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송년주일 유머와 예화[시간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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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송년주일 유머와 예화[시간의 개념]
오래전에 한국말이 서툰 선교사님이 년말 마지막 날
송구영신 예배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자매 여러분, 오늘 망년회 예배를 드립니다.
이 밤이 지나면 이년이 가고 새 년이 옵니다.
오는 년을 맞이함에 있어 새 년과 함께 보낼
몸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듯
이미 떠나 간 년을 과감하게 정리하여야 할 마음 가짐도 중요합니다.
지난 년을 돌이켜 보면 여러가지 꿈과 기대에
미친 년도 있고 어떤 년은 실망스럽고,
어떤 년은 참 재미있었습니다.
새 년은 어떤 년일까 하는 호기심과 기대도 있겠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년 저년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년이란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내년에 어떤 년을 맞아도 잘 살아야 합니다.
백발의 한 노인이 있었는데,
그는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깊이 맛본 후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말로 다음 세대인 청년들을 훈계했습니다.
"내가 울고 웃던 어린 시절에는 시간이 마치 기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지나갔고,
내가 꿈을 꾸고 이야기하던 청년 시절에는
시간이 빠른 걸음처럼 지나갔다.
내가 완전히 성인이 되었을 때,
시간은 마치 뛰어가는 것처럼 지나갔고,
장년에 도달해 능력을 과시할 자리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
시간은 구름처럼 날아가 버렸고,
흰 머리를 머리에 이고 완전한 노인이 된 그때는,
시간이 전부 지나가 버린 것을 알았다.
시간은 참으로 짧다. 그러므로 이것을 존중해야 하며
가장 귀중하게 쓸 필요가 있다.
현재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간의 운명은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시간”이란 말에 대하여 헬라어에서는
두 가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크로노스라는 말인데 크로노스란 흐르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년,월,시로 날마다 저절로 보내는 시간입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되고, 3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모두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입니다.
둘째는 카이로스라는 말인데 카이로스란
순간순간의 질적인 시간을 의미합니다.
의미 있는 시간, 가치 있는 시간, 보람있는 시간,
기쁨의 시간, 감격의 시간은
모두 카이로스의 시간 개념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하나님의 집에서의 하루가
세상의 천 날보다 낫다.”고 하는 말은
세상의 천 날보다도 성전에서의 하루 곧, 카이로스의 하루는
크로노스의 시간 천년을 지내는 것보다도
더 가치가 있고 의미 있는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진리 안의 자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있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에 빠져있는 대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면
닫혀있던 옥문이 활짝 열리고
자신을 옭아맸던 모든 족쇄도 풀릴 것이다.
-라이사 터큐어스트의 ‘즉각순종’ 중에서-
주를 찾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도저히 예배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는 주의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온통 둘러싸고 있는 어둠 속
진리의 빛을 밝히시며
참된 자유를 누리길 원하시는 하나님.
이제 절망 가운데 더 큰 은혜를 허락하시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고통의 신음소리를 감사와 기쁨의 찬양으로 바꾸시고
눈물을 거두어 영광의 열매로 돌려주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다시 한 번 예배의 자리에 앉으십시오.
우리가 떠나온 예배의 자리에 여전히 서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오.
빛 가운데 거하는 것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싸우는 싸움이 아니라
빛 가운데로 더욱 나아가기 위한,
빛 안에 머물기 위한 간절함과 갈급함으로 가득하여지길
죄악을 미워할 수 있는 것은 빛이신 그 분 안에 더욱 거하는 것
교만함을 피할 수 있는 것은 겸손하신 그분을 더 알아가는 것
빛이신 주님, 어두움 가운데 더욱 비추소서.
우리를 이끄소서.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출애굽기 40:34~38)
행복한 순간은 앞에 있다
행복의 순간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고
탄식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행복한 순간은 앞에 남아 있다.
- 되르테 쉬퍼의《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중에서 -
지나간 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지금 서 있는 자리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오늘을 열심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을 잘 살면 행복은 뒤따라옵니다.
결혼 연습
많은 젊은이들이 데이트를 통해 배우자를 만나 결혼 합니다.
