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TOP
DOWN


설교 예화(맹 집사 이야기)

본문

설교 예화


 


▶맹 천수 집사님이 쓴 '맹 집사 이야기'는 우리에게 굉장히 감동을 주는 책입니다. 맹 집사는 조그마한 시골교회를 섬기는 분린데, 하루는 임 집사라는 분이 중풍으로 쓰러졌습니다. 몸도 비대한 분이 중풍으로 쓰러져 눕게 되어 거동을 못하니까 교회에 와서 예배를 못 드립니다. 그래서 맹 집사님이 늘 예배드리고 임 집사 집에 가서 교회 소식을 전했습니다. 

  오늘 목사님 설교는 이렇게 했고, 외부에서 손님은 누가 왔고, 교인들은 이렇게 은혜를 받았다고 얘기를 하면 그 임 집사는 누워서 '아, 그러느냐'고 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날도 주일예배를 마치고 교회소식을 전하려고 맹 집사가 임지사 집에 갔는데 임 집사가 그럽니다. '나도 교회에 가서 예배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말을 들은 맹 집사가 부담이 되어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시작합니다. '오 주님, 휠체어 한대만 주시면 제가 평생동안 임 집사를 밀고 다니면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맹 집사님이 그런 기도한다는 얘기를 듣고 목사님께서 예산을 세워서 휠체어를 하나 사 주었습니다. 맹 집사님도 기뻐했고 임 집사님도 기뻐했습니다. 맹 집사님이 휠체어를 끌고 임 집사를 모시고 예배당에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휠체어를 끌고 임 집사를 끌고 오는 맹 집사를 보고 박수를 쳤습니다. /할/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박수를 받을 때 느꼈던 흥분이 돌아갈 때 휠체어를 밀고 갈 때는 별로 그 기분이 없었습니다.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주일날, 주일 밤, 수요일 밤을 밀고 다니려고 하니까 너무 힘들고 더군다나 휠체어라는 것이 아스팔트 길 같으면 잘 가는데 시골 자갈밭 길을 가니까 비대한 몸이 왜 그렇게 무거운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휠체어를 밀고 가면서 '많이도 먹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수요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휠체어를 밀고 가는데 비가 쏟아졌습니다. 비 온다고 안 갈 수도 없고 비 오는 날 우산을 받쳐가면서 휠체어를 밀고 가는데 진흙탕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때 마음 속에 살인을 합니다. '중풍 들었으면 죽어야지 무엇 때문에 살면서 사람을 괴롭히나' 하면서 끌고 갑니다. 그런데 그 날도 비가 오는데 휠체어를 끌고 왔다고 교인들이 박수를 치면서 칭찬을 합니다. 

  그 다음 주일 아침 임 집사님을 또 휠체어에 태우고 예배당으로 가는데 예배당 입구에 조그마한 구멍 가게가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소주를 마시면서 맹 집사를 보면서 이렇게 칭찬합니다. '맹 집사는 천사야 어떻게 자식도 못하는 일을 저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칭찬합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예배당 앞에 도착한 맹 집사는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으로 안 집사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제에 내가 어떻게 예배당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마음으로 살인을 했는데...' 

  맹 집사는 감히 예배당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임 집사를 안으로 들여보내 놓고 자기는 밖에 서서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임 집사를 데리고 다녔지 주님에게 보이기 위해서 데리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저는 날마다 예배당 안으로는 들어갔으나 주님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은밀한 가운데 계신 주님 안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예배당 밖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때 주님의 십자가의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맹 집사야, 내가 너를 용서한다.' 맹 집사는 주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고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 내가 수 없는 세월을 여기에 와서 예배를 드렸지만 교회당만 왔다갔지 주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 나는 지금까지 예배를 드렸구나! 오, 나의 살아 계신 주님, 나에게 은혜를 내려주소서.' 그가 중심으로 회개하고 주안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선한 일도 선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주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인도에 가면 스님들의 일화들이 많은데 인도에 달마 스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선의 원조라고 말합니다. 달마 스님이 AD 520년경에 중국에 왔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9년 동안 도를 닦습니다. 선은 스님들이 깊은 명상을 하면서 무아지경으로 자기를 들어서 득도하는 경지를 선이라고 말합니다. 

  하루는 왕이 먼 나라에서 위대한 고승이 왔다고 하니까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스님, 안녕하십니까 제가 스님들을 많이 돌보고 사찰을 많이 세웠는데 내 적선의 공적이 어느 정도입니까?' 하면서 자기를 과시했습니다. 

  그때 달마 스님이 '공적 무' 하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왕의 얼굴빛이 바뀌면서 '제가 그렇게 사찰을 세우고 적선을 많이 했는데 공적 무라니요' 하고 화를 냈습니다. 그때 달마 스님이 마음이 적선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선을 쌓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놓고 달마 스님이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을 칩니다. 

