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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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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사는 내내 오스트리아에서는 좀 이상한 글을 쓰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를 옹호하고, 그의 장례식에서 조사까지 읽은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수도 빈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거리를 지나노라면 예닐곱 집마다 [피부병, 성병 전문의]라는 간판이 보였다. 전염의 불안에다 오늘날의 세계가 전혀 모르는 그 당시의 치료는 역겹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방법으로 가해졌다. 그 결과 이빨이 빠지고 갖가지 장애가 일어났다.그러므로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 진단이 내려지면 권총을 잡았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한 세기 전환기의 빈은 당시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대도시였으나 급속히 좁아지는 제국의 영역, 더딘 사회개혁,극단적인 빈부 격차 등 갖가지 사회문제가 뒤엉켜 있었다.츠바이크의 글은 이중적인 성규범이 낳을 수 밖에 없는 결과에 대한 고발이다. 그래서 프로이트 같은 탐구자가 생긴것 이고.에곤 쉴레(1890~1918)는 이런 분위기를 고발하고 바로 잡기 위해 도발하는 전략을 세운다. 모든 분야의 예술가에 대한 지나치리만큼의 존중이 관례인 사회에서 인체, 특히 자신과 여체를 성적인 면에서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연출한다.자기현시적, 노출증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도발적이거나 격한 심리 상태를 보여주고, 자위행위 중이거나 자위행위로 사정하는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20대 초반의 작품에 자주 보인다.[튀는 젊은이]로서의 행동은 급기야 사고로 발전해서 1912년,동네 주민들은 그가 뻔뻔스런 모델과 의심스러운 생활을 할 뿐 아니라 어린 사람들을 유인해 옷을 벗긴다고 고발했다.부녀 유혹과 유괴 혐의는 벗었지만, 민망한 그림을 아이들이 볼수 있도록 방치한 점은 죄라 하여 사람들 앞에서 작품 중 하나를 태우고, 며칠간의 수감형을 내렸다.이 사건으로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사람이란 이런 무리도 하면서 커가고 사는 것. 그런 뒤 27세의 쉴레는 작업실 근처에 사는 그와 비슷한 중산층의 여성을 만나 결혼한다. 그는 쉴레를 진정시켜 성에 대한 강박을 없애주고 어른답게 만들었다.1918년 초, 빈 분리파 미술가들은 쉴레에게 전시장의 중앙 큰 방을 내주었다. 훌륭한 아내와 만족한 생활을 보내던 그를 찾아온 성공과 임신 소식, 곧 마무리 될 1차대전의 상황은 그를 전과 달리 더없이 부드럽게 했다.그러나 어쩌랴! 당시 빈을 휩쓴 유행성 독감에 아기를 가진 아내가 죽었고, 그도 사흘이 지나지 않아 같은 길을 따라갔다.유작이 된 [가족]은 그러므로 불안정을 떨친 새로운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미래에의 간절한 염원을 그린 그린 그림이 되었다. 최석태<미술평론가>발 행 일: 97/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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