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새출발, 새삶 예화 모음
본문
새해, 새출발, 새삶 예화 모음
46세의 새출발
'99(구구)년도에 입학한 대학생을 가리켜 '비둘기 학번'이라고 말합니다. 평화와 순결을 상징하는 비둘기처럼, 14년 동안 한결같이 조선대 본관 중앙 현관을 지켜온 46세의 문종규씨, 그 '수위 아저씨'가 바로 올해 비둘기 학번의 야간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친절하고 유난히 표정이 밝았던 그 수위 아저씨의 인생 여정은 가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것이었습니다. 6·25 상이용사이신 부친을 대신 해 가장으로서 가정을 꾸려나가야 했던 그는 상고를 중도에 포기한 채 막노동과 공장생활을 전전하면서도 인생의 밝은 면을 보면서 기쁘게 살았습니다. 대학 현관을 지키게 되면서 배움에 대한 꿈을 나날이 키워왔고 대학입학 검정고시 보기를 네 차례, 드디어 '98년에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는 자신이 근무하던 학교의 자랑스러운 '비둘기 학번'이 된 것입니다.
업무를 마치고「경영학 개론」서를 가슴에 품고 강의실을 향하는 그는 더 이상 46세의 중년이 아니었습니다. 상실시대의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푸른 희망의 항해사였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에베소서 3장 14절 ∼ 19절
우리 한국 역사에 이태조와 무학대사의 대화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기에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태조께서 어느 때 무학대사와 대화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대사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돼지상이네, 그려." 돼지 닮았다고 얘기했습니다. 아, 물론 농담이지요. 그런데 무학대사는 이태조를 쳐다보다가 하는 말이 "임금님은 부처님 상입니다" 그랬어요. 이태조는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 아무리 임금님과 신하의 이야기이지만은 농담은 농담인데 나는 자네더러 돼지 같다고 했는데 자네는 어째서 날더러 부처님 같다고 하는 건가?" 이때에 무학대사는 시침을 떼고 한마디했습니다. "그거야 물론 누구든지, 자기 마음 생긴 대로 남의 얼굴 보는 거죠." 나는 내 마음이 부처님 같으니까 다 부처님으로 보이고, 당신은 돼지 같으니까 나를 돼지로 보는 거 아니겠느냐? 이거예요. 그래 뭐, 할 말이 없었지요.
용서받고 「새옷」 입어야 중생
중생이란 무엇일까요.
중생이란 개혁이 아닙니다.흔히 『옛 죄를 끊고 새 생활을 시작하라』고 말합니다.좋은 말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거듭나거나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가령 가게에서 10만원 외상을 졌는데 그것은 갚지 않고 앞으로 계속 거래하면서 물건값을 지불한다고 해도,그 전에 갚지 않은 빚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오늘부터 죄를 끊고 다시 죄를 범치 않는다고 해도 아직도 과거의 먹장 같은 검은 죄는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중생이나 신생은 하나 하나 개혁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사함받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낡은 옷을 수선해 입는 것이 아니라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은 중생이 아닙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기 때문에 입으로 신앙고백하는 것이 거듭나는데 중요한 방편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마음 중심으로 믿고 영생을 소유해야 합니다.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입에 발린 말만 가지고는 거듭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중생은 아닙니다.
교회출석이 구원의 한 방편은 되지만 건성으로 교회 다닌다고 다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교회에 다니고 세례를 받고 착한 일을 하고 기독교 문화에 산다고 그것이 곧 중생은 아니고 구원받은 것도 아닙니다.
중생은 신적인 변화(Divine change)입니다.
사람은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이는 곧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입니다.사람으로부터 오는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변화입니다.
사람은 설득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신적 변화를 창조하실 수가 있습니다.우리는 자신이 창조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그러나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이 우리 삶의 변화를 일으켜 주십니다.
중생은 신비로운 변화(Mysterious change)입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할 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 3장8절)고 말씀하셨는데,그 뜻은 중생이란 신비스러운 것이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중생은 절대적인 변화(Absolute change)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중생은 모든 것이 변하는 것입니다.새로운 희망,새로운 기쁨을 갖게 됩니다.한 때 사랑하던 것을 지금 미워하게 되고,전에 미워하던 것을 이제 사랑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전에는 교회를 가장 멸시했는데 이제는 세상의 어떤 기관보다 존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됩니다.한 때는 빈정거리고 욕할 때만 부르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제는 그 어느 것보다 존귀하고 사랑스럽게 들리는 것입니다.