  그가 다른 절로 도망을 쳐서 벽만 보고 도를 닦는데 하루는 장군이 찾아왔습니다. '오, 스님이시여, 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내 마음을 편케 하옵소서. 제가 장군으로서 수 없는 승리를 하고 남을 죽이면서 싸움에서 이겼는데 내 마음속에 싸우고 있는 이 문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서 내 마음이 괴롭사오니 내 마음을 편케 하소서'

  그런데 달마 스님이 전혀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폭설이 내리는 밤에 무릎을 꿇고 밤이 새도록 떠나지 않고 '오, 스님이시여, 내 마음을 편케 하소서' 하니까 달마 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마음을 괴롭히는 것을 네가 내려놓아라' 

  그 말을 듣고 '아, 내 마음의 문제를 내가 내려놓아야지 누구보고 내려놓으라고 하나' 하고는 삭발을 하고 스님이 되어서 위대한 해가 스님이 되었습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 건너가서 일생을 희생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아프리카에서 나의 생을 보낸 것을 희생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대한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어 내가 조금 헌신한 것뿐인데 이것을 어떻게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건강한 활동, 좋은 일만 하는 생각, 마음의 평화, 이후에 올 영광스러운 운명의 밝은 소망의 모든 그 날을 기대한 나의 삶을 어찌 내 희생이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전체가 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라 나는 아무것도 희생한 것이 없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전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동이 다양합니다. 미국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물질문명의 찬란한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살기 좋은 나라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미국의 문명의 계속적인 발전을 보면서 편리한 인간의 생활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에 가면 편리한 상품들을 우리들이 소유하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또 유럽에 가면 옛 조상들이 건축한 예술 작품을 보면서 변하지 않는 작품, 수천년 수백년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골동품을 보면서 그 작품에 대한 소중함과 가치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문명을 개발해 가는 미국의 사회와 옛 조상들이 만들어놓은 유럽의 작품을 보면서 또 하나의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인도에 가면 신기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감동입니다. '웬 사람이 이렇게 많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인구로 말하면 우리나라와 같습니다. 우리나라 땅덩이의 16배가 인도인데 인구가 우리나라의 16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인도가 인구가 많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길거리에 나와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존현장이 포장되고 화장되지 않은 채 원색적으로 공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건을 살 때도 포장해서 사고, 사람도 옷으로 포장해서 감추고, 얼굴도 하루에 몇 가지씩 발라서 화장을 합니다. 그런데 인도 사람들은 화장 문화가 아닙니다. 그대로 자기를 노출시킵니다. 오른손으로 먹고 왼손으로 닦고, 몸도 아래만 가리고 위는 다 노출시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인도 사람들은 미개인이 아닌가' 

  그런데 문화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손으로 먹어야 맛이 나고 왼손으로 닦아야만 위생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도 화장실에는 화장지가 없습니다. 물로 닦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치질이 없습니다. 자연이 훼손될 염려가 없습니다. 나무로 화장지 만들 필요가 없으니까요. 

  자유의 나라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모두가 남에 대해서 어떻게 살든 관심이 없습니다. 가난하게 살면서 자유하고 거지도 자유합니다. 불평이 없습니다. 얼굴이 유난히 밝습니다. 저들은 죽음에서 자유하는 백성입니다. 길거리에서 나서 살아도 슬퍼하지 않고 죽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장례식장에 가면 통곡하고 우는 사람이 많은데 인도는 화장터에서 시체가 타도 우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생은 다 때가 되면 가는 것이다'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 가면 문명을 보고 문화를 보고 자연을 봅니다. 그런데 인도에 가면 사람을 봅니다. 길거리에서 나고 길거리에서 자고 길거리에서 얻어먹는 사람들을 봅니다. 문명을 보는 미국, 문화를 보는 유럽, 사람을 보는 동양, 거기에서 무엇을 보느냐?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인도에 가면 호주머니에 돈을 가지고 가서 거지에게 적선을 합니다. 거지를 불쌍하게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거지가 우리보다 얼굴이 더 밝습니다. 주는 사람은 찡그리고 인상쓰고 받는 사람은 얼굴이 훤합니다. 거지인데도 얼굴이 밝습니다. 자기 존재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불교 하면 이판사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판은 수도승이 이판이고 사판은 주지승입니다. 주지승들은 밥그릇 때문에 싸웁니다. 수도승들은 안 싸웁니다. 수도승들은 암자에서 도를 닦기 때문에 전혀 밥그릇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싸움을 해도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서 한 면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카톨릭을 보면 수도하는 수도사가 있고 행정하고 일하는 주임 신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양면이 있어서 카톨릭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세계를 보면서 각각 양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로 나누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고 우리 존재가 한 몸에서 두 가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 살 때는 사판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어와서는 혼자 기도하면서, 예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받고 용서를 받고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지' 회개하고 변화를 체험하는 과정을 우리는 한 몸으로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값을 상품으로 치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값이 비쌉니다. 그런데 늙으면 값이 떨어집니다. 이것이 상품적 비교의식입니다. 

  한번은 IMF가 터진 이후에 부인들이 목욕탕에 앉아서 그르더랍니다. '당신 남편은 얼마짜리야?' '시시해 한 2천만원짜리 되나봐' '그래? 시시하네. 시시한 사람과 계속 살거야?'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야'

  세상이 얼마나 각박해졌는지 자기 남편을 돈으로 환산해서 가치를 평가하는 복부인들이 있습니다. 

