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장애주부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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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 괜찮아요"의식이 들자마자 이씨는 물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머리를 모로 돌렸다. 산고 때문일까,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불길한 예감 때문일까. 그의 이마에는 진땀으로 흥건했다.남편의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단 2~3초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짧은 순간은 32년간의 길고 어두웠던 장애의 삶이 한 점으로 일거에 압축된 긴장의 정점이었다.터널의 끝일까, 벼랑일까. 그의 예감은 두 가지 가능성만 허락했다. 압축됐던 무수한 기억들이 풀리며 머리를 스쳤다.2남1녀 중 막내인 이씨는 태어날 때부터 가벼운 뇌성마비를 앓았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독실한 불교신자인 친정어머니(61)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어머니는 그러나 이씨를 동사무소에 장애인 등록을 하지 않았다.왜 그랬을까. `가벼운 장애여서 필요성을 못느낀 것 같기도 하고, 딸의 장애를 숨기고 싶어했던 것 같기도 하고.'. 때문에 그는 자라면서 한번도 장애인관련단체와 접촉을 갖지 않았다. 다른 장애인과의 만남도 우연 이외에는 거의없었다. `그런 것을 보면 어머니는 숨기고 싶어했던 것 같은데.'그 자신도 철들면서 장애를 꼭꼭 숨기려 했다. 그러나 숨길 수 없었다.웃거나 긴장할 때면 얼굴근육이 약간 뒤틀리고 경련이 따랐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무섭다"며 그를 따돌렸다. `병신'이라는 말도 자주 들어야 했다. 그는커가면서 말이 없어졌다. `누구는 나를 과묵하다고 했지. 말은 물론 사람과의접촉도 가급적 피했으니까'.84년 대학에 들어가면서 스스로 둘러친 이런 고립에서 벗어나려 했다.그래 주저와 시도를 반복하던 끝에 입학 3년 만인 86년에야 문학동아리 `한놀'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같은 84학번인 동아라 회장 신씨를 처음 만났다.친구들은 신씨를 책임감이 강하고 성격이 강직하다고 했다. 운명이었을까. 그가 좋았다. 신씨도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다.신씨는 그의 밀폐된 방에서 세계로 열린 작지만 소중한 창이었다. 이 창을 통해 비로소 바깥 세상을 고유의 빛깔과 모습으로 볼 수 있었다. 그제야열린 가능성을 향해 떳떳이 걷기 시작했다. 대학졸업 뒤 사회생활을 준비하기위해 컴퓨터를 배웠다. 92년엔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태어나 사실상처음으로 성취감을 느꼈다. 장애인 특례고용이 아닌 일반경쟁에서 합격한 것이어서 기쁨은 더욱 컸다. 대학 입학때도 그렇긴했지만 그때는 여전히 `정상인'과의 첫 사회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그렇다고 장애의 그림자를 말끔히 벗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장애인이기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행복에는 언제나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이라고 수없이 자신에게 다짐했다. 다짐할 때마다 눈에 고이는 물을 피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그가 청혼해온 날, 그날은 행복과 절망의 극단에 두 다리를 걸치고 있는기분이었다. `더 이상을 원하다가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지'라는 두려움도교차했다. 그래서 "좋은 친구로 남아 있자"고 했다. 돌아서면서 `더 이상의 행복은 죄'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이며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았다. 결국 그를 만난 지 10년 만인 95년 10월 그와 결혼했다. 그의 끈덕진 설득 결과였다.결혼하면서 또 다시 마음을 다져먹었다. 더 이상의 행복은 바라지도, 설사주어지더라도 받지않겠다고. `그것은 어렵게 찾은 행복의 끝이 될 수 있다'고다짐했다. 그러나 남편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아기를 갖자는 것이었다. `혹시 나와 같은 장애아를 낳는다면.'이라는 이유로 거듭 반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다짐마저 봄눈처럼 녹아버렸다. 아기를 낳기로 했다. 다름 아닌 그 자신의 결정이었다. `행복의 끝일 수 있다'던다짐은 아기에 대한 열망에 압도돼 실종됐다.한 아내의 본능적인 바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기를 통해 굴절된 자신의 삶을 곧게 펴내려는 욕심이었을까. 엄청난 무게로 짓누르던 출산의 두려움은 뒷전에 밀려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 `건강하다.' 남편의 말이 귓가에 들렸다. 기뻤다. 남편도 눈시울을 훔치고 있었다. 그의 마음 속에 또아리를 틀고지난 32년간 그의 삶을 가위 눌러온 장애의 강박이 마침내 불살라지는 것같았다. 그는 막 터널을 빠져나와 빛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나른했다. 잠이들었다.그가 곤한 잠에서 깼을 때 아기는 심하게 울고있었다. 어딘가 숨었던 두려움이 그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아기는 수시로 설사를 했다. 열도 있었고 아픔을 호소하는듯 자주 칭얼댔다. 그는 순식간에 `뇌성마비가 유전된 탓'이라고 믿어버렸다. 사흘 뒤 이 우울증과 두려움 속에서 퇴원했다. `뇌성마비는유전되지 않는다'고 가족들은 간곡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어떤 설명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이에게 암울한 삶을 물려주느니 차리리 함께 죽고 싶다"고울먹일 뿐이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장애인으로서 겪은 고통의 기억과이 고통을 안고 살아갈 아기의 모습, 그리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빼꼭이들이차있는 듯했다.결국 16일 새벽, 아기가 태어난 지 6일째 되던 날 그는 달리 선택의 도리가 없다고 예감했던 그 벼랑에 섰다. 장애로 인한 좌절의 끝이기를 기대했던 아기를 남겨둔 채 아파트 14층에서 몸을 던졌다. 그가 숨지고 며칠 뒤 딸아이는 설사를 멈추고 건강을 되찾았다. 남편은 엄마가 갖지 못했던 행복과삶을 오래도록 살아달라는 뜻의 이름을 딸에게 주었다.(한겨레신문9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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