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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 인물들의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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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 인물들의 예화


 


 


 


(열심덩어리)


어느 날 줄리어스의 꿈에 어떤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손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는가에 대해 자랑을 했다. 그러자 그 손님이 줄리어스에게 열심을 보여달라고 했다. 줄리어스는 서슴지 아니하고 자기 품에서 열심덩어리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줄리어스의 열심덩어리를 받은 손님은 지니고 다니던 저울에 그것을 달아보더니 "100근이군요"라고 했다. 줄리어스는 내심 너무나 기뻤다. "내 열심이 100근이나 되다니--"


그런데 손님은 열심덩어리의 구성분자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열심덩어리를 세세히 분석한 후 그가 말했다.


"야심이 20%, 의심이 19%, 명예심이 30%, 기타 28%,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단 3%도 안되는군요"


 


 


(명품 바이올린)


아주 낡고 보잘것 없는 바이올린 하나가 경매에 부쳐졌다. 한 사람이 1실링을 불렀다. 그러자 방안에 폭소가 일어나더니 그 값으로 그에게 주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경매인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말했다. "누가 이 바이얼린으로 한번 연주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잠시 방안에 침묵이 흐른 뒤 한 노인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 노인은 바이올린을 턱에 괴고 몇번 활을 시험해 음을 맞추고 나서 그 낡은 악기로부터 절묘한 선율을 캐내기 시작했다. 순간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소리에 매혹되고 말았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끝났을 때 방안은 감동의 박수갈채가 진동하였다.


다시 경매인은 바이올린을 들고 값을 물었다. "5파운드" "10파운드" 결국 "100파운드"로 낙찰되었다.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전과 다름없는 바이올린이었는데---. 그 낡은 바이올린은 대가에 의해 명품으로 바꾸어졌던 것이다. 우리들은 한결같이 쓸모없고 무능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가장 가치있고 위대한 명품 인생으로 바뀔 수 있음을 기억하자.


 


 


(나는 왕이로소이다)


독일의 신비주의자 타울러가 하루는 거지를 만나서 "친구여 오늘도 안녕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하니 그 거지가 대답하기를 "난 하루도 안녕하지 않은 날이 없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타울러가 말하기를 "그러면 행복하시기를" 하자 거지의 대답이 "난 불행해 본 적이 없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타우러는 놀라서 "그것은 무슨 뜻이죠?"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지는 "날이 좋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비가 와서 먹을 것이 넉넉하면 감사하고, 배고파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나를 기쁘게 하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불행하지 않을 때 불행하다고 말해야 합니까"라고 대답했다. 타울러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고 "당신은 누구시오"라고 물었다. "나는 왕이오" 라고 그 거지는 대답했다. "그럼 당신의 나라는 어디 있소"라는 타울러의 질문에 "내 마음속에---"라고 조용히 대답했다.


 


 


(묻혀있는 보화)


우리는 보화하면 반짝 거리는 것만 떠올린다. 그런데 대천 해수욕장의 머드축제는 진흙도 보화라는 것을 당당히 밝힌다. 진흙으로 무려 120억의 관광 수입을 올렸다면 진흙도 보화이다. 이처럼 우리 눈에는 아직 안보이지만 엄청난 보화가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고 ,심지어 내 속에 있을 수 있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만 주신 보화가 있음을 기억하고 묻혀있는 보화를 찾아내야 한다.


 


 


(왕과 병사)


몇 세기 전에 동방의 호전적인 어느 왕이 자신의 무적의 군대를 이끌고 어린 추장인 '아부타버'의 영토에 이르렀다. 이 왕은 아부타버의 용맹성에 대해 익히 듣고 있던 터라 죽이는 대신 평화의 사절을 보냈다. 아부타버는 그 제안을 듣자 한 병사에게 단도를 주면서 "이것을 너의 가슴에 꽂으라"고 명령했다. 그 병사는 명령대로 그 칼을 가슴에 꽂았다. 그러자 아부타버는 또 다른 병사를 불러 "이 낭떠러지에서 유프라테스강으로 뛰어내리라"고 명령했다. 그 병사 역시 지체하지 않고 뛰어내렸다.


아부타버는 사절에게 "가서 당신의 왕에게 전하시오. 나에게는 이와 같이 용맹한 군사 500명이 있소. 앞으로 20시간 이내에 내 부하들이 당신 왕을 체포할 것이오"라고 했고 이 말을 들은 왕은 그 무적의 군대와 함께 진격을 했지만 아부타버의 충성스러운 작은 군대를 이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부하를 발견한다. 그가 바울이다.