  젊은 부부가 연애해서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부인보다 월급이 적다는 것 때문에 부부가 다툰 후 별거한지 7년이 되었습니다. 부인은 컴퓨터를 잘해서 월급을 많이 받고 남편은 부인보다 적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부인이 남편에게 '이것도 월급이라고 받아왔어?'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남편은 자존심이 심한 상처를 받게 되었고 그 다음부터 남편은 남편 노릇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뒤부터는 남편이 기가 죽어서 남자 구실을 못하니까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 왜 그라느냐?' '어머니, 안됩니다.' '우리 집은 전통적인 기독교 가문이기 때문에 이혼은 절대 안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혼도 못하고 둘이 별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혼하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인격적인 남편으로 본 것이 아니고 돈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상품적 관계입니다.


 


  ▶캘커타에 가면 테레사 수녀의 자비의 집이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거기에 와서 일생을 살아 세계의 성인이 되었는데 인도 사람들은 그를 18번째 신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는 키가 1m 50cm입니다. 세상 여자로서는 크다만 여자였습니다. 그가 인도에 가게 된 것은 19살 때 다르질릉이라는 곳에 수녀로서 중학교 선생으로 파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선생을 하다가 그가 29살 때 캘커타에 전근하게 됩니다. 캘커타는 거지와 불쌍한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입니다. 그가 캘커타에 전근해 와서 캘커타에서 선생을 하는데 거지와 불쌍한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이 캘커타입니다. 

  거기서 그가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에 가난한 사람 중에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 이런 모임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선생을 포기하고 수녀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러한 감동을 받은 것은 그가 캘커타에서 선생을 하면서 어느 날 옛날 있었던 다르질릉으로 갈 때 성령께서 감동하십니다. 

  '테레사야, 너는 캘커타에 가면 많은 거지들과 문둥병자들이 거리에서 나서 거리에서 살다가 거리에서 죽는단다. 너는 그곳에 가서 그들에게 살아서는 잠자리를 주고 죽어서는 무덤을 주어라' 

  이런 감동을 받고 그는 월급 받는 선생을 정리하고 캘커타에 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러면서 주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오늘밤 나는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할지 모르고 떠나나이다. 내일 아침 나는 어디에서 먹어야 될지 모르고 떠나나이다. 나는 이 한 벌 옷이 해어지면 무슨 옷을 입을지 모르고 떠나나이다. 주께서 떠나라 하시기에 나는 떠나오니 주여, 내 생애를 책임져 주시옵소서'

  그는 거기에서 자기 몸을 온전히 사랑의 사람으로 헌신하면서 그의 생애를 투자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위대한 여종으로 69살에 노벨상을 받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전 세계가 그를 돕는 손길을 통해서 큰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삶의 터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터와, 쉼터와, 배움터입니다. 삶의 터전, 삶의 기초가 되는 곳을 학교라고 말하고, 일터를 직장이라고 말하며, 쉼터를 가정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배움터가 있어야 되고, 일터가 있어야만 보람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쉼터입니다. 일생동안 인간이 쉰다는 것이 큰복인데 그 쉼터가 곧 우리의 가정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내가 살고 있는 가정집으로 들어갑니다.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가정을 통해서 쉼을 얻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가정을 갖는다는 것은 쉰다는 것인데 쉰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쉽니다. 만약에 미운 사람을 만나면 그 마음이 쉬지 못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또 하나의 진리가 있는데 거기에는 보화라는 신비가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가족이 보화지, 직장도, 돈도, 명예도 아니고 이 사람이 내 보화야' 이것을 느끼면 그 자리에 안식이 옵니다. 

  가정에 돌아갈 때마다 사랑함으로 쉼을 얻고 가족을 보면서 '천하보다 귀한 보배들이 여기 있구나!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은들 이 보다 귀할 수 있을까' 그것을 마음으로 느낄 때 그 자리에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세상에 나가서 출세 못해도 괜찮습니다. 돈을 조금 못 벌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가정에서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것을 보화처럼 여길 때 그것이 만족인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모든 공허를 채우는 만족한 상태를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도 이 세상 것으로는 만족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미국의 부자가 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열심히 일하던 종이 하루는 마당을 쓸다가 한숨을 쉽니다. 그래서 주인이 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한숨을 쉬는고' '예, 일만 불만 있으면 내가 잘 살 수 있는데 일만 불이 없어서 이 고생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럽니다.'

  그때 주인이 '일만 불만 주면 행복하겠나?' '예, 행복하죠' '그래, 내가 일만 불을 줄 테니 행복하게 살아라' 그러면서 주인이 돌아가자 종이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10만 불 달라고 할 것을...'

  인간이 어떤 사람도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이 세상 것으로는 안됩니다.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를 만나서 부모에게서 받은 영향은 지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인물, 성격, 체질, 습관 모든 면에서 자기가 알든 모르든 부모님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이 갈수록 자신도 모르게 부모를 닮아 가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그래서 만남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3,499 건 - 22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