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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화(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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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화(성경)


 


곽선희목사 설교 예화⑦

  ▶성경이 아니라 백화점 물품 구입 목록

  어느 목사님이 길을 가다가 그 근처에 사는 교인 댁 한 곳이 생각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 댁을 심방하고 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예고도 없이 목사님의 방문을 받으니 심방 받는 집에서는 반갑게 목사님을 맞이했습니다. 

  목사님은 자리에 앉자 말했습니다. “생각나는 구절이 있어서 한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성경책을 좀 가져오십시오” 그때에 그 교인은 생각했습니다. ‘이 기회에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잘 믿는지 목사님께 보여드려야지’ 그래서 아이를 불러 말했습니다. “얘, 너 안방에 가서 엄마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책을 가져다주겠니?” 목사님 들으시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꼬마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들고 나오는 책은 성경이 아니라 백화점 물품 구입 목록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여러분, 잘 믿는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까? 여러분 가정의 어린아이에게 물어보십시오. 아이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추어졌는가를 보십시오. 그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이야기하십시오.


 


  ▶장작을 몸소 패면 겹으로 더워진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옛날 장작불을 때는 난로 앞에 이런 글을 새겨 놓았었다고 합니다. ‘장작을 몸소 패면 겹으로 더워진다’. 이 얼마나 그럴듯한 말입니까? 잠자리에서 금방 일어나 불을 쬐려고 하면 불 속에 들어가도 춥습니다. 그러나 몸소 장작을 패면 패는 동안에 덥고, 불피워서 덥습니다. 이중으로 따뜻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18세기 영국의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이 세인트 폴 성당을 재건할 때의 일입니다. 여러 해가 걸리는 그 큰 공사를 추진해나가던 어느 날 크리스토퍼 렌은 평상복 차림으로 공사 현장에 나가보았습니다. 그는 채석장에서 돌을 다듬느라고 수고하는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은 묻는 사람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여섯 자 길이에 석 자 폭 되는 돌을 다듬고 있소” 그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 사람 역시 반갑지 않다는 듯이 건성으로 대답합니다. “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오. 벌써 몇 해째 이렇게 돌만 다듬고 있소.”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똑같은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사역에 한몫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격스러워서 즐거운 마음으로 이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사랑하십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이 낳은 유명한 종교가입니다. 그의 글을 읽고 감동 받은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그는 시장 아버지와 첩이었던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에서 자라기는 했으나 첩의 아들이라고 눈칫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본처의 자식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저주스러운 생이었겠습니까? 

  왜 나 같은 것을 낳았느냐고 부모를 원망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담 모퉁이에 우두커니 기대서서 역시 자기 생을 비관하고 있을 때에 북 치고 나팔을 불면서 지나가는 구세군 전도대를 만났습니다. 

  저들이 전도하면서 외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랑하십니다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그들 가까이로 다가서서 물었습니다. “기생 아들도 사랑하나요?” “아무렴요, 어떠한 죄인이라도 사랑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글 가운데에는 ‘나는 기생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이야기가 종종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확실한 의식, 그 감격이 가가와 도요히코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다만 부러울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여러 해 동안 평양감옥에 있을 때에 한 감방에서 주영하라고 하는 공산주의자와 같이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함께 지내도록 만들어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기철, 주영하--공교롭게도 같은 주씨입니다. 그래서인지 서로 툭 터놓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게됩니다. 그런데 주영하라는 사람은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철저한 공산주의자요,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상당한 고관으로 지내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주영하가 목사님에게 말합니다. “내가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에 형님을 만났더라면 예수쟁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주기철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던가봅니다. 이에 주기철 목사님도 “내가 예수 믿기 전에 당신을 만났더라면 나도 틀림없이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주영하가 끝으로 중요한 말을 합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이 땅에 평등을 이루고, 이 땅에 자유를 이루고, 모든 사람들이 잘살게 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이렇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아주 희색이 만면하여 하나님 앞에 간다면서 죽더군요. 그 모습을 저는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부러울 뿐입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생긴 병입니다!

