성령 세례를 모르고 체험이 없어서 성령을 받는다던지 소리를 내며 기도를 한다고 하면 질색하는 분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성령의 충만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길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후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l20명이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하루, 이틀, 사흘… 열흘 동안이나 기다리면서 열심으로 기도하던 중 열흘째 되던 날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뜨거워지더니 이상한 말을 하고 능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기도하며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자들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목회하는 데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십시요. 성령 충만해 진다는 말은 마치 돈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물을 많이 가지고 있듯이 성령을 많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도 내 힘으로 하려고 할 때에는 예수를 믿는 생활이 힘들고 괴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은혜를 받으면 기쁨으로 하게 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성령이 충만해지면 모든 의심과 부조리가 해결됩니다. 과거에는 설교를 들어도 성경을 읽어도 의심이 자꾸 생겨납니다.


그러나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그러한 의심이 다 사라지고 부조리하게 생각되었던 것이 믿음 안에서 다 해결되고 완전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중생하지 못하고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좇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영에 대해서는 중생도 못하고 구원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일에는 깜깜하고 도무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육체대로만 살고 영적으로 영의 눈이 뜨이지 않으면 아무리 영의 일을 이야기해도 알지 못합니다. 천국? 지옥? 하나님의 계심? 심판?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영적인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을 말합니다.


2. 육신적(Carnal man)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를 정말 믿기는 하나 영적으로 성숙하여 신령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와 같이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구원은 받았어도 아직 육체의 소욕을 버리지 못하고 영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먹여 주어야지 스스로는 성경도 제대로 읽을 수 없고, 또 은혜를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시기, 분쟁, 다툼이 많습니다. 모든 교회에서 일어나는 시끄러운 문제들도 바로 이런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육적인 사람들 때문에 말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3. 신령한 신자(Spiritual man)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고 장성하여 분별력이 있고 영적인 힘이 있는 장성한 교인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5절에 보면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숙한 교인은 잘못된 교리, 잘못된 신학, 잘못된 영의 역사 등을 다 분별할 수가 있어서 이단사설에 현혹되거나 매혹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심령에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서 모든 것을 알게 해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1서 2장 20절과 27절에 보면 "너희는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우리 마음 속에 오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주께 맡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오면 자연히 깨달아지고 알아지는 것입니다.


신령한 교인 중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갈라디아서 6장 1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시험받는 사람이 있을 때에 자기를 반성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중에 어떠한 사람에게 속했습니까? 분명히 예수님은 나의 구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내 죄를 대신해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의 중요한 한 가지 목적은 능력과 권능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구원받은 후에는 반드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① 이 능력은 죄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죄와 싸울 것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도 충만하지 못한 사람은 육신의 소욕에 지고 맙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거스리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에도 보면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 힘으로 신앙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실패했지만, 8장부터 보면 성령의 능력으로 신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승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도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죄를 이기는 능력은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 전도와 봉사의 능력입니다.


육은 영적인 일에 무능합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봉사에 쓰여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의 목적은 영적인 봉사의 힘을 얻는 것입니다.


무디(D.L. Moodv) 같은 이는 국민학교 3학년 밖에 못나온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키도 작고 목소리도 나빴다고 합니다. 배운 것이 없고 훌륭한 체모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무디와 같은 부흥사는 없다고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성령에 사로 잡힌 사람이 될 때에 어떠한 상황과 조건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나타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4장 31절에 보면 "빌기를 다 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나 기도나 봉사나 무엇이든지 성령을 받아야 그 능력이 오는 것을 믿으시고 아무쪼록 열심히 기도하고 사모하고 기다려 성령 충만히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아멘-


 


엑스광선과 같은 성령


엑스광선은 1895년 독일의 물리학자 뢰트겐의 발견하였던 방사선이다. 이 선은 동물의 근육을 꿰여 드러나보는 광선으로 예를 들어 동전을 넣은 가죽 부대를 엑스광선 앞에 비추어보면 그 가죽 부대는 보이지 않고 동전과 철물 같은 것만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폐같은 곳에 기름이 들거나 무 슨 이상이 생기면 그것을 분별할 수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엑스광선 은 많은 방면에 실용적으로 쓰이지만 특히 의학계에서 큰 공헌을 하여 환자 에게서 병의 근원을 탐색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다면 신앙계에서의 엑스광 선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령의 빛인 것이다.인간의 감춰진 죄와 허물 은 성령의 조명으로서 만이 볼수 있으면 회개할수 있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할