생각을 새롭게
히브리서 12장 1절 ∼ 3절
어느 가정 주부가 고등어 두 마리를 시장에서 사가지고 집에 가지고 갔습니다. ‘내일 아침 이것으로 반찬을 하리라’ 생각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고등어가 간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구두가 냉장고 안에 들어있더랍니다. 신발장을 가보니깐 신발장에 고등어가 놓여 있습니다. 이 여자가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여러분, 행동은 있는데 생각이 없다 말입니다. 그 생각은 어디로 갔습니까? 여러분, 이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어느 사이에 행동만 남고 생각은 빠져나갔습니다. 그것은 행위가 아닙니다. 행동이 먼저 가고 때로는 욕망이 먼저 가고 생각이 뒤따르면 그 일에는 계속 후회가 있습니다. 끝없는 후회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생각이 먼저 가고 그리고 행동이 가서 생각한 바를 사건 속에서 행동 속에서 확증해 나갈 때에 그래서 때로는 더 높은 의미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올시다. 가령 생각과 행동이 따로 따로 간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인간을 학술적 용어로써는 호모사피엔스라고 합니다. 호모사피엔스라는 말은 생각하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혹은 호모에렉투스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직립 보행하는 사람이다. 두발로 서서 걸어다니는 사람들이다. 그런 존재란 뜻입니다. 호모파베르라고도 합니다. 그것은 도구, 용기를 사용할 줄 아는 존재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 학술적 용어 속에서 사람의 사람 된 높은 가치는 어디 있느냐 하면, 호모사피엔스에 있습니다. 생각하는 인간, 그 생각이 없는 인간 그건 다만 동물일 뿐입니다. 이 생각하는 능력, 기능,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게 있는 가장 귀중한 기능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생각하는 것. 그러니까 생각을 져버릴 때 ‘인간 됨을 져버렸다’ 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올시다.
귀를 새롭게
마태복음 13장 16절 ∼ 23절
어느 날 아메리칸 인디언청년이 뉴욕시내 한 가운데에 살고있는 백인 미국친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이는 오랫동안 친한 사이였습니다. 자동차와 사람들로 붐비는 시내의 시가를 둘이서 걷고 있었는데 이 인디언 친구가 느닷없이 발을 멈추더니 "이 시내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누만" 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음 속에서 귀뚜라미 소리를 들은 겁니다. 그때에 미국친구는 말하기를 "아! 이 뉴욕 한가운데에 무슨 놈의 귀뚜라미 소리란 말인가?" 라고 거부를 했더니 이리 와 보라고. 귀뚜라미 소리나는 쪽으로 계속 둘이 걸어가보니깐 길 모퉁이에 넝쿨나무로 된 집에 벽 틈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러했습니다. 그때에 미국 백인친구는 말하기를 "자네는 시골에서 살아서 청각이 아주 뛰어나게 좋은가 보구만"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메리칸 인디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50전짜리 동전 하나를 아스팔트 땅에다가 떨어뜨렸습니다. 데구르르 굴러가더니 저만큼 가서 던져졌는데 길 가던 사람이 모두 발을 멈추고 그걸 바라봅니다. 그 중에 꼬마하나가 빨리 가서 50전짜리를 손에 들고 돈 주웠다고 좋아하면서 돌아오는 겁니다. 그때에 아메리칸 인디언 친구가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귀가 밝은 게 아니라 당신들의 귀가 어두워진 거요. 문제는 관심사가 문제라구요." 귀뚜라미 소리는 안들려도 돈 소리는 들리지 않느냐, 이렇게 비웃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아니 무슨 소리로 들립니까? 바로 거기에 여러분의 사람됨에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의 I and Thou 라고 하는 아주 참 세계적인 명저가 있습니다. '나와 너' 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책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나 외에 어떤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는 두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인격적 관계요 대화적 관계요. 또 하나는 비인격적 관계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나와 너'라고 하는 관계여야 하는데 잘못되면 '나와 그것'의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I and Thou 냐 I and It 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에 있을 때는 내 존재가 인간적으로 살아납니다. 그러나 나와 그것의 관계가 되는 순간 나라는 존재도 자꾸 비인격화 되어버리고 만다 하는 이론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화적 관계, 듣는 관계에 있을 때에 인간존재가 성립되고, 대상을 수단으로 하여 버릴 때는, 들을 필요도 없고 듣지도 않는 그런 관계가 되면 인간의 인간됨은 무너지고 만다 하는 유명한 이론입니다.