 


 


(종교기사단)


중세에 군인과 수도사 생활을 동시에 하는 종교 기사단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템플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이다. 이들은 십자군을 돕기 위해 창설되었고 나중에 독자적인 힘을 가진 강력한 신앙 군사 조직으로 발전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싸우면서 믿고 믿으면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찬양과치유)


대전대학교 한의과대학 송태원 교수는 흰쥐 20마리를 분양받아 음악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했다. 알코올에 중독시킨 쥐와 생수만 먹인 쥐를 3그룹으로 나눠 알코올에 중독 시킨 쥐를 그린 음악군과 자연 음악군으로 나누고 또 한그룹은 알코올에 중독시켜 아무음악도 들려주지 않았다. 여기서 그린음악은 동요풍 경음악(전원음악)이다. 자연 음악은 바람소리 물소리 등을 악보에 그대로 옮긴 것이다. 결과는 그린음악군의 쥐들이 자연 음악군보다 노폐물들이 신속히 배출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오히려 나머지 한그룹인 무음악군은 알코올 해독을 위해 간이 많이 상해 간의 무게가 많이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 결과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미 수 천년 전에 성경은 이 사실을 탁월히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시103편1절)"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라."...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


 


 


(의심)


어떤 사람이 공중 목욕탕에 갔다. 그런데 아무도 없어서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먼저 들어와 있던 사람이 나중에 들어온 사람을 흘끔 보더니 자기 옷장을 열고 지갑과 시계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나중 들어온 사람도 먼저 있던 사람을 흘끔 보더니 자신의 소지품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먼저 들어와 있던 사람이 나중에 들어온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우리 서로 등의 때를 닦아줄까요?"그러시죠. 혹시 예수를 믿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저는 장로랍니다. 아이구! 이거 반갑습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사탄의 일곱가지 유혹)


사탄은 우리에게 유혹을 한다.


1)누구나 한다.


2)신앙생활은 나이 들어서 해도 늦지않다.


3)아주 작은 것이니까 괜찮다.


4)아무도 보지 않는다.


5)딱 한번은 괜찮다.


6)너무 힘들게 살았으니까 당연하다.


7)나에게 주어진 좋은 기회이다.


 


 


(믿음)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농작물이 메말라 죽어가던 어느날 어느 작은 마을의 교회에서 기도회가 열렸다. 하나님께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기 위한 모임이다. 성도들이 기도하는 도중 먹구름이 몰려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던 사람들이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비가 올 줄 알았다면 우산을 가져올 걸 비가 와서 집에도 못 가겠네.모두들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데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우산을 활짝폈다. 너는 어떻게 우산을 다 갖고 다니니?갖고 다닌게 아닌데요. 그러면 어디에서 났니? 오늘 하나님께 비를 내려 주시라고 기도하러 왔잖아요? 어른들은 가슴이 저며드는 느낌을 이 소녀에게서 받았을 것이다.


 


 


(고난이 주는 유익)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우리를 고통 스럽게 하지만 다음과 같은 유익을 준다. 첫째, 고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와 은총과 능력과 붙들어 주심을 경험한다. 둘째, 고난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가르칠 수 있다. 셋째 고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룬다. 욥도 자신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었다.


 


 


(두 종류의 인간)


카를 힐티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그의 일기 11월 4일자에서 세상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우리들이 행복할 때 애교를 떨고 다정하다가도 우리가 불운에 처하게 되면 슬그머니 몸을 숨기는 사람이 있고 또 한사람은 애교는 적으나 내가 불운에 처했을 때 우리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당신은 어느 쪽에 속하는 사람인가 생각해 봐라. 그리고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 판단해 보라" 너무나 부끄러운 질문이라서 나를 솔직하게 돌아보면 잠을 못 이룰 것 같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겸손해야 한다. 교만은 곧 죄악이다.


 


 


(아무도 안보는 곳)


중세기 어떤 수도원 원장이 수도원생중 한 사람만 특별히 사랑했는데 그것때문에 다른 수도원생들이 그 수도원생을 미워했다. 어느날 원장이 수도원생들에게 새 한마리를 주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새를 죽여 오라고 했다. 얼마후 수도원생들이 새를 죽여가지고 왔는데 유독 원장이 사랑하는 수도원생만 죽이지 않고 왔다. 다른 수도원생들은 그가 혼날 것을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원장이 새를 죽이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그는 어디를 가도 하나님께서 보셔서 죽일 수 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수도원 원장은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나는 이제 예수님의 제자이다....불과 십자가와 짐승의 떼도 두렵지 않다. 뼈가 부러지고 수족이 잘려도 상관치 않을 것이다....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한 이들을 내게 오게 하라. 이그나티우스의 말 입니다.


 


 


(기도해야 하는 이유)


1>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명령이다.


