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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天國)과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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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天國)과 지옥


 


기독교에 가장 큰 소망이자 인간에게 알려지지 못한 세계입니다.  이는 약간의 민간

신앙이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세계입니다. 불교의 극락과는 다른 개념으로 소개되

고 있습니다.

우선 기독교의 천국은 장소성이 있으며 교주의 거처지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이 특이

합니다.  게다가 성도들의 영원한 삶의 장소라 함에는 여간 경이롭지가 않은 사상입

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4대 중심으로 보는 회개의 역할과 기도의 특권 그리고 증거 생활에

이어 천국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성경이 강조한 빈도수가 그러합니다.

천국은 부활에 대한 가르침의 결과이자 모든 신자의 활동이 보장되는 현장이기 때문

입니다.


천국의 생활은 지상에서 그 완전함을 나타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약간의 맛을 

볼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신자의 생활이 유쾌하고 소망 가운데서 즐거워 할 때 우

리는 천국 같다고 이해할 뿐입니다. 

이 천국에 대한 관심의 정도에 따라 신앙의 정도를 판단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

니다. 내세의 천국에 대한 성경적인 믿음이 없이는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신앙적

판단으로 처리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천국에서 이 세상의 모든 삶에 대한 판단을 받아 그 영광대로 상을 받아 천

국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상 성도의 생활은 천국의 영생에 대

처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구체적인 모양과 삶의 방식에

관하여는 성경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종교의 내세관보다 명확

합니다.


기독교의 강조점이 천국이 아니고  삶의 과정에 관설하여 집중한다면 세인들의 철학

에는 호응을 많이 받겠지만 성경적으로는 미약합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은 어쩌면 다

른 이방인들이 기대하는 기복적 신앙 사상에는 상통한 점이 많은 것을 봅니다. 구약 

성경에는 천국이라는 낱말이 없듯이 정통 유대인은 내세의 천국을 믿지 않습니다.


이제 구약의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은 천국으로 종결지으려 하는 성경 사상을

우리는 역력히 알 수 있습니다.  억지로 사람의 요구에 충족키 위한 신학을  만들어

상황론적 신학 즉 상황윤리 신학이라는 것 등을 발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근본 목적을 흐리게 하고 종교적으로만  가능케 하는 신앙자로 만들게 될 것

입니다.


기독교는 종교 그 이상의 무엇이기에 우리는 종교적 색채로 잘 소개 해 주는 세속을

위한 가르침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이는 성경에 초등 학문이라 했으며 예수의 가르

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의 세계로 알 것뿐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사람이 가서

살 곳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곳에 가셨습니다.우리가 그의 재

림 시에 부활되어 그곳에 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만약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신앙의 전면적 활동과 사상이 헛되고 말 것이라 하며 이 소망이 중심이 되

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태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자들의 천국에 대한 간증으로 그 세계를 이해하려 하

는 자들도 있겠지만 자칫하면 오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고 설

명 또한 규칙적이지 못한 것을 듣게 됩니다. 

성경에서 천국을 이해 할 수 있도록 한 여러 증거가 있습니다.  다만 난해하기 때문

에 학문적 이해와 아울러 천국형 인격과  감동을 힘입어 깨닫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

다.


요한 계시록에는 천국에 대하여 추상적이지 않고 보다 소상히  그 모습을 기록해 주

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적 해석만으로는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다만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과 천국의 모양을 구체적으로 말하려는 자는 성경에 일치할 것

을 우리는 주장할 뿐입니다.


천국은 육감과 이성적(理性的)지식으로 이해될 수  없는 성령의 감각 지대이기 때문

에 지상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를 지닙니다.

