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자 칼빈
본문
땡그랑∼
칼빈이 태어날 당시 로마 가톨릭에서는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했어요. 면죄부를 사면 천국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구원을 얻으려면 미사를 잘 드리고 축제일을 잘 지키면 된대요. 어린 칼빈은 이런 전통에 따라 성당에 다녔답니다. 어린 시절 허약하고 수줍음이 많았던 칼빈은 뛰어난 기억력을 지니고 있었어요. 야심이 많던 그의 아버지는 지방 영주였던 몽모르(Montmors) 가문으로 칼빈을 보내 그 집안 사람들과 공부하도록 했어요. 물론 비용은 아버지가 부담해야 했지만 칼빈은 상류층 자녀들과 사귀며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답니다.
넌, 신부가 돼야 해!
칼빈의 아버지는 칼빈이 가톨릭 신부가 되기 원했어요. 부와 명예를 가지는 가장 좋은 길은 신부가 되는 길이었거든요. 신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날 때 칼빈은 겨우 14세였어요. 그런데 19세가 되자 아버지는 법학을 공부하라고 했어요. 당시에 칼빈의 아버지는 살던 곳의 성직자들과 충돌이 있자 아들이 신부가 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뿐만 아니라 법학을 공부해야 생활이 안정되고 장래가 확실하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하지만 이렇듯 칼빈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던 아버지가 1531년에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러자 칼빈은 자신이 하고 싶던 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답니다.
쉿, 조용히 해
그 당시에선 헬라어 공부하는 것을 금지시켰어요. 헬라어를 배우면 신약성경 내용을 알게 되고 결국 가톨릭이 말씀에서 떠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요. 하지만 칼빈과 그 친구들은 비밀리에 헬라어를 익히고 성경의 원문을 접하며 조금씩 종교개혁에 동조해 가고 있었답니다. 칼빈의 친구인 니콜라스 꼽이 1533년 11월 파리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했을 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산상수훈을 주제로 설교를 했어요.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이 연설 이후 사회 권력층, 성직자들의 많은 비난과 핍박이 왔어요. 자신의 권위에 위험이 올 수 있기 때문이에요. 결국 꼽은 바젤로 피신했어요. 연설문을 함께 작성했던 칼빈도 핍박 때문에 도망다니기 시작했답니다. 하지만 이 시절에 아주 유명한 ‘기독교 강요’의 체계를 세우게 되었어요.
제네바 개혁 운동
피난 생활을 하던 칼빈은 ‘기독교 강요’ 출간한 후 제네바에서 개혁 운동을 일으켰지요. 물론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가톨릭 성직자들과 싸웠고 때로는 국가에서 추방 명령을 받아 떠돌이 생활을 하기도 했어요. 14년 동안 제네바의 종교 개혁을 위해 싸웠던 칼빈, 칼빈의 개혁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답니다.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란드, 영국, 독일 등에서 그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계승되었죠. 하지만 그 동안 칼빈의 몸은 말이 아니었어요. 위궤양, 관절염, 천식, 폐병, 결석, 늑막염 등으로 인해 걸어다니는 병원이라 해도 될 정도였거든요. 결국 그는 1564년 55세의 나이로, 비명 없는 무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답니다.
칼빈이 태어날 당시 로마 가톨릭에서는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했어요. 면죄부를 사면 천국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구원을 얻으려면 미사를 잘 드리고 축제일을 잘 지키면 된대요. 어린 칼빈은 이런 전통에 따라 성당에 다녔답니다. 어린 시절 허약하고 수줍음이 많았던 칼빈은 뛰어난 기억력을 지니고 있었어요. 야심이 많던 그의 아버지는 지방 영주였던 몽모르(Montmors) 가문으로 칼빈을 보내 그 집안 사람들과 공부하도록 했어요. 물론 비용은 아버지가 부담해야 했지만 칼빈은 상류층 자녀들과 사귀며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답니다.
넌, 신부가 돼야 해!
칼빈의 아버지는 칼빈이 가톨릭 신부가 되기 원했어요. 부와 명예를 가지는 가장 좋은 길은 신부가 되는 길이었거든요. 신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날 때 칼빈은 겨우 14세였어요. 그런데 19세가 되자 아버지는 법학을 공부하라고 했어요. 당시에 칼빈의 아버지는 살던 곳의 성직자들과 충돌이 있자 아들이 신부가 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뿐만 아니라 법학을 공부해야 생활이 안정되고 장래가 확실하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하지만 이렇듯 칼빈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던 아버지가 1531년에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러자 칼빈은 자신이 하고 싶던 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답니다.
쉿, 조용히 해
그 당시에선 헬라어 공부하는 것을 금지시켰어요. 헬라어를 배우면 신약성경 내용을 알게 되고 결국 가톨릭이 말씀에서 떠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요. 하지만 칼빈과 그 친구들은 비밀리에 헬라어를 익히고 성경의 원문을 접하며 조금씩 종교개혁에 동조해 가고 있었답니다. 칼빈의 친구인 니콜라스 꼽이 1533년 11월 파리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했을 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산상수훈을 주제로 설교를 했어요.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이 연설 이후 사회 권력층, 성직자들의 많은 비난과 핍박이 왔어요. 자신의 권위에 위험이 올 수 있기 때문이에요. 결국 꼽은 바젤로 피신했어요. 연설문을 함께 작성했던 칼빈도 핍박 때문에 도망다니기 시작했답니다. 하지만 이 시절에 아주 유명한 ‘기독교 강요’의 체계를 세우게 되었어요.
제네바 개혁 운동
피난 생활을 하던 칼빈은 ‘기독교 강요’ 출간한 후 제네바에서 개혁 운동을 일으켰지요. 물론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가톨릭 성직자들과 싸웠고 때로는 국가에서 추방 명령을 받아 떠돌이 생활을 하기도 했어요. 14년 동안 제네바의 종교 개혁을 위해 싸웠던 칼빈, 칼빈의 개혁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답니다.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란드, 영국, 독일 등에서 그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계승되었죠. 하지만 그 동안 칼빈의 몸은 말이 아니었어요. 위궤양, 관절염, 천식, 폐병, 결석, 늑막염 등으로 인해 걸어다니는 병원이라 해도 될 정도였거든요. 결국 그는 1564년 55세의 나이로, 비명 없는 무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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