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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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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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가 아직 아이였을 때 그의 아버지 필립포스 세가 땅을 많이 정복하자 '아버지가 다 정복하면 내가 나중에 정복할 땅이 없어진다.' 고 말했다.부왕이 암살되자 약관 스므살에 왕위에 오른 그는 아버지보다 훨씬 넓은 땅을 정복했다. 그는 이란을 정복한 후 멀리 인도까지 원정하였으며 정복지에는 자신의 이름을붙힌 알렉산드리아 시를 70개소나 건설하였다.그렇게 관대하고 인자하고 부하를 사랑하던 알렉산더도 전승의 교만에 도취하여 자신을 신격화하고 절제를 잃어버리자 술과 색에 기울어져 성질이 난폭해졌다.그래서 원정의 제일 공로자인 노장 파비니오의 부자를 죽이고 은인 그라이다스도 죽였다.인도 원정을 마치고 페르샤로 돌아오는 길에 바빌론에 들렸다. 신관은 그곳을 들리는 것이 불길하다고 예언하였으나 그것을 무시했다. 어느날 밤 그는 오랜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니야카스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연회를 마친다음 잠자리에 들려고 할때 총애를 받는 신하 메디야스가 들어왔으므로 다시 술을 마셨다. 그 이튿날 석양 때까지 자고 일어 났다가 다시 술을 마셨다. 몸이 약해지자 열병이 걸렸다.알렉산더는 크토리아 왕녀 크로사나와 결혼하였고 다시 다리우수 왕녀 스타티라와결혼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왕의 병이 깊어지자 한 신하가 물었다."대왕께서 별세하신 후에는 누구에게 나라를 맡기려 하시나이까 ""가장 강한 자에게 " 왕의 대답이었다.병이 더하여 진다는 소문이 군대 안에 퍼지자 다투어 그의 마지막을 보기를 원했다.그러나 평소의 측근자들만 무장해제를 하고 왕의 병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왕은 슬피우는 부하들의 손에 입을 맞추어 결별의 뜻을 표하였지만 후계자에 대하여서는 별 말이 없었다. 그날 밤에 세상을 떠나니 BC 323 년 6 월 28일 그의 재위 12년 8개월 그의 나이 33세 였다.33세에 죽은 또 한사람이 있다. 그는 많은 사람을 살렸으나 알렉산더는 많은 사람을죽였다. 음부는 세상 영웅들을 옴을 영접하고 있다. (사14:9)폼페이우스한 때 로마의 삼두 정치의 한 사람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씨이저와의 대결에서 패 한후 그가 지배하던 로마 판도 안에서는 숨을 장소가 없었다. 부하 몇을 데리고 낮이면숨고 밤이면 도망가서 소아시아에 있는 애인 코네리를 데리고 그는 이집트로 다시 향했다.생각해 보면 억울하고 서렵기 그지 없었다. 대 정치가요 대장군이던 자신이 도망가는 신세가 되다니.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을 진압했고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한 자신이 아니가 대 로마 제국을 지배하던 종신 집정관이 아닌가 전날 이스파니아,시리아를 정복했고 개선장군으로 입성하던 때의 만세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이 아닌가과거 이집트를 도와 준일이 있으므로 그 인연을 믿고 이집트로 가는 길이었다.거기서 다시 기회를 보자는 속샘이었다. 그는 베르샴에 배를 세우고 이집트 정부에 자기가왔음을 통지하였다.이집트 정부에서는 만약 그를 환영하면 씨이자의적이 되고,만일 그를환영하지 않는다면 후에 그가 다시 세력을 얻을 때는 불리할 것으로 판단한 그를 거짖으로 환영하여 죽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폼베이우스 일행을 맞으려오는 배에 탄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있었다. 아기를 안고불안스럽게 바라보던 아내 코네리는 남편의 소매를 당기며 이집트 배로 내려가지 말라고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작별의 키스를하고 이집트 배로 내렸다. 거기에는 옛날 자기의 부하였던 한 로마의 사관이 타고잇는 것을 보고 반가와서 "자네는 옛날 나를 따르던 부하가 아닌가" 하니 그 사관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그 사관은 해안에 상륙하자 번개같이 폼베이우스를 찔려 죽이고 그 부하도 죽였다.그는 폼베이우스의 목을 잘랐다. 가족들은 해안으로 가서목없는 시체를 안고통곡하다가 화장하여 유골만 가지고 돌아왔으니 BC48년 9월 28일, 그의 나이 59세였다.뒤를 쫓아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 씨이자 앞에는 폼베이우스의 머리와 원수의 도장인 반지가 운반되었다. 씨이자는 눈물을 흘렸다. 옛날의 동지요, 사랑하던 사위였기때문이다."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4:14남이 장군남이 장군은 1441 년 (세종 23년) 의산군(迎買가) 휘(壑)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의령 (迎苟),태종(車靭)의 외손자 이다. 좌의정 권남의 4녀와 결혼 1457년 (세조3년)17세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1467 년 (세조 13년) 이시애(譽枇爽)가 북관(瀨가)에서 난을 일으키자 雁境偶으로토벌대에 참가 이를 평정하고 稶개공신등에 오르고 迎買가에 봉해졌으며 이어서 서북편의 가俺者를 정벌하여 불과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다.1468 년 栒靭(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 대궐에서 숙직하던 어느날 밤 남이 장군은 擢紡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이 사라지고 새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했다.그로서는 구역질나는 선비의 생리,음모를 잉태하는 족벌 사회, 어두움 만으로 둘러싼인 점점 커져가는 부패의 공을 저 멀리 차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그러나 평소 그의 승진을 질투하고 있던 璵猥가이 이르 엿듣고 그의 시 "暇`沙曳斜膽菜가"을 恐菜가으로고처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을 했다."백두산 돌을 칼갈아 가루내고두만강 물을 말먹여 바닥내리사나이 20세에 나라를 바로잡지 못하면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이르랴."그는 모진 고문을 받았다.살을 태우고 뼈를 깍이는 갖가지 형벌과 온갖 감언이설에도그는 끝끝내 굴하지 않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누구하나 그의 무고함을 변호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부친과 절친한 사이로 그의 결백을 누구 보다도 잘아는 당시의 영의정 가芙(강순)마져 하얗게 센 머리를 조아리고 掩가牢齧이렀다.남이는 역모의 배후를 캐내려는 고문 끝에 다리가 부러졌다. 그는 이제 자기의 운명이 마지막에 이르렸음을 알았다. 불타는 눈으로 강순을 바라보며 남이는 입을 열었다.저자, 강순이 나를 시켰소. 그것은 노한 음성이었다. 순간 영의정 강순은 새파랗게 질렸다. "남이야 네가 내게 무슨 원한이 있어 나를 이렇게 모함하느냐" 그러나 남이는의연히 말했다."원통한 것은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이다. 나의 원통함을 알고서도 구하지 않으니당신 또한 원통하게 죽는게 당연하지 않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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