영광스럽다든지 환하다는 말들은 이해하는 자에게 그 실체를 느끼게 맡길 수밖에 없

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의 실록이나 과학적 물체나 수학적 이치를 표현하는 것과 감

정을 이야기하는 것, 이를테면 시적 감각을 형용  할 때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감정까

지 필요로 하는 언어의 전달이 있는 것입니다. 천국이란 단어는 세상의 지형을 말하

듯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존재하는 곳이며  의식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완전한 증명을 할 수도 바랄 수도 없다는 결론입니다.  우선적으

로 부활의 신체적 조건과 감각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천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부활하신 몸으로  사람들과 땅에서  40일을 생존하시고 음식을

드신 것으로 부활의 몸은 영이 아니라 몸이라는 것을 증거 하셨습니다(눅24:).

그런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에  우리 인간으로서 바랄 수 있는 최대의

선물로 보는 것입니다.  부활,  그것은 모든 신앙의 조건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입니

다.


현대 신학자 중에는 예수의 역사적 부활이나 우리들의 부활을 불신하는 자도 있습니

다(불트만).  또는 부활이 강조 될 것이 아니라고 하는 식의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절대적으로 증거 되야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성경이 시대적 산물 같은 철학 도서나 이스라엘의 국지적 종교의 이상이라면 우리는

분명히 역사를 바로 이해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진리이며 진리는 역사

를 관통하는 완전의 저력을 갖춘 것입니다. 진리는 시대 역사에 호응하기 위해 자신

을 개혁하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이 개혁돼야 할 것입니다.


천국은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의 한 장르가 아니라 어른 신자에게 더욱 강조되

어야 하는 기독 신앙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설교와 전도에 있어 부활과 천국이 없다

면 그것은 성경 사상자들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성경은 종교 서적이 아니라 내세에

가야 할 인간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이것이 예언이고 희망입니다.


짤막한 이생의 삶을 위한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허무를 솔로몬처럼 외치고

있습니다.  사회의 비리와 정치가들의 죄 그리고 여러 가지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철

학적 비판과 개혁을 해 왔지만 아직도  우리는 문제 속에서 거듭나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을 느낍니다.


일생을 연구하고 개혁하고 또 변화를 추구하여도  우리는 스스로 이생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갈급한 심령으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러나 천국이라는 소망 가운데서 살

다가 간 자들의 유언과 그들의 실록에는 만족과 기쁨이  내재했고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케 했습니다.


천국은 교회가 가진 가장 큰 소망의 노래이며 전도의 최종 목표입니다. 이것을 빼놓

고는 아무런 활동의 근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삶의 한

모습을 위해 기독 신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천국이 있기 때문에 믿고 목회하고 전도하며 순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천국에 대해 많은 비유와 교훈으로 소개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 사역의 목표가 곧

천국의 소개임을 밝히셨습니다.






그 나라의 하나님



 


G.E.Ladd 의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revised edition, edited by D.A.Hagner를 번역하면서, 정리한 내용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들은 처음에는 그 뜻에 대한 언어학적, 주석학적 연구와 그 용어 자체의 쓰임으로부터 도출되었습니다. 이 역동적인 해석은 복음의 신학에 의해, 좀더 엄격하게 말하면 복음서의 하나님에 대한 교설에 의해 좀더 설명되었습니다.


그 나라는 인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basilieia tou 'theou'. 강조점은 첫 번째가 아닌 세 번째 단어에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고려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그의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메시아 개념도 마찬가지다”


만약 그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라면, 그 나라의 모든 측면은 하나님의 특징과 행동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존 역시 하나님의 현재의 활동의 특성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하고, 그 나라의 미래는 그 시대의 마지막에 그의 왕적인 통치가 구속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유대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전체적으로 군주적인 통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왕적 지배권이 궁극적으로 모든 존재를 넘어서는 하나님이 아니신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율법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대의 마지막에 그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행동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현존에 대한 선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역사 속에 구속적으로 활동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측면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역사 안에서 행하고 계신 하나님은 또한 그의 영광과 구원하는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 이 시대의 마지막에 다시 행동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미래 모두 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의 마당이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나타냅니다.