  어느 소아과 병원 의사 선생님이 파리하게 병든 어린 아이를 진찰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내가 고칠 수 있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답답한 마음으로 “무슨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의사는 대답했습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생긴 병입니다.” 다시 어머니는 물었습니다. “나는 이 어린 아이를 열심히 사랑했는데요.” 의사 선생님은 말합니다. “어머니는 사랑했다고 하지만 이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흔적이 없습니다.”


 


  ▶커다란 금 십자가!

  어느 때 친구가 전에 없이 커다란 금 십자가를 가슴에 단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붙들고 한 마디 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어느 사람이 쓴 논문을 보았더니 가슴에 단 십자가가 크면 클수록 위선도가 높다 그러더구만” 그랬더니 그는 당장 떼서 주머니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마디 더했습니다. “주머니에 떼서 넣는 사람은 더 위선자라고 그러더구만.”


 


  ▶너 왜 우냐?

  어느 어머니가 딸 셋을 데리고 혼자 살았습니다. 거기에다 고아원에서 양녀 하나를 더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이 애를 동생으로 알고 너희들이 같이 사랑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아이가 낯선 곳에 와서 계속 웁니다. 

  언니들이 이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를 위해서 인형도 갖다 주고, 먹을 것도 갖다 주고, 옷도 갖다 입히고 하며 별 방법을 다 썼지만 이 어린 아이는 계속 웁니다. 사흘이나 우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제일 큰 언니 되는 아이가 너무 답답해서 “너 왜 우냐” 하면서 같이 붙들고 울었습니다. 한참 울다가 둘이 쓰러져 잤는데 그 다음부터는 안 울더랍니다. 문제는 나와 함께 울어 줄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인간이 권위의 한계를 느낄 때

  유명한 정신 의학자 칼 융(Carl G.Jung)은 “인간이 권위의 한계를 느낄 때 그에게는 적어도 세 가지의 심리적 현상이 일어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있어 벽에 부딪히거나 혹은 ‘이것이 한계다’하고, 지능의 한계, 능력의 한계, 그리고 인생이라는 길에서 이것이 한계다, 하고 느끼는 순간에 이러한 심리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첫째는 ‘불안함’입니다. 이 한계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한계 밖의 일에 대해서는 예측도 불허합니다. 그러므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이 앞에 어떤 일이 있을까 하며 그야말로 망망한 대해에 던져지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둘째는 ‘억압감정’입니다. 아주 확 눌려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실보다 더 무겁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는 아주 사라진 것같이 용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제자의 길과 그 개체

  그런고로 본훼퍼 같은 신학자는 <제자의 길과 그 개체>라고 하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세 가지 결단이 있어야 한다. 

  첫째, 단독 결정이 있어야 한다. 누구에게 물을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실존적인 문제이니까. 아내고 남편이고 자식이고, 아무와도 관계없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생명의 문제이니까 단독으로 결정해야 한다. 

  둘째, 단독으로 나서야 한다. 거추장스러운 것은 생각할 수가 없다. 이것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혼자 나서야 한다. 

  셋째, 세상과의 관련성을 청산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에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끊어버려라. 툭툭 잘라 버려라. 그러지 않고는 결코 사람의 바른 모습, 그리스도인의 바른 제자가 될 수 없다’


 


  ▶최고 계급자에게 순종하면 돼!

  대학 다니다가 군에 들어간 육군 신병이, 내가 이 3년 동안 군인생활을 하면서 일생 추억에 남을 만큼 좋은 군인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선배 되는 병장에게 물었습니다. “군인 생활을 좀 깨끗하게, 명예롭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좀 자세하게 가르쳐주십시오.” 

  선배 되는 병장은 껄껄 웃으면서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군인 생활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 오직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면 되느니라. 명령 떨어지는 대로만 시간, 시간 복종하면 돼. 네 앞에 할 것까지 미리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어.” “아, 간단하군요.” 

