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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예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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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예화들


 


1)‘존 번연’의 신앙고백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John Bunyan)은, 인생에서 헤어나기 어려운 

깊은 수렁을 지나 마지막 벼랑 끝에 섰을 때에, 자기의 삶의 처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나를 맞으실 때 칼을 들고 나오실 지라도, 나는 그분의 발 아래에 내 몸을 던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나의 최후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고난의 극한 상황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절박한 신뢰를 불르일으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당하지 않고도, 그 분을 신뢰하고 믿는 것을 더 복되고 귀한 신앙으로 평가하십니다.


그러나 평범한 가운데 사는 사람이나 절망의 깊이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폭풍우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폭풍우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자 은총의 손길입니다. 

그래서 C. S. 루이스(C. S. Lewis)는 “고난이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 야고보서 5:13 


2) 저에게 십자가를 질 힘을 허락하소서.


주님, 제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에 복을 내려주소서

저에게 십자가를 질 힘을 허락하시어, 진실로 사랑하는 기쁨으로

이웃을 만나 삶을 힘차게 이어가게 하소서

주님, 제가 만약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서 영원에 이르려 하고 있다면,

가슴 아프게 찔리는 벌을 내려주소서 

힘들이지 않고 평화를 얻으려 하거나,

누워서 하늘나라의 자유를 차지하려는 헛된 마음을 없애주시어

오직 이웃을 용서하는 아픔의 기쁨,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아픔의 기쁨을 허락하소서 

십자가의 영광은 용서와 희생의 탑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심하게 하소서.

          - 김영수, 생활성서사, 



    3)십자가가 없다면, 폴란드도 있을 수 없습니다!


폴란드의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기 전의 일이다. 폴란드의 수상 ‘야루젤스키’ 정부는 공장과 병원 등, 공공건물에 있는 십자가를 비롯해, 학교 교실에 있는 십자가까지, 모두 떼어내도록 지시를 내렸다. 폴란드의 교회들은 십자가 금지령을 비난했고, 정부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전국 각지로 번져 나갔다.


결국 정부는 한 걸음 물러나서 ‘문서로는 그런 내용을 남기지만, 학교 교실의 십자가를 떼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선에서 타협을 제시했다. 


그런데, 가르볼린 지역의 학교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어느 열렬한 공산당원은 ‘법은 법이다’라고 하면서, 20년 동안 교실에 설치되어 있던 십자가 7개를 모두 떼어버렸다. 며칠 뒤, 여러 명의 학부모들이 학교로 몰려와서 더 많은 수의 십자가를 매달았다. 공산당원은 또다시 그 십자가들을 떼어 냈고, 다음날 6백 명의 학생들 가운데 3분의 2가 항의에 나섰다. 중무장한 경찰들이 즉시 진압에 나섰고, 학생들은 십자가를 높이 들고 거리 행진에 들어갔다. 항의를 지지하기 위해 마련된 기도회에는 부근 교회의 교인과 학생들 2천5백 명이 참석했다. 경찰들은 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교회를 에워쌌다. 십자가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군중들과 경찰 진압대를 향해 폴란드 교회 성직자는 소리 높여 외쳤다. “십자가가 없다면, 폴란드도 있을 수 없습니다!” 


    4)낮추는 만큼 높아집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한 분이 계신다. 그는 대령으로 예편하셨고, 올해 연세가 69세나 된다. 이 분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이 분 앞에 서면 모두가 조용해진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엄숙해진다는 표현이 딱 맞는 표현이다. 우리가 목례를 하면 그는 허리를 굽히고, 우리가 허리를 굽히기라도 하면 그는 90도로 숙이시고, 우리가 90도로 인사를 하면 그는 무릎을 꿇으시고, 우

리가 무릎을 꿇으면 그는 아예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버리신다.


