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화(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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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화(영광)
▶어느 여고생이 반에서 늘 1등만 했습니다. 그 2등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1등을 놓치지 않는 한 그 학생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영광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밤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매일같이 긴장을 하고 살아야 하고, 잠을 잘 때도 긴장을 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그러다가 이 학생이 마침내 신경 쇠약에 결렸습니다. 그리고 정신 질환에 시달리다가 그만 자살해서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여학생이 1등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그 영광스러움과 화려함을 몰랐더라면 훨씬 더 편안하게 자랐을 것이고 정신도 건강하게 자랐을 것인데, 어린 나이에 1등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광과 화려함을 너무 일찍 터득하는 바람에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가수들이 대중 앞에 나와서 노래를 부를 때 얼마나 화려합니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을 때는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가수들의 이면 생활을 보면 누구보다도 고독하고 공허하고 피를 말리는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화려한 인기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느라고 애를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예인들이 자꾸만 대마초를 피우고 마약을 복용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가수는 그런 말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인기를 계속 유지만 시켜 준다면 마귀에게 내 영혼이라도 팔겠다.' 이 영광,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여러분, 그 치솟던 인기와 영광과 박수가 어느 날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상상을 해보십시오. 얼마나 초라해지고 끔찍한 일입니까? 그것은 아주 무서운 형벌입니다. 생각만 해도 두려운 고통입니다. 그래서 별 네 개를 단 장군이 옷을 벗고 전역을 하는 날은 4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기분이라고 하고, 별 세 개를 단 장군은 3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기분이라고 합니다.
▶결혼을 하면 느끼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만남의 신비로움'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서 함께 부부가 되어 산다는 것은 그곳에 신비로움과 굉장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의 만남 속에는 신비함까지 들어 있습니다.
▶요즘 간 큰 남자 시리즈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침에 밥해달라고 하는 남자는 간 큰 남자라고 합니다. 월급 다 어디다 썼느냐고 묻는 남자도 간 큰 남자라고 합니다. 아내가 밖에 나갔다가 늦게 들어왔을 때 어디 갔다왔느냐고 묻는 남자도 간이 큰 남자라고 합니다. 요즘 남자들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물론 풍자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남자들이 너무나 왜소해졌습니다.
도시에서 공부하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아들은 편지에 결혼 상대자를 자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아버지가 곧 답장을 씁니다. 그때 아내가 방으로 들어와서 편지 쓰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썼습니다. ‘내 아들아 기특하구나. 네가 벌써 커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니, 결혼은 달콤하고 기쁘고 행복한 것이란다. 부디 좋은 인생이 되어라.’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재빨리 편지 끝에 ‘첨언’이라고 써 놓고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방금 네 어머니가 밖에 나갔단다. 이 바보 멍텅구리야, 결혼은 무덤이야.’ 그러고는 풀로 편지를 봉해 버렸습니다. 아내가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관계입니까? 이것은 비극이고 희극입니다.
▶루터의 전기를 보면 루터가 종교 개혁 당시에 몇 번씩이나 좌절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좌절의 자리에게 일어나게 한 것은 그의 아내 ‘카테리나 폰 보라’였습니다. 그때마다 루터에게 굉장한 용기를 주었습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 성공은 그래서 아내 덕분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곤충의 세계를 보면 곤충들은 일생 동안 몇 번씩의 변화를 겪습니다. 처음에는 애벌레가 변화해서 곤충이 되고, 이 곤충이 다시 몇 번씩 껍질을 벗다가 나중에는 나방이가 되고, 나비가 되고, 매미가 되어서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다른 차원의 곤충으로 변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비스런 삶을 살아갑니다. 곤충들도 이렇게 변화하고 몇 번씩 거듭나는 동안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곤충뿐이 아니고 사람도 일생 동안 몇 번씩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도 그런 변화를 통해서 그 인생의 모습을 바꾸어 가며 한 단계씩 발전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변화, 이것이 바로 사람을 사람 되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원숙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가출해서 방탕하다가 마침내 돼지우리 안에 들어 앉아서 잠자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어 가며 눈물로 회개하는 동안 부서지고 깨어졌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본분을 망각하고 술과 호색과 연락을 즐기다가 마침내 눈이 빠진 채 맷돌을 돌리며 수모를 당하고 눈물로 회개하는 동안 깨집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깨지고 부서지는 아픔을 경험하면서 새 인생을 맞이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깨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깨져야 할 때 깨지지 않으면 자기 본위의 자아가 그대로 남아서 그 인생을 괴롭힙니다. 깨지지 않으니까 겉에서 보면 영락없는 그리스도인같이 보이는데 그 속을 보면 여전히 사울 그대로 남아 있어 가지고 고집과 혈기와 편견을 극복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고, 믿음을 말하고, 천국을 말하고 있지만 가슴은 여전히 변화되지 못하고 사울 그대로 남아 있어 열기가 없고 싸늘하게 식어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가슴속에서 무슨 힘이 나오고, 용기가 나오고, 고백다운 신앙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면 ‘예, 사대 성인 중 한 분이시지요’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거리낌 없이 하고 그럽니다.