2>기도는 우리의 문제의 뿌리로 나아가게 한다.


3>기도 없는 일은 실패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4>기도가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5>기도가 우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6>우리가 약할때 힘을 북 돋아 주기 때문이다.


 


 


신앙의 힘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너무도 단순하고 용이하게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이를 겨우 인간들이 갖추어야 할 덕성들 가운데 하나로 열거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신앙이 무엇인지 진실로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며 신앙의 힘이 얼마나 큰지 시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마틴 루터)


 


 


십자가


십자가의 동지들은 십자가야말로 선하고 위대하며 인간들의 행위는 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선행은 부정되며, 행위 속에서 그 힘을 얻고 있는 옛 아담은 못 박히기 때문이다.(마틴 루터)


 


 


폴리갑-서머나교회 감독


서머나 교회에 폴리갑 이라는 훌륭한 감독이 있었는데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때 재판관은 폴리갑이 노령임을 감안하여 황제를 두고 맹세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석방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폴리갑은 "내가86년 동안 그를 섬겼으나 나를 한번도 저버리신 일이 없다.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라고 응답하였다.


 


 


저스틴 마터


초기 기독교 시대에 이교도들은 기독교인들이 예배때 비밀리에 한데 모여 먹고 마시며 방탕을 즐기고 불을 끈 후에 근친상간도 가리지 않는 혼음을 즐긴다고 생각했다. 또 그리스도인들이 새 신자들의 입문식때 유아를 커다란 빵 속에 감추어 두고 입문자에게 빵을 자르도록 명령한다고 생각했다. 그후에 아직도 더운 유아의 살을 먹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모두가 형제, 자매라는 호칭과 성찬식 때문에 비롯된 오해들이다. 그 덕분에 기독교인들은 많은 핍박을 당했다. 그래서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한 변증가들이 나왔는데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이가 저스틴 마터이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의 도덕을 살피면 이런 일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정당히 판결해 주기를 바랬다.


 


 


리용의 이레니우스


오류는 절대 그 자체의 모습으로 우리들 눈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자들은 오류가 진리 자체보다도 더욱 진리라고 믿게 된다.


 


 


카르타고의 시프리안


박해와 고통이 더욱 심하였으므로 권력자들 앞에서 보여준 신앙인들의 고백과 용기는 보다 더 명예스럽고 감동적이었다. 양자 간의 대결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이를 통한 신자들의 영광은 더욱 높아져갔다.


 


 


초대교회 순교자 펠리시타스


초대교회 당시 로마는 교인들의 신앙을 포기시키고자 노력하였으므로 심문과 재판과정이 길어질 수 밖에 없었다. 체포 당시 임신중에 있던 펠리시타스는 이러한 이유때문에 혹시 순교에 참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교기에 의하면 그녀의 기도는 이루어져 체포된 후 8일 만에 여아를 순산하였으니 이 아이는 곧 다른 기독교 여신도에 의해 입양되었다. 그녀가 해산의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면서 간수들은 어떻게 원형 경기장의 짐승들을 대항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답변은 당시 순교에 관한 기독교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현재 나의 고통은 나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야수를 대항할 때에는 또 다른이가 내 가운데 역사하실 것이다. 내가 그를 위해 고난을 당하니 그가 내 대신 또한 고통을 받으실 것이 틀림없다.


 


 


영지주의


영지주의란 지식을 의미하는 헬라어(그노시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일부 특수한 자들을 위하여 특별히 구별된 신비스러운 지식을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이 지식이야말로 구원에 이르는 비밀의 열쇠였다. 예수그리스도가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이 지식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었다


 


 


마르시온


그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악한 것이라고 확신했으므로 그 창조주 역시 악하거나 혹은 무지하다고 결론지었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의 아버지, 즉 성부이신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인 여호와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바로 이 여호와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 그에 의하면 이 여호와는 무지, 악한 동기로서 이 세계를 만들고 이스라엘이라는 특별한 민족만을 선택하였던 독선적인 신 이었다. 한마디로 그의 사상은 신약의 하나님과 구약의 하나님을 갈라 논 이단 사상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클레멘트는 그리스도를 모든 지혜를 가진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했다.(우리들은 모든 지혜를 가진 위대한 스승을 모시고 있으니, 아테네와 그리스를 포함하여 전세계가 그에게 속하고 있다.)