그 분 앞에 서면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대꾸할 수 없어지고, 한마디로 유구무언이 된다. 상대보다 더 낮아져 섬기겠다는데,  누가 대꾸를 할 것이며 누가 항의를 할 것이며, 누가 그를 미워 할 수 있겠는가? 


세상 모든 사람이 이 분과 같다면 전쟁이 있을 수 없고, 싸움이 없으며, 미움 자체가 없어질게다. 그래서 이 분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엄숙, 평화, 경건함이 온 주위를 휘감아 흐른다. 

                                    - 소 천 


 5)가장 수치스런 로비스트에드워드 폰 ‘클로버그’ 3세(63)는 지난 20년 동안 가장 악명 높은 지구상 독재자들의 이미지를 세탁해준 로비스트로 유명하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을 비롯해 라이베리아의 새뮤얼 K. 도,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버마의 군사정권, 군부독재를 지지해온 과테말라 재벌 등이 그의 주요 단골손님이었다.


그런 그가 5월1일 로마의 한 저택에서 자살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해 눈길을 끌고 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독재자들을 위해 일 해온 부끄러운 과거를 속죄 받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1942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지방대학 졸업 이후 워싱턴의 아메리칸대학에서 기부금 모집 담당 일을 하면서 로비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클로버그’는, 후세인도 한때는 미국의 동맹자였다고 주장했으며, 이라크를 다녀온 뒤에는 후세인에게 완전히 매료됐다며 워싱턴 정계에 홍보하고 다녔다.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를 위해 미국과의 교역 승인을 얻어내기도 했다. 

정계 로비스트 활동을 그린 <워싱턴 바빌론>이라는 책에서 그는 “아무도 접근하고 싶어 하지 않는 고객을 다루는 데 단연 뛰어났다”는 평을 받았으나, <스파이>라는 잡지에서는 워싱턴 정가의 가장 수치스런 로비스트 가운데 한명으로 뽑혔다. 역대 미국 행정부와 제3세계 군부독재자들 사이의 검은 거래에도 그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그가 세상을 떠났음에도 그간의 숨겨진’ 활동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6)진정한 겸손


국내의 한 기자가 싱가포르에 취재를 하러 갔었습니다. 당시엔 리콴유가 총리자리에 있던 시절이었는데, 기자가 취재하러 간 한 공연장에서 리콴유의 부모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강한 권력을 가진 총리의 부모님이 사람들 틈에 섞여 줄을 서서 기다리다 매표를 하고, 1등석이 아닌 평범한 자리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심 이유가 궁금하던 기자는 공연이 끝난 뒤 찾아가서 물었습니다.“리콴유 총리의 부모님 맞으시죠? 어째서 총리의 부모님이나 되시는 분이 

이런 곳에서 공연을 관람하십니까?”

그러자 노부부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아들이 총리인 것과 내가 일반석에서 공연을 보는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입니까?”노부부는 아들이 총리가 된 후에도 어떤 혜택도 일절 받지 않았습니다. 그전과 같은 생활을 유지하면서 평생 해오던 시계 수리점을 70세가 넘도록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노부부에게 총리직은 그저 아들의 직업일 뿐 그 이

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탐하고 주변에 지위 높은 사람들을 통해 조금이라도 혜택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마음이 교만해지고 중심을 잃어갈 땐 하나님의 아들로써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7)스파트가 승리한 이유


주전 431년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그리스 도시국가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이길 것이라고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난한 농업국인 스파르타는 강한 군사력을 가진 아테네의 상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테네는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고 중무장한 병사와 더불어 인구도 많았다. 그에 비해 스파르타는 인구도 적고 전쟁 경험도 없고 무장된 병사도 적었다. 그런데 전쟁의 결과는 스파르타의 승리였다.승패의 원인은 교만과 겸손이었다. 아테네의 왕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의 능력과 경험을 무시하고 안이한 태도로 전쟁에 임했다. 그는 교만하여 기고만장한 태도로 전쟁에서 쉽게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는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만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는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치밀한 작전을 짰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후퇴하지 않으리라는 강한 결단으로 전쟁에 임했다. 결국 능력은 부족하지만 겸손함으로 임한 스파르타의 승리로 전쟁은 끝났다.


