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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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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예화


▶수원 중앙 침례교회 앞에 큰 빌딩이 있는 데 그 지하실이 나이트 클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건물이 교회 교육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전에는 예배드리고 은혜 받고 나오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나이트 클럽


 이었는데 이제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김장환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 건물이 전에는 술집이었었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건물이 되었네요. 어떻게 저렇게 큰 건물을 샀어요?'

  목사님이 말씀하신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 할머니 권사님 한 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500만원을 손에 쥐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서 은혜롭게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음란한 네온 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늘 보기가 안 좋았지요. 나는 자녀들이 주는 돈을 먹지고 않고 입지도 않고 알뜰살뜰 모았습니다. 저 건물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못 하고 죽네요. 이 돈을 목사님에게 드릴 터이니 목사님이 저 건물을 사주세요'

  그래서 권사님 장례를 마치고 그 할머니의 뜻을 교인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모두가 공감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시작하여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건물을 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고 나면 나도 감격스럽고 다른 사람도 감격스러운 일 그런 일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요즈음 공장마다 어렵고 사업마다 불황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공장이 어려워졌습니다. 한 명 두 명 떠날 때 독실한 크리스천 자매도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물으셨습니다.

  '왜 떠나려고 하시나요?' '공장이 너무나 안 되어서요. 제 월급도 줄 형편이 못 됩니다'

  '그럼 자매님까지 떠나면 그 공장은요?' '문닫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물어 볼 것이 있습니다. 자매님은 불을 킨다면 언제 키지요?' '어두울 때 키지요'

  '그러면 이렇게 공장이 어려울 때 불을 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세요. 이런 때 진실로 같이 일해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자매님은 떠나지 말고 끝까지 일해 보세요'

  목사님의 조언을 듣고 그 자매는 월급을 제 때 받지 못 하여도 끝까지 사장과 함께 동거 동락하면서 크게 일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나중에 큰 보상을 받았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을 감격시킬 수 있는 일이라면 정말 보람된 일입니다.


 


  ▶일을 짜증스럽게 하는 사람이 있고 그 일을 하기만 하면 감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 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제목은 '원숭이 아빠 40년'이라는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서울 대 공원에서 원숭이,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을 사육하는 사육사 이길웅씨 이야기였습니다. 김포 금성 초등학교 5학년 때 창경원으로 소풍을 가서 원숭이를 보는 순간 벼락치듯이 꿈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원숭이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원숭이 사육사가 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 원숭이 사육사로 취직을 하여 40년을 한결같이 원숭이와 함께 살았습니다. 원숭이만 기르면 그렇게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40년 간 42마리 원숭이를 낳아서 길렀습니다. 3개월에 한번 정도 집에 들어가서 잘 정도입니다. 그리고 동물원에서 원숭이와 함께 지내는 것이 즐거움이었습니다. 원숭이가 자식 같다는 것입니다. 원숭이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새벽 3시면 일어나서 늘 건강상태, 우리 상태를 점검함으로 하루 일과가 시작됩니다. 그가 은퇴하고 딴 사람이 사육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원숭이가 아프기 시작하였습니다. 낫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동물원 당국은 그를 할 수 없이 다시 불러서 사육사 일을 하고 있다는 보도입니다. 그가 가기만 하면 원숭이가 자식처럼 품에 안기어 평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원숭이만 사육하면 감격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면 즐겁고 감격이 있습니까?


 


  ▶주후 386년 가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태리의 밀라노에서 교회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사건이 하나 발생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어떤 교수 한 사람이 친구 집을 방문했습니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조용히 의자에 혼자 앉아서 깊은 상념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내가 왜 이럴까?' 자신의 방탕한 삶을 되돌아보면서 깊은 고뇌에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어떤 어린 아이 하나가 지나가면서 부르는 노래 소리가 우연히 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 가운데 그의 귓가에 강하게 울리는 가사가 한 구절 있었습니다. 라틴말로 '톨레 레게! 톨레 레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책을 펴서 읽어라! 책을 펴서 읽어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신비스런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옆에 있던 책을 한 권 집어들었습니다. 그 책은 로마서를 베낀 사본이었습니다. 책을 펼쳤습니다. 눈에 확 들어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롬13:13-14절의 말씀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 말씀을 읽는 순간에 그의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성령께서 강하게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방탕한 삶을 다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그 뒤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통해서 놀라운 영광을 나타내주셨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성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서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그의 삶이 180도로 완전히 바뀌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뒤에 약 천 년이 흘렀습니다. 어거스틴 파의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쳤는데 그가 주로 가르친 과목이 로마서였습니다. 한번은 그가 교황청에 볼 일이 있어서 로마로 건너갔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로마에 가면 모두가 빌라도의 계단이라고 하는 높은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올라가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중에 자기가 죽어서 연옥에 가게 되어 당할 고통을 미리 맛본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그 관례대로 무릎을 꿇고 기어서 힘들게 그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에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서 아주 강하게 솟구치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롬1:17절에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그에게 들렸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부질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그 길로 독일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마틴 루터입니다.

