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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화(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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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화(새사람)


 


▶사람에게 여섯 개의 감옥이 다 있다고 합니다. ⑴자기도취의 감옥입니다. 자기 잘난 줄 알고 교만의 감옥입니다. 공주병 왕자 병에 걸린 감옥이라고 합니다. ⑵비판의 감옥이라고 합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 약점만 보고 비판하는 겁니다. ⑶절망의 감옥입니다.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평불만만 하는 감옥입니다. ⑷과거 지향의 감옥입니다. 자꾸 옛날 생각하고 옛날 좋았다고 지난날을 생각하는 겁니다. ⑸선망의 감옥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의 소중함을 전혀 모르고 남에 것만 귀하게 생각하고 남의 것만 자꾸 부러워하고 시기 질투하는 겁니다. ⑹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공연히 배가 아프고 자꾸 헐뜯는 이게 모두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말했습니다. <사랑은 남에게 그 무엇을 베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사람과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전차가 있던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사람이 전차 밑에 깔렸습니다. 전차를 들 수 없기에 한 쪽을 잘라내야 그 사람을 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장비를 옮겨 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밑에 깔린 사람은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밖에서 안절부절만 하고 있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전차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를 붙들고 안심시켰습니다.


  <곧 당신을 구할 차가 올 것입니다. 그 동안 나와 같이 있어요.> 그리고 그 속에 들어 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같이 있자고 부르셨습니다.


  어디서나 어느 곳에서나 우리는 이렇게 외치십시다. <주님! 나는 주님과 함께,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돈 쓸 때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주님께 묻고, 주님의 대답을 듣고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타이타닉이라는 유명한 영화는 스필버그 감독이 만들었습니다. 스필버그는 오프라 윈프리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영화의 크라이막스를 배가 물에 잠길 때 수천 명이 죽어가고 있는 장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도망치지 않고 같이 있어 주면서 찬양을 불러 주었던 이가 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주께로 나가기 원합니다.>


  같이 있는 것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최고의 비결은 같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같이 있자고 부르셨습니다.




  ▶어느 바닷가에 한 가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둘이 단란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생명처럼 사랑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친구와 둘이 배를 타고 바다 멀리 놀러 나갔습니다. 파도가 갑자기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강한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배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점점 가라앉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등대지기였습니다. 그런 세찬 강풍 속에서 아들을 구하려고 구명보트를 타고 바다로 목숨을 걸고 나갔습니다. 아들이 탄 배가 가라앉고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가 타고 간 배는 두 명 밖에 탈 수 없는 구명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친구 두 명이었고 배는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구명정을 보고 아들 친구는 이미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먼저 건지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아들 친구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들이 놀라서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래요? 아버지?>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너는 예수를 믿으니까 천국에 갈 수 있지만 네 친구는 예수를 안 믿기에 지옥에 간다.> 이 말을 듣고 아들은 곧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습니다. 아들은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천국에서 만나요.> 아버지는 펑펑 울면서 아들 친구를 구하여 육지로 나왔습니다.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설교한 내용이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찬송을 부르는 데 교회 뒤에 동네 불량배들이 앉아 있다가 이 설교를 듣고 말했습니다.


  <뭐야? 꾸민 이야기 아니야?> <누가 믿어?> 그 때 불량배 뒤에서 앉아 있던 노인이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네. 젊은이들! 내가 그 아버지라네. 내가 그 바다에 들어가서 아들 친구를 끌어낸 사람이야. 저기 서서 말씀을 증거한 목사가 내가 구한 아들 친구야.>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의좋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은 아주 부요한 데 동생은 아주 가난하였습니다. 늘 100만원 200만원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늘 동생은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형은 그렇게 동생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수억 원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지나가는 곳에  수 억짜리 금덩어리를 떨어뜨려 놓고 집어 가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금덩어리를 떨어 뜨려 놓고 형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동생이 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 장님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장님을 보더니 중얼거렸습니다.


  <장님이 얼마나 불편할까? 한번 체험하여 보자.> 그리고 눈을 감고 금덩어리 앞을 지나갔습니다. 주려고 하여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낙천주의 여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낙천주의 아들이고 다른 아들은 비관주의 아들이었습니다. 비관주의 아들 방에 장난감을 잔뜩 사다 놓았습니다. 낙천주의 아들 마당에는 개똥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보니 비관주의 아들은 울고 있었습니다. <왜 우니?> <장난감이 부서질 가 두려워요.>


  그러나 낙관주의 아들에게 가보았습니다. 개똥위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습니다. <너 거기서 무엇 하니?> 아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엄마! 개똥이 여기 있는 것 보니 이 주변에 강아지가 있어요. 강아지를 기다리고 있어요.> 무엇이든지 기본이 좋아야 합니다.




