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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화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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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화 모음






 ★ 어느 교회 장로님과 집사님들이 조 용기 목사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전도사가 교인들보다 기도도 못하고 설교도 못한다고 불평을 늘어놓으며 다른 교역자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조 목사님은 말하기를 물론 귀교회 전도사님이 신앙연조나 사회경험이나 연령으로 보나 은혜면으로 보나 다 부족할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부족한 자이지만 하나님이 부르셔서 설교자로 세워주신 것이 다릅니다.  그러니 많이 기도하여 도와 주십시오 했다고 한다.


 


  ★ 무디 선생이 1879년에도 볼티모어에서 전도집회로 인도하고 있을 때에 무디를 하나의 허풍쟁이로 비난하던 어떤 불신 신문기자 한 사람이 무디의 설교 가운데서 거짓말들을 취재하려는 목적으로 참석했던 일이 있었다.

  그 기자는 무디의 설교와 예화는 날조한 것으로 알고 기사화 할 작정이었다.

  그 때 무디에 설교 중 예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에 한 신사가 어떤 도시에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는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때여서 거리에 수많은 상점들의 진열장에는 크리스마스 선물과 장난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린이 3명이 진열장 앞에 서서 무엇을 들여다보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는데 언니가 소경인데 동생이 장난감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었다.

  한동안 움직일줄 모르고 서서 설명하는데 소경에게 장난감에 대하여 설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무디는 이 소경은 언니에게 말로서 인형의 모형이나 색깔이나 생김생김을 말해 주어 이해시키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예화를 하였다.

  무디가 아무리 자상하게 소개를 해 준다고 하여도 직접 만나보는 것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 주님께 나와서 그를 영접하고 만나 눈을 떠서 볼 수 있기를 원한다고 설교하였다.

  집회를 마친 후 그 기자는 무디를 찾아와서 그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느냐고 물었다.  무디는 그에게 보스톤지에서 읽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무디의 대답을 듣고 나더니 바로 자기가 그 예화의 주인공이며 그것이 전도 집회가 열리고 있는 볼티모어 시내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말하였다.

  결국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기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었고 동시에 그는 그때의 전도집회에서 맨 처음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 되었다 한다.


 


  ★ 미국에 어떤 목사님이 박사님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에 초청을 받아 설교하게 되었다.  지식인들이 모이는 교회이기 때문에 염려를 하고 가면서 어떤 설교를 해야 그 박사들이 회개하고 은혜를 끼칠까 하고 염려에 잠겼는데 그의 부친께서 부탁하기를 네가 그들이 아는 것을 가지고 증거하지 말고 그들이 모르는 복음진리를 가지고 설교하라고 권하였다.

  이 말을 들은 목사는 용기를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훌륭한 지식인이라고 해도 진리 앞에는 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사님들에게 큰 감화를 주고 은혜의 집회가 되었다고 한다.


 


  ★ 어떤 목사님이 스코틀랜드에 있는 한 교회로 부임해서 현대인들의 죄에 대하여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교인들이 모여 와서 새로 부임한 젊은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예배를 마치고 나자 나이 많은 교회사찰이 목사에게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보세요 젊은 목사님 교인들을 떨어지지 않게 하시려거든 현대인들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설교는 교인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설교하시려거든 옛날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과 같은 족장들의 죄에 대하여 설교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제발 설교하실 때 현대에 사는 우리드르이 죄만은 지적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한 설교는 교인들이 견뎌내지 못하고 도망하거나 싫어합니다." 하고 충고하더란다.


 


  ★ 미국에서 어떤 목사님이 저녁 예배를 드리는데 교인이 얼마 안되어도 열심히 찬송하고 기도하고 준비한 설교를 힘차게 증거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갈려고 할 때 지하실에서 한 사람이 나오면서 용서해 달라고 우는 것이다.  이상히 생각한 목사님은 이유를 물은 즉 예배당에 비품을 도적질하러 들어와서 숨었다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그만 도적질할 마음이 없어지고 두려운 마음이 생겨 회개하고 예수를 믿겠다고 자복하였다.

  목사님은 감격해서 후히 대접하여 보냈다.


 


  ★ 한 번은 조 용기 목사님이 제법 유식한 설교를 해서 내가 얼마나 유식한가를 인정받으려고 이 책 저 책을 들쳐보고 키엘케골의 실존주의 철학이론을 들어서 설교준비를 하고는 굉장한 메시지라고 자신이 느끼면서 주일날 힘차게 외쳤다. 

  그러나 섭섭하게도 나의 박식에 곤두라질 줄 생각했던 청중들이 어딘지 모르게 몹시 시들하더라는 것이다.

  설교를 마친 후 씁쓸한 감정으로 사무실에 들어와 앉았는데 그때 어떤 성도의 안내를 받아 온 신사가 있었다.

  모 대학에 철학교수라고 인사를 하였다.

  조 목사님은 그가 설교에 대하여 칭찬해 줄줄 알고 기대하였으나 뜻밖에도 가혹한 비평을 해주었다.

  그는 말하기를 조목사님의 서투른 철학설교는 견습철학도의 서투른 논문발표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조 목사님 오늘날은 지식의 분업화 시대입니다.

  나 같은 철학교수는 평생을 철학연구에 바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교회에 찾아올 때는 목사님의 전문적인 성경해설을 들으러왔지 서투른 철학강의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고 하더란다.  "목사님이 아직 젊었기 때문에 실례인줄 알면서도 이와같이 충고를 합니다.  목사님은 성경전문가가 되십시오." 하는 충고를 듣고 나서 한없이 좌절감과 수치감을 느꼈으나 부끄러움이 가져다 준 결과는 훌륭한 설교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할 때 텍사스에서 전도집회를 인도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 받기 위하여 몰려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회의 설교에는 역사가 없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데 독일에서 왔던 자기가 잘 아는 평신도가 "오늘 왜 역사가 없는 줄 압니까?  오늘 설교에는 십자가가 빠졌습니다." 하고 충고하자 이때부터 빌리그레함 목사님은 결심하기를 나의  설교에는 십자가만 증거하기로 하자, 했다.