  가만있다가 이 머리 좋은 청년이 다시 질문합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이 사람은 이렇게 하라, 저 사람은 저렇게 하라 하고 여러 상관이 명령을 각자 다르게 내리면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 사람아, 별걸 다 걱정하는군. 그럴 때는 말이야, 최고 계급자에게 순종하면 돼.” 대단히 중요한 예화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왜 우리의 신앙 생활이 나약해지는 것입니까?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하나의 관계성입니다. 윌리암 바클레이는 이 문제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자를 이제는 아버지로, 그리고 항상 두려워하던 하나님을 이제는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공포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는 증오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이기적인 생각에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질투나 앙심에서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쓸모 없는 존재로 알았으나 예수 안에서 이제는 소중한 존재로, 실패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은 성공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허무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막중한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 생각이 바꾸어지는 것,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그 말씀만 믿고 살았습니다.

  선교사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위해 수고하다가 1896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글래스고 대학에서는 그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했는데, 그는 아프리카에서 사자에게 찢기어 병신이 된 팔을 그대로 안고 단상에 섰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높이 칭찬할 때, 그는 답사하기를 “저는 다시 아프리카로 가렵니다. 지금까지 저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주님의 그 말씀만 믿고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진리

  성 어거스틴은 진리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말했다. 

   첫째, 진리는 사실이다. 즉 셋에 셋을 곱하면 아홉이고, 다윗은 유대나라 왕이었다는 사실이 진리라는 것이다.

  둘째, 진리는 실재하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말이다.

  세째,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가 진리이다.

  네째, 그 실재를 깨달은 사실 그만큼이 진리다 라는 것이다.


 


  ▶인류에게 봉사하였다!

  여러분, 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설교를 좋아한다. 그분은 마지막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성대한 장례식을 원치 않습니다. 나의 장례식을 집전하는 분은 부디 너무 길게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조사에서는 나의 노벨 평화상에 관하여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학위, 명예 등에 관해서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정의를 위해 외쳤다고 만 해 주십시오. --- 오직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에게 봉사하였다고 만 말해 주십시오.”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인정할 만큼 정결하고 경건하게 일생을 살아 온 한 수도사가 있었다. 마귀들이 그를 시험하였다. 돈으로 시험하고, 여자로 시험하고, 직위로 시험하고 --- 별의별 방법을 다 써서 시험하였으나 수도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마귀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이럴 때에 어느 마귀가 자신 있게 나섰다. “내가 시험을 걸겠다”하고 수도사에게 다가갔다. “수도사님!” 하고 인사를 했다. “왜 그래?” 수도사가 의연한 태도를 보인다. 마귀는 점잖게 말한다. “수도사님의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대번에 수도사의 얼굴빛이 달라지더란다.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설화 한 도막을 소개하겠습니다. 요단강 계곡의 경사면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나름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공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의 재목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는 하나님 성전의 한 부분이 됨으로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높이, 높이 찬양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나무는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곧 범선이 되어 가지고 사람들의 왕래를 도울 뿐 아니라 온 세계로 두루 다니면서 소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세 번째는 나무는 “나는 여기 남고 싶다. 높이, 높이 자라나 하늘을 향해 가지를 쳐들고 있겠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해주겠다” 라고 소원을 밝혔습니다.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어했던 나무는 찍혀서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공을 받아 작은 구유가 되었습니다. 나귀가 핥아먹고 개가 핥아먹고 하는 먹이통이 되어 마구간 한 귀퉁이에 팽개쳐지는 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배가 되어 대양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서글프게도 찍히고 깎이어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되어, 꾀죄죄한 어부들이나 올라타고 비린내나는 생선 마리나 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일 없을 때에는 쓸모 없이 버려진 채 호숫가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그냥 있고 싶어한 소원과는 달리 어느 날인가 웬 사람들이 와서 결국은 찍혀버렸고, 그리고 다듬어져서 엉뚱하게도 저주받은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아, 나는 왜 하필이면 이렇듯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단 말인가?’ 하고 그는 탄식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만 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숱하게 있을 좋은 처소를 다 놔두고 하필이면 그 천덕꾸러기 말구유에 태어나시는 것이어서, 첫 번째 나무였던 그 말구유가 결국은 더 할 수없이 큰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세월이 더 흘러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오셔서는 그 보잘것없는 조각배에 올라앉으시고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어서, 두 번째 나무였던 그 조각배가 그렇듯 주님께 강단을 드리는 뜻밖의 영광을 입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3년쯤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세 번째 나무였던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못 박혀 달리심으로 길이길이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라는 내용의 설화입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던 사람이 아니라 깁던 사람이었습니다.

