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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화(스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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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화(스펄전)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스펄전 목사님이 하루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서 말씀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한 청년이 손을 들더니 빈정대면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의롭게 죽어 가는 동안에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목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이 전능한 분이라면, 하나님은 그 순간 스데반을 지켜주고 보호해주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주변에 있는 돌들을 다 치워버린다든지, 하늘에서 천둥을 쳐서 사람들을 흩어버린다든지, 또는 천사를 보내서 스데반을 다른 곳으로 피신을 시켜 주었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스데반이 의롭게 죽어가는 동안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 때 스펄전 목사님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스데반을 다른 곳으로 피신을 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서 자기를 돌로 치는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스데반을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스데반이 순교하던 현장에는 바울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본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였습니다. 그러하던 그가 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처럼 또 한 사람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교회가 위대한 바울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스데반의 기도에 응답하신 덕분이다."


강팍한 바울의 마음은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에 이미 흔들리면서 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인 손양원 목사님은 여순 반란 사건 때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그 원수 학생을 구명하다 못해서 그 학생을 자기의 양자로 삼겠다고 분주하게 뛰어다녔습니다.


참다못한 그의 딸이 그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에게 대들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오빠들이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슬프디 슬픈 얼굴을 하고서 하늘에서 원수를 갚아달라고 부르짖는 오빠들의 음성이 들리지도 않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는 것입니까?"


그 때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딸에게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얘야, 성경말씀을 자세히 읽어보아라. 성경말씀에는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용서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즉 그 학생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셨으니까,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그를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 학생을 자기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신학교에 보냈습니다. 자기의 대를 잇는 목사로 키웠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필리핀의 병사 약 이만 명이 일본군의 포로수용소에 포로로 잡혀 있었습니다. 수용소안의 환경은 너무나도 열악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습니다. 거기에다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하루에도 수 없는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용소에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왔습니다. 날개를 몹시도 다친 비둘기였습니다. 수용소 안에 있는 병사들은 한마음이 되어서 극진하게 병든 비둘기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약품을 구해다가 다친 날개에 발라주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자기들의 양식을 아껴서 비둘기에게 모이로 주었습니다.


비둘기가 깨끗하게 치료되던 날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자기들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비둘기를 치료하면서 사랑으로 돌봐주는 가운데 그들의 사망률이 급격하게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었다는 것, 그들에게 사랑해주어야 할 대상이 있었다는 것, 그들에게 돌봐 주어야 할 대상이 있었다는 것이 그들에게 삶과 희망의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한 때에 베스트셀러인 가시고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조창연 씨가 쓴 소설인데, 아버지가 아들을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부성애를 그린 소설입니다. 가시고기라는 것은 조그만 민물고기인데, 특이한 점은 암놈이 알을 낳을 때에 바위틈에 알을 낳고는 그냥 가버린다고 합니다.


보통은 짐승들이 암놈이 새끼를 낳은 다음에 잘 보살피는데, 가시고기는 그렇지 않아서 암놈은 알을 놓고는 그냥 가버립니다. 그러면 수놈이 그것을 돌보고 보호합니다. 적이 와서 자기의 새끼를 침공하면 목숨을 걸고 자기의 새끼를 보호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새끼들을 정성스레 키웁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자기 새끼들을 키우면, 새끼들이 모두 자라 자기의 갈 길을 가버립니다. 그러면, 아빠 가시고기는 힘이 다 빠져서 돌 틈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리고 만다고 합니다.


가시고기는 이렇게 자기 새끼들을 위해서 전적으로 희생하고 새끼들을 위해 자기의 몸을 버립니다.


 