손을 새롭게
사도행전 1 : 13 ∼ 20
안소니 드 멜로 라고 하는 분이 쓴 '1분 지혜'라고 하는 아주 작은 책이 있는데요, 그 속에 나오는 짤막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그러한 일화입니다. 한 도박사가 오랫동안 영성 수련을 쌓은 노 수도사를 찾아가서 자기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어제 카드놀이를 하는데 속임수를 쓰다가 그것이 발각되어서 상대방이 저를 무참하게 때리고 창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래서 무릎이 부러지고 깨지고 다 이렇게 부상을 입었습니다. 제게 무슨 충고를 해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노 수도사는 이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하시는 말씀이 "내가 만일에 자네라면 이제부터는 1층에서만 카드놀이를 하겠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 도박사는 어리둥절했습니다. 분명하게 '다시는 도박질을 하지 마라' 그럴 것 같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말씀할까? 제자들도 이 말을 듣고 당황했습니다. 황당해서 "선생님,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마라' 그래야지 어째서 '앞으로는 1층에서만 하라' 그랬습니까?" 이 노 수도사의 이야기를 그렇습니다. "그 사람을 좀 봐라. 그만두지 못할 사람이야. 저 사람은 도박을 끊지 못할 사람이다. 그러니 또다시 2층에서 내던져지면 되겠냐? 1층에서만 하라고 했느니라" 그랬어요.
여러분, '손을 씻는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손씻는다' 그러쟎아요. '손을 끊었다.' 오랫동안 내려오던 습관에서 손을 끊는다는 것, 참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정말로 어렸을 때 보았습니다. 이 도박을 너무 많이 해서 그것 때문에 패가 망신하니까 마지막에 결심하고 오른손 손가락을 작두에다 잘랐어요. 다신 안한다고……. 그 다음에 그 다음 손가락으로 하더라고요. 손 씻는 것, 참 어렵습니다. 그 별것도 아닌 것 같지만 담배 못 끊는 사람들 보세요. 요새 담배 피우는 사람들 구박이 자심합니다. 그 누구도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국제 비행장에 가서 보면은 아무데서도 못 피우게 하고 한 쪽, 요만한 유리로 만든 방에, 거기 들어가 앉아서 뻐끔뻐끔하고 있는 거 보면 원숭이 같더라고요. 이거 하나를 끊지 못해서 그 사람들에게 구박을 받고, 자기 자신도 이걸 끊어야 되겠다고 맹세, 맹세……. 손을 씻지 못하는 그런 비참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밤이 가고 새 날이 오려면
어느 현자(賢者)가 제자들을 불러놓고 물었습니다.
“밤의 어둠이 지나가고 새 날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한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온 세상이 밝아오는 것을 보면 새 날이 온 것을 알 수 있지요.”
스승은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라고 했습니다.
“창문을 열고 사물이 그 형체를 드러내어 나무와 꽃이 보이기 시작하면 새 날이 밝아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스승은 역시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러 제자들이 각자의 의견을 나름대로 이야기했지만 스승은 계속 아니라고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스승님은 밤의 어둠이 가고 새 날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러자 스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형제로 보이면 그때 비로소 새 날이 밝아온 것이다.”