 


찾으시는 하나님 seeking God


‘찾으시는 하나님’이란 명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개념에 대한 연구를 통해 나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상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 안에 있는 새로운 요소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의 가르침과도 병행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찾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경험되어야 할 분이지, 전해져야 할 가르침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 속에 반영되어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유대교의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들의 하나님은 일관되게 역사 속에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고 또한 구원하시기 위해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하나님은 악한 세상으로부터 떠나버리셨고 더 이상 역사 속에서 구원을 위해 활동하시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의 마지막 구속적 행위가 그 시대의 마지막에 일어나리라고 기대되었지만, 그 중간에는 하나님은 역사와 동떨어져 있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행동을 개시하셨을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이 지금 다시 역사 속에서 구속적으로 활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알리지 않았던 방식과 정도로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구약의 약속의 성취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메시야적 구원이 임했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죄인들을 찾으시고, 잃어버린 자들을 그의 통치로 불러들이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는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에 대해 율법의 역할이 예수님의 종교적 경험으로 대치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랍비적 사고의 흐름을 따랐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사역은 그의 내적 경험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경험으로 들어올 때, 하나님 나라가, 그의 통치가 그들에게 ‘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경험으로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 나라가 발전하고 온 세계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에도 간직해야 할 중요한 요소들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측면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합니다. 우리 주님의 메시지와 사역의 핵심에는 찾으시는 사랑으로써 하나님의 실재가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잃어버린 자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기를 기다리지만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그 사실은 예수님 자신의 사역에 구체화되었습니다. 그가 바리새인들로부터 의에 대한 규칙을 어기고 죄인들과 어울렸다고 비난을 받았을 때, 그는 죄인들을 찾으시는 것이 그의 사역이라고 답하셨습니다.(마가 2:15~17)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복음을 가져오셔야 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셨고, 그들의 죄책감을 들추어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보다 그들의 필요를 지적했고, 그것을 위해 봉사하셨습니다.


죄인을 찾아오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진리는 누가복음 15장에 길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세 개의 우화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친근한 식탁 교제를 나누는 것에 대한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나와 있습니다. 그는 길 잃은 양을 찾는 것이,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이, 용서를 받을 만하지 않더라도 탕자를 가족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신적인 목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각각의 우화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찾는 일을 주도하십니다. 목자가 양을 찾으며, 여자가 동전을 찾으려고 청소를 하며,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올 것을 기다립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중심적인 특징은 돌아오는 아들이 아니라 기다리는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그 우화는 일차적으로 인류이 방탕함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묘사합니다.


유대 학자들은 죄인에 대한 이러한 관심이 새로운 것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바리새주의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첫 걸음을 먼저 내미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 주도권이 보통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회개)에 있다고 말합니다. 즉, 죄인이 회개해야 하나님이 만나주십니다. Montefiore 는 그와 비교되는 예수님의 “위대함과 독창성”이 “죄와 죄인들을 향한 인간의 태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을 피하기 보다는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죄인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유대교에서는 완전히 들을 수 없었던 것이며, 에스라4서에서 표현되는 것들과 비교하면 완전히 배치됩니다. 에스라4서에서 저자는 의로운 사람이 적음을 한탄하며 말합니다.


      “정말 나는 죄인을 변화시키는 일이나, 그들의 죽음이나, 그들의 심판이나 멸망에 대해 관심이 없다. 