그런데 이 데이트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어서
상대 배우자에 대한 희생과 섬김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서 데이트 상대자에 대한 매력이
줄어들게 되면 미련 없이 그 관계를 청산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데이트를 윈도우쇼핑에 비유합니다.
소위 창문너머로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다가
그 중에서 가장 멋진 상대자로 결정 한다는 것이지요.
이 같은 데이트를 통해 결혼한 부부들은 그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을 때
인내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너무나 쉽게 결혼을 파기시켜 버립니다.
과거 데이트할 때 데이트 상대자와의 관계를
쉽게 청산 하곤 했던 일에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선지 오늘날 이혼부부의 절반 정도는 결혼한지 10년 이내의 젊은 부부라는
통계 수치를 보면서 사람들은 결혼 전 동거나 계약결혼을 부부 이혼의 해결책으로 제시합니다.
상대방을 충분히 알게 된 다음에 결혼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난 30년 사이에 결혼 전 동거 문화가
미국의 경우 7배나 증가했다고 통계 수치가 말해 줍니다.
그렇지만 혼전 동거 경험을 가진 채 결혼한 부부의 이혼율이
그렇지 않은 부부보다 80%나 더 높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사단의 유혹이 얼마나 간교한 것인지를 다시 깨닫게 되지요.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상대 배우자를 향한 헌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이 같은 결혼 연습이 있을 리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면서 데이트보다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시는 배우자와 가정을 꾸미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적절한 권위
현대 사회는 권위를 거부하지만, 관련성을 숭배한다.
우리의 기독교적 신념은, 성경이 권위와 관련성,
모두를 갖고 있고 그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 존 스토트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와 관련이 있고 권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심으로 관련성을 보여주시고,
많은 이들이 불순종하고 있지만,
언젠가 모든 이들이 주의 권위 앞에
무릎 꿇게 되는 것으로 권위를 보여주십니다.
죽이는 왕 vs 생명을 주는 왕(성탄절 QT)
폭군 왕과 아기 왕 (2:13~17)
사람들은 약자 편에 서기보다 권력자 편에 서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은 가장 힘없는 약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반면 당시 권력자인 헤롯은 베들레헴의 남자 영아들을
다 죽이는 만행을 저지를 만큼 폭군이었습니다.
본문은 당대 최고 폭군과 그 앞에 죽음의 표적이 된 나약한 한 아기를 대조시킵니다.
외적인 조건만 본다면 아기는 폭군 왕의 권력을 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기 왕(메시아)을 친히 보호하십니다.
13절과 19~20절은 주의 사자가 나타나 지시하는 장면입니다.
이 두 축 사이에 헤롯의 횡포(16~18절)가 감싸여 있는 구조가 특이합니다.
곧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보호받는 아기 왕이
오히려 헤롯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헤롯은 이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패배하고 있습니다.
인간 왕과 만왕의 왕(2:18-23)
헤롯은 죽이는 왕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를 죽음의 왕으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헤롯의 죽음에 대해서는 3번이나 언급되는 반면(15, 19~20절),
그가 죽이려고 했던 아기는 죽지 않습니다.
죽이는 권력을 가진 헤롯은 결국 죽고 말지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기는 살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구원자가 됩니다. 이것이 역사의 역설입니다.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권력자 왕과 아기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심층 구조의 측면에서 보면 온갖 두려움과 약점을
권력으로 감추고 있는 한 인간 왕과 비록 연약한 아기로 오셨지만
만왕의 왕으로 세상 가운데 오신 메시아 사이의 대비가 나타납니다.
역사의 표면을 넘어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됩니다. -생명의 싦
불독의 눈높이
나 여호와가 너를 불렀은 즉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 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이사야 42:6-7
내 아들 내외는 무시무시한 얼굴과 튼튼한 몸통을 가진,
54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아메리칸 불독을 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친구가 되기 전까지 “버디”는 웬만해서 나를 못 믿는 눈치였습니다.
내가 서있는 동안에는, 버디는 거리를 유지하며 나와 눈도 맞추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 내가 몸을 바닥에 엎드리면 큰 턱을 가진
버디의 표정이 변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버디는
화물열차처럼 쏜살같이 달려와 장난스럽게
큰 발로 내게 덤벼들며 자기의 억센 목을 긁어 달라곤 합니다.