▶유명한 헤밍웨이가 있습니다. 이 분은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너무 공부도 잘 하고 총명하고 지혜로우니까 세상길로 갔습니다. 부모님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분이 말하기를 남자가 되어서 이렇게 다양하게 멋이 있는 분은 헤밍웨이라고 합니다. 인물 좋고 키 크고, 수염, 사진 보셨잖습니까? 작품 하나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들어가도 대단한데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는 이걸 가지고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분을 호탕하고 아주 개방적이고 쾌락적이고 재치가 있고 쾌활했다고 합니다. 모든 분들이 보기에 너무 멋있었다고 합니다. 헤밍웨이가 움직이면 세계가 따라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영혼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사람에게 박수 받고 세계적인 자리에 올라갔지만, 하나님을 떠난 그의 영혼은 갈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핸들을 내 마음대로 틀고 여기 저기 갔다가 그 다음에 자꾸 부딪히게 되고 그의 마음은 늘 공허했다고 합니다. 이미 남긴 그의 글에 ‘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지고 코드를 꽂으려고 해도 꽂을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외로움과 공허함속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외로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많이 가져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지 아니하는 우리 인생, 위로부터 불이 꺼진 인생은 밖에 불이 아무리 있어도 내 마음의 불은 하나님이 켜 주시는 겁니다. 영적인 불이 꺼지면 밖의 불이 아무리 찬란해도 그 안의 불은 그를 밝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 영혼, 심령, 그 안이 살아있지 않습니까? 제자의 길은 영혼이 살아있지 않습니까? 헤밍웨이는 결국 외로움과 우울증을 견딜 수 없어서 엽총으로 1961년 자기 머리를 쏘고 자살해 죽었습니다.


 


▶미국의 정신 분석 학자인 에릭히 프롬 (Erich Fromm)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사랑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이야기했다.


1)관심을 가지는 것 2)책임을 지는 것 3)존중하는 것 4) 이해하는 것 5)주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마을에 소와 사자가 있었다. 둘은 죽도록 사랑했기 때문에 안 되는 줄 알면서 결혼했다. 둘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다. 소가 최선을 다해서 날마다 맛있는 풀을 사자에게 대접했다. 사자는 싫었지만 정성이 고마워서 참고 억지로 먹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날마다 맛있는 살코기를 소에게 대접했다. 소도 역시 괴로웠지만 사자의 정성에 감동해서 참고 억지로 먹었다. 그러나 참을성은 한계가 있었다. 둘은 마주 앉아 얘기했고 마침내 소와 사자는 다투었다. 그리고 끝내 헤어지고 말았다.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한 말은 “난 최선을 다 했어”였다.


 


▶국가가 젊은이를 나라 지키는 군인으로 쓰려고 할 때에는 호된 훈련을 시킵니다. 목수가 기둥을 만들 때에는 통나무를 사정없이 도끼질하고, 톱질하고 대패질을 하여 다듬어서 사용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큰 일할 일군들은 호되게 훈련시키십니다. 그리고 적당히 사용하실 사람들은 적당히 훈련시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쓰시지 않을 사람은 훈련도 시키지 않고 고생도 시키지 않으시고 편안하게 내버려 두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훈련도 안 받고 편안하게 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지 않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까? 아니면 적당히 훈련받고 적당히 쓰임받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눈물이 펑펑 쏟아질 정도로 호되게 훈련받고 크게 쓰임받기를 원하십니까?


 


▶충청도에 가면 백로들이 많이 모이는 섬이 있습니다. 한 조류연구가가 그 곳에 3년간 기거하면서 백로들을 연구하였습니다.


어미 백로는 새끼를 까놓고는 정성껏 사랑으로 기릅니다. 소낙비가 오면 자기 날개를 펴서 비가 그치기까지 날개를 접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다가도 일단 성장하고 나면 3일가량을 굶깁니다. 배고파서 둥지를 뛰쳐나가려고 하면 못 나가게 부리로 쪼아댑니다. 먹을 달라고 보채면 몸을 심하게 쫍니다. 그리고 나서 둥지에서 떨어뜨립니다. 만일 굶기는 고난 없이 떨어뜨리면 날개에 기름기가 많아서 나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백로에게 고난은 나를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누에고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누에는 자기 입에서 300m 명주실을 뽑아 자기 몸을 칭칭 감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잠을 자다가 나비가 됩니다. 그리고 번데기만 남게 됩니다. 그 때 자기가 감아 놓은 명주실을 뚫고 나오려고 애를 씁니다. 발버둥 칩니다. 피눈물 나는 처절한 노력입니다. 그런데 그 때 잠실 업을 하는 사람이 안스럽게 보면서 구멍을 뚫어 주어 보았습니다. 나비는 쉽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날개에 힘이 없어서 픽 쓰러져 일어나지 못 하고 날지 못하고 푸득 꺼리다가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생하여야 강해집니다. 애를 써야 무엇이 됩니다.


