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화(1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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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화(18번)
▶우리가 흔히 자신이 제일 잘 하거나 잘 부르는 노래를 일컬어 18번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일본의 대중 연극인 가부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러 장(場)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부키에서 장(場)이 바뀔 때마다 막간극을 공연했는데, 17세기 무렵 '이치가와 단주로'라는 배우가 단막극 중에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 극이 모두 18가지였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18번째가 가장 재미있었다고 하여 십팔번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일제 강점기에 대중 속으로 들어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애창곡의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다이제스트에 실린 글입니다. 미국 어느 제철공장 지대에 위치한 교회에서 생긴 일입니다. 제철경기가 너무나 극심한 불경기로 수많은 노동자가 실직한 상황이었습니다. 모두 살림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굶는 이도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던 중 광고시간이었습니다. 한 명이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모자 속에는 5달러짜리 돈 100장이 들어 있습니다. 모두 500불입니다. 나는 그 동안 교회에서 여러분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한 번도 못 하고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이 모자를 돌리려고 합니다. 저의 성의로 알고 한 장씩 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저를 편안하게 하여 주시는 길입니다. 물론 저도 너무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는 교인들에게 그 모자를 돌렸습니다. 돈을 꺼내 가는 이도 있었고 돈이 있는 이들은 그의 아름다운 마음을 보고 돈을 오히려 집어넣는 이도 있었습니다. 다 돌아서 모자 속을 보니 모자 속에는 1,067달러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기둥 같은 일군이 많군요. 모두 아름다운 이야기뿐이군요.> 나눔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그 나이가 100세를 넘겼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지도 벌써 110년이 넘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는 것이지만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왔다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실로 엄청난 축복입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우리 민족은 비로소 개화되었고 근대화되었고 오늘과 같은 발전을 이루는 데 원동력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 민족은 참으로 복을 많이 받은 민족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엄청난 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교회는 이 같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이 민족을 향해서도 할 일을 다 하고 세계를 향해서도 할 일이 많은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받은바 은혜를 갚기 위해서도 우리 한국교회는 세계에 나가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미개하고 낙후된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복음을 받을 때의 모습과 흡사한 나라들이 많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두 거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가 장애자였습니다. 한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고, 한 사람은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들은 일을 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없이 걸식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한 움막에 기거하면서 서로 협력을 하며 살았습니다. 소경은 앉은뱅이를 등에 업고서 앉은뱅이의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앉은뱅이는 소경의 등에 업혀서 소경의 눈 역할을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두 거지가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그들을 매우 동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걸하러 올 때마다 자신들의 음식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거지였고, 또 장애자였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그 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살림 자체가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두 거지에게 돌아오는 음식의 양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의 마음속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꾀를 부렸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의 밥그릇에 있는 음식을 조금씩 자기의 밥그릇에 슬쩍 슬쩍 옮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앉은뱅이는 배불리 얻어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은 늘 허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눈보라가 몹시도 휘몰아치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두 거지는 구걸을 하기 위해서 움막을 나왔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경은 앉은뱅이를 등에 업었습니다. 그러나 그날따라 매우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앉은뱅이는 그동안 잘 얻어먹었기 때문에 몸이 많이 불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제대로 얻어먹지를 못해서 몸이 약해질 때로 약해져 있었습니다.
일순간 소경은 현기증을 일으키더니 그 자리에서 푹 꼬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소경의 등에 업혀져 있던 앉은뱅이의 몸도 나동그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두 사람은 눈 위에 꽁꽁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때 두 사람은 서로 더불어 협력하면서 나름대로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의 마음속에 욕심이 생기면서, 꾀를 부리면서 그 행복은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너'의 소중함을 무시했던 '나'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두 사람 모두의 죽음이라는 공멸로 나타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일찍이 고대의 어떤 철학자가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 혼자 살수는 없습니다. '너' 없는 '나'가 있을 수 없고, '나' 없는 '너'는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이웃을 소중히 생각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민요가운데 아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무슨 뜻입니까? 나를 사랑하는 님이 나를 떠나려고 합니다. 갈 테면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리도 못 가서 발이 부르트든지, 발목이 삐든지 해서 넘어지고 말 것이라는 뜻입니다. 일종의 저주의 노래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심성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미국에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웃집 농부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했습니다.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그래서 홧김에 아주 해로운 잡초의 씨앗을 구해서 그 농부의 밭에 왕창 뿌려버렸습니다. 순식간에 밭 전체를 뒤덮어버리는 번식력이 강한 잡초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바로 직후에 그는 그 농부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농부는 자기 딸에게 결혼선물로 그 밭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청년은 자기가 뿌린 씨앗을 그대로 거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그 밭에 있는 잡초를 뽑아내기 위해서 죽을 고생을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저주하면 그 해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를 말아야 합니다. '두고 보라지, 잘 되는가 한번 보자!'라는 말은 우리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늘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하는 길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직장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직장인은 자기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가 참 심했습니다. 그의 상사는 아주 성질이 까다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실수조차도 용납하지 못하고 심하게 야단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상사가 보기 싫어서라도 회사를 그만 둘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 친구로부터 좋은 조언을 얻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의 체험에서 터득한 하나의 비결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비결은 간단했습니다. 