 


 


카르타고의 터툴리안


터툴리안은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일단 기독교가 진리임을 발견한 후에는 또 다른 진리를 찾기 위한 시도조차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대들은 발견하기까지 추구해야하고, 일단 발견한 후에는 믿어야 한다. 그후에 할 일이란 이미 믿은 것을 계속 굳게 붙잡는 것뿐이다. 그 뿐 아니라 그대는 더 이상 믿을 것이 없다고 믿어야 하며, 더 이상 추구 할 것이 없다고 믿어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


오리겐은 클레멘트의 가장 뛰어난 제자이다. 클레멘트와는 대조적으로 오리겐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박해하에 순교하였는데 바로 이 박해 때문에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야 했다. 당시 아직 어렸던 오리겐은 스스로 순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그의 옷을 감추고 집에 가두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신 그는 당시 투옥되어 있던 아버지에게 보내는 순교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였다.


 


 


카타콤이 등장한 이유


많은 사람들이 카타콤을 로마 당국의 눈을 피해 모인 곳 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과장이다. 왜냐하면 이 지하 묘지의 존재는 로마 당국에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지하 묘지를 소유한 것은 기독교인 뿐 만이 아닌 것도 그 증거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기독교 신자들이 카타콤으로 피신한 적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이곳에 모였던 것은 당국의 눈을 피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존경하였던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그곳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 신자들은 이곳에서 행해지는 성찬예식을 통해 자기들과 예수 그리스도 뿐만이 아니라 신앙의 선배들까지도 함께 참여 한다고 보았다. 특히 2세기 중반부터 순교자들의 기일에 묘지에 모여 성찬 예식을 갖는것이 습관화 되고 있었다. 여기서 성자들의 축일도 생겨났다.


 


 


세례준비 기간


사도행전을 보면 기독교로 개종하자마자 곧 세례받는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유대인이거나 그 영향을 깊이 받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방인들이 교회로 많이 들어오면서 세례식을 위한 교육과 준비를 행할 기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세례준비기간은 3세기 초 부터 실시 되었다.이러한 준비기간은 대개 3년으로 이 기간 동안 세례준비자들은 기독교 교리에 관한 교훈을 받았으며 자기들의 신앙을 생활 속에서 증명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세례받기 직전 이들은 시험을 통과해야만 세례를 받고 세례자 명부에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초대교회예배


초대교회 예배는 성찬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오직 세례 받은 신자들만이 성찬에 참여 할 수 있었다.전도는 부엌과 상점과 시장에서 행해졌다.


 


 


초기 기독교의 예술


기독교 신자들이 가정에서 예배드리다가 자기들 전용의 묘지들과 교회들을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 예술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예술은 대부분 지하 묘지나 교회의 벽에 나타난 벽화들이다. 또한 보다 부유한 기독교 신자들의 유해를 담은 석관의 장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특히 예배의 중심이 성찬 이었으므로 이를 시사하고 상징하는 장면들이 가장 많이 나타난다.


 


 


텔리카(순교자)


나는 내가 익히 배우고 학습한 하나님의 율법만을 순종한다. 이 법을 통하여 나는 세상을 극복할 것이다. 이 율법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콘스탄틴 황제의 꿈


기독교 사가중의 한 사람인 락탄티우스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꿈속에서 기독교의 상징을 병사들의 방패에 부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이것으로 정복하리라는 단어들과 함께 공중에 환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어?든 콘스탄틴은 병사들의 방패와 군기에 헬라 문자로 chi와 rho를 겹쳐쓴 것처럼 보이는 문장을 그려놓도록 하였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처음 두 문자이므로 이 표식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던 것 같다.


 


 


밀란칙령


제국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 콘스탄틴은 속전속결을 위주로 하였다. 그는 밀비안 다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밀란에서 리키니우스만나 동맹을 맺었다. 이곳에서 맺은 협정의 일부는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고, 그들의 교회들과 묘지들과 기타 재산들을 다시 돌려 준다는 것이었다. 흔히 "밀란칙령"으로 알려진 이 협정은 박해의 최후 종식을 의미한다(A.D.313)


 


 


수도원운동의 기원


교회 안에서는 바울의 가르침 독신이 주님을 더 섬기기 쉽다는 이유이며 교회 밖에서는 육체의 정욕을 이기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가르침이 원인이다.


 


 


수도사


수도사라는 단어는 헬라어 고독을 의미하는 모나코스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혼자 거주하는 수도사를 의미하게 된 은자는 원래 도망자, 혹은 피신한 사람을 의미하였다.


