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화(앵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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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화(앵무새)
▶앵무새를 훈련시켜서 파는 상점이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축복받으세요.>
이렇게 말을 가르쳐 비싼 가격에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사 댁은 부부 싸움이 심하여 앵무새가 밤낮 그 소리를 듣고 살았습니다.
<이 새끼야> <이 년아>
목사님이 심방을 갔더니 앵무새가 말했습니다. <이 새끼야> <이 년아>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김 집사! 이 앵무새 없애라. 손님 올 때마다 이럴 터이니 얼마나 창피하니?>
김 집사가 말했습니다. <정 들었어요> 이렇게 팔라고 하고 안 판다고 하다가 김 집사가 말했습니다.
<좋은 수가 있어요. 목사님 앵무새를 일주일만 빌려 주세요> 그래서 목사님이 앵무새를 빌려 주었습니다.
일주일 후에 목사님이 앵무새를 찾으러 갔더니 목사님 앵무새가 목사님을 보자 말했습니다. <이 새끼야> <이 년아>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본받고, 본받아야 할 것을 본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나라 속담에 <흉보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흉보는 것 같은 데 어느 덧 그 것을 배워서 그대로 합니다. 구박받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흉보면서 자기가 시어머니가 되면 며느리를 구박합니다.
군대에서도 그렇습니다. 고참이 졸병을 괴롭힙니다. 졸병은 고참을 못 된 놈이라고 흉보면서 자기가 고참이 되면 졸병을 괴롭힙니다.
신앙생활이란 본받을 것을 본받고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본받지 않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본받아야 할 것을 본받지 않고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본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네가 예수를 본받은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습니다.
한 유대인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같이 산책을 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나무를 가르치면서 말했습니다.
<저 나무에 올라가라> 아들이 무서워서 올라가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괜찮다. 내가 있다>
그리고 아들에게 나무위로 올라가라고 재촉하니까 아들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밑가지에 걸터앉았습니다. 아버지는 더 높이 올라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들은 점점 무서워진다며 거절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자기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이제 뛰어 내려라>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무서워요><괜찮아! 아빠가 받아 줄께>
이 말을 믿고 아들은 높은 나무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받아주기는 커녕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습니다.
땅바닥에 떨어져 아픔을 이기지 못 하는 아들이 항의하며 말했습니다. <받아준다고 하면서 왜 팔짱만 끼고 있어요.>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이제 알았지?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말만하는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해!> 체험적인 경험을 심어주는 아버지의 교육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10년간 선교사로 일했던 로엘 케네디(Lowell Kennedy)의 경험담입니다.
어느 날 원주민 두 명과 함께 어떤 마을로 전도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돌무더기가 보이자 그들은 각각 무거운 돌을 한 개씩 들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에게도 무거운 돌을 하나 들라고 하였습니다.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왜 돌을 들어야 하나?> 그들은 대답하였습니다.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에 그냥 갔습니다. 곧 강에 도착하였습니다. 물이 불어 넘치고 있었습니다. 동행하던 두 친구는 무거운 돌을 메고 강을 건넜습니다.
그 돌의 무게 때문에 떠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건너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건넌 후 소리를 질렀습니다.
<선교사님! 그냥은 건널 수 없습니다. 무거운 돌은 메고 건너야 합니다. 그래야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그 때서야 선교사는 무거운 돌을 메고 온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자기가 질 수 있는 정도의 큰 돌을 메고 와서 건넜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물로 들어오니 물 때문에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그 돌 때문에 자기가 떠내려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 무거울 것 같지만 사실을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시험의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무거워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십자가 때문에 고난의 강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새벽기도의 십자가가 무거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새벽기도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능력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십일조의 십자가가 무거운 것 같지만 사실은 십일조의 십자가 때문에 축복의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아주 고약한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찌나 구두쇠였는지 옆집에서 굶어 죽어 가는 사람이 있어도 못 본 체 하는 지독한 구두쇠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구두쇠 영감은 이상한 돌연변이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이제 내가 살날도 얼만 남지 않았다. 더 이상 구두쇠 소리를 들었다가는 죽어서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 우선 동네 사람들에게라도 인심을 얻어야 하나님이 나를 천국으로 부르실 것이다>
그래서 그 부자는 그 부자의 높은 담 위에 이렇게 글을 써 붙였습니다.
<모두 오세요.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병든 사람에게는 약값을 나누어 드립니다. 언제든지 누구든지 환영합니다.>
대문밖에 나온 부자는 이 글을 한번 일어 보더니 서쪽에서 해가 떠올랐다며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허허허. 나도 이제 착한 사람으로 소문나겠는 걸!>
그로부터 두 시간 뒤였습니다. 이 소식을 삽시간에 퍼져서 배고픈 사람들, 병든 사람들,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부잣집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일어났습니다. 부잣집으로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밝고 명랑하고 기대감에 쌓여 있는 데 돌아오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찡그리고 있었고 어두워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이상하여 가보았습니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조금 더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문 안쪽으로 10 마리도 넘는 사나운 사냥개들이 밖을 향해 으르렁 거리며 한 사람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 하도록 지키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고약한 구두쇠 영감의 계획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문은 나게 하여야 하겠고 물질을 나누어 주기는 아깝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이런 방법이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목사님에게 찾아왔습니다. 와서는 ‘나는 왜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하고 탄식을 합니다.