 


  ★ 미국 몬트리올에 살고 잇는 군사외국인 학교의 교수님이 한국에 모 목사님을 만나서 이야기하기를 저가 다른 여러 교회를 나가보다가 그만 둔 이유는 목사님들의 설교가 입에서 나오는 설교지만 이곳 개척교회는 비록 적고 전도자이지만 그의 설교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설교를 한다고 하였다.


 


  ★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부인 반에서 조는 사람이 많았다.

  목사님이 "왜 이렇게 조는 사람이 많습니까? 다음부터는 고춧가루를 가지고 와서 졸 때에 눈에다 쳐서 졸지 않도록 하시오." 하고 책망을 하였다.

  그랬더니 졸다가 깬 부인이 말하기를 "흥 내 눈에다 고춧가루 치라고 말고 목사님 설교에다가 고춧가루를 치지." 하고 투덜대면서 눈을 감더란다.


 


  ★ 어느 목사님이 설교에 죽을 쑤고 강단에서 내려오니까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의 손을 잡고 글썽글썽 눈물 지며 "제가 잘못하여 목사님 설교를 죽쑤게 하였습니다.  제가 토요일마다 목사님을 위하여 기도했는데 어제는 손님이 와서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울더란다.


  ★ 무디가 어느 날 밤 시카고에서 집으로 가던 길에 가로등에 기대어 서 있는 어떤 사람을 본 일이 있었다.

  무디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손을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이렇게 물었다.  "예수를 믿으시는지요." 그때 그는 화를 내면서 때리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디는 그 사람이 하수도에 처넣지나 않나 두려웠다.

  무디는 "대단히 미안합니다.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용서하십시오. 그렇지만 나는 물어 볼 만한 것을 물어 보았는데요." 하였더니 "당신 일이나 걱정하시오." 하고 그 사람은 성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디는 "그것이 바로 내 일인걸요." 하고 서로 헤어졌다.

  그 후 서너달이 지나 어느 추운 아침에 누군가 무디 집에 찾아왔다.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저는 예수 믿고 싶습니다."하기에 문을 열고 보니 전에 가로등에 기대어 시비할 뻔하였던 그 청년이었다.  "선생님 저는 그때 헤어지고 나서 저녁마다 귓전에 '예수 믿으시는지요.' 라는 음성이 들려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선생님께 와서 이렇게 서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하고 그 날 밤에 무디 선생과 진지한 상담을 하고 예수를 영접하였다.

  그는 교회에 잘 나가 주일학교 선생이 되었다가 전쟁이 나서 출전하여 최초에 전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죽기 전에 하나님을 위하여 산 증거를 남겨둔 사람이었다.

  무디의 한마디 설교에 능력이 나타났다.


 


  ★ 미국에서 어떤 목사님이 형무소에서 전도를 하고 돌아오면서 어떤 여관집 주인과 동행하게 되었다.

  그 사람이 "목사님의 설교가 몇몇 죄수들에게 감동을 주었기를 바랍니다.  아마 그러한 설교는 그들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럼, 젊은이에게 감동이 되었오?"하고 물었다.

  "저에게요? 목사님이 죄수들에게 하였지 제게 하였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목사님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소, 그리스도는 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젊은이에게도 필요하오." 하였다는 이야기다.

  목사의 설교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


특별 예식 설교

 스콧 깁슨 | 미국 고든콘웰신학교 교수 

 이 글은 저자의 허락을 받아 Preching for Special Service(Baker Book House)의 내용을 번역·게재한 것입니다.


설교자에게는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특별 행사들이 끝없이 기다리고 있다. 기본적으로 강림절, 성탄절, 현현절,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 등과 같이 교회력에서 비롯된 행사들이 있다. 이외에도 국경일과 관련한 특별 행사들이 있고, 또 어버이날이나 어린이날 등과 같은 국가 공휴일과 관련되어 있는 목회적 행사들이 있다. 이 모든 공휴일과 더불어, 교회 안에는 수많은 선교 주일, 은퇴 목회자 주일, 특별 봉헌 주일 등과 그밖에 교단이 지정한 수많은 특별 행사들이 있다. 여기에다 개인적 행사와 관련한 특별한 모임에서의 설교를 요청하는 성도들의 필요는 목회자로 하여금 일년 동안 정해진 계획대로 성경 말씀을 설교하여 성도들을 양육하고자 하는 사역을 당혹스럽게 하곤 한다.


어떤 목회자들은 이런 일정에 미리 잡혀있지 않았던 갑작스런 요구들에 의해 여지없이 허물어지기까지 한다. 그런 설교자들 가운데는 설교를 사전에 준비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주일 아침 예배의 설교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주제라도 환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설교자와 성도들에게 영양가 있는 설교 식단을 제공하는 비결은 교회의 영적 성숙과 그 필요들을 고려하면서 사전에 계획을 잘 세우는 것이다. 이런 것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설교자는 다양한 ‘특별 주일’들을 소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1 목사가 세우는 설교 계획은 설교자 자신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어떤 특별한 행사는 설교나 기도 중에, 혹은 기타 다른 예배 순서에서 사전에 언급됨으로써 성도의 관심을 특별히 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초점은 교회의 절기나 특별 행사와 같은 목회적 활동 자체가 아니라 그런 특별한 목회적 행사에서의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에 있다. 그래서 예컨대 결혼식과 장례식, 세례식과 헌아식, 성찬식, 그리고 전도집회와 같은 특별한 집회에서의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다루려고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이 시리즈의 글은 특별한 행사 예배를 전부 다루는 데 있지 않고, 특별 행사에서의 설교 문제를 다루는 데 있다. 즉 목회자가 세례식, 결혼식, 성찬식과 장례식 등의 예배에서 해야 하는 설교를 구성하는 방법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특별 행사의 설교를 특별히 준비해야 하나 

이 글에서 필자는 일반 예배 설교의 일정에서 크게 벗어나는 행사에서 행해야 하는 설교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3 개 교회의 목회자로서 정기적인 예배에서의 설교 일정과는 달리 따로 고려해야 하는 특별 행사 설교에 적용되는 요소들이 있다. 설교자들에게 던져지는 일반적인 질문은 아마도 ‘왜 특별 행사 설교를 하는가’ 라는 질문일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특별한 행사에서 하는 설교를 통해 설교자는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게 되며, 그러면서도 그 특별 행사에 초점이 잘 맞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면,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곧 예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특별 행사 예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돼야 한다.4 이 시리즈에서 다루게 될 대부분의 특별 행사들에는 일정한 예배 의식과 성경 봉독이 있으며 특별 행사와 관련된 기도가 포함된다. 목회자요 설교자로서의 임무는 예배 의식을 보완하고, 그 특별 행사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그 행사를 통해 참석자들에게 총체적인 예배 체험이 일어나도록 최선을 다하는 데 있다.