몇 년 동안이나 자신의 넓은 잔디밭의 풀을 손수 다 깎느라고 힘들었던 한 사람이 어느날 성능이 좋은 풀 베는 기계를 사기로 결심하였다. 그 기계를 운반해 온 사람은 그에게 기계를 어떻게 조작하는지와 이미 그 기계에 가스와 기름을 채워 놓았음을 일러주었다. 그 사람은 기계를 운반해 온 사람이 떠나자마자 곧 자리에서 일어나 기계를 조작해 보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엔진이 작동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점검해 보았으나 기계는 여전히 작동되지 않았다. 마침 그때 이웃 사람이 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의 일을 이야기해 주자 그 이웃 사람은 기계를 살펴본 후 시동키를 누르자 그 즉시로 부르릉하고 소리를 내면서 엔진이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 사람은 시동 버튼도 누르지 않은 채 기계를 작동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던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에 있어서 성령님은 그 기계의 시동 버튼과 같다. 그 기계는 시동 버튼을 눌러야 작동되듯이 우리 역시 성공적인 크리스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권능을 힘입어야 한다. 우리가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과 육신의 소욕, 그리고 마귀를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을 된다.


 



성령으로 마음을 채우며


1971년 부흥회 인도를 위해 워싱턴 주의 시애틀로 갈 때의 일이었습니다. 착륙 준비를 하던 기장이 문제가 발생했다는 방송을 했습니다. 비행기의 앞바퀴가 제자리에 정착이 되면 불이 들어와야 되는데 불이 들어오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조종사들은 앞바퀴가 잘나와 있는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에서 착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기장은 연료가 거의 떨어질 때까지 상공을 돌다가 비상착륙을 시도하겠다고 방송을 했습니다. 창 밖으로는 구급차들 이 줄을 지어 서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고 승객들은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기장의 마지막 점검을 들었습니다. 만일 승객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인생의 가장 절박한 심정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승객들은 그 절박한 순간들을 견디기 위해 무엇이든 생각나는 것으로 마음을 채우며 그 시간을 보냈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그의 영향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우리의 생각, 동기, 인간 관계, 우리의 꿈까지도 간섭하시기를 간구하여야 합니다.


 



신약성서에 쓰여진 성령


신약에는 '성령'이라는 단어가 도합 147회 씌어져 있다.


그중 54회가 사도행전에 씌어있고 로마서에 45회, 그리고 공관복음에 34회가 씌어있다.


또한 요한복음과 그외의 서한에 21회, 고린도서에 1회가 등장한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이 성령에 관하여 매우 강조되어 나타나고 강하게 가르치고 있음을 성도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성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찰스 피니는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것이 죄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많은 빛을 소유하였으므로 죄인이 회개 안하는 죄보다 성령충만하지 않은 죄가 더욱 크다"라고 했던 것이다.


 


성령 받은 증거


작가 이어령씨의 <아들이여 이 산하를>이란 책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 수염을 길게 가꾸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사는 꼬마 아이 하나가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궁금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할아버지를 만나자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밤에 주무실 때 그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십니까. 아니면 끄집어 내놓고 주무십니까.” 할아버지는 이 질문을 받고 “얘야. 미안하다. 나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니 하룻밤만 자보고 대답을 하마.” 그리하여 그 날 밤 수염을 붙들고 씨름을 합니다. 수염을 이불 속에 넣으면 답답하고 끄집어내면 쓸쓸하고. 그리하여 30년 동안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수염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맙니다. 저자는 이 얘기를 통해. 30년 동안 내 몸에 달고 다닌 수염이 이불 속에 있어야 하는지 밖에 있어야 하는지. 철야를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듯 내가 지금 예수 안에 있는지 예수 밖에 있는지. 내가 지금 진리 안에 있는지 진리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자세를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하고도 완벽한 대답이 성령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 안에 성령을 받는 것은 귀신들린 점쟁이와도 같이 공연한 열정과 열심을 내며 광신적으로 날뛰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한국 교회 한 부분에서는 방언이 성령 받은 유일한 증거인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느 교단에 들어가면. 또 어느 기도원에 들어가면 개도 다 방언을 한다고 가르칩니다. 개는 다 방언을 할지 몰라도 그리스도인이 다 방언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방언은 수많은 성령의 선물 가운데 하나이지 성령 받은 단적인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수 없느니라.”(고전12


:3)



성령님과 함께 하는 설교


스코틀랜드의 R.프르스라는 유명한 설교학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느날 설교시간이 되었는데 목사님이 안나오셔서 교회 비서가 찾아가서 밖에서 들어보니 말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누구와 대화중인가 보다, 대화가 길어지는구나'하고 생각하고는 조심스러워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가보니 또 대화를 하고 있어서 가만히 엿들어 보았다. "당신이 안가시면 나도 안갑니다"하며 누군가에게 사정하는 얘기였다.