       오히려 나는 의의 창조에, 그들의 순례에, 그들의 구원에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 inviting God


‘찾으시는 하나님’은 또한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종말론적 구원을 많은 손님들이 초대된 연회나 축제로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사이에 자주 있었던 식탁 교제를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들을 제공하고 미리 보여주는 살아 있는 비유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식탁교제는 가장 친근한 관계이며, 예수님의 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먹는다는 사실에 분개했습니다.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렸습니다. ’call'은 'invite'의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연회로 죄인들을 초청하는 것이 정확히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지만, 그러한 호출은 또한 초대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예수님의 회개로의 호출이 초대라는 특징은 그의 요구가 유대교의 가르침과 다음을 보여줍니다. 유대교에서 회개의 교리는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는데, 그것은 구원이 얻어지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크게는 율법의 용어로 이해되었습니다. 부정적으로는 율법에 대항하는 악한 일과 위반을 없애는 것이었고, 긍정적으로는 신적인 뜻의 표현인 율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멍에”는 “회개의 멍에”라고도 불릴 수 있었습니다. 일의 차례는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인간의 행동이 신적인 행동에 선행해야 합니다.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죄의 용서는 죄인에게 달려 있다. 거기에는 중개자에 대한 질문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회개에 대한 요구는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호출 뿐만 아니라, 신적인 초대에 응답하라는 요구입니다. 이 신적인 초대가 전제되어 있는데,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회개 요구를 세례 요한의 요구와 구별시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의 날에 비추어 그들의 죄를 회개하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초대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행동하고 있으며, 역동적으로 역사 속에 그의 구속적인 뜻을 드러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과 행동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찾으십니다. 그는 그들을 메시야적 축복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는 그의 은혜로운 제안에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응답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새로운 선지자가 등장했는데, 실상 그는 선지장 이상이며, 사람들에게 그가 약속한 축복 그것을 가져오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시며, 그들을 그의 통치에 복종하도록 초대하셔서, 그가 그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아버지 되심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 두 요소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특별히 종말론적인 상황 속에 가장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특별히 주목할 만합니다. 종말론적 구원에서 의인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마태 13:43) 축복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상속을 준비하신 분은 바로 아버지이십니다.(마태 25:34)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선물을 부여하는 분도 아버지이십니다.(누가 12:32)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라는 가장 고귀한 선물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인데, 이 통치는 모든 세계에 미치는 것입니다. 그 날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의 제자들과 새로운 교제를 즐기게 될 것입니다.(마태 26:29) 하나님의 아들들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나누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마태 6:9,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왕되심과 아버지되심은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입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언어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에 대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 모든 사람이 아닌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축복이며 관계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되심의 관계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옴으로 자격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게 하시는 것은 아버지로써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그들의 아버지로써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아버지되심이라는 선물은 종말론적인 완성, 미래에만 속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 나라의 미래의 선물은 현재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렇게 간주하라고 가르친 사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현재의 관계 속에서조차, 아버지되심은 하나님 나라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아는 사람은 삶에서 가장 고귀한 선물이 하나님 나라이며, 하나님의 의가 되는 사람들입니다.(마태 6:32, 33, 누가 12:30)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기원과 성격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생깁니다. 아버지되심이란 개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묘사하는 방법으로 나타나는 구약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언약 때문에 하나님의 장자입니다.(출애굽기 4:22) 하나님은 따라서 종종 그 나라의 아버지로 생각되었습니다.(신명기 32:6, 이사야 64:8, 말라기 2:10) 이것은 자연적으로 생긴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전체적으로 그 나라의 아버지이시지만, 이스라엘이 배교하면,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이스라엘 안의 의로운 신앙적 남은 자들에게만 국한됩니다.(시편 103:13, 말라기 3:17) 정경 이후의 문서에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특별히 각 개인들과 관련하여 강조됩니다. 아버지되심의 완전한 의미는 종말론적이며, 하나님 나라에서 경험될 것입니다. 랍비 문학에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윤리적인 관계로 설명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견해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 속의 아버지되심이라는 이 개념을 결정적인 주제로 만들었고, 보편적인 용어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라는 유대교의 가르침을 도입해서, 그것을 심화시키고 풍부하게 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확대시켰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은 그의 모든 도덕적인 완벽함의 합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가 되어야할 그 분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아버지라고 합니다.