독수리는 자기 새끼 위에서 너풀거리며 날지 못 하고 땅으로 추락할 때까지 도와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내버려 두십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힘들 때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생하는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파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견디다 못 해 쓰러지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결코 우리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결코 우리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결코 우리는 우겨 싸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한 눈 팔지 않고 보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새끼 위에서 너풀대고 있기 때문에 새끼는 어미를 보지 못 합니다. 그러나 분명이 어미는 온통 신경을 새끼에게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긴장에 초긴장을 하고 있습니다.


안 보이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움 속에 있어도 하나님은 초긴장을 하고 보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상실한 고통 속에서도 잿더미에 앉아서 하나님은 안 보이지만 하나님이 분명히 자기를 보고 계심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왼 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 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9-10)


 


▶어느 한 의사의 간증입니다. 그가 배를 타고 가는 데 강풍이 불었습니다. 배가 뒤집혀서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죽었구나!> 생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바다에 온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그 때 돌풍이 불어 왔습니다. 자기를 땅으로 던졌습니다. 어지러웠습니다.


그는 봉천동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온전히 헌신하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봉천동의 슈바이처>로 널리 알려 지게 되었습니다. 윤 주홍장로님 이야기입니다. 그는 달동네와 낙도에서 25년 동안 무료 진료를 하였습니다. 1989년 제1회 서울 시민대상 수상을 하였습니다. 고난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훈련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축복의 땅은 온도계와 같습니다. 날씨가 따뜻하면 수은주가 올라갑니다. 날씨가 추우면 수은주가 내려갑니다. 그렇습니다.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지는 땅이 축복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살면 하나님께서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 내려주십니다. 풍성한 삶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닫아 버리십니다. 그러면 그 땅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아합 왕 때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김에 따라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닫아 버리셨습니다. 3년 동안 흉년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엘리야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다시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다시금 비가 내렸습니다.


이처럼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다스리시고, 책임지시고, 섭리하시는 손길을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축복의 삶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영국의 한 귀족이 인도의 영주에게 밭을 가는 트랙터 한 대를 선물을 했습니다. 며칠 뒤에 영국의 귀족이 인도의 영주가 트랙터를 잘 사용하고 있는지 가서 보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인도의 영주가 트랙터의 운전대 위에 올라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는 소 네 마리를 트랙터 앞에 걸고서는 힘들게 밭을 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귀족은 인도의 영주에게 내리라고 했습니다. 소를 풀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대신 트랙터 위에 올라앉았습니다. 그는 시동을 켰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네 마리의 소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수십 마리가 달라붙어서 갈 수 있는 밭의 면적을 다 갈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권고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


 


▶어느 모임, 어느 공동체에서든지 책임지는 사람이 기둥입니다. 나라를 책임지는 사람이 나라의 사람입니다. 교회를 책임지는 사람이 교회의 사람입니다. 가정을 책임지는 사람이 가정의 사람입니다. 책임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철환 작가가 쓴 <연탄길>은 아직도 책 분야에서 인기가 대단합니다. 제 3편까지 나왔습니다. 제2편에 실린 글입니다.


<아빠는 우리 가정의 지붕>이라는 글이었습니다. 회사에서 퇴출당한 후 가정이 점점 가난하여졌습니다. 그 동안 벌어 놓은 돈이 없어서 다 까먹고 나니 이제는 거지같았습니다.


아들이 학교에서 다녀와 말했습니다. <아빠! 내 친구들이 내 신발을 보면서 거지 신발이래.>


그 날 밤에 비가 억수로 쏟아졌습니다. 집이 새어서 안방이 물투성이였습니다. 아빠가 잠깐 나간다고 나갔는데 밤 1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집안 식구는 무슨 일인가 걱정이 되어 밖으로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 하고 돌아오는 데 지붕 위에 검은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있는 남자는 분명히 아빠였습니다. 놀라서 아빠를 부르려고 하는 데 엄마가 말했습니다.


<부르지 마라. 아빠가 가장으로서 자기 책임을 못 다 하니까 저렇게라도 하여 책임을 지려고 하는 마음을 꺾지 마라. 아빠의 보람을 망가뜨리지 말자. 아빠는 우리 가정의 우산노릇을 하려고 하고 있다.> 가슴 뭉클한 이야기입니다. 책임지는 사람 이야기입니다. 책임을 지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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