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와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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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의 환경과 습성, 생존을 다룬 파브르의 "곤충기"에 보면"소나무행렬모충"이라는 벌레가 나온다. 이 곤충은 줄을 지어 기어가는 성질을 갖고 있다.파브르는 이 곤충 몇 마리를 화분 테두리 위에 나란히 올려놓은일이 있었다. 그런데 원형인 화분 테두리에서 앞서가는 한 마리를따라, 다른 벌레들이 계속 빙빙 돌다가 그만 며칠만에 모두 지쳐서 죽고 말았다.주위에 먹을 것이 있었고 살길이 있었는데도 돌기만 했던 것이다.악습의 되풀이, 타성에 의한 되풀이는 비극을 낳는다.예와 아니오를 때에 맞춰 적절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자신이 소속된 집단이나 공동체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옳을 때 예라고 말할 수 있고, 그를때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지혜와 결단을 요한다.예나 아니오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행^불행이 결정되는가 하면집단 분위기가 좌우된다. 예를 들어 법정 증인의 대답이나 증언한마디로 사건의 결말이 뒤짚힐 수도 있고 판결이 결정된다. 그리고 한마디 대답 때문에 좌중이 파안대소할 수도 있고 분위기가 경직될 수도 있다.어제 아침 부산 공항 식당에서 몇 사람과 조반을 함께 했다. 음식을 날라다 주는 사람은 순박해 보이는 시골 아주머니였다. 주문한 식사는 부산 명물 재첩국이었는데, 생각보다 여러 가지 반찬이곁들여 나왔다.일행 중 한 사람이 "오늘 아침은 특별히 반찬을 많이 주십니다"라고 농담을 건네자, 그 아주머니는 천연덕스럽게 "특별히 맘이드는 거라예"라고 받아넘기는 바람에, 폭소가 터지고 기분 좋은조반을 먹을 수 있었다.언어의 미학, 이것은 반드시 언어학이나 국문학을 연구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우리시대의 언어 문화를 가시와 엉컹퀴로비유할 수 있다. 거칠고 살벌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비어와속어가 판을 치는가 하면, 언어의 횡포가 우리의 인격을 파괴하고있다.그러나 보다 심각한 위기는 언행의 표리부동 현상이다.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그리고 말을 믿어야 할지 몸짓을 믿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생필품 구입의 경우 독일 사람은 튼튼한 것을, 프랑스 사람은화려한 것을, 일본 사람은 축소 지향적인 것을 찾기 때문에, 거기에 걸맞은 제품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그런데 우리네 경우는 어떤가. 약속과 신의와 진실과 정직히 실종되어 가고 있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자신의 언표를 책임지지못하고 뒤집기를 되풀이한다든지 말 다르고 몸짓 다른 사람이라면대장부에 끼지 못한다.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교훈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사표시와 행동 표시를 분명히 하라는 뜻이며자신의 언행을 책임지라는 것이다. 무책임한 사람들 때문에 병들어가는 우리 시대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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