‘배운 것이 있나, 유산이 있나, 재질이 있나, 가정적인 배경이 있나, 그렇다고 잘난 것도 아니고 나는 뭡니까?’하고 하소연을 합니다.
아마 직장을 얻으려고 단 보다가 걸리는 것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오늘날같이 능력 위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자격증의 시대에서 뭔가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리를 확보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아마 이 청년도 그래서 고민을 하고 낙심을 하다가 찾아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습니다. 21살이라고 합니다. 이 청년에게 진지하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너에게는 젊음이 있지 않니? 젊음이 가장 큰 자본이야, 젊음은 어느 유산보다도 훨씬 더 좋은 가능성이야, 네 손을 보아라, 그 튼튼한 손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엇이 더 필요하니’ 그리고 목사님이 돌려보냈습니다.
위로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좀 더 아픔이 계속될 것입니다. 사람이면 모두 그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자기의 위치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완벽하게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해서 그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과정을 보게 되면 대개 완벽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대개 약점이 있는 사람, 좀 부족한 점이 있는 사람을 골라서 사용하시고, 일을 맡기십니다.
자격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 완벽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사람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큰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만 의식이고, 교만 의식입니다. 그런 사람은 성실성이 없습니다. ‘나는 부족하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훨씬 더 성실하고, 인간적이고, 삶의 모습이 더 진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판단도 사람의 판단과 다릅니다. 사람은 보이는, 어떤 나타나 있는 현상을 보고 판단을 합니다. 사람을 선택할 때도 좋은 조건을 지닌 사람을 고르고, 되도록 보이는 조건을 우선합니다. 배우자를 고를 때도 어떤 사람이냐를 보기 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를 먼저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두 일류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이 같은 생각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판단이 다르고 보시는 관점이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을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그분으로부터 관심을 얻게 되고 은총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믿음이 깊은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는 종종 궁궐을 빠져나가서 서민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빅토리아 여왕이 한 과부를 만났습니다. 과부도 믿음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면서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빅토리아 여왕은 과부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의 생애에서 당신을 찾아와 주신 손님 가운데 가장 고귀한 분은 누구였습니까?"
빅토리아 여왕은 과부의 입에서 "그야 물론 예수님이시지요!"라는 대답이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과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야 물론 여왕님이시지요! 제 삶에 있어서 여왕님이 저를 찾아와 주신 것은 절말 너무나도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빅토리아 여왕은 실망한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예수님이 당신을 찾아와 주신 것이 아닐까요?" 그러자 과부는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왕님, 예수님은 제 삶의 있어서 저의 손님이 아니라 저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언제나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 삶의 목적이랍니다. 저는 지금도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빅토리아 여왕은 감격한 듯이 과부의 손을 꼭 쥐어주었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것은 세 가지 죄입니다. 성경에 하라고 하는 것, 안 하면 죄가 됩니다. 또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하면 그것도 죄가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사무엘은 말했습니다(삼상12:23).
⑴전도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가장 큰 명령에 '불복종 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막16:15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 명령이 지상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불순종하는 것은 죄 중에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기가 싫었습니다. 왜?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원수국인 앗수르의 수도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원수의 나라가 구원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풍랑이 일었습니다. 제비를 뽑아 보니 요나였습니다. 요나를 바다로 던졌습니다. 고래가 삼켰습니다. 고래는 요나를 니느웨에 토하여 놓았습니다. 결국은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곳에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풍랑이 일어납니다. 오늘 당신의 니느웨는 어디입니까? 오늘 당신의 다시스는 어디입니까? 오늘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여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⑵전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태만하게 한 나태 죄'입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때에 로마인들은 여기저기를 점령하면서 노예들을 포로로 잡아 왔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시킨 일이 길을 닦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예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가 만든 길이 망가지면 그 노예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노예들은 길을 닦을 때 평생 망가지지 않도록 잘 만들었습니다. 충성을 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태만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임한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렘48:10절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
어느 전쟁 후에 한 사람에게 사형언도가 내려졌습니다. 그 사람이 항변을 했습니다. '나는 전쟁 중에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왜 사형입니까?' 장군이 말하기를 '모두가 죽을 각오로 싸우는 데 너만 가만히 있었다. 그런 치열한 전투에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사형 감이다.' 판결을 내렸다고 합니다.
⑶전도하지 않는 것은 '영혼 살인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분명히 살인죄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을 죽이는 것은 영혼살인죄입니다.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 그리고 부모나 이웃이나 친척, 친구나 옆 집 영혼이 지옥가게 하는 것은 영혼 살인죄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시급한 영혼이 있습니다. 오늘 전도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갈 영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기도의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하라!'입니다. 마7:7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믿으라.'입니다. 막11:2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할/
셋째는 '받은 것으로 주장하라'입니다. 막11:24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런데 응답되지 않는 기도도 있습니다. 외식하는 기도, 회개치 않는 기도 응답이 없습니다. 시66:18절에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약4:3절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바른 기도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요일5:14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또 요15: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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