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의 방법
본문
방법에 있어서 성경에 나타난대로 보면 먼저는 이렇게 말씀한다. "매주일 첫날에(2절)" - 우리가 지키는 '주일'이다. 주일에 모일 때마다 하라는 것이다. 주일마다 - 다시 말하면 연보가 생활화하고 일상화해야 된다는 말씀이다. 마음 내키면 하고 어느 때에는 안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으레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내가 먹고 사니까 불쌍한 사람들을, 내가 여유 있으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되겠다, 하는 마음으로 할 것이다 하는 말씀이다.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성미라는 것이 있었다. 이 성미도 역시 연보의 생활화이다.또 하나는, '저축하여'라는 말씀이 있다. 모아놓으라는 것이다. 교회는 항상 이것을 모아놓는다. 구제금, 구제비, 또 구제쌀을 넉넉하게 가지고 있다. 언제든지 누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내줄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홍수가 나야만 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미리미리 모아서 넉넉하게 창고에 뒀다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내줄 수 있도록 되어 있어야 된다는 말씀이다.그 다음에 아주 delicate한 말씀이 있다.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2절)" 한다. 나 보는데서 헌금(,모금, 연보)하지 않도록 하라, 그렇게 눈치보익 하지 말라, 하는 얘기도 되고, 내가 가서 한번 설교를 하고 자, 헌금합시다 연보합시다, 하게 되면 강제성이 있서,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안할 수 있겠느냐, 체면이 있지 바울 앞에서 내가 아니할 수 있나, 이래가면서 하게 되는 것, 나는 그런 것은 원치 않는다, 그런 꼴은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갈 때에 내 앞에서는 헌금하지 않도록 하라, 연보하지 않도록 하라, 한다. 여기에 아주 용의주도한 사도의 의지가 담겨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원적으로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자세, 그 깊은 곳에서 일상적으로 구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다 -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다.연보하는 의의도 아주 귀하게 설명했다. 3절에 보면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한다. 은혜를 가지고 간다고 했다. 연보는 곧 은혜이다.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 참 귀한 말씀이다. 주는 자에게도 은혜이다. 줄 수 있다는 것이 보통 은혜인가 너무 너무 좋은 일 아닌가... 나는 북한에 가게 되면 참 행복하다. 준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주러 왔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그저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만나기만 하면, 기회만 닿으면 주는 것이다. 내가 거기 있는 사람들하고 악수를 할 때에도 가끔 손바닥에다 돈을 오므려 쥐고 악수한다. 몰래 주어야 되겠으니까. 그러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준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받은 은혜 가운데 주기도 하지만 준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다. 받는 사람은 받는 사람대로 또 은혜롭다. 거저 받는 것이니까 은혜이다. 그래서 giver and receiver - 주는 자나 받는 자나 둘 다 은례롭다. 그래서 은혜를 가지고 간다 - 참으로 은혜스러운 것이라야 한다.그 다음으로 주는 말씀을 보니 이제 사도 바울이 자기 계획을 말씀한다. 5절에 보면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하는 말씀이 있다.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7절)" 한다. 여기서 생각할 것이 몇가지 있다. 지나가는 길에가 아니라 거기에서 머물기를 원하노라 - 내가 너희에게 갈 때에 너희를 소홀히 여겨서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르는, 목적은 딴 데 있어 지나가는 길에 얼굴이나 비추는 정도로 너희에게 나아가기를 원지 않는다, 반드시 얼마 동안 유하기를 바란다, 함이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세심한 배려가 있다. 지나가는 길에 들르는 것은 별의미가 없다. 고린도교회에 올 때에는 고린도교회에 올 목적으로 고린도에 와야 한다. 그렇잖은가 가끔 보면 뭐 "지나는 길에 겸사겸사로" 하는데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마음과 무게와 진실을 담아서 거기에 방문하겠다는 것이다.또 한가지 아주 귀중한 말씀이 있다.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6절)" 한다. 엄청난 의미가 여기에 있다. 내가 너희들에게 가서 유할 것이요, 그 다음에는 너희가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나를 보내어주기를 바란다 - 내용적으로 보면 이런 것이다. 그들이 파송하는 형식을 가지겠다는 것이다. 또 헌금(연보)도 해서 여비도 주고 또 거기서부터 새롭게 출발하도록 사도 바울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무슨 말인고 하니 언제나 주도적으로 역할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로마로 가는 길에 어디까지나 그저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러가면 여기서는 구경만 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가서 머물 것이고 너희는 나를 갈 속으로 보내주기를 바란다 - 선교학적 표현으로는 sending body가 되라는 것이다. 즉 '파송의 주체'가 되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남 보내는 것 구경만 한다. 갔다 와서 선교 보고 한다고 하면 '그런 일이 있었나 수고드 했구만.' 이러고 만다. 이런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받는 자의 입장에 있었지만 이제는 주는 자요, 그 동안에는 피선교자의 입장이었지만 앞으로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주체적 역할을 해주기 바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을 선교적 차원에서 격상시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격을 높여 준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 주의 뜻이면 갈 것이다, 주의 뜻이면 머물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주의 뜻이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울의 겸손이요 진실한 마음이었다.지금은 에베소에 있다. 그럼 왜 여기에 머무느냐 그 뜻에 대해서도 참 귀한 말씀이 여기에 있다. "내게 광대하고 공효(功效)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9절)"라고 말씀했는데 번역을 좀 바꾸어보면 '나에게 큰 문이 활짝 열려서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하는 뜻이다. 기회라는 게 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다. 문이 열렸을 때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 문 열렸을 때에는 일하지 않고 닫힌 문을 가서 두드리겠는가 열린 문으로 들어가고 닫힌 문은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 선교학의 원리이다. 닫힌 문 자꾸 두드리다가 세월 다 보내는 사람 있다. 또 하나는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한다. 편안해서 에베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대적이 많다. 그러므로 바울의 입장에서는 여기서 열심히 전도해서 대적을 어느 정도 굴복시켜놓고 그 다음에 교회가 원만하게 부흥횔 때에 떠나야 되겠다는 생각이다. 핍박은 자신이 당하겠다는 것이다. 문이 활짝 열렸으니 더 여기서 일해야 되겠고, 대적이 많으니 또 나 여기에 있어야 되겠다 - 자, 이런 가운데 있는데 주의 뜻이면 내거 너희들에게 갈 때가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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