깨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굳은 마음에서 생수가 나오고, 체면도 극복하게 되고, 자존심도 부서지게 되고 그래서 비로소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양조장 근처를 지나다가 물씬 풍기는 막걸리 냄새를 맡고는 ‘참 기가 막히는군’ 하더랍니다. 사람이 변해서 장로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옛날 마시던 그 술 냄새를 맡자마자 속에 가라앉아 있던 옛날의 내가 순간적으로 꿈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술 냄새가 역겨운 것이 아니고 기가 막히게도 코를 찡하게 움직이게 했던 것입니다. 깨지되 완전히 깨지지 않으면 그 근성이 이렇게 속에서 살아 있다가 되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한 학생이 연필 깎는 칼로 옆의 학생을 찔렀습니다. 그러자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책가방을 모조리 조사해서 칼을 모두 회수했습니다. 앞으로는 어느 누구도 칼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것이 소위 우리 식 교육입니다.
칼을 뺏으면 뭘 합니까?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은 칼말고도 뾰족한 컴퍼스도 있고 연필도 있고 볼펜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뿐입니까? 주먹도 있고 발도 있습니다. 문제는 칼이 아니고, 인간이 깨지고 마음이 깨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깨지고 부서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사울이 비로소 바울이 된 것은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남으로 부서지고 깨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늘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지고 있는 짐은 너무 무거워’ 그러면서 늘 지쳐서 힘겨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다가 지쳐서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 설원 풍경이 나타났습니다. 소복하게 쏟아진 눈길 위로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한참 있다 보니까 한 사람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자세히 보니, 한 사람이 몹시 지쳐 있는데 또 한 사람이 그를 업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이 생각했습니다. ‘누군 지는 모르지만 저 사람도 나처럼 지쳐 있구나’ 그런데 유심히 보니까 업고 가는 사람은 주님이었고, 등에 업힌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고맙게도 주님께서 꿈속에 나타나셔서 그를 위로해 주셨던 것입니다.
알고 보면 주님은 우리를 지금 이렇게 위로하시고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오라, 다 내게로 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도와주시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주님은 영혼의 참 안식처이고 쉼터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신앙 인들의 고향이고 안식처입니다.
가끔 어떤 중년 신사 한 사람이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고 갑니다. 신분도 밝히지 않고 낮에 와서 한참 기도를 하고 갑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모습이 아주 특이합니다. 와서는 혼자 앉아서 큰 소리로 실컷 울고 갑니다. 참 푸짐하게 울면서 얼마 동안 기도하고는 돌아갑니다.
언젠가 그 사람이 그렇게 기도하고 나오다가 목사님과 딱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민망해 하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렇게 한번 풀고 가야 당분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인고 하니 교회가 고향이라는 말입니다. 고향이기에 와서 그렇게 실컷 울고 가면 상당 기간 동안 위로가 되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권사 님은 집을 짓는데 방향과는 상관도 없이 교회를 향해서 문을 내도록 지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소설 가운데 ‘이끼루’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산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습니다. 병원에서 앞으로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후 이 사람은 삶에 회의가 생겼습니다. 일하는 것도, 먹는 일도, 술 마시는 일도, 누구를 만나는 일도 모두 재미가 없습니다. 만사가 귀찮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무작정 길을 걷다가 길가에서 꽃을 파는 소년과 앉아서 여러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하는 중에 이 사람이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앞으로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단다.’ 그러니까 어린 소년이 선뜻 대답을 합니다. ‘아저씨 아직 6개월은 있잖아요.’ 그 말에 이 사람이 정신이 들었습니다.
‘6개월밖에 없는 것이 아니고, 6개월이나 남아 있다.’ 이 짤막한 말 한마디는 그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그가 지금까지 지고 있던 그 무겁던 짐들이 순간적으로 가볍게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마늘도둑이 한 사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어떤 집에 들어가서 마늘을 훔치다가 그만 그 집 주인에게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는 관가로 끌려왔습니다.
고을 원님은 안 그래도 그 즈음에 집집마다 마늘도둑이 들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마늘도둑질에 대한 뿌리를 완전히 뽑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서 아주 엄한 벌을 내리리라 작정했습니다. 원님은 마늘도둑에게 세 가지 벌을 제시하면서 그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일렀습니다.