어쩌면 버디가 내게 바란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수준으로 내려와
인간 그리스도로서 우리와 함께 살아주셨던 것과
어렴풋하게나마 비슷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최초의 조상이 죄를 짓고 주님을 피해서 숨은 이후부터,
우리는 높고 거룩한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요 3:20).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가 예언했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주님의 품으로 부르기 위해 자신을
얼마나 낮출 수 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의 창조주는 우리의 죄를 바로 잡기 위해
낮은 종의 모습을 입고 우리와 함께 살다 죽었습니다.
지금도 영적으로 흑암에 처한 우리를(사 42:7)
친구로 부르며(요 15:15) 우리를 달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아직도 주님 믿기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주님, 인간의 옷을 입고 천국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심을
감사드립니다. 비록 우리가 죄인이지만
주님 곁으로 갈수 있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아멘.
-오늘의 양식
멘토링
요즘 ‘멘토링’이란 말을 널리 쓰고 있다.
‘멘토링’이란 말은 희랍신화 오디세이에서 비롯된다.
오디세이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왕은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면서
아들의 교육을 친구인 멘토에게 부탁하였다.
세월이 지난 후에 아버지가 돌아와보니
아들이 어엿한 청년으로 자라 있었다.
여기서 멘토의 이름을 따서 일대일의 관계로
제자를 기르는 일을 ‘멘토링’이라 부르게 되었다.
멘토가 제자를 기르는 방법의 첫째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사색하는 방법이었다.
둘째는 제자의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케 하여
뜨거운 토론을 벌였다.
셋째는 멘토는 질문하고 제자는 대답하였다.
넷째는 멘토는 제자를 대할 때에
동료나 친구를 대하면서 허물없이 지났다.
다섯째는 멘토는 제자를 지도하면서 철학, 논리학, 수학을
집중적으로 지도하였다.
이런 과목들은 논리적 사고를 길러주고 합리성을 길러준다.
지도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정이
논리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력이다.
누구나 청소년 시절에는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흔들리기 쉬운 때가 있다.
이런 때에 좋은 멘토를 만나 폭넓은 감화와 격려는
자신의 위기를 극복케 한다.-김진홍
압살롬의 머리카락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이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사람의 강점이 아니라 오히려 약점이다.
약점은 자신을 일으키는 동인이 되며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발판이 될 수 있기 때문
일본 굴지의 기업 마쓰시다를 창업한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나는 가난한 덕분에 근검절약할 줄 알아 부자가 되었으며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욱더 열심히 공부에 매달렸고,
몸이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생 건강과 자신을 돌봐서
95세까지 장수할 수 있었다'라고 고백했다.
기업도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가 어려울 때가 아닌
대부분 잘 나갈 때 잘 될 때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
자신의 강점을 경계하고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
마음에 담아두는 이야기'성경에 나오는 압살롬의 이야기'
다윗임금의 아들 압살롬 왕자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재미있다.
워낙 키도 크고 잘생긴 외모로 온 이스라엘에 칭송이 자자했다고 함
특히 길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을 길렀는데 매년
그 머리를 손질하면 왕실 저울로 4.5킬로그램
정도의 양이 나왔다고 한다.
압살롬 왕자는 숯이 많고, 길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으로 인해
온 이스라엘 사람의 칭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훗날 반역을 하게 되어 쫓기는 신세로
노새를 타고 도망을 하는 중 그 긴 머리카락이
그 나무에 걸려서 노새는 빠져나가고
자신은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신세가 되어
뒤에 쫓아오는 병사가 창으로 찔러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칭찬했던 그 멋있는 머리카락이
자신을 죽이는 치명적인 무기가 되어버린 셈.
이런 사례가 자신의 강점을 경계하고 교만해 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이러한 이야기에서 나오는 교훈이 아닌가한다.
교만하다, 겸손하다는 둘 다 품사가 형용사이다.
그러한 상태를 일컷는 말이기 때문.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런 형용사를 동사로써
어법상의 명백한 오류로 사용할 때가 있다.
가령 겸손해라하는 예가 그렇다.
우리가 감탄사가 아닌 명령형으로 형용사를 쓸수가 없다.
예를 들어 예뻐라, 아름다워와라!
