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씨시의 창설자 프란치스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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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는 부유한 포목상인인 베드로 벨라도네의 아들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아씨시에서 출생하고, 그의 부친이 출타 중인 틈을이용하여 어머니가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그러나 부친이 프랑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프란치스꼬라고 개명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다가 기사가 될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1202년 투옥되었다.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옛생활로 돌아가는 듯 보이다가 중병을 앓았으며, 다시 회복한 뒤로는 딴 사람이 되었다. 그는 스뽈레또에서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고, "내 교회를 고치라"는말씀을 들으면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였다.그는 산 다미아노에서 들은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아버지의 가게에서 물건을 내다팔아 성당을 수리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부친과 결별하고 허름한 농부의 옷을 입고, "가난 부인"을 모시는 통회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친구들에 모여들었고,3년후인 1210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meh의 가난을 살려는 그와 11명의 동료들을 인정하였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곧 프란치스꼬회의 시작이다. 그들의 본부는 아씨시의 교외산따 마리아 데글리 안젤리에 있는 뽀르찌웅꼴라 성당이었고,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부터 이 수도회는 역사에 그유례가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하였다. 이탈리아 내외를 두루다니면서 형제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을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거부하였고, 교계의 진출을 사양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사제가 아니었고 다만 부제였다고 한다. 1212년에 그는 성녀 글라라와 함께"가난한 부인회"를 창설하였고, 모슬렘인들에게복음을 전하려고 그들을 찾아간 적이 있을 정도로 선교에대한 열망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1219년에 십자군을따라 에집트로 갔다가 술탄 말레크 왕 카멜의 포로가 된 사실이 있다. 그는 결국 사라센 선교가 실패로 끝난 줄 알고,성지를 방문한 뒤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1217년부터 이 수도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하여 조직이 강화 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관구가 형성되고, 잉글랜드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가 파견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성공을거두었다. 프란치스꼬는 장상직을 스스로 사임한다. 이것 또한역사에 길이 남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부재중에, 몇명 회원들이 수도회의 규칙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알고,우고리노 추기경의 도움으로 규칙을 확정짓고, 승인 받았다.1224년, 그가 라 베르나 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입었으니,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이다. 오상은 그의 일생동안 계속되었고, 육체적인고통을 안겨 주었으며, 2년 후에는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지금도 그분에 대한 공경은 세계 도처에서 성황을 이루고 있고, 그분이 세운 재솟 프란치스꼬회원도 다른 재속회원에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어, 그분의 성덕을 본받고 성덕을 살려고 노력한다. 또 그는 이탈리아어로 "태양의노래"를 지었다. 1226년 10월 3일에 운명하시고, 1228년에시성되셨다. 아씨시의 가난뱅이 프란치스꼬만큼 교회 안에서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를제 2 의 그리스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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