최근의 비평가들은 “흔히 알고 있는 바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인간의 형제됨’이라는 교리를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어떤 근거도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용어에 대한 연구로부터 두 가지 사실이 도출되었습니다. 1) 예수님은 자신을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 그룹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0:17에서의 용법은 복음서의 것보다 더 명확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예수님은 메시야적 아들이지만, 그의 제자들이 그와 같은 식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아닙니다. 2) 예수님은 단지 그의 제자들만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메시야적인 아들됨을 인식하고서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아버지되심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태복음 5:44~45)


이 말은 하나님이 보편적인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며, 하나님이 그의 자녀로써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이 해석은 전이해를 가지고 이 본문을 읽은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단지 예수님의 제자들의 아버지로만 보여집니다. 선인과 악인 모든 사람에게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신적인 아버지되심과 혼동되어선 안됩니다. 똑같은 본문을 주석해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라는 결론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마태 6:26)


하지만 하나님께서 새들을 돌보는 것은 아버지로서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가 아닌 자들에게 그의 창조의 축복을 부여하는 것도 아버지로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하나님의 찾으시는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 나라에 그들을 복종시키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찾으시는데, 그가 그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아버지되심은 탕자의 비유에서도 발견됩니다.(누가 15:11~24) 탕자는 모든 사람이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가 속한 곳으로 돌이키기만 하면 된다고 해석됩니다. 이런 해석은 그 비유가 일상의 삶에서 나온 이야기로써 그 목적이 기본적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자세한 부분까지는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것은 거기 나오는 돼지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처럼 부적절한 주해입니다. 이 부분의 세 가지 비유의 중심적인 진리는 간절히 그리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이며,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여자이며, 탕자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비유이지 아들에 관한 비유가 아닙니다. 세 비유 모두 잃어버린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한 가지 요소는 그것이 소유물이란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은 양떼에 속했으며, 동전은 여인의 소유이며,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집에 속해 있습니다. 인류가 있어야 할 적절한 장소는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 잠재적으로는 보편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이 낯선 땅에 있을 동안에는 그의 아들됨은 공허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으로 돌아오게 되면, 즉 그가 속한 곳으로 돌아오면 아버지의 집에 속하게 됩니다. 하나님도 역시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셔서 그들이 아버지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갈망하십니다.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의미는 Jeremias가 연구해 왔습니다. 예수님이 아람어인 ‘abba’를 하나님을 지칭하는데 사용하였고, 그의 제자들에게 ‘abba'라고 부르라고 가르쳤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러한 아람어 형태는 서신서들 속에서 그리스어의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로마서 8:15, 갈라디아서 4:6) 'abba'라는 단어는 아이들의 말에서 따온 것인데, 지금의 ‘아빠’라는 말과 비슷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일상적으로 이 단어를 하나님을 말하는데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 단어가 너무 친근해서 실례가 될 것 같아서입니다. 예수님은 아이처럼 하나님께 말했고, 그의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예의 차원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의미에서 ‘아버지’를 사용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마태 23:9)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그 말을 아껴두어야 합니다. 'abba’는 예수님에 의해 사람들에게 주어진 확실함과 친밀함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표현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시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선물을 제공하지만, 그는 여전히 은혜의 선물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보복하시는 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잃어버린 자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신적인 거룩함을 그저그런 친절함으로 바꾸어버리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찾으시는 사랑이시지만, 그는 또한 거룩한 사랑이십니다. 그는 하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의 왕국을 거절하는 사람은 그의 심판 아래 있게 됩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랑이라는 사실은 인류를 곤경으로 몰아넣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랑의 제안에 반응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유죄판결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Bultmann은 하나님을 ‘요구자’로써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결과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거나 심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보복하는 의로움에 대한 강조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도 반복됩니다.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서 종말론적 왕국의 도래는 의인을 위한 구원과 불의한 자에 대한 격렬한 심판을 뜻합니다.(마태 3:12) 예수님도 똑같이 가르쳤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의 이면에는 영원한 불의 형벌을 겪는 것이 있습니다.(마태 25:34,41)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예수님 안에서 현존하며 역사하여 사람들을 악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합니다. 하나님은 참회하는 자에게는 아낌없는 죄사함을 주시며, 죄인들을 직접 찾아서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눈이 멀어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악의 활동을 구분할 수 없어서 하나님 나라를 귀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다면, 그 사람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고 영원한 죄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신자들을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사람들에게 두려운 운명이 기다릴 것입니다.(마태 18:6) 찾으시는 사랑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는 하나님의 의로움과 정의를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미는 구원이면서 동시에 심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심판은 원칙적으로 인류 가운데서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결정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의 선포를 거절할 때, 그들의 종말론적인 운명이 결정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양한 도시를 방문하여 천국을 선포했지만 거절되었을 때, 제자들은 그들의 발의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을 표현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알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왔다”는 선언은 약속 대신에 심판이 되었습니다. 두려운 심판이 그런 도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설교했고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행한 도시에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가버나움에 선언된 심판의 성격은 명백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처럼 누가복음은 심판이 고라신과 벳새다에 떨어질 것이라고 종말론적 어조로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와 마태 모두에서 가버나움에 대해서는 덜 종말론적 용어로 말하는데,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부였고 왕국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들었던 이 자랑스런 도시가 하데스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태가 종말론적 어조를 붙이기는 했지만, 그는 이 말을 역사 속에서의 심판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버나움에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가버나움에 대한 이 심판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사야 14:13~15에서 바벨론에 대해 행해졌던 모욕의 노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마태와 누가 모두가 기록한 중요한 요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것에 대한 심판은 종말의 날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일어날 것입니다. 세속적인 교만으로 높아졌던 가버나움은 수치스러운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소돔과 같은 운명 - 멸망을 겪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14 장을 인용한 것은 적절합니다. 바벨론처럼 가버나움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예언자들처럼 예수님은 종말론적인 시각에서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심판을 위한 신적인 임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의 파괴는 하나님 나라의 심판일 것입니다.