8)무디의 겸손        


 D. L. 무디(D. L. Moody)가 미국의 한 도시에서 전도대회를 열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모 신문사의 한 기자가 무디에게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무디는 전도대회로 너무나 바쁜 나머지 그 인터뷰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신문 기사마다 ‘교만한 전도자 무디’라는 혹평의 글들이 실렸습니다.


무디의 동료들은 하나같이 “이런 거짓된 기사를 싣다니 말도 안 돼”라며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화를 내야 할 무디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동료 한 사람이 무디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기사마다 공개적으로 선생님을 교만한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화나지 않으십니까?”     

“제가 화가 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기자는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쓴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나는 그보다 더 교만한 사람입니다.”



9.설교예문


  ♣사순절 여섯 번째(고난주일)

  성경 ; 사50:4-9, 빌2:5-11, 막15:1-39

  제목 ; 그가 무슨 나쁜 일을 하였는가?

  

우리 인간의 죽음에는 참으로 다양한 죽음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명예와 관련된 죽음에는 ‘영광스러운 죽음’과 ‘수치스러운 죽음’이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죽음이란, 사회와 국가, 또는 종교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헌신한 사람들의 죽음을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스러운 죽음에는 대개 순(殉)자를 부칩니다. 예를 들자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을 때에는 순국(殉國)이라 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죽었을 때에는 순직(殉職)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을 때에는 순교(殉敎)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 후손에게도 영광스러운 일이 됩니다. 그래서 순국을 했거나 순교한 사람의 후손들은 그 선조(先祖)의 영광스런 죽음을 자주 거론하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수치스러운 죽음이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 부귀와 영화를 누리려고 자신이 속한 사회와 국가를 배신한 사람들, 아니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자신이 믿는 신앙마저 저버리고 아주 비굴하게 살다가 일생을 마친 사람들의 죽음이 바로, 수치스러운 죽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넷에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의 주인공은 ‘에드워드 폰 클로버그 3세’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지난 2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들의 이미지를 세탁해준 사람으로 그 이름을 떨쳤습니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을 비롯해서,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버마의 군사정권, 군부독재를 지지해온 과테말라 재벌 등, 그들의 나쁜 이미지를 좋은 이미지로 바꾸는 일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가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악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5월1일, 로마의 한 저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그 수치스러운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음으로써, 그동안 독재자들을 위해서 일해 온 부끄러운 과거를 속죄 받으려 했는지도 모른다고, 그의 죽음을 보도한 신문기자가 덧붙였습니다. 


이 신문기자가 ‘가장 수치스런 죽음’으로 표현한 ‘에드워드 폰 클로버그 3세’의 자살, 오늘 우리가 생각해봐도 참으로 불행한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진정 수치스런 죽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클로버그 3세는 그 누가 보아도 영광스럽지 못한 인생을 살다가 마지막에는 가장 안 좋은 방법으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로 아무런 죄나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신 분이 있습니다. 죄와 잘못은 고사하고, 오히려 수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좋은 일을 아주 많이 행하셨건만, 33세라고 하는 아주 젊은 나이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셨던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견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여러 번 그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그런데도 구하고, 예수님은 그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진 거룩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짊어지고 있는 죄의 굴레를 벗겨내시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를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에 따라, 주께서는 그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죽음이 외형상 겉보기에 참으로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행해졌던 십자가 형(刑)은 정말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가장 무섭고도 고통스러운 사형제도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을 그 무서운 십자가 형(刑)에 처하도록 심판한 사람은 그 당시 유대총독이었던 빌라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는 군중들에게 “그가 무슨 나쁜 일을 했는가?”하고 물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예수님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도록 판결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군중들이 민란을 일으킬까봐 무서워서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예수님께 사형언 도를 내렸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십자가 형(刑)이라고 하는 가장 무서운 극형에 처하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외형상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죽음은 거룩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겸손히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거나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 땅 위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 다툼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옛 조상 아담과 그 아들 가인이 지니고 있던 악한 피가 우리 인간의 피 속에도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자신의 죄를 아내에게 떠넘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한 나머지, 결국은 그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악하고 더러운 본능이 우리 몸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이 본능을 이겨내지 못하면, 우리 또한 어쩔 수 없이 아담과 가인처럼 실패한 인생을 살아야 하고, 그 결과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해야만 합니다. 