 


장례식과 같은 특별한 상황은 거의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럼에도 목회자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준비되어 있음으로”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더구나 목회자들은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해야” 한다(딤후 4:2). 특별 행사 설교를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한 설교자는 이렇게 말한다. “특별 행사 설교는 닳고 닳은 청중의 미각을 만족시켜 주는 하나의 수단도 아니고 상처받기 쉬운 순간에 있는 사람들을 낚아 올리기 위해서 던지는 미끼도 아니다. 특별 행사 설교는 그 시기와 상황에 적합하게 선포되어진 말씀이다.”


 


강해 설교자들에게는 성경과 신학을 올바로 전할 책임이 있다. 칼 브라튼(Carl E. Braaten)은 이렇게 말한다: “믿음과 사고는 설교와 신학 연구라는 양쪽 영역에 모두 속해있다.” 또 어느 신학자는 “설교 없는 신학은 공허하고 신학 없는 설교는 어둡다”고 말한다.6 영국의 클레버리 포드(D. W. Cleverley Ford)는 설교자들에게 특별 행사와 그 설교가 의의 있는 것이 될 수 있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라고 권면한다. 포드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설교자의 책임은 특별 행사에 참석했던 혹자가 몇 년이 경과하고 난 후에도 ‘내 인생이 이렇게 달라졌다니! 이건 결코 잊지 못할 특별 행사 덕택이 아닌가. 내 인생관을 바꾸어버린 무언가가 내게 일어났어’라고 고백하게 만들 정도로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다.” 

마이클 커트니(M. Courtney)는 자기 아이가 세상을 떠난 뒤 장례 예배의 위력과 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위로와 소망을 주었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 한다: “예배는 위기를 맞은 시기에 많은 역할을 한다. 이 예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보존될 수 있었다. 그 예배로 인해 우리 부부와 조문객들이 우리 아이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을 부정하도록 만들 수도 있는 일들이 너무도 많이 일어난 그때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그 예배를 통해 상기할 수 있었다. 그 예배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주고, 자기들에게는 낯설고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 중에서 우리를 배려하도록 해 주었다. 하나님께 간절히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갈급함을 느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그 예배를 통해서였다.”8 어느 특별 행사 설교든지 그 목적은, 분명한 성경의 메시지이면서도 듣는 이들을 고려하여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며, 간절히 듣기를 사모하는 사람들과 반드시 들어야 될 사람들에게 성경에 기초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는 데 있다.



빌리 그래함의 첫 설교(작은 출발) 

 빌리 그래함은 그의 첫 설교를 계획 없던 것으로써 감옥에서 행하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그래디 웰슨과 함께 Fuller Brush의 외판원을 하였다. 장로교인의 친구 지미 존슨 이 부근의 감옥으로 봉사를 하러 간다고 할 때 이들도 함께 가기를 원했다. 빌리와 그래디는 처음으로 감옥에 가보는 것이었다. 지미 존슨은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는 빌 리가 간증하겠다고 조용히 말했다. 빌리는 놀랐으나 상황에 대처하였다. Fuller Brush 사람들도, 감옥의 사람들도 그 여름 이후 이 키 큰 젊은이가 전도사의 길로 들어서서 세계 수백만 명에게 설교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설교준비는 기쁘다

 목사님이 남미선교여행을 떠나신 이후로 예배의 설교를 다 맡아 하게 되었습니다. 

겉보기와는 달리 설교를 준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세상에서 가장 피를 말리는 일이지 싶습니다. 

하나님의 대언자(代言子)로 강단에 서서 말을 한다는게 보통 일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말을 전하려면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있어야지요. 

(하긴, 요즘에는 자기 말을 하나님 말처럼 전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보는 사람마다 "힘들지요?" 하고 묻습니다.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사실은 조금 언짢은 기분입니다. 

설교를 하는 일이 매우 긴장되고 힘든 일이긴 하지만, 

그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과 은밀히 데이트를 즐기며 호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음은 

설교준비를 하는 사람만 얻을 수 있는 대단한 특혜이고 기쁨입니다. 

그 시간이 때로는 깊은 밤이기도 하고 새벽녘이기도 하고, 또는 한나절을 꼬박 보내기도 하지만 설교준비가 힘든 것인가 기쁨인가를 평가하라면 저는 단연 기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설교준비하기 얼마나 힘드세요?' 하고 힘든 쪽을 바라보지 말고, 

설교를 준비하는게 얼마나 즐거우세요? 하고 즐거운 면을 바라봐 주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성공적 설교비결

 성공적 설교비결 존 쉐퍼드 목사는 1950년대 미국에서 알려진 설교가였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았다. 그는 임종시 젊은 목사들에게 자신의 성공적인 설교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나의 설교의 비결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나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성령의 감동으로 자주 울었습니다. 둘째, 성경의 가르침에 내가 먼저 은혜를 받았습니다. 셋째, 나는 마치 주님께 보고서를 막 제출하고 난후와 같은 마음으로 설교단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령의 감화를 받고, 자신이 먼저 변화되고, 주님께 보고하는 자세로 산다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감사의 설교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 휘테라는 설교가가 있었다.그는 매주일 설교할 때마다 그 주에 있었던 일 중에 꼭 한가지씩 감사할 조건을 찾아 감사기도를 드리곤 했다.한번은 그 지역에 큰 태풍이 몰아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최악의 한 주간을 보내게 되었다.주일 아침이 되자 성도들은 오늘 아침만은 목사님이 감사할 조건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 날 아침에도 여전히 감사기도로 설교를 시작했다.그 감사의 내용은 이러했다.“하나님,감사합니다.지난 주간과 같은 최악의 재난이 항상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현대인들은 가장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다.과거 어느 때보다 우리는 풍요로움과 편리함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늘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그것은 바로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기보다는 꼭 현재 없는 것을 찾아서 불평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지금 주어진 삶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진정한 행복은 바로 감사에서 시작된다.