  하나님은 마틴 루터로 하여금 로마서를 통해서 중세의 암흑시대에서 기독교를 건져내게 하신 것입니다. 그 뒤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서에 의해서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칼빈도 감화를 받았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감화를 받았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후에 독일 교회가 깊은 침체의 수렁에 빠졌을 때 독일 교회에 새로운 강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바로 이 로마서였습니다.


 


  ▶1704년 독일의 '베냐민 슈몰크' 목사님 내외분이 심방을 갔다 집에 와 보니 집이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어린 형제가 집에 있었는데 불러 보았지만 대답이 없습니다. 혹시 하고 잿더미를 들추어보니 어린 두 형제가 부둥켜안은 채 죽어 있었습니다. 그 두 어린 아들의 시신을 앞에 놓고 망연자실했습니다. 

  그때 별생각이 스쳐갔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순간 분노와 서운함과 의문이 몰려 왔습니다. 인간적인 오기도 서려왔습니다. 그런 생각에 휩싸여지자 온 몸에 소름이 끼쳐 왔습니다. 

  그 순간 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여기에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하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에 평온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영감이 넘쳐 나왔습니다. 그때 주어지는 감동의 영감을 글로 적어 놓았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온 영혼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사 뜻대로 하소서' 여기에 홀부르크라는 분이 곡을 붙였는데 그 것이 오늘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431장 찬송입니다. 

  참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신앙의 세계에는 이런 감동이 있고 기적이 있습니다.


 


  ▶원래 설교는 재미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가 잔소리를 하면 '또 설교하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가 '재미없다'고 행각하면 재미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시작되면 잠이 오는 것입니다. '은혜 안 된다'고 생각하면 곧 바로 잡념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오늘은 듣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설교가 은혜롭고 재미가 있어집니다. 

  부흥회 때나 산으로 기도회를 갔을 때 듣는 설교가 주일날 듣는 설교보다 훨씬 은혜가 되고 재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듣겠다 하고 작정하고 찾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억지로 끌려 나와서 설교를 들으면 설교가 재미있을 리가 없습니다. 설교가 재미없다고 생각하면 그 설교는 지루합니다. 또 길게 느껴집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너무 길게 했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시작되면 모두 졸기 시작합니다. 어느 집사님이 더 참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더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목사님 설교가 15분만에 끝났습니다. 밤새 준비한 설교원고를 주일날 아침에 강아지가 물어 가는 바람에 오늘 설교가 짧게 끝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이 집사님이 목사님에게 가서 그 강아지를 한 달만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담임 목사님에게 갖다주겠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길게 하는 목사일수록 재미도 없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수요일 저녁에 그 날이 남편의 생일이라 손님 접대를 하다 중간에 잠깐 나와서 예배드리려고 교회에 갔습니다. 그 날 예배가 빨리 끝났으면 좋았는데 그날따라 길어졌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마지막으로'라고 말했습니다. '야 이젠 끝나나 보다' 했는데 조금 있다가 '끝으로' 그럽니다. 그리고 한참을 설교하다가 이번에는 '결론으로' 그럽니다.

  마침내 설교가 끝나고 주 기도를 했습니다. 주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오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셨다고 찬송 한 장을 더 부르자고 그럽니다. 그것도 가장 긴 241장 하나님아버지 주신 책은 그 찬송은 5절까지 있습니다. 

  예배를 이렇게 드리면 안 됩니다. 예배드리려면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길어도 듣겠습니다'하고 앉아 있어야 은혜가 되고 말씀이 귀에 들어옵니다. 무엇이나 자세가 중요합니다. 행복은 마음으로 그렇게 결정하면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연탄장수는 매일같이 연탄마차를 끌고 다니면서도 늘 웃는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매일같이 검은 얼굴에 흰 이를 내 놓고 웃고 다니는 그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워서 웃고 다닙니까' 그러자 그 연탄장수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설명해도 모를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있는 평안과 감사의 마음을 설명한들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여인이 차를 타고 달리는데 도중에 차가 멈추었습니다. 응급처치를 해 보았지만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약속시간은 다가오고 초조했습니다. 지나가는 차를 세워 보았지만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암담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었습니다. 