  ▶언젠가 영구차를 타고 공동묘지에 갔다가 하관을 마치고 운전사들과 함께 영구차에 올라가 앉아 있다가 운전사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그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루는 영구차에 관을 싣고 가서 매장을 하고 가족들을 집에 데려다 주고 나니까 그만 통금에 걸려서 차고까지 갈 시간이 없어서 도중에 차를 세워 놓고 차 속에서 밤을 새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수와 같이 캄캄한 밤에 희미하게 촛불을 켜 놓고 영구차 안에서 밤을 새우는데 때 마침 밖에서 비가 오기 시작하였더랍니다. 사람은 이런 때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영구차 속에서, 한밤중에, 촛불을 켜 놓고, 그것도 지금 밖에서는 궂은비가 내리고 있으니 얼마나 구색이 잘 맞는 밤입니까? 그 밤에 조수와 함께 잠을 청하니 잠이 오겠습니까?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어디서 ‘이리 오너라.’ 하는 말이 들려오더랍니다. 이 사람들이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고 합니다. 지금 긴장을 하고 있으니까 그러려니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5분쯤 지난 후에 또다시 ‘이리 오너라.’ 하고 또렷한 음성이 들려오더랍니다. 사람이 이쯤 되면 별수 없어집니다. 권세가 있고 없고, 돈이 있고 없고, 뱃심이 있고 없고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지금까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던 자기 자신의 문제, 지금까지 내면의 속에 깊이 감추어 있던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생에 대한 공포와 교차되면서 자기 자신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이 운전사들은 남달리 영구차에 시체를 싣고 매일같이 공동묘지를 이웃집 드나들 듯이 왔다 갔다 했지만 자기 자신의 영혼 문제, 실존의 문제,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고, 생각도 못하고 그저 돈 몇 푼 더 받고 술 한 잔 더 얻어 마시는 것에만 골몰했는데 그날 밤 갑자기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기이한 소리를 듣게 될 때 비로소 이 사람들은 ‘나도 지금 살아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지금까지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보지를 않았는데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니까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의지심이 생기더랍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면 신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점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긴장을 하고 있는데 또 5분쯤 후에 ‘이리 오너라.‘ 하는 소리가 아주 음흉하게 들려오더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참다못해서 전등을 켜 들고 함께 소리 나는 출처를 찾아서 문을 열고 칠흑같이 어두운 밖으로 나가는데 머리가 있는 대로 모두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더랍니다. 조심스럽게 나가는데 그때 갑자기 ’이리 오너라.‘ 하고 그 소리가 또 들려오더랍니다. 이 사람들이 그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전등을 소리 나는 곳에 비추어 보니까 자동차 밑에 앞바퀴와 뒷바퀴를 연결하는 새시 위에 어떤 사람이 술에 만취된 채 누워서 기분 내키는 대로 한마디씩 내뱉은 것이 영구차 안에 있던 사람들을 그렇게 놀라게 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얼마나 화가 났던지 그만 그 술꾼을 끌어내어 실컷 때려 주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 사람들은 그날 밤에, 지금까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인간의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반성해 볼 기회를 가졌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정돈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왕은 늘 시종 한 사람을 곁에 대동시켰는데, 그의 손에는 언제나 사람의 해골이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주연상을 베풀어 놓고 취해서 이성을 잃을 정도가 되면 이 시종은 해골을 술상 머리에 올려놓고 말하기를 "폐하여, 폐하도 결국 이렇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읊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한창 취기가 올라서 정신이 몽롱해질 때 그 소리에 그만 임금은 정신을 가다듬고 주연상을 물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지혜 있는 왕입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은 나도 장차 저렇게 죽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방종도 하고, 만용도 부리고, 때로 교만해지기도 하고, 부질없는 일에 매달려서 인생을 소비하기도 하고, 허탄한 곳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다가 어느새 그날이 다가오게 되면 모두 당황하고 이게 아닌데 하고는 탄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눈을 감고 입을 열어서 기도하기만 하면 그저 "주여, 충만! 충만! 충만함을 주시옵소서!"라고 오직 늘 충만 만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루는 옆에 계신 분이 그 집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집사님은 이미 충만하신 것 같은데, 왜 자꾸 충만을 구하십니까?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웃으시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충만해야지 하나님이 많이 축복해 주실 것 아닙니까? 그래야 사업도 잘 되고, 돈도 잘 벌지요."


  충만하기를 바라는 목적이 기껏해야 돈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충만하겠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충만’이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충만했습니다. 말씀으로 충만했고, 믿음도 충만했고, 성령도 충만했고, 은혜도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충만 그 자체를 위해서는 한 번도 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명에 충성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 주님의 증인되는 일에 열심을 다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사명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절로 모든 면에서 그들을 충만케 하신 것입니다. 충만해야지 전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충만해야만 헌신하고, 충만해야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그저 "충만! 충만!"만을 구하다보면, 허구헛날 아까운 세월만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담대하게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뜨겁게 사랑해 보십시다. 그리고 죽도록 충성해 보십시다. 하나님이 절로 우리에게 충만함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D. L. Moody는 조금 특이했습니다. 이 분은 성경을 읽다가 의심이 생기면 일단 성경을 덮어버립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무조건 입을 열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한바탕 전도를 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성경을 펼치면 의심은 온대간대 없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깊은 확신이 다시금 맴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말씀인 줄 압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충만한 은혜를 우리가 계속해서 간직하는 비결은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계속해서 간직할 수 있습니다.