성장하는 교회의 설교자 분석

 1. 소명감이 투철하다. 

2. 확신에 차 있다. 

3. 열정에 차 있다. 

4. 영적인 비젼으로 가득차 있다. 

5. 심오한 진리를 쉽게 전하다. 

6. 머리 보다는 영혼을 파고 든다. 

7. 감동적이다. 눈물이 난다. 기쁨을 일으킨다. 기분이 상쾌해 진다. 

8. 회개하고 싶어진다. 가슴이 뜻끔하다. 

9. 결단과 헌신을 요구한다. 

10. 사람이 변한다. 자신의 변화를 의식한다. 성숙해진다. 

11. 재미있다. 유모어가 있다. 

12. 또 듣고 싶고 또 먹고 싶다. 

13. 교인들을 대단히 존중한다. 

14. 몸과 마음이 깨끗해진다. 몸의 치유가 나타날 때도 있다. 

15. 혼자 듣기 아깝다. 남에게 들려주고 싶다. 

16. 설교자를 감히 범할 수 없다. 

17. 마음이 편해 진다. 안점감과 평화를 안겨준다. 

18. 지식의 전달이 아니고 영혼의 메세지임을 느낀다. 

19. 순종하면 잘 될 것 같다. 

20. 강한 공감을 일으킨다. 가슴에 와 닿는다. 

21. 자신을 비하시키거나 변명하지 않는다. 

22. 설교하는 것을 즐긴다. 

23. 목소리 마저도 듣기에 즐겁다. "듣기에 거슬리는 말은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다." 

24. 밝고 진지한 표정이 말보다 더 중요하다. 

25. 야단치는 목소리는 은혜가 않된다. 죄는 책망하나 용서의 강조로 해방감을 준다. 

26. "우리"란 표현을 더 많이 쓴다. 

27. 다른사람의 흉내를 내지 말라.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가장 효과적이다. 

28. 설교자의 태도가 좋아야 설교가 좋다. 

29. 아내에게 연습하라. 

30. 설교를 읽지 말라. 

31. 암송한 설교를 하지 말라. 

32. 예를 자주 사용한다. 

33. 설교를 쓰되 요약된 노트를 갖고 설교하라. 

34. 평범한 진리가 보편성이 있다. 

35. 언제나 노트할 것을 갖고 다니라. 

36. 서론에서 청중과 연결되어야 듣는다. 

37. 언제나 듣는 이들을 일으켜 세운다. 

38. 언제나 믿음, 희망, 사랑을 일으킨다.



마지막 설교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하에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938년 이후 4차 검속에 전후 7년 간의 옥고를 겪다가 1944년 4월 21일 평양감옥에서 순교하신 분이다. 

일본 경찰이 그를 회유하려 잠시 가출옥시켰을 때 그는 자기가 시무하던 산정현교회에서 최후의 설교를 했다. 다음은 그 설교의 일부분이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님, 80이 넘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드립니다. 나의 병든 아내와 어린 자식들과 나의 사랑하는 교우님들을 주님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나는 이 산정현교회의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따라,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려합니다(말씀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에 주목사님의 음성도 비장하여졌고 만당의 교우들은 모두 눈물로 성경책을 적시며 흐느껴 울었다. 독사의 눈 같은 일본 형사들의 눈에도 눈물이 어리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여 철석같은 마음이 변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의 울음소리 때문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신자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얽히고 설킨 인정의 줄 때문에 주님 따라 가는 길이 방해를 받는다면 성경 말씀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부모나 처자를 사랑하고 아끼되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긋납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이 마지막 설교 속에는 참된 순교자의 의연한 모습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패치(Patch)설교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8) 

 영화 '패치 애덤스'의 한장면이다. 교수가 환자에게 병세를 묻는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당신 이름은 무엇입니까?"하고 질문한다. 의대생 패치 애덤스다. 그는 병을 보기보다 병을 앓는 인간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그렇게 표현한다. 애덤스는 사라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커피가 새는 종이컵을 반창고로 ㅝ 줬다가 '패치'(Patch)라는 별명을 얻는다. 

상처를 치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적인 의사가 되려고 의대에 진학한 그는 3학년까지 환자를 만날 수 없다는 학칙을 어기고 병동을 돌면서 환자들과 대화하고, 어린 암 환자들을 즐겁게 해주면서 병원 분위기를 바꿔 놓는다. 경관 좋은 산자락에 무료 진료소를 만들어 가난한 이웃을 치료해준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고 따르던 동급생 캐린이 환자에게 살해되고, 자기 진료활동을 무면허 의료로 간주하는 교수의 고발로 퇴학당할 위기에 몰린다. 패치는 퇴학청문회에서 동료의대생들에게 "환자를 만나지 말고 인간을 만나라."고 웅변한다. '패치 애덤스'의 주인공은 실존인물로 현재 영혼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 미국 전역에서 소문을 듣고 몰려든 동료 의사들과 건강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 촬영 중 두 명의 패치 애덤스 (헌터 애덤스와 로빈 윌리엄스)는 병원을 방문해 많은 어린 환자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스펄젼의 두편 설교 비교

 챨스 스펼젼 목사가 한번은 형편없는 설교를 했다. 말하자면 완전히 죽을쑨 것이다. 그는 참으로 마음이 겸비하게 되어 주께 기도했다. "주 하나님, 당신은 무에서도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 형편없는설교를 축복해 주십시요" 

그는 한 주간 내내 주님을 의지하면서 이 기도을 했다. 한밤중에도 일어나기도를 했다. 