 


 


수도사 안토니


아타나시우스에 의하면 그는 나일강변 비교적 작은 촌락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죽었을때 많은 유산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었는데, 부자 청년의 일화"만약 완전하기를 원하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너는 천국에서 상급을 얻으리라"를 듣고 충격받아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깊은 지혜와 확신으로 늘그막에 이단인 아리우스주의자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공동 수도 생활의 기원


초기 수도사들의 완전 고독한 생활 형식은 당시 사막을 찾았던 대부분의 수도사들에게는 맞지 않아 공동 생활의 수도운동이 나타나게 되었다. 비록 그 창시자는 아니지만 파코미우스는 그 형태를 결정적으로 완성시킨 인물이다. 파코미우스는 남부 이집트의 조그마한 촌락에서 주후286년경 태어났다. 그의 집은 이교도 이었으므로 군대에 들어가기까지 기독교를 몰랐다. 익숙지 못한 군대생활로 힘들어 할 때 일단의 신자들이 그와 그의 동료들을 위로하였고 그는 이일로 기독교에 큰 호감을 가졌다.그는 어떤 계기로 군대를 떠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이때 파코미우스는 어떤 은자와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했으며 그 스승의 명령에 의하여 독립해 수도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나은 봉사를 위해 기도했다. 이때 천사의 환상을 통해 인류를 섬기라는 메시지를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뜻과 달라 몇번이나 거부했으나 결국 굴복하여 공동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따른 사람들의 명령 불복종으로 실패했으나 곧 그 명성이 알려져 이교도들까지 수도사가 되겠다고 줄을 섰다.


 


 


수도사 마틴


마틴은 주후335년경 현재의 헝가리인 판노니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교도로서 마틴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반대하여 그를 군에 보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군대에서 거지를 도움으로 꿈에 자신이 거지에게 준 반쪽의 외투를 주님이 입고 계신 것을 보고 수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채플이라는 교회를 가르치는 단어도 이 마틴 때문에 생겨나게 되었다. 언젠가 투우르의 감독직이 비게 되자 사람들은 마틴을 그 자리에 앉힐려고 했다. 하지만 감독들의 반대로 시간이 흘러가다 어떤 사람이 성경봉독 시간에 시편8편 2절을 혼자서 읽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알고 마틴을 그 자리에 앉혔고 물론 감독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편8편2절은 이런 말씀이다."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하려 하심이니이다."


 


 


도나투스주의


7세기 로마제국시대 북아프리카의 고백자들(박해시 변절하지 않고 이긴 사람들)이 일으킨 운동으로 신학적으로는 변절자들의 안수와 성례는 무효라고 주장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운동이며 문화적으로 로마화된 지주, 관리 기독교인들에 대항하여 일어난 분파주의 운동이다. 지도자는 도나투스이며 중심지역은 지금의 북아프리카 튀니지 왼쪽으로 그 당시 누미디아와 모리타니아 지역이다.


 


 


니케아신경


우리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일체의 사물들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성부, 한 하나님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성부의 본질로서 비롯된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하나님의 하나님이시오, 빛중의 빛이시오, 진정한 하나님 중의 하나님이시니 그는 창조되지 않고 성부와 동일 본질로서 잉태되셨으니,그를 통하여 천상과 지상의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는 우리 인간들과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성육신하셔, 인간이 되심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제3일에 부활하시어, 승천하셨으니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는다.


그러나 그가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자들 잉태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들, 혹은 무에서 그가 비롯되었다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서로 다른 본질, 혹은 정수라고 주장하는 자들, 혹은 그가 창조되었거나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보편 교회는 저주하는 바이다.


 


 


대 배교자 줄리앙


줄리앙은 콘스탄틴 황제의 조카이다. 그는 사촌 콘스탄티우스 황제 때문에 기독교에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콘스탄티우스가 자기의 형제들과 아버지를 죽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형 갈루스는 시저가 되었다가 반란의 의심을 사서 죽기도 하였다. 그러던 줄리앙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 왔던 것이다. 콘스탄티우스가 마음을 풀고 그를 시저로 임명했으며 후에 의심을 받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때즘 콘스탄티우스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줄리앙은 이교를 지지하고 키우는 정책을 펴면서 스스로 이교의 최고 사제장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고전을 가르치지 못하게 했으며, 기독교인을 멸시하는 논문을 썼다. 특히 성전 파괴가 구약의 예언이라는 기독교인들을 비웃고 반박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전설에 의하면,"갈릴리 인이여, 그대가 정복하였도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그를 대배교자라 부른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우리 주님의 성육신이 미친 결과들은 너무도 거대하고 또한 무수하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 숫자를 일일이 헤아리고자 하는 자는 마치 거대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물결의 숫자를 헤아리는 것과 같다".성육신 참으로 위대하고 놀라운 일이다.