그래서 하도 궁금하여 문을 살며시 열고 보았다. 그랬더니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제가 준비는 다했지만 성령님께서 저와 함께 가시지 않으시면 저 혼자 갈 수 없습니다"하면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간절히 바랬다는 일화가 있다.


이처럼 `성령님께서 가셔야 내가 이 시간에 가서 설교하겠다'는 이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도 말씀과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거기서 부딪혀서 강한 역사가 일어나는 데 쓰임받는 설교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성령님의 역활


몇 년 동안이나 자신의 넓은 잔디밭의 풀을 손수 다 깎느라고 힘들었던 한 사람이 어느날 성능이 좋은 풀 베는 기계를 사기로 결심하였다.


그 기계를 운반해 온 사람은 그에게 기계를 어떻게 조작하는지와 이미 그 기계에 가스와 기름을 채워 놓았음을 일러주었다. 그 사람은 기계를 운반해 온 사람이 떠나자마자 곧 자리에서 일어나 기계를 조작해 보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엔진이 작동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점검해 보았으나 기계는 여전히 작동되지 않았다. 마침 그때 이웃 사람이 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의 일을 이야기해 주자 그 이웃 사람은 기계를 살펴본 후 시동키를 누르자 그 즉시로 부르릉하고 소리를 내면서 엔진이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 사람은 시동 버튼도 누르지 않은 채 기계를 작동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던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에 있어서 성령님은 그 기계의 시동 버튼과 같다. 그 기계는 시동 버튼을 눌러야 작동되듯이 우리 역시 성공적인 크리스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권능을 힘입어야 한다.


우리가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과 육신의 소욕, 그리고 마귀를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을 된다.


 


김익두를 변화시킨 성령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기도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친 목사를 대라면 김익두 목사를 빼놓을 수 없다. 그가 14살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그가 사는 산골 마음에 미국 선교사들이 와서 부흥회를 하게 되었다. 키가 크고 힘이 쌘 김익두는 가난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날마다 산에서 나무를 하면서 소일했다. 김익두는 부흥회를 방해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루는 부흥회를 하는 교회에 몰래 숨어 들어가 교인들의 신발을 모조리 연못 속에 던져 버렸다. 김익두는 경찰에 붙잡혀가 실컨 매를 맞고 변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하나님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부흥사가 되었다.


(감사)


☞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오직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성령 을 받으면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도 변화될 수 있다. 다만 기도하면서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시인하고 가슴으로 믿기만하면 오늘도 사도행전의 역사는 그의 가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신자는 성령으로


 파블로카잘스는 20세기 최고의 첼로 연주자이며, 작곡가요, 지휘자요, 피아노 연주자이다. 1966년, 그의 90회 생일이 되기 직전에 노만이라는 사람이 위대한 음악가의 노후의 생활을 관찰한 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관절염과 호흡 곤란으로 카잘스의 손은 부어 있었고, 손가락들은 서로 엉켜 있는 듯했다. 저런 손으로 어떻게 음악을 연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카잘스는 고통스러운 발걸음으로 간신히 피아노까지 걸어갔다. 그가 피아노 앞에 앉자 그를 바라보고 있던 노만의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그 손가락들이 마치 태양 빛에 펴지는 꽃봉오리처럼 펴지더니 건반을 만지는 것이 아닌가? 꾸부정했던 그의 허리도 반듯하게 펴졌다. 확실히 숨쉬는 것도 편해 보였다. 그는 바하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주는 섬세하고 예민했다. 그는 이어서 브람스의 곡을 연주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카잘스는 생기와 영감과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연주를 다 마친 그가 일어나 걸을 때 그의 몸은 곧바르게 되었고, 키도 더 커진 듯했다. 간신히 침대에서 나와 고통스럽게 옷을 입던 노인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음악인은 음악 안에서 새로워졌다. 우리 크리스천은 어떻게 새로워질까?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야한다.


 


성령의 궁전


초대교회의 한 사도는 길을 다닐 때나 집에 있을 때나 무엇을 하더라도 언제나 마치 살얼음판을 걸어가듯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신자들은 이를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물었다. "


답답하지도 않으십니까?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사도는 웃음을 띤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과 성령을 모신 몸일세. 내 몸은 곧 성전이란 말이네. 그러니 어떻게 조심하지 않을 수 있으며 깨끗하게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령충만1


 성경은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 혜의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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