그 다음 주일은 지난 주의 엉터리 설교를 보상하려는 마음으로 멋진 설교을했다. 사람들도 굉장히 칭찬했고 그 자신도 굉장히 흡족해 했다. 그 때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 이 두 편의 설교의 결과을 한번 비교해 보아야 하겠다." 

그 결과는 참으로 놀랄만큼 달랐습니다. 첫번째의 엉터리 설교를 통해서는41명이나 주님을 

영접했지만 두번째의 그 멋진 설교를 통해서는 단 한영혼도 구원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2. 기도이다. 

쉘든 고든(Sheldon D. Gord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이 말은 기도에 대해서'말하는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들이 기도를 믿는다고 말하는자들을 두고 하는 말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자들은 시간을내서 기도하는 자들이다. 오늘날 바로 이들이 하나님을 위해 최상의 것을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영혼들을 구하고 문제들을 해결하며 교회를일깨우고 세상을 좀 더 오래 향기롭게 하는 일에 있어서 최상의 일을 하고있다.이러한 기도에 대치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본문(대하7:14)은 우리에게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고 담대히 촉구한다. 우리는오직 죄의 심각성, 사악함과 비열함에 대해 개인적으로 집단적이며 국가적으로슬퍼 괴로워하게 될 때만이 신앙부흥을 체험하는 자들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멋진 설교

성 구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시 119:43) 

어느 교회에 처음으로 취임한 신임 목사님이 첫 취임예배에서 아주 멋지고 놀라운 설교를 했습니다. 교인들은 정말 기뻤습니다. 좋은 목사님을 청빙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취임예배에서 한 설교와 똑같은 설교를 다시 했습니다. 교인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목사님이 혹시 잊었거나 아니면 취임예배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어서 설교 원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두 번째 주일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똑같은 설교를 했습니다. 교회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보다 못한 한 용감한 교인이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언제 새로운 설교를 시작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당신이 이 말씀을 정말로 삶 속에 적용할 때 그때 저는 새로운 설교를 시작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위엄 있는 목자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매주 설교를 들으시지요? 무슨 목적으로 이 말씀을 받으셨습니까? 그저 위로를 받고자? 아님 교양을 쌓고자? 말씀은 생활에 적용되어야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일주일 동안 아니 평생 동안 주를 위한 삶을 살기 위하여 설교를 듣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순종할 때 참 자유를 얻습니다. 그리고 참 평안을 얻습니다. 설교 듣는 자세를 새롭게 합시다.



비서가 목사한테 설교를 하고 있다

위어스비라는 목사님에게 여비서가 있었다. 사고를 당해서 그 여자의 남편은 장님이 된 채 사경을 헤매고 있으 

며, 그 여자 자신도 많은 시험을 겪고 고생을 하더란다. 딱하고 답답한 나머지 목사님이 비서를 위로한다. "나 

는 당신과 당신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비서가 묻는다.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 목사님이 대 

답한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어 당신의 고난을 면케 해 달라고 기도하지요." 그랬더니 여비서는 "그렇게 기 

도하지 마세요, 목사님" 하고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저는 이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모든 은 

혜를 다 받으려고 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어서 받아내야 되겠어요. 그러니 목사님, 제가 그 축복을 받아냄으 

로써 오늘 당하는 이 고난이 헛된 고난으로 끝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세요" --- 비서가 목사한테 설교 

를 하고 있다. 옳은 이야기이다.



감사의 설교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 휘테라는 설교가가 있었다. 그는 매주일 설교할 때마다 그 주에 있었던 일 중에 꼭 한가지씩 감사할 조건을 찾아 감사기도를 드리곤 했다. 한번은 그 지역에 큰 태풍이 몰아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최악의 한 주간을 보내게 되었다. 주일 아침이 되자 성도들은 오늘 아침만은 목사님이 감사할 조건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 날 아침에도 여전히 감사기도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 감사의 내용은 이러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난 주간과 같은 최악의 재난이 항상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현대인들은 가장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우리는 풍요로움과 편리함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늘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그것은 바로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기보다는 꼭 현재 없는 것을 찾아서 불평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주어진 삶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 진정한 행복은 바로 감사에서 시작된다.



십자가가 중심인 설교 

빌리 그레이엄은 자신의 초창기 사역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달라스의 코튼 원형 경기장, 큰 무리가 운집한 그 곳에서 저녁 시간 그는 말씀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의 설교에 대한 반응이 시원찮았다. 그가 연단에서 내려오고 있었을 때 다정스러운 노인 한 분이 오더니 팔로 그를 감싸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빌리 목사님, 십자가를 오늘밤에는 듣지 못했습니다. 물론 설교 내용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설교하시지 않더군요." 그 위대한 복음 전도자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서 울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하였다. "오 하나님, 저를 도우셔서 십자가가 중심이 아닌 설교를 결코 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바로 여기에 승리케 하는 메시지의 본질이 있다. 이는 바로 피이다. 즉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의 온갖 승리케 하는 십자가이다. 어린양의 피로써 교회는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믿도록 하면서 그 점을 선포하게끔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같이 복 된 소식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해지면서 모든 이들이 들을 때까지 전해지게 되어 있다. 

'증인'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하게도 문자적으로 '순교자'로 번역되며, 이는 바로 어린양을 따르는 가운데 되어진다. 온갖 자신의 권리들을 포기하고서 십자가를 지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마 16:24)없이 그분의 제자가 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육체와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며(갈 5:24), 자신들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로 여기는 사람들이다(롬 6:11).



순회 설교자 웨슬리의 기도

"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 (엡 6:18) 

4월 24일(목): 우리는 볼턴에서 뉴우웰 헤이까지 8마일을 말을 달려갔는데 거의 4시간이나 걸렸다. 

