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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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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때 편찬된 한국 역사의 분류사인 [증보문헌비고]에 왜국이 울릉도의섬들을 자기네의 땅이라고 두번 다시 말하지 않게 된것은 오로지 안용복의공이라고 했다. 장보고가 삼국시대때 바다의 영웅이라면 안용복은 조선시대 바다의 영웅이다.동래에서 편모슬하에서 자라던 용복에게 해양 진출의 모험심과 일본에대한 증오심을 심어준 것은 그의 사춘기에 있었던 유유라는 이웃 마을 아가씨와의 로맨스때문이었다.가난에 쪼들린 유류는 외삼촌을 따라 다대포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중병 때문에 심청이처럼 대마도로 팔려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의협심이 대단했던 안용복은 단신 왜지에 들어가 유류를 탈환할 셈으로 무술을익히는 한편 부산의 왜관 인근을 맴돌며 일본말을 익혔다. 그리고 대마도에 건너갈 기회를 잡고자 수영의 수군기지에 노젓는 노꾼 곧 수병으로 들어간다.숙종 19년(1693) 여름의 일이다. 안용복이 단 한 척의 배로 해양경비의임무를 띠고 울릉도 근해에 갔다가 불법어로를 하던 6척의 일본 어선단에게 납치돼 갔다. 지금의 일본땅 시마네껜(도근현)인 백기주의 감사앞에 대령시키자 안용복은 울릉도는 우리 땅에서 하루 걸이요 일본 땅에서 닷새걸이인데 어찌 너희 땅이냐고 대어들었다.과오를 자인하고는 유화책을 써 돌려 보내고자 은덩이를 주며 회유했으나 막무가내자 앞으로 그같은 분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계를 써주었다.외교상 빌미를 잡힐 것을 두려워한 일본은 도중에 그 서계를 빼앗아 파기해버린 것이다. 울분을 참지 못하던 안용복은 그 3년후에 송광사 소속상선을 꾀어 다시 울릉도 근해에 출동해 어로중인 일본 어부들을 붙잡아 국경침범을 추궁했다.이에 우리 땅 송도로 가는 길일뿐 월경이 아니라 하자 송도로 끌고 가보니 바로 당시 우산도로 불리던 지금의 독도였다. 그곳에 움막을 짓고 밥을지어먹고 있는 것을 본 안용복이 우산도는 우리 땅이다고 일갈 살림을 박살내고 일본 어부들을 돛대에 묶고서 다시 일본 땅에 들어 갔다. 그리고울릉 우산도 해역에 침범하지 않겠다는 백기주수의 약속을 받고 돌아온 것이다.독도 영토분쟁이 역사상 어느때보다 닳아오르고 있다. 이 시점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독도를 둔 정부대책이 일개 서민인 안용복만도 못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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