새 날은 아침이 옴으로써 시작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웃을 형제로 보고 그들을 사랑으로 대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입을 새롭게
이사야 6장 1절 ~ 8절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혜를 모았다고 하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어떤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시장에 가서 맛있는 것을 사오라고 했습니다. 그 아내는 바구니를 준비해 가지고 나가서 소의 혀를 사왔습니다. 그 혀를 가지고 그날 요리를 해서 먹었습니다. 몇 일 후에 남편이 또 말하기를 오늘은 가장 싼 것을, 모든 음식 재료 중에 싼 것을 사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 아내는 또 가서 소 혀를 사왔습니다. 남편이 “어째서 가장 맛있는 것을 사오라고 했는데 혀를 사오고, 가장 싼 것을 사오라고 했는데 또 혀를 사왔느냐” 하고 물었는데 그 부인은 대답하기를 “가장 맛있는 것이 혀입니다. 친절한 말, 사랑스러운 말, 그 아름다운 말을 듣는다는 것, 이보다 더 맛있는 게 없습니다. 좋은 소리를 듣는 거 가장 맛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사왔습니다. 가장 싼 것, 가장 쉬운 것, 그저 아무 생각없이 쉽게 할 수 있는 싸구려 행동이 바로 말입니다.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그래서 혀를 사왔습니다.” 이렇게 지혜를 담아서 대답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가장 귀한 것도 말이요 가장 잘못되기 쉬운 것도 말이요. 그래서 말에 허물이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불행해 지기도 하고 그리고 망하기도 합니다
발걸음을 새롭게
로마서 10 : 9 ∼ 15
근엄하긴 하지마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어떤 왕이 있었답니다. 아주 옛날 이야기입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 왕은 짜증을 냈습니다. 때로는 화를 냈습니다. 발에 먼지가 묻는다고. 그리고 거친 땅 때문에 발이 종종 상하게 된다고 투덜거리면서 늘 이렇게 불만스러웠는데, 급기야 이런 명령을 했답니다. "나라 전역을 쇠가죽으로 다 깔도록 하라" 하는 명령입니다. 이 소문이 삽시간에 전국에 퍼지게 될 때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답니다. 어떻게 이런 명령이 있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주 지혜로운 사람 하나가 왕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소가죽으로 온 땅을 덮는다니요.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생각입니다. 온 세상 소를 다 잡아도 그렇게는 못 합니다. 그러질 마시고 폐하의 두 발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정도의 쇠가죽 두 조각만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가죽으로 당신의 발을 잘 싸면은 다시 상처가 나지도 않을 것이고 먼지가 묻지도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어리석은 왕은 "아∼ 그거 참 좋은 생각"이라고. 그게 구두의 유래랍니다.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긍휼
애가3:1-66
두 생각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생각을 하면서 자기의 모습을 돌아본다. 그나마 상황이 좋을 때에야 별 생각 없이도 지낼 수 있지만 조금만 복잡해지면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더 악화되어지고 직접 피부에 느껴지면 그 때에는 생각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안으로 움츠러들어 벽안에 갇히어 끙끙대기가 일쑤이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의 체험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고초와 재난'을 쑥과 담즙으로 비유하고 있다. 살가죽이 쇠하고 뼈가 꺾이는 절망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얼마나 그것이 심했으면 그가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18절) 하였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의 마음에 또 다른 생각의 길을 터 주신다. 어두운 것을 기억할 때에는 낙심이 되지만 왠지 중심에 이것을 생각하니 소망이 피어오름을 그는 보게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의 무궁함'이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항상 진리인 것'을 기억하게 하셨다. 다른 것은 다 변해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생각하게 하신 것이다. 그 성품은 하나님 자신도 부인할 수 없고 저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북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시고 심판을 명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긍휼의 성품으로 인하여 끝내 이렇게 말씀하셨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 냐 내가 어찌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아무리 심판을 선포하셨어도 하나님 자신이 소유한 거부할 수 없는 긍휼의 성품이 하나님 안에서 불붙듯 하여 하나님을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도 부인할 수 없는 항상 진리된 것'을 예레미야에게 생각나게 하시고 그의 생각의 물꼬를 빛으로 터 주신 것이다. 그것을 안 예레미야의 얼굴에는 복받치는 울음 가운데 울먹이며 터쳐 나오는 환희의 선명함이 있었다.
하나님의 긍휼이 항상 진리이기에 그것은 아침마다 항상 새롭다. 지나간 세월들은 언제나 과거의 기억 속으로 나를 끌어당기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나를 언제나 현재 속에서 새롭게 하신다. 새벽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새벽이 열리며 시작되는 하루는 이 땅에 어느 누구라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한 날이다. 마치 눈이 내린 길에 발자국이 하나도 나있지 않은 길이 앞에 펼쳐져 있는 것과도 같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그 길을 아직 걷지 않으신 그러한 새로움을 안겨 주는 것이 새벽이다. 하나님은 물론 모든 역사를 아시고 이끌어 가시지만 우리의 손을 잡고 가는 면에서는 아직 그분도 걸어보시지 않은 길이 바로 새벽으로 시작되는 하루의 삶이다.
그 하루는 누구라도 아직 절망의 발자국이나 낙심의 발자국을 내지 않았고 또 낼 수도 없다. 그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그 하루를 맞이하느냐가 그 하루의 지나온 발자국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안에 날마다 창조를 선물로 주신다. 오늘은 어제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하루의 창조인 것을 알려 주시면서 같이 걸어가자고 손을 내미신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마음 속의 긍휼을 아침마다 새롭게 열어 보이시며 나를 부르신다.