  ▶옛날 중국에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화가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자기의 그림이 제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임금님이 두 화가를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제목을 하나 주면서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림의 제목은 "평화"였습니다. 두 화가는 "이제야 말로 나의 솜씨를 발휘할 때가 되었구나!"라고 기쁘게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드디어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두 화가가 그림을 들고서 왕궁으로 왔습니다. 임금님과 신하들이 다 모여서 그림을 감상합니다.


  첫째 화가는 이런 그림을 그렸습니다. 깊은 산속이었습니다. 풀잎 하나 나뭇잎 하나 움직이지 않는 고요함과 적막함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널따란 잔디밭이 있었습니다. 잔디밭 위에는 한 노인이 길게 누워서 세상모른 채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가 기르는 개가 고개를 다리 속에 파묻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쳐다보기만 해도 졸음이 와서 눈이 스르르 감길 것 같은 그림이었습니다.


  둘째 화가는 이런 그림을 그렸습니다. 거대한 폭포를 그렸습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의 우렁찬 소리가 들리는 듯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폭포수 중간에 하나의 가느다란 긴 나뭇가지가 뻗어 있었습니다. 그 나뭇가지 중간에는 새 둥지 하나가 놓여있었습니다. 새 둥지 안에는 어미 새 한 마리가 폭포수에서 떨어지는 물의 퉁김을 받아서 흠뻑 젖은 채 눈을 꼭 감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 어미 새 품안에는 새끼 새 몇 마리가 평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두 그림이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이 두 그림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평안일 것 같습니까?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서 낮잠을 자는 것이 진정한 평안이겠습니까? 여러분, 양로원에 계신 분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노인들은 하루 종일 그곳에서 쉬기만 합니다. 그런 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억센 환경 속에서의 평안, 이것이 진정한 평안입니다. 생동감이 있고, 살아있는 평안일 것입니다.




  ▶어떤 꼬마아이가 자기 집에서 장난감 레고를 가지고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신문을 보다가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와서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꼬마아이가 자기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쉿! 조용하세요. 저는 지금 교회를 만들고 있어요." 자기가 교회를 만들고 있으니까 조용히 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이가 기특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얘야, 그런데 왜 교회에서는 조용해야 되니?" 아이가 무엇이라고 대답했겠습니까?


  "에이! 아빠는 그것도 몰라? 교회에서는 다 졸잖아! 아빠가 떠들면 다른 사람들이 다 깨어날 거 아냐?"


  여러분! 우리는 지금 살아 계신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거룩한 시간을 어떻게 졸면서 맞이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이 죄인 된 인간들을 만나주시는 엄청난 축복의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하면서 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배라는 말은 예를 다해서 경배 드린다는 뜻입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worth(가치)"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치를 하나님답게 인정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제대로 돌려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한 이야기입니다. 작은 어항 속에 금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매일 싸웠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대판 싸웠습니다. 결국 한 마리가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한 마리는 승리의 쾌재를 불렀습니다. 이제는 자유롭게 마음껏 혼자 즐기면서 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몇 일 못 가서 그도 죽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죽은 물고기가 악취를 내면서 몸이 썩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서로 도와 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더불어 믿어야 합니다. 교회가 신앙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때, 교회는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연못 속에 황금비늘을 가진 황금 물고기가 한 마리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물고기들은 황금 물고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늘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걸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황금 물고기의 자세는 너무 도도했습니다. 자기의 비늘이 다칠까봐 늘 혼자 떨어져서 살았습니다. 때로는 물고기들이 모여서 축제를 벌이기도 했지만 황금 물고기는 그저 멀리 서서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늘 동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다른 연못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이사를 왔습니다. 이사 온 물고기도 황금 물고기의 아름다운 자태에 반해버렸습니다. 이사 온 물고기는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습니다. 그 동안 너무나도 외로웠던 황금 물고기는 곧 이사 온 물고기와 친해졌습니다. 하루는 이사 온 물고기가 황금 물고기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얘, 친구야! 너의 황금빛 나는 비늘을 하나만 내게 나누어줄 수 없겠니? 그러면 내가 그것을 고이 간직하도록 할게."


  황금 물고기는 선뜻 자기의 황금비늘 하나를 떼어서 이사 온 물고기에게 주었습니다. 이사 온 물고기는 그것을 받고서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황금 물고기도 좋아했습니다. 그러자 주변에 있는 물고기들이 다 몰려들었습니다. 너도나도 황금비늘을 하나씩만 나누어 달라고 졸라댔습니다. 그러자 황금 물고기는 자기의 비늘을 하나씩 떼어서 그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다 나누어주고 났을 때 황금 물고기는 더 이상 황금 물고기가 아니었습니다. 보통 물고기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친구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연못가를 지나다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연못 속이 온통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들이 지니고 있는 황금빛 비늘이 저마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의 모습이 이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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