내가 설교를 막 시작했을 때 햇빛이 내 옆머리에 어찌나 뜨겁게 비치든지 이렇게 설교가 계속되면 설교를 오래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했다. 그랬더니 그 해가 조금 후에 구름으로 가려지더니 예배가 끝날 때까지 계속 구름 속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을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4월 25일(금): 나는 10시 경에 터드몰텐 근처에서 설교하였다. 

사람들은 산등성이에 줄줄이 서 있었다. 그들은 외모로 보아서는 굉장히 거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촛농이 녹아내리는 것과 같이 부드러웠다. 헵턴 스토올에 가서 나는 오후 3시에 산등성이에서 설교하였다. 

그런데 내가 설교를 시작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설교를 마칠 때까지 비가 멈추어 주기를 기도하였다. 그랬더니 실제로 비가 멎었다. 

그리고 내가 설교를 마친 다음에 다시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이제 이우드까지는 여행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설교

 스코틀랜드의 R.프르스라는 유명한 설교학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느날 설교시간이 되었는데 목사님이 안나오셔서 교회 비서가 찾아가서 밖에서 들어보니 말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누구와 대화중인가 보다, 대화가 길어지는구나'하고 생각하고는 조심스러워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가보니 또 대화를 하고 있어서 가만히 엿들어 보았다. "당신이 안가시면 나도 안갑니다"하며 누군가에게 사정하는 얘기였다. 

그래서 하도 궁금하여 문을 살며시 열고 보았다. 그랬더니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제가 준비는 다했지만 성령님께서 저와 함께 가시지 않으시면 저 혼자 갈 수 없습니다"하면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간절히 바랬다는 일화가 있다. 

이처럼 `성령님께서 가셔야 내가 이 시간에 가서 설교하겠다'는 이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도 말씀과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거기서 부딪혀서 강한 역사가 일어나는 데 쓰임받는 설교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말틴 루터 킹: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한다면,나는 당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싶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거창한 장례식을 삼가해 주시오. 그리고 긴 찬사도 삼가주시오. 또 내가 노벧상 수상자라는 것도 말하지 말아 주시오 나의 학벌도,그것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말틴 루터 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다가 갔다고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주기위해, 헐벗은 사람들에 옷을 주기 위해 살다가 갔다고 말해 주시오. 내 생애에서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찾다가 갔다고 뭇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다가 갔다고 말해 주기를 나는 바랄 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사랑의 설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 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14세기경의 일이다. 한 성직자가 그의 마을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 중에서 제일가는 설교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사람들을 예배당에 나 오라고 권유했다. 그의 예배당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서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성직자를 기다렸다. 그러나 성직자는 강단에 올라가지 않고 있었다. 

성직자는 잠시 후에 촛불등잔을 들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조각상을 비추는 것이었다. 맨 처음에는 못박힌 예수의 양손, 그 다음에는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 그리고 또 못박혀 있는 예수의 양발을 차례로 촛불로 비치며 보여주었다. 

잠시 후에 성직자는 사람들에게 돌아섰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볼 수 있도록 촛불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여러 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세상 제일가는 설교입니다."



설교보다 더욱 훌륭한 것 

 한 마을의 과부와 6명의 자식들이 모두 전염병에 걸렸다. 그러자 그 마을 목사 부인이 아침 식사 중에 자신이 가서 그 가족들을 돌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편인 목사를 비롯하여 가족 모두가 반대했다. 하지만 그녀는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시91:6-7)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결심을 꺽지 않았다. 

"나는 시편 기자가 한 말씀을 믿고 있어요. 이 말씀은 나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요청하고 있어요. 내가 없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들을 돌보아 주실 거예요." 

그녀는 전염병에 걸린 가족들에게로 가서 4주 동안이나 그들과 함께 지냈다. 마침내 그 가족들의 병이 완쾌되자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가족들의 염려와는 달리 전염병에도 걸리지 않았고, 그녀의 가족들도 모두 무사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마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목사의 설교보다도 오히려 그녀의 행위가 그 마을 사람들의 신앙심을 깊게 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던 것이다.(마5:16, 딤전4:12, 벧전1:15)



성공적 설교비결

 존 쉐퍼드 목사는 1950년대 미국에서 알려진 설교가였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았다. 

그는 임종시 젊은 목사들에게 자신의 성공적인 설교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나의 설교의 비결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나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성령의 감동으로 자주 울었습니다. 둘째, 성경의 가르침에 내가 먼저 은혜를 받았습니다. 셋째, 나는 마치 주님께 보고서를 막 제출하고 난후와 같은 마음으로 설교단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령의 감화를 받고, 자신이 먼저 변화되고, 주님께 보고하는 자세로 산다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세상에서 제일 가는 사랑설교

 14세기 경의 일이다. 한 성작자가 그의 마을 사람들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 중에서 제일 가는 설교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사람들을 예배당에 나오라고 

권유했다. 그의 예배당에는 남녀노소 할 것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서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성직자를 기다렸다. 그러나 성직자는 

강단에 올라가지 않고 있었다. 

성직자는 잠시후에 촛불등잔을 들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조각상을 비추는 것이었다. 맨 처음에는 못 박힌 예수의 그리스도의 양손, 그 

다음에는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 그리고 또 못 박혀있는 예수의 양발을 

차례로 촛불로 비치며 보여 주었다. 

잠시후에 성직자는 사람들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볼 수 잇도록 촛불을 치켜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세상 

제일 가는 설교입니다.`



설교

  국민학교에 다니는 한 소년이 설교를 잘하신다는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부모님이 큰 교회에 데려다줄 때까지는 그 삼촌을 만나본 적도 없고 설교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는 삼촌이 십자가에 대해 설교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 소년은 그 이야기를 듣고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갑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꼼짝않고 자기를 마치 별난 사람 쳐다보듯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매우 당황했다. 나중에 그 아이가 말한 것에 의하면, 제일 당황했던 것은 예배가 끝나자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회중이 걸어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아이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매주일마다 그렇게 한다. 우리는 와서 십자가의 우리 주님의 부활을 송축하고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걸아나간다.