그렇다. 그러한 하나님을 알고 나면 이 땅의 어떤 것도 자기의 기업을 삼을 만한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없다.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기업이며, 그래서 나는 저를 바라리라고 고백할 따름이다(24절). 그러할진대 잠잠한 기다림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의 본심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과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을 주님이 기쁘게 보시지 않으시는데 하물며 그 분이 의도적으로 우리를 고생케 하시고 근심케 하시겠는가.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다(33절). 그 분은 벌을 위한 벌을 내리지 않고 반드시 당신의 목적하신 바를 두시고 그것을 성취하는 분이시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주님이 메우신 멍에를 메고 잠잠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고백한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27절). 그렇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더 나약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로 젊은 때와 같은 힘을 주시고 멍에를 메우는 분이시다. 견딜만한 힘을 주시고 우리의 고난을 헤쳐가게 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이루실 목적이 있으시기에 그리하시는 것이라면 어찌 우리가 그것을 마다하겠는가.
결국 당신의 부인할 수 없는 긍휼의 성품대로 풍부히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실 주님께 인생을 맡기며, 때리는 자의 수욕을 참으며 티끌에 입을 대고 주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주님께는 반드시 무슨 뜻이 있을거야... 그래, 주님이 언제 나를 실망시키신 적이 있었는가...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결국 긍휼로 내게 답하실 주님을 바라자...'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자기들의 회개에 대한 급한 응답을 요구하고 있다(40-41절). 그러하기에 하나님에 대한 실망도 그만큼 커져 금새 불평을 쏟아내고 있다(42-47절). 용서받는 것이 무슨 마땅한 자기들의 권리인 양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뤄지는 것은 아랑곳없고 현실을 벗어나려는 목적만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예레미야는 또 다시 시내처럼 흐르는 눈물을 훔쳐낸다(48절). 자기 한 사람의 고난으로 이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기꺼이 그것을 감내하려 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우리 예수님의 외로운 고난을 생각나게 해 준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며 묵묵히 주의 일을 행했던 주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자에게 가까이 하셔서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린다(57절).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는 강한 약속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를 신원해 주시는 주님... 그 주님이 오늘을 사는 내게도 가까이 오셔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니 이것이 은혜요 이것이 인생들 가운데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새마음 새뜻 새힘
세계적인 철학자 러셀은 세상에는 물리적인 힘, 경제적인 힘, 영향력 등 세 가지 힘이 있다고 했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큰소리치고 힘없는 사람은 아무 소리도 못합니다.세계 각 나라들은 군사력이란 물리적 힘을 가지려고 하고 사람들은 경제적인 힘을 숭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돈을 하나님보다 크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주일 동안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상경하신 예수님은 어느날 아침 무화과를 찾았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시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광야에 있을 때 어린 소년이 내어놓은 보리떡 다섯 개, 생선 두 마리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점심,저녁을 굶어야 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물리적인 힘뿐 아니라 경제적인 힘도 빈약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소리,큰기침 하나 없음에도 이스라엘의 큰 무리를 통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힘이 무슨 힘이겠습니까. 그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닌 것입니다. 또 경제적인 힘이 아닙니다. 이 힘은 철학자 러셀이 말한 대로 영향력이라는 힘 즉 종교적 힘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선교 2세기를 향해 영향력이라는 종교적 힘을 가져야 합니다. 이 힘은 첫째 하나님 말씀의 실천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만큼 생활에 옮기느냐, 즉 실천하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긴다고 하는 것은 위대한 인격과 정신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말씀을 옮긴 분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생활 훈련을 연마해야 이 세상에 소금도 되고 빛도 되는, 영향력 있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입니다. 인간의 최대 기대는 생존과 행복과 평화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기대에 부응하였던 것입니다. 즉 울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였으며, 이 세상이 끝인 줄로 알고 있는 인생들에게 부활이 있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무덤 속에 썩고 있는 나사로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재생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인간의 기대를 예수님은 모두 부흥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선교 2세기를 내다보는 한국 교회도 인생의 기대에 부응하는 교회가 되도록 힘과 기량을 배양해야 하는 것입니다.적어도 앞으로의 한국 교회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참생명, 밝은 희망 그리고 영원한 평화를 건네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교회가 지녀야 할 힘은 생활의 변화와 창조의 기능입니다. 날로 새로워지는 신생의 역사입니다. 변화의 출발은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과 교회는 마음이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생각도 새로워지고 뜻도 새로워지고, 말도 새로워지고, 행동도 새로워지고,생활도 새로워지고 인생 전부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새로운 힘을 배양하십시다. 물리적인 힘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힘도 아닙니다.예수님이 지니셨던 정신적인 힘,종교적인 힘,성령의 힘 곧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신앙의 힘, 사랑의 힘, 영적 영향력을 가집시다.