상사로부터 야단을 맞을 때마다 그 상사를 축복해 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별것 아닌 일로 상사로부터 야단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이 분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분의 마음에 평안을 심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상사는 조금도 변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꾸중을 들을 때마다 계속해서 그 상사를 위한 축복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축복기도를 하는 그 자신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꾸중을 들어도 상사가 미운 생각이 전혀 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상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상사를 대할 때도 언제나 밝고 상냥한 모습으로 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결국은 그의 상사도 그를 대할 때 친절한 모습으로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애꿎은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축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변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종이에 빽빽하게 적은 것을 목사님에게 건너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도 사실은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과 교회를 위해서 제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은 그 교인이 주는 종이를 받아서 보았습니다. 그 종이에는 목사님이 고쳐야 할 것 50여 가지가 조목조목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것을 읽고 나서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그리고 그저 한 마디만 나중에 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교인이 돌아가고 난 후 바로 그 자리에서 목사님은 사표를 썼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당회에 사표를 제출하고서 그 교회를 떠나 버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비판하면 그 사람이 쉽게 변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기가 쉽습니다. 일할 의욕을 상실시키고, 좌절감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웃에 즐거워하는 자가 있습니까? 함께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이웃에 우는 자가 있습니까? 함께 울어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내 입장에 맞추려고 하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의 입장에 맞추어 주어야 합니다. 나 위주로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해 줄 줄 아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제자가 자기 스승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제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자야,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아라. 누가 보이느냐?"
제자는 창밖을 내다보고 난 뒤에 스승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어떤 아주머니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서 정답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자 스승은 또 제자에게 일렀습니다. "이번에는 거울 앞에 서거라. 그리고 거울 속을 들여다보아라. 누가 보이느냐?"
제자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서 스승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거울 속에는 제 모습만 크게 보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스승은 제자에게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제자야, 똑같은 유리인데 어찌하여 유리창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거울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기 모습만 볼 수 있겠느냐? 그것은 거울 뒤에는 은칠이 되어있기 때문이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해 주기 위해서는 먼저 네 마음에 있는 은칠을 벗겨버려야 하느니라. 투명해져야지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볼 수가 있단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편견의 은칠을 먼저 벗겨버려야 합니다. 내 감정의 은칠을 벗겨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쉽게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이런 너그럽고 여유로운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루는 앞마당에서 수탉 몇 마리가 처절하게 싸움을 했습니다. 세력 다툼을 한 것입니다. 그 중 가장 힘이 세고 억센 놈이 승리를 했습니다. 이긴 수탉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울타리에 높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야! 세상에서 나보다 힘센 놈이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해!"
그러나 그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공중을 날고 있던 독수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서 그 수탉을 채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큰소리치는 사람, 잘난 척 하는 사람, 오래 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누가 그런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그 사람 때문에 화평이 깨지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가만히 내버려두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의 생각에는 자기 아내의 청각에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내가 자기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똑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해야 겨우 알아듣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 모르게 아내의 청각을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때마침 아내가 화장대 앞에 앉아서 화장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멀찌감치 앉았습니다. 일부러 신문을 보는 척하면서 아내를 향해서 물었습니다.
"여보, 내 목소리가 들려요?" 그러나 아내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좀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신문을 보는 척하면서 넌지시 아내를 향해서 물었습니다.
"여보, 내 목소리가 들려요?" 그러나 역시 아내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아내 등 뒤로 바짝 다가가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보! 이제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요?" 그러자 아내는 귀찮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들린다니까요! 당신은 내가 이미 똑같은 대답을 세 번씩이나 하는데도 모르고 계세요?"
그러니까 실제로는 누구 청각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까? 아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남편인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자기 아내가 제대로 듣지 못한다고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우리도 이런 잘못을 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불평을 합니다. "왜 세상이 온통 붉지?"
사실은 우리가 붉은 색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안경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밝게 보이는 것입니다.
▶누릴 수 있는 데 거절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데 거절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구약 최고의 사람은 모세가 그랬습니다. 모세는 애급 궁중에서 얼마든지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궁중을 누리지 않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동족들과 함께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신약성경 최대의 사람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성경 수많은 사람 중에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은 바울 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권력과 실력을 겸비하였습니다.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이방 선교사로 일하다가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누릴 수 있는 것을 가장 많이 포기한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머리 둘 곳도 없이 고난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안 죽어도 되는 분이 죽으셨습니다. 안 울어도 되는 분이 우셨습니다. 안 맞으셔도 되는 분이 맞으셨습니다. 누리는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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