역사적인 용어로 심판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하는 부분은 다른 데도 있습니다. 많은 말들이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의 거민들에 대해 그들의 영적인 무지와 제공된 메시야적 구원을 인식하지 못한 것 때문에 심판받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하나님 나라의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암탉의 은유는 구약으로부터 온 것입니다.(신명기 32:11, 시편 17:8, 36:7) 그리고 이방인을 개종시킨 유대인은 Shekianh(하나님의 임재)의 날개 아래로 그를 데려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의미는 어떤 사람을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게 했다는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이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너의 집이 버림받았고 황폐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너의 집”이 성전을 의미하는지 유대 민족을 의미하는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성전이나 유대 민족이나 흥망을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제안이 거부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구속된 세계의 수도가 될 것이라 기대했던 예루살렘과, 인류의 유일한 성소인 성전은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황폐케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누가복음 19:41~44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방문의 때”를 몰랐기 때문에 우셨습니다. 이 단어(episkope)에는 그의 백성을 방문하러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예언적인 사고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말에서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평화를 주시려고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은혜와 자비 가운데 이스라엘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 길을 택했습니다. 그 재앙은 그 도시에 죽음과 파괴를 가져올 역사적인 방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과 성전에 닥쳐오게 될 역사적 심판에 대한 다른 본문들을 살펴볼 필요는 없습니다. Wilder는 예수님이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볼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임박한 역사적인 재앙으로 장차 올 일을 묘사할 수도 있었고, 묵시적이고 초월적인 사건으로써 다가올 일을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장차 올 신적인 방문은 역사적이면서도 종말론적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역사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그의 나라의 축복을 주기 위해 자기 백성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제안이 경멸받았을 때, 심판의 방문이 뒤따릅니다. 역사 속의 심판과 마지막 때의 종말론적 심판이 모두 뒤따릅니다.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왕적 통치의 심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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