설교

  한 작은 꼬마가 뒷마당에 있었는데 그때 아버지가 꼬마가 뭔지 짓고 있는 것을 보고 다가갔다. 너 무엇을 짓고 있니? 라고 자기 아들에게 묻자 꼬마는 자기 아빠에게 소곤거리며 말했다. 교회를 짓고 있어요. 너 왜 소곤대고 말하니? 아빠가 물었다. 그 꾸러기가 말하길 왜냐하면 다들 자고 있으니까요.


설교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요 1:12; 벧전 1:23; 딤전 4:6-9

  영국 감리교 신학자 피어스가 의대생으로 런던에 있을 때였다. 그는 그 당시 가장 유명한 목사가 담임하던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듣고 돌아오면서 지금까지 들어본 설교 중 가장 훌륭한 설교를 들었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튿날 그리고 한주일 내내 머리속에 생각되는 것은, 설교는 내용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혀 다른 생소한 설교자를 찾아갔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설교자나 설교 내용은 생각나지 않고 구세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과 그의 능력에 대한 신앙으로 가득 찼다. 다음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좋은 친구 조력자와 함께라면 지옥에라도 가서 찬송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생겼다. 이처럼 말씀을 어떻게 전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달라진다.

 

설교 대상이 바뀐 것 아닌가

 히 9:22; 10:19-24; 벧전 1:23; 엡 4:24

  어느 날 예배에서 웨슬리가 고급 관료들과 귀족들을 앉혀 놓고 노골적으로 그들의 죄에 대해 경고하는 설교를 하였다. 예배가 끝나자 한사람이 다가와 말했다.

 "오늘 설교는 거리에 있는 부랑아들에게나 어울릴 것 같군요.""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설교를 했더라면 나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자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는 말씀을 설교의 본문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인간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이는 것은 도덕적인 죄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도덕적으로는 흠이 없어 보이는 점잖은 사람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으로서 이 복음을 받아들여야하는 것이다.

 

 설교 연습에 은혜받은 일꾼

 눅 24:25; 민 14:28; 겔 2:12; 33:11

 영국의 대설교가 스퍼전이 대집회의 설교를 맡게 되었다.

 그래서 집회 전날 회당에 가서 자기의 음성을 시험해 보려고 모퉁이에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라고 외쳤다.

 이 때 2층에서 회당을 수리하고 있던 일꾼이 우렁찬 소리에 놀라 무서운 생각에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살펴 보아도 회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일꾼은 신앙을 버리고 타락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를 듣고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소리치시는 말씀인 줄 생각하였다. 그가 조금 전에 들었던 음성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그 일꾼은 집으로 돌아가 번민 끝에 기도를 드렸다. 그 밤에 회계하고 마음에 평안함을 얻은 그는 `죄 많은 이 몸이 예수의 은혜로 구원 얻어 새사람이 되지 않으면 영원히 망하겠다.'라고 결심하여 훌륭한 신자가 되었다.

 

 설교 전에 알아야 할 것

 행 20:24; 갈 6:14-17; 빌 1:18-21

 언젠가 영국 킹스 칼리지 교수인 프레드릭 모리스가 에버슬리에 설교하러 갔을 때, 그는 친구인 그 지역 교구 찰스 킹슬리에게 물어 보았다.

 "자네의 교구 사람들은 어떤가?"

 그러자 킹슬리가 대답했다.

 "그 사람들이 어떤가에 대해서는 절대 마음 쓰지 말게. 그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을 그 사람들에게 말해 주게나."(Frederick C. Spurr)

 

:설교노트와 못

  어느 주일, 목사가 그의 교회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그의 아침 설교노트를 집에 두고 온 것을 발견하고는 당황했다. 그는 집에 가서 노트를 가져올 시간이 없었다. 그가 말하기 위하여 단에 섰을 때 그는 그의 회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저는 오늘 아침 제 설교노트를 잊고 왔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주님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유감스럽게 여깁니다. 저는 오늘 저녁에 보다 잘 하기를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나에게 똑같은 교훈을 담은 다른 이야기를 기억나게 한다. 어린 소년이 큰 창고 꼭대기에 기어 올라갔다. 그는 그 꼭대기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다가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갑자기 그는 미끄러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그가 돌밭 밑에 떨어진다면 그가 상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사랑하는 하나님, 저를 제발 떨어지지 않게 해주세요.”제발 제가 저 바위들 위에 떨어지지 않게 해주세요.” 바로 그때에 그의 바지가 지붕에 삐죽 나온 못에 걸렸다. 이 못이 그를 떨어지지 않게 붙들었다. 그러자 이 어린 소년은 위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상관없어요. 하나님, 나는 못에 매달렸어요.” 우리들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어린 소년과 같다. 그에게 못은 바로 그때에 거기에 있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목사가 주님을 의존 할 때보다는 그의 설교노트를 사용할 때 더 안전감을 느꼈던 것처럼. 하나님에게 도움을 받기보다는 못에 의하여 매달려 있는 것이 훨씬 더 확실하다고 느낀다. 우리들 중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구하고 부르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버릇을 키운다. 우리들은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을 잊은 듯하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할 수 없다” 요15:5


 설교는 영혼과의 씨름

 벧전 4:11; 빌 2:14-17; 딤전 1:18-20

 옛날 스코틀랜드에서는 대부분의 설교가 성경 없이 그저 기억에 의해서만 전달되곤 하였다. 때로 노트가 필요한 때느 설교단 밑의 작은 선반 위에 감춰두었다가 꺼내보곤 하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이'라는 것에 대해 거의 미신에 가까울 정도로 심한 편견을 지니고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복음을 설교하는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과 말씀이 기록된 종이는 결코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아주 간단한 말씀이라도 성경을 봉독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이 지닌 설교에 대한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견해는 바로, 설교는 회중들과의 영적인 싸움이라는 것이었다. 술련된 설교가들은 설교에 임할 때 마치 경기에 임하는 운동선수들과 같은 자세를 갖추었다. 그러고는 마치 레슬링 선수가 상대편을 보다 잘`거머잡기'위해 같은 동작을 다 취해 보듯이 회중의 영혼을 멋지게 `사로잡기'위해 전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설교를 잊어버린 설교자

 딤전 4:8-16; 고후 2:14-17; 빌 4:11-13

  리빙스턴이 신학생이던 시절의 일이다.