같은 경우로 말할 수 없는 이치이다.
즉 형용사인 교만하다, 겸손하다는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다.
오늘 지금 당장의 자신의 의지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겸손 자체가 얼마나 많은 부단한 노력과
내공을 쌓으면서 변해가야 하는 것인지를
나타내는 것임과 동시에
교만하다 역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변해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형용사 이치
나는 사업을 하기 전에 삼성물산을 거쳐
모 유통회사의 구매부서에서 바이어로 근무했다.
유통업체의 구매본부는 업체의 생사여타권을 쥐고
매출을 좌지우지하는 유통권력의 핵심이다.
많은 납품업체들이 극진히 대접하고
로비하며 추켜세우는 자리이다.
그러다보니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유통권력을 휘두르며 그렇다보니
유통권력의 단맛에 빠져
점차 교만해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이것이 비단 유통업체의 구매부서에서만 일어나는 것일까?
사법권력, 언론권력, 정치권력을 비롯
우리나라 사회처럼 갑과 을이 명확한 그런 관계에서는
권력을 휘두르고, 접대받고, 힘을 휘두르는 자리에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를 경계하면서 교만해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겸손해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성품은 바로 겸손한 성품이다.
원래부터 겸손을 타고난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자신의 강점을 경계하고 자신을 낮추게 되면서
겸손해졌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겸손은 부단한 노력과 내공을
쌓음으로써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이준엽
모든 꽃들이 장미일 필요는 없습니다
장미꽃은 누가 뭐래도 아름답습니다.
붉고 매끄러운 장미의 살결,
은은하게 적셔 오는 달디단 향기
겉 꽃잎과 속 꽃잎이 서로 겹치면서 만들어 내는
매혹적인 자태 장미는 가장 많이 사랑받는 꽃이면서도
제 스스로 지키는 기품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꽃이 장미일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꽃이 장미처럼 되려고 애를 쓰거나
장미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실망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내 빛깔과 향기와
내 모습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어차피 나는 장미로 태어나지 않고
코스모스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가녀린 내 꽃대에
어울리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장점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욕심부리지 않는 순한 내 빛깔을 개성으로
삼는 일이 먼저여야 합니다.
남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내 모습,
내 연한 심성을 기다리며
찾는 사람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장미는 해마다 수 없이
많은 꽃을 피우는데, 나는 몇 해가
지나야 겨우 한 번 꽃을 피울까 말까
하는 난초로 태어났을까 하고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장미처럼 화사한 꽃을
지니지 못하지만 장미처럼 쉽게 지고 마는
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장미처럼 나를 지킬 가시 같은 것도
지니지 못했지만 연약하게 휘어지는 잎과
그 잎의 담백한 빛깔로 나를 지키지 않습니까?
화려함은 없어도 변치 않는 마음이 있어
더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도시의 사무실 세련된 탁자 위에
찬탄의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는 장미가 아니라,
어느 산골 초라한 집 뜨락에서 봉숭아가 되어
비바람을 맞으며 피어 있을까 하고
자학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장미처럼 붉고 짙으면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빛깔을
갖고 태어나지 못하고 별로 내세울 것 없는
붉은빛이나 연보라 빛의 촌스러운 얼굴빛을 갖고 태어났을까?
하고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봉숭아인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빛깔을 자기 몸속에 함께 지니고 싶어
내 꽃잎을 자기 손가락에
붉게 물들여 지니려 하지 않는가?
자기 손가락을 내 빛깔로 물들여 놓고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할 만큼 장미는 사랑받고 있을까?
장미의 빛깔은 아름다우나 바라보기에 좋은
아름다움이지 봉숭아처럼 꽃과
내가 하나 되도록 품어 주는
아름다움은 아니지 않는가?
장미는 아름답습니다.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시기심도 생기고
그가 장미처럼 태어났다는 걸
생각하면 은근히 질투심도 생깁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장미일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나대로, 내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산국화이어도 좋고
나리꽃이어도 좋은 것입니다.
아니, 달맞이꽃이면 또 어떻습니까?
- 좋은 글 중에서-
얼마 남지 않은 12월 마무리 잘하시고
신묘 년 새해, 알차고 소망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시길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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