우리 몸속에 흐르고 있는 악한 피, 곧 더럽고 추한 본능을 이겨내려면,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예수를 믿는 믿음까지도 자신의 유익만 위해서 믿는 이들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생활을 자신의 세상적인 안락을 영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삼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거룩한 죽음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러운 욕심과 죄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다투며 살아가는 생존경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인생살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요컨대,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높아지고 명예스럽게 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고 헐뜯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신을 낮추시고 겸손하게 되셔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사시다가, 최후에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높아지려고 부단히 애쓰지만, 그러나 저마다 자기가 높아지려고 하다 보니, 서로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모두 다함께 상처를 

입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끌어올려서 영광스럽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맞이할 때마다 자주 부르는 찬송가 147장 1절과 2절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입어서 교만한 맘을 버리네.’


 이 찬송가 가사에서 볼 수 있듯이, 십자가와 욕심은 서로 상반된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세상 욕심을 극복하는 길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그 욕심 때문에 멸망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욕심을 극복하고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누리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영수’라고 하는 분이 월간 ‘생활성서’에 올렸던 글입니다. 

주님, 제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에 복을 내려주소서! 저에게 십자가를 질 힘을 허락하시어,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이웃을 만나게 하시고 삶을 힘차게 이어가게 하소서.

주님, 제가 만약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 영원에 이르려 하고 있다면, 가슴 아프게 찔리는 벌을 내려주소서! 힘들이지 않고 평화를 얻으려 하거나, 누워서 하늘나라의 자유를 차지하려는 헛된 마음을 없애주시어, 오직 이웃을 용서하는 아픔의 기쁨,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아픔의 기쁨을 허락하여 주소서! 십자가의 영광은 용서와 희생의 탑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심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심을 가지고 살면, 당장은 그 이기심이 우리 자신을 좀 더 유익하게 하고 편안하게 할는지 

모르나, 종래에는 수치스러운 결말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길은, 오늘 우리가 가고 있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 길은 자기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야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리보다는 먼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

다. 그래서 더욱 힘든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동행해주시는 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이 참으로 힘들고 어려워도

1.그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제게는 매일 ‘사랑밭새벽편지’라는 메일이 오고 있습니다. 그 메일에는 ‘소천’이라는 필명을 가진 사람의 글이 자주 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쓴 글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한 분이 계신다. 그는 대령으로 예편하셨고, 올해 연세가 69세나 된다. 이 분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이 분 앞에 서면 모두가 조용해진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엄숙해진다는 표현이 딱 맞는 표현이다. 

우리가 목례를 하면 그는 허리를 굽히고, 우리가 허리를 굽히기라도 하면 그는 90도로 숙이시고, 우리가 90도로 인사를 하면 그는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가 무릎을 꿇으면 그는 아예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버리신다. 

 그 분 앞에 서면,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대꾸할 필요가 없어지고, 한마디로 유구무언이 된다. 상대보다 더 낮아져서 섬기겠다는데, 누가 대꾸를 할 것이며, 누가 항의를 할 것이며, 누가 그를 미워 할 수 있겠는가? 세상 모든 사람이 이 분과 같다면, 전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싸움도 없을 것이며, 미움 자체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이 분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엄숙, 평화, 경건함이 온 주위를 휘감아 흐른다.’