 여러 신학생들이 다 설교를 준비해 설교화 교수에게 검사를 받은 후 설교 내용을 암기하였다가, 주일이 되면 근처에 있는 교회에 나가서 설교를 하였다. 리빙스턴도 역시 설교를 준비해 교수에게 검사를 받은 다음 주일이 되어 근처 어느 교회의 강단에 서게 되었다.

 리빙스턴은 설교를 하려고 강단에 올랐는데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아서5분 가량을 묵묵히 서 있었다. 급기야 "성도 여러분, 저는, 그만, 설교할 내용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한 후 도망치듯이 교회를 나와 버렸다.

 리빙스턴은 이 경험으로 설교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낯뜨거운 실수로 인해 그는 더욱 위대한 설교가, 대 탐험가가 되어 후세에 많은 공헌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설교의 능력

  몇년 전 우리 교파에서 발행되는 '약속:사화적 활동'이라는 작은 잡지에, 우리교회에 다니는 10명의 사회 운동가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들은 사회정의와 인종평등을 위한 일선에다 그들의 삶과 사역을 헌신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되었습니까?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러한 일선으로 내몰았습니까?"

 10명중 8명의 대답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설교였습니다. 설교가 나로 하여금 돌이켜 사물을 바로 보도록 만들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설교를 통해서였습니다."


설교의 영향력

 사 55:6-9; 시 44:21; 고전 14:2; 렘 49:10

  감리교 초기의 위대한 평신도 설교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존 넬슨이 자신의 회심을 설명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설교가 지니는 영향력에 관하여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넬슨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휫필드 선생은 내게 훌륭한 악기를 연주하는 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분의 설교는 나를 즐겁게 하였고, 나는 휫필드 선생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한 웨슬리 선생이 무어필드에 처음 설교하러 오셨을 때까지는 나는 마치 둥지를 벗어나 방황하는 어린 새 같았습니다. ...웨슬리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당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시면서 내가 서 있는 곳을 향하여 얼굴을 돌렸습니다. 내 생각에 그 때 그 분의 두 눈은 내게서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전에는 그 분의표정은 내게 경외스러울 정도의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분의 설교말씀은 내 가슴을 시례추처럼 진동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 분이 말씀하실 때, 나는 그 분의 말씀이 모두 나를 향하여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웨슬리 선생이 말씀하실 때, 나는 `이 분은 내 마음의 비밀을 말해 주실수 있을거야. 이 분은 나를 이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을거야. 이분은 내영혼의 치료약, 곧 예수님의 보혈을 내게 알려주셨어.'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웨슬리 선생은 당신의 설교를 결론 짓기 전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악한 자는 그의 길을 버리고,


설교의 지적인 호소와 감정적인 호소

 딤전 1:15; 4:14-16; 행 2:35-41

  템플 대주교는 런던 주교의 설교를 들었을 때 무척 큰 감동을 받았고 스스로가 뭐든지 할 준비가 다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격앙된 느낌은 곧 다음에 경험된 감동, 즉 음악회라든지 훌륭한 서적으로부터 얻은 감동에 의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이후에 성서 속에서 그 주교가 인용했던 본문을 대했을 때 템플 대주교는 그 말씀으로 감동받았던 일을 기억해 냈고, 대체 자기가 왜 그렇게까지 감동 받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느라 애썼다.

 그러나 이후 템플 대주교가 스테프니 주교의 설교를 들었을 땐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했다. 다만 그는 주교가 지적하고자 하는 주안점들을 서로 연결시키느라 애썼고, 그 고리를 놓칠까 두려워하며 그 설교를 들었다.

 그 설교가 주는 기쁨은 그저 지적인 것이었을 뿐,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설교에서 인용했던 성서 본문을 찾아봤을 때, 대주교는 비로소 주교가 저적했던 것들을 모두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것들 의연결은 필연적이었다. 그리고 템플 대주교는 그 본문이 분명하게 말해주는 가르침들을 내가 따르고 있는지 아니지를 알수 있게 되었다. 대주교에게 있어 그 지적인 설교가 더 큰 가르침을 오래도록 새겨 주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설교의 진전

  어떤 젊은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아이를 양육하기 위한 규칙". 그러나 그 후 그 목사님이 아이들을 갖게 되자, 그 다음엔 주제를 바꿔서 "아이를 양육하기 위한 제언"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아이가 십대가 되었을 때에, 그 목사님은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설교하지 않았다.


설교의 환경을 알아야 한다

 벧전 5:2-4; 요 10:14; 21:15, 16

  목회 장소와 환경을 기억한다는 것은 설교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조각가 챈트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옛날 사람들은 동상이 세워지게 될 장소를 알고서 작업을 했으며 그 동상이 언 정도의 빛에 노출될 것인지를 예상했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는 설교 대상지역과 그 지역 사람들을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을 거의 완전하게 무시해 버리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야.

 18, 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거우 50명 정도밖에 출석하지 않는 도심지 교회의 어떤 설교자는 "열심있는 성도들이여!"라는 찬송가로 예배를 시작한다. 빈민보호소에서 "너의를 위하여 보화를 땅에 쌓아두지 말라."라는 는 본문으로 설교한 목사도 동일한 망각을 하는 것이다.

 지방 교도소에서 "참석해 주신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하여 "모두가 이제 각자의 처소에서 떠나게 되기를"열렬하게 바라는 말로 강연을 끝냄으로 기결수들에게서 대단한 인기를 얻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주 어리석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상황을 오판한다면 헛수고가 되고 만다.

 도시 사람들은 시골 사람들과는 매우 다르다. 또한 중산층 사람들과 노동자 계층 사람들과 매우 다르다. 물론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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