 


 


아타나시우스2


아타나시우스는 나일강 유역의조 그마한 촌락에서 태어났다. 아마 그는 그의 피부로 보아 콥트인 이었으며,하층계급 출신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신앙적 엄격성때문에 그는 친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일부 적수들로부터 경탄을 자아 내기도 했다. 그는 치밀한 논리에 통달하지도 않았고, 스타일이 우아하지도 않았으며, 정치적 술수에 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일반 민중들로부터 신임을 얻었으며, 사치에 빠지지도 않았고, 확고한 자기의 신념과 신앙에 따라 살았다. 철저한 신앙생활, 민중들 속에 뿌리박은 신념, 흔들리지 않는 심오한 원칙이 그를 무적의 존재로 만들었다.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 사이에 본질이 같다. 제2차 세계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에서 비준됨


 


 


호모이우시오스(유사본질)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은 본질이 비슷하다. 아리우스 주의와 비슷하나 하나님이 마치 세 신들인 것처럼 이해되지 않는 한 이 표현들을 사용할수 있다고 아타나시우스가 선언 하였다.그런데 우리가 주의 할 것은 하나님은 한분 하나님으로 본질은 하나이다는 사실이며, 또한 하나님은 세신은 아니시나 삼위(세 인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부인하고 "삼신론"을 주장하거나, 한분 하나님이 성부도 되셨다가 성자도 되셨다가 성령도 되시는 것은 "양태론" 이단임을 기억해야 한다.예)여호와 증인(이단)


 


 


마크리나


유명한 바실과 닛사의 그레고리의 누나로 그들을 신앙으로 지도하고 은둔자의 삶을 가르친 위대한 여인이다. 그녀는 한때 교만하였던 위대한 바실을 겸손하고 훌륭한 신앙인으로 인도 하였으며,동생 그레고리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위대한 갑파도기아인들 중 한사람으로 당당히 서게 되었다.


 


 


대바실


바실은 소아시아의 안네시 근처에서 남성 중심의 공동체를 만들고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이사랴의 장로에 선출되어 이 생활을 오래 할 수 없었다. 그 즈음 아리우스주의자 발렌스가 황제가 되었다. 가이사랴의 감독은 이 황제와 대항하기 위해 잠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바실을 불러 들였다. 바실이 바이사랴에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감독이 죽었고 바실이 감독으로 선출 되었다.황제는 어떤 장군을 보내 바실을 굴복시키려 하였으나 결국 황제가 바실의 철저한 신앙에 굴복하였다.


 


 


닛사의 그레고리


바실의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는 형과 달리 성품이 조용한 것을 즐기고 침묵과 고독을 즐기는 성격이었다. 그는 어떤 운동의 지도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없었다. 그의 형 바실과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와 달리 그는 젊은 여성과 결혼하여 상당히 행복한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수년후 아내가 사망하자 그는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동정에 관하여란 논문을 통해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했다. 결혼안한 사람은 이런 아픔을 격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 했다.그에게 있어서 수도생활은 세속생활의 아픔과 고통을 피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신비적 명상과 생활을 통해 유명해 졌으며, 혀의 강요에 의해 닛사의 감독직을 맡았다. 그는 아리우스파를 꺽는데 일조했으며 후에 다시 은둔생활을 하며 일생을 마쳤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그레고리는 젊은 때에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가이사랴에서 수학한후 아테네에서14년간 머물렀다. 이때 그는 바실과 왕자 였던 줄리앙을 만났다. 그는 30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바실과 함께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원치 않았지만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한때 바실의 수도원으로 피하였으나 결국은 목회를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쯤 사랑하는 아버지와어머니 형제, 자매가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그레고리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목회사역을 그만두고 명상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친구 바실이 죽었다. 이때 그레고리는 친구가 아리우스주의자와의 싸움에서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당시 교회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던 아리우스주의와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돌이 날라오고 ,폭도들이 그가 예배드리는 예배당에 진입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380년말 테오도시우스황제가 정권을 잡음으로 정통주의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새 황제는 그레고리에게 성 소피아 성당을 찾아가자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온 하늘이 구름으로 덮혀 있었는데 그레고리가 있는 쪽의 구름에 구멍이 뚫려있고 그 구멍을 통해 그레고리의 머리에 햇빛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고 황제도 그를 콘스탄티노플의 총감독으로 임명하였다.