이렇게 글을 쓴 다음,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글을 첨부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낮아지면 복을 받는다.’는 표현으로 겸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낮아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그릇 만큼만 낮아지려고 하니,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낮아지되, 완전히 죽은 듯 낮아지는 사람이야말로 겸손의 앞잡이가 되어서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낮추는 만큼 높아집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듯이, 낮아져서 겸손하게 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낮아져 겸손하게 되어야 진실로 사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며 높아지고자 하는 본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겸손하게 되는 일은 고난입니다. 

그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교만한 마음과 쓸데없는 자존심은 참으로 고치기 힘든 장애(障碍)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힘써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본받아 사는 일은 기도하지 않고는 실천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내 능력과 의지만으로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듣고 기도함으로써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서 50장에는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겪으셔야 할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때리는 사람들에게 등을 대 주었고, 내 수염을 뽑는 사람들에게 뺨을 대 주었다. 그들이 나를 조롱하고 내게 침을 뱉을 때에, 나는 내 얼굴

을 가리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니,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음을 굳게 먹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6-7절)’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야 교만이라고 하는 장애를 극복하게 되고 겸손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나와 

내 가족을 살리고 내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모든 악조건을 극복

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서 우리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2.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기 전의 일이라고 합니다. 폴란드 수상 

야루젤스키 정부는 공장과 병원 등, 공공건물에 있는 십자가를 비롯해서 학교 

교실에 있는 십자가까지 모두 떼어내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폴란드 교회들은 정부 당국의 ‘십자가 금지령’을 비난했고, 정부에 대한 분

노와 원망은 전국 각지로 번져 나갔습니다. 결국 정부는 한 걸음 물러서서, 문

서로는 그런 내용을 남기지만, 학교 교실의 십자가를 떼어내도록 강요하지 않

는다는 선에서 타협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가르볼린 지역에서 학교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공산당 책임자는, 

법은 법이라며 20년 동안 교실에 설치되어 있던 십자가 7개를 모두 떼어버렸

습니다. 그러자, 며칠 뒤 여러 명의 학부모들이 학교로 몰려와서 더 많은 수의 

십자가를 매달았습니다. 공산당은 또다시 그 십자가들을 떼어냈고, 다음날 6백 

명의 학생들 가운데 3분의 2가 항의에 나섰습니다. 중무장한 경찰들이 즉시 

진압에 나섰고, 학생들은 십자가를 높이 들고 거리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항의를 지지하기 위해서 마련된 기도회에는 부근 교회의 교인과 학생들 2

천5백 명이 참석했습니다. 경찰들은 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교회를 에워쌌습니

다. 이때, 폴란드 교회 성직자들은, 십자가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눈물을 흘

리고 있는 군중들과 경찰 진압대를 향하여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폴란드도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우리가 십자가를 상징으로만 바라보고 있거나 우리 머릿속에만 남겨두어

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이 짊어지도록 알려주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기쁜 마

음으로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희생과 헌신을 통한 사랑의 실천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핑계나 책임전가가 통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짊어져

야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잘못도 없이 십자가 위에 달리셨지

만, 그러나 그 누구를 원망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우리야말로 십자가에 달려도 아

무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만 억울한 소리

를 들어도, 그리고 아주 작은 손해를 입게 되어도, 그 얼마나 원망이 많고 불

평이 많습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결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겸손히,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자 할 때, 하나

님은 가까이 오셔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실 것

입니다. 우리가 낮아지고 또 낮아져서 기꺼이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은 우리

를 끌어올려서 영화롭고 아름다운 자리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시는 그날까지, 주님께서 가

셨던 그 길을 열심히 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주님이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것처

럼, 지금보다 훨씬 더 자기를 낮추어 겸손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

히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수치스러운 죽음이 아닌, 거룩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십자가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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