  그때 차 한대가 다가오더니 신사 한 사람이 내렸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엔진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 신사는 한참 엔진을 만져보더니 '이제 시동을 걸어 보라'고 합니다. 시동이 잘 걸렸습니다. 너무 신기했습니다.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사례하려고 지갑을 열었더니 한사코 사양했습니다. 

  그럼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하니까 이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이 차를 설계한 헨리 포드입니다' 그리고는 살아져 갔습니다. 얼마나 뒷맛이 상큼하고 즐겁고 행복한 모습입니까?


 


  ▶어떤 분이 이 나라가 싫어서 이민 가려고 수속을 밟고 있었습니다. 거짓과 속임과 무책임과 부정과 이기주의에 신물이 났습니다. 이 땅에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주차해 놓은 차를 누가 긁어놓았습니다. 순간 또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차 유리에 쪽지 한 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운전이 서툴러 차에 금을 그었어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연락방법은 없고 시간을 없어서 그냥 갑니다, 연락처를 적어 놓았으니 연락주시면 변상해 드리겠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 분이 그 쪽지를 받아들고 그 날 얼마나 마음이 흐뭇하고 반갑고 행복했던지 '차에 금을 그었을 때는 빨리 도망가는 것이 보통인데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는가? 이 나라는 아직도 희망이 있는 나라구나'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가 싫어 이민 가려던 계획을 취소했다고 합니다.


 


  ▶다이어트를 하는 어떤 여성이 자신의 몸 때문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먹고 다이어트를 해보지만 아무리 해도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성은 우선 몸에 꽉 끼는 옷을 입고 날씬해 보이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얘, 너 참 힘들겠다. 옷이 그렇게 끼어 얼마나 불편하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친구를 만나면 인사가 다 이렇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이 여성이 마음을 바꾸어 이제 헐렁한 옷도 입고 먹을 것도 먹으면서 하는 다이어트로 방법을 바꾼 것입니다. 그랬더니 친구들의 인사가 바뀌어 '얘, 너 살이 빠진 것 같아. 옷이 헐렁하네' 사실은 살이 빠진 건 아니지만 살이 빠진 것 같다는 인사를 들으니 기분이 참 좋더랍니다. 

  그래서 마음에 좋은 기분으로 살겠다고 생각하면서 헐렁한 옷을 마음대로 입고 지내기로 했다고 합니다.


 


  ▶아동 문학가 소파 방정환 선생님 집에 어느 날 밤 강도가 들어와 돈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순순히 390환을 내주며 '여보시오. 돈을 가져가면서 고맙다고 하고 가져가야 하지 않소?' 하고 말했습니다. 강도는 어이가 없어 '그래, 고맙다.' 하고는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그 강도는 붙들려 왔습니다. '이 사람이 방 선생님 돈을 빼앗았다지요?'하고 경찰은 물었습니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너 잘 만났다 이놈!' 했을 것이나 방 선생은 오히려 깜짝 놀라며 '아니요, 나는 이 사람에게 돈을 뺏긴 일이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이 놈은 이 댁에서 돈을 390환이나 빼앗았다고 하는데요?' 그러자 방 선생님은 강도를 향하여 '아니 이 사람아! 내가 390환을 주니까 당신은 고맙다고 하지 않았소? 빼앗았다면 고맙다고 했을 리가 있소?' 라고 했습니다. 

  경찰은 포박을 풀어주고 가버렸습니다. 강도는 너무나 고맙고 감격하여 그 후 방 선생님 댁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얼떨결에 시켜서 한 감사가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는 큰 사건이 될 줄은 방 선생뿐만 아니라 강도 그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감사는 사람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예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감사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기도'입니다. 

감사를 노래로 표현하는 것이 '찬송, 찬양'입니다. 

감사를 생활로 드러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성경에 감사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단순히 마음을 편안히 가지며 마음이 기쁘다는 개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마음이 기쁘고 편하다는 감정으로 해석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상당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가 편안해서 감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장 잘 말씀해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골3:15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감사에 대하여 세 가지 의미를 말하고 있는데 첫 번째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이에 대한 전제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를 주장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감사가 옷이라고 한다면 이 옷의 원료는 그리스도의 평강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을 가지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평강은 세속적인 기분이나 만족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한 그 상태에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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