첫 번째 벌은 마늘을 훔쳤으니까, 그 원대로 마늘 100개를 날 것으로 먹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벌은 곤장을 50대 맞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벌은 벌금으로 금전 한 냥을 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늘도둑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곤장 50대를 맞으려고 하니까 너무 아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벌금으로 금전 한 냥을 내려고 하니까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 당시에는 금전 한 냥이 매우 많은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늘도둑은 벌로 마늘 100개를 먹겠다고 아뢰었습니다.
처음 그가 마늘을 한 두개 먹을 때는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10개쯤 먹으니까 입안도 얼얼하고 속도 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이왕 먹기 시작한 것이니까 끝까지 먹어야되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는 마늘을 20개나 먹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습니다. 눈알도 빠져나오는 듯 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먹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는 원님에게 마늘을 먹는 대신에 곤장을 맞게 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의 사정이 받아들여져서, 그는 곤장을 맞기 시작했습니다. 10대를 맞았더니 엉덩이가 터지고 살갗에서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5대를 맞았더니 정신이 까물까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0대를 맞았을 때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서 까무러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한참 뒤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더 이상 맞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원님에게 곤장을 맞는 대신에 벌금을 내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애꿎게 마늘을 20개나 먹고, 곤장을 20대나 맞고, 그리고 나서 벌금으로 금전 한 냥을 내고 난 후에 간신히 풀려나올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선택을 바르게 했어야 했습니다. 괜히 잘못 선택해서 온갖 곤욕을 다 치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일에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바에 대한 결과는 우리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시골에 사시는 어떤 할아버지가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를 꼭 한 번 구경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차를 타고서 청와대 앞까지 왔습니다. 청와대 문은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건장하게 생긴 사람이 제복을 입고서 떡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그에게 다가가서 자기의 주머니에 있는 쌈짓돈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만하면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때 문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안됩니다. 이곳은 돈을 주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아무리 제게 많은 돈을 주어도 이 문을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초청을 받은 사람은 그 누구라도 단 한 푼을 내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을 받고서 그 부르심에 응한 사람은 자기의 공로가 전혀 없어도, 내세울 만한 인간적인 의가 없어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천국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10: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백두산 정상의 천지에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빗방울이 조금만 서쪽으로 기울어지면 압록강을 따라서 서해로 흘러가게 됩니다. 반대로 그 빗방울이 조금만 동쪽으로 기울어지면 두만강을 따라서 동해로 흘러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똑같이 천지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수 만리나 서로 떨어지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 간에 선택한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서로 간에 가는 길이 달랐기 때문에 그 결과도 엄청나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택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중세 유럽에 있던 어떤 수도원의 기도실 벽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너의 삶이 가난하더라도 너는 나를 원망하지 말아라’ 그 글의 제목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너는 나를 주라고 부르면서도, 나를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고/너는 나를 진리라고 말하면서도, 내게 배우지 않았고/너는 나를 빛이라고 하면서도, 나를 바라보지 않았고/너는 나를 길이라고 하면서도, 나를 따라오지 않았고/너는 나를 능력이라고 하면서도, 나를 의지하지 않았고/너는 나를 응답이라고 하면서도, 내게 기도하지 않았느니라/그러니 너의 삶이 가난하더라도 너는 나를 원망하지 말아라."
우리에게 기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글입니다.
▶영국이 낳은 명장 가운데 ‘찰스 조지 고든’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그가 아프리카 수단에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입니다. 그는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그 자신이 직접 군인들을 이끌고 싸움터로 갔습니다.
그런데 고든 장군이 기거하는 막아 앞에는 매일 아침 한 시간씩 하얀 손수건 한 장이 걸려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그 손수건이 걸려 있을 때에는 특별한 용무가 아닌 한, 그의 막사 안으로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병사들은 그 손수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든 장군은 매일 아침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에는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시간에 그의 막사 앞에 하얀 손수건을 걸어놓았던 것입니다.
영국 정부는 그의 혁혁한 전공을 치하하기 위해서, 기념비를 제작하며 동상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대로 만들지를 못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그 대신 그에게 작위를 주고 포상 금을 지급하겠다고 제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고든 장군은 그것마저 사양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그를 겨우 설득해서, 그의 업적을 새겨 넣은 자그마한 금메달 하나만 그에게 수여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유족들은 그의 유품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보여야 할 금메달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 금메달은 그가 애지중지하던 것이기에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그 금메달의 행방을 찾아보았습니다. 나중에 가슴 뭉클한 사연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해인가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금메달을 녹여서 팔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돈으로 양식을 사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던 것입니다. 그의 일기장에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적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받은 선물 가운데 가장 아끼던 것을 오늘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바쳤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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