  윌리엄 커레이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사람으로 인도에 가서 선교 활동을 많이 한 분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선교사의 한 분입니다. 그는 언어에도 능통하여 성경을 34개 국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인은 물론 모든 영국인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높이 존경하여 그를 만나고자 했으며 또한 그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어느 날, 큰 만찬회가 열렸습니다. 윌리엄 커레이를 모시고 베푸는 환영회였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는 으레 못된 사람이 끼게 마련인가 봅니다. 그곳에도 윌리엄 커레이가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것에 배가 아파서 망신을 주려고 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분에게 참으로 무례한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당신은 젊었을 때에 구두를 만드는 직공 이었다면서요?” 과거를 들춥니다.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순간에 이렇듯 불쾌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물음에 윌리엄 커레이는 껄껄 웃으면서 평화로운 얼굴로 대답합니다. “자매 님께서는 잘못 알고 계십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 줄 모릅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던 사람이 아니라 깁던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신다가 헤진 구두를 깁는 직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를 부르심으로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선교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일순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다!

  내가 구라파의 어느 교회에 갔다가 참 좋은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우리는 예배당 정면에 십자가를 세워 놓았지만 내가 방문했던 교회의 예배당 정면에는 동그랗고 커다란 등을 만들어 놓았다. 내가 이상하게 여기고 물어 보았더니 그것은 하나님의 눈이라고 그랬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눈앞에 앉아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다. 이것을 항상 의식하면서 예배드리자 해서 그런 상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일리 있는 이야기 아닌가?


 


  ▶오른 빰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1920년에 김인서 장로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방에는 또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가 있었는데, 바로 그 유명한 윤병구 선생입니다. 이 사람은 비폭력과 무저항주의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김인서 장로를 만나게 되자, 대뜸 한마디합니다. “성경에 보면, 누구든지 네 오른 빰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 했는데, 그따위로 해 가지고 어떻게 독립운동을 하겠소? 폭력을 쓰는 자는 폭력으로, 무력을 쓰는 자는 무력으로 대항해야 될 게 아니오?” 

  그 때에 김인서 장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뺨을 치는 자에게 마주 대하여 치는 것은 혈기의 용맹이요, 소인의 용맹이요, 필부의 용기일 뿐입니다. 또, 한 사람밖에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른 빰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거룩한 용기요, 만인을 감복하게 하는 대용(大勇)이요, 영적 용기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감동해서 윤병구 선생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물러선 기독교인?

  콘스탄틴 대왕은 로마에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의 부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보니, 그의 신하인 문무 백관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비기독교 인이었기에 부하들에게 관직과 기독교 중 하나만 선택하도록 명령했다. 기독교를 따르려면 관직을 포기하고, 관직에 있으려면 기독교를 버리라는 것이다. 이 때에 상당한 기독교인들이 왕께는 죄송했지만 관직보다는 예수님을 택했다. 물러서는 그들의 표정은 더없이 밝고 편안했지만 왕은 대단히 괴로웠다.

  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더니 그 중에도 역시 기독교인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등지고 관직을 택했던 것이다. 왕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남아 있는 변절자들을 다 내어 보내고 오히려 스스로 물러선 기독교인들을 다시 불러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결국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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