 


 


밀란의 암브로스


373년 밀란의 감독이 사망하였다. 이때 암브로스는 이 도시의 총독이었다. 아리우스파와 정통파가 감독선출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되어 폭동까지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이때 암브로스는 이러한 일을 방지하기 위해 선거현장에 참여하여 군중들을 달래는 연설을 하였다. 연설로 질서가 회복되었을때 갑자기 한 어린아이가 "암브로스를 감독으로"라고 소리질렀고, 군중들도 이에 따라 소리를 높였다. 당황한 쪽은 암브로스였다. 그는 군중들을 회유하고 설득했으나 실패하여 도시를 탈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탈출하지 못하고 어쩔수 없이 감독직에 올랐다. 암브로스는 비록 자기가 원하지 않았으나 감독직에 오르자 최선을 다했다. 암브로스가 감독에 임명된지 얼마 안되어 황제의 허락을 받고 국경을 넘어왔던 고트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고트족들은 자기들이 잡은 포로들의 몸값을 요구하였고, 암브로스는 아리우스주의자와 반대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회소유의 각종 금은 기명과 장식품들을 녹여 포로들의 몸값을 마련하였다. 암브로스는 목회자들의 책임은 강한 자들에게서 약한 자들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암브로스의 설교로 북아프리카 출신의 젊은 웅변선생이 돌아왔는데 그가 바로 서방교회의 위대한 지도자 어거스틴이다. 암브로스 당시 서방제국은 그라티안과 그의 이복형제 발렌티니안 2세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런데 막시무스의 반란으로 그라티안이 살해되었고 발렌티안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황제의 어머니 저스티나는 암브로스를 막시무스에게 사절로 파견하였고 암브로스는 이 일을 잘 처리하기도 하였다.


 


 


존 크리소스톰


콘스탄티노플의 존은 죽은지 100년후 후세인들에게 길이 알려진(황금의 입)존 크리소스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가 이런 별명을 얻게된 것은 그 당시 가장 뛰어난 설교자요, 웅변가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설교강단은 악과의 전투장이었고, 결국 그를 유배의 길을 떠나게 한 장소였다. 그는 안디옥에서 출생하였고 유명한 웅변가 리바니우스에게 사사를 받았다. 그는 수도사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어머니 때문에 집을 수도장소로 만들어 수도생활과 어머니의 욕구를 다 들어 주었다.그후 산악지대의 수도원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다가 6년 만에 안디옥으로 돌아와 집사와 감독이 되었다.그는 곧 비잔틴세계에 알려졌고 그 명성으로 콘스탄티노플의 감독까지 되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시련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악과 타협할줄 모르는 강인한 성품과 교회를 개혁하고자하는 그의 경건때문이었다. 그는 왕이나 왕비나 제국 정부의 실권자와 싸웠고 승리할 수 있었으나,그를 지지하는 민중들을 염려하여 스스로 유배의 길을 떠났다. 이것 때문에 서방교회와 달리, 동방교회는 국가의 영향을 받는 교회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는 설교자로써 목회자로써 훌륭한 모범을 보인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제롬


4세기의 인물로 부드러운 성품은 아니었지만 격정적이며 인간 이상의 차원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열심있는 신앙인 이었다.그는 주후 348년 붑부 이탈리아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생각이 컸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말을 권위있게 받아들였다. 근 고전적 학문을 숭상하면서도 이런 애착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근 또한 성의 유혹에서 자유하고자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여자무희 들의 환상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이런 금욕생활도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성의 유혹을 위해 자신이 보기에 야만적으로 보이는 히브리어를 연구하였다. 하지만 그는 채3년도 못되어 안디옥으로 돌아왔고 안디옥에서 장로로 선출되었다. 그후 그는 로마로 돌아가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한편 그는 과부 알비나의 저택에 거하던 부유하고 경건한 여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특히 여기서 그는 자신의 일생에 도움을 준 파울라와 그녀의 딸 유스토키움을 만났다. 이러한 여성들 속에서 비로소 가장 헌신적인 제자들을 만난 제롬은 그 집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근 후에 자기를 돕던 로마교회의 감독이 사망하자 예루살렘으로 갔다. 파울라와 유스토키움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후 그는 이집트에 가서 사막의 수도사와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를 만난 후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돌아가 수도생활에 전념하였다. 파울라의 지도아래 여성수도원을, 제롬의 지도아래 남성수도원을 세워 근처 어린이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파울라가 거느린 수녀들에게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특히 그는 자신의 일생일대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될 성경의 라틴어 번역에 헌신하였다. 흔히 벌게이트로 알려진 제롬의 번역판은 결국 전체 라틴어 사용 교회에서 표준 성경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성경은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고 어거스틴까지 제롬이 번역한 성경을 염려하는 편지를 보내기 까지 했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 언뜻볼 때 제롬은 자기명성과 입장만 고집하는 매우 무감각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실상 그의 속 모습은 이것과 달랐다. 이 사실을 파울라와 유스토키움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404년 파울라가 사망함으로써 제롬은 고독과 우울에 빠져들었다. 또한 그는 자기의 죽을 날이 가까이왔고 한 시대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감지했다. 몇년 지나지 않아 로마가 고트족의 알라릭에게 함락 되었고 그는 이슬픈 사실을 자기의 노쇠에 빚대어 써서 딸같은 유스토키움에게 보냈다. 그후 그는 10년가량을 더 살고 유스토키움이 숨을 거둔지 몇달후 영원한 안식의 길에 들어섰다.


 


 


어거스틴1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의 조그만 촌락 타가스테에서 주후 354년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일찍이 예수님을 영접했으나, 그는 방탕한 삶을 살다 늦게 예수님을 영접했다. 밀란에서 어머니의 권유로 밀란의 암브로스 감독의 설교를 들은 어거스틴은 기독교야말로 참 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 그는 미지근한 신앙생활은 하기가 싫었다. 하지만 죄가 그를 붙들고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밀란의 한 정원에서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책을 들고 읽어라 책을 들고 읽어라 책을 들고 읽어라 . 어린아이들이 밖에서 놀면서 내는 소리였다. 하지만 어거스틴에게는 하늘의 명령으로 들렸다. 그는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들어 다시 읽었다.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그는 이제까지 미루었던 결단을 행동에 옮기기로 하였다. 그는 교수로서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방탕한 삶을 청산하였다. 그리고 경건생활과 학문연구, 명상에 전념하였다. 곧 그는 위대한 신학자로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다.


 


 


어거스틴2


어거스틴의 명성이 퍼져나감에 어거스틴은 명상과 철학만 할 수 없었다. 그는 친구를 권유해 자신이 있는 키시키아쿰 공동체에 가입시키려고 힙포의 교회에 출석했다. 이 당시 힙포의 감독 발레리우스는 이 어거스틴을 알아보고 청중들을 설교로 움직여 어거스틴을 감독보에 임명하게하고 곧 공동 감독직에 임명했다. 이제 어거스틴은 꼼짝없이 그 당시 교회법에 따라 힙포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얼마 안되어 발레리우스가 사망함으로 그는 감독이 되었다. 그는 그때부터 저술활동에 전념하여 전체 라틴어권에서 가장 인정받는 신학자가 되었다. 그는 먼저 마니교를 반박하는 책을 ?고 의지의 자유가 없다고 하는 마니교에 대항하여 의지의 자유가 있음을 말했다. 그는 또한 인정받기 어려운 감독의 성례는 인정할 수 없다는 도나투스파에 대항하여 ,감독의 인품 때문에 성례까지 무효화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펠라기우스의 죄악을 인간 의지에 의해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의지자체도 죄악에 사로잡혀 무력하므로 이 의지를 하나님이 회복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구속을 받아야 된다고 말했다. 즉 인간자유의 전적타락을 말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며 하나님께서 이미 예정한 자들에게만 이것을 주신다고 말해 예정론을 주장했다. 그는 신국론, 하나님의 도성을 지었으며 교회에 큰 유산을 남겨준 인물로 지금까지 알려지고 있다.


 


 


클로비스의 회심


골에 살고 있던 프랑크의 왕들은 게르만 족이지만 다른 게르만족과 달리 이교도였다. 최초의 프랑크족 통치자 클로비스는 주후 500년경 신앙을 고백하고 로마 카톨릭 공주와 결혼하였다. 프랑크 역사에 따르면 클로비스는"내가 만약 다른 종족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이 승리케 해주신다면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고 말하였는데 알레마니족 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으므로 그의 군사 3000명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클로비스의 회심으로 교황권과 프랑크족을 대표로 하는 서부 유럽사이에 신앙의 동맹이 결성 되었다.


 


 


그레고리 교황의 영국선교


그레고리는 앵글로색슨족의 선교를 위해 그 당시 로마로 노예로 붙잡혀온 앵글로색슨의 소년노예들을 매수하여 로마에서 목회자가 될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그는 어거스틴을 영국에 파견하여 선교의 일을 감당하게 하였다. 어거스틴은 성공적으로 선교를 감당하였고 영국의 켄터베리에서 최초의 영국 대주교가 되었다.


 


 


모하메드


이슬람교의 창시자로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최고의 선지자라고 말함 ,처음에는 반대를 받았으나 메디나에서 메카로 도망하여(헤지라) 메카에서 환영받은 후 크게 일어나 자신이 죽은후 2년 만에 전 아라비아가 이슬람화 되고 그후 기독교에 긍정적, 부정적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가르침은 알라신은 창조와 심판의 신이며, 곧 개인들을 행위대로 심판할 것이다. 그는 오직 알라신만 믿을 것, 일일 5번 기도할 것, 구제, 라마단의 거룩한 달에 금식할 것, 메카를 순례할 것을 이슬람교인들의 의무라고 말했다. 사?의 종교는 우리가 보기에도 기독교와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보이며,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고, 아라비아의 문화의 영향도 받은 종합적으로 만들어진 종교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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