새롭게 태어납니다.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웠던 저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어느 가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댁의 가장은 의과대학 교수이면서 유명한 병원 원장이었고, 하나뿐인 아들도 의과대학생이었습니다.
사모님과 딸도 인정 많고 덕있는 분들이어서 저는 남의집살이 하는 것 같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 가족 모두가 너무도 고마워 저는 정성을 다해 그분들을 섬겼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 제가 스무 살이 된 어느 날, 저는 뜻밖에도 그댁 아들로부터 정식으로 청혼을 받게 되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과 심한 충격으로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그 집을 떠날 궁리만 했습니다. 주인댁 부모님도 당연히 반대를 했고 집안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워졌습니다.
그러나 뜻을 굽히지 않는 아들에게 부모님의 승락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의를 다하여 꾸준하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내게 납득시켜 주었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아들의 뜻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에게 알려 주셨고, 그의 뜻을 받아들이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끝없이 두렵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는 저에게 아버님이 간곡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아내로 택하고 너를 며느리로 맞이한 우리에게 갚고 싶은 것이 있다면 네가 의사인 남편의 아내답게 되는 것이고, 병원장의 며느리답게 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살면서 이 가문의 당당한 일원이 되거라.”
저는 그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가정부 처지에서 그 댁의 며느리로 처지가 바뀐 것입니다. 저를 선택한 남편과 받아 준 시부모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은 이전에 제가 가정부로 일하던 때의 의식이나 태도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버님의 며느리답게 그 남편의 아내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 뿐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시부모님과 남편이 원하는 대로 공부를 시작, 고등학교 과정을 끝내고 대학의 간호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하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그 가문이 원하는 며느리와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아픔이 함께하는 과정이었으나, 오직 저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모든 가족이 저를 인정해 주고 그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그 감사와 감격이 오늘도 저를 기쁨과 보람으로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힘이요, 저의 재산입니다.
새 시대에 새롭게
누가복음 5:33∼39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37절)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이 땅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외치던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메시지의 주인공이 오신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던 모습에서 아들을 통해 직접 말씀하시는 시대가 왔으며 한번에 그 스스로를 드림으로써 그를 믿는 자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가 오셨습니다. 그렇게 새로 임한 새 시대에는 새로운 삶의 양식과 모든 영역 속에서 새로운 모습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옛 방식대로,옛 모습대로, 무엇보다 ‘고정관념’ 속에 묶여 사는 바리새인들의 비판과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 오늘 본문에 기록돼 있습니다. 한 예로 모든 것을 그들의 시각으로 보며 비아냥거리는 바리새인들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과 예수님 제자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몰이해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분이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가시기까지는 ‘신랑’되신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쁨의 자세는 그분으로 인해 이 땅에 도래한 새로운 시대를 향한 당연한 반응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 대속으로 인해 그분을 믿는 모두에게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새것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그 말씀과 함께 요한계시록 21장 5절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오심으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시작하였고, 우리 또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 시대의 옛것’에 사로잡혀 있는 자를 향해 ‘새 시대에 헌(옛) 방식’이 함께 할 수 없음을 ‘새 옷과 낡은 옷’ 그리고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의 비유를 이용하여 가르침을 주고 계심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함께 할 때 두 가지 모두 버리게 됨을 지적하심으로써 새 시대에는 새로운 모습과 생각이 필요함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또한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39절)는그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속담으로 이 속담을 통해 한편으로는 옛것에 젖어 있는 그들의 모습,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삶의 위험함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이 옛 모습에 연연해하지 말며 옛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사역을 기대하며 사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지금이 바로 새 출발점
인생이란 하루하루가 훈련이다.
우리 자신을 훈련하는 터전이다.
실패도 할 수 있는 훈련장이다.
살아있음이 흥겨운 훈련장이다.
지금 이 행복을 기뻐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 행복해지랴.
이 기쁨을 발판삼아 온 힘으로 나아가자.
나의 미래는 지금 이 순간 이 곳에 있다.
지금 여기서 노력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 노력하랴.
-오히라 미쓰요의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중에서-
1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어보며 새로운 다짐을 해봅니다.
지금 내가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치있는 일일까 생각하면서...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잊혀지고 해결될 것을 왜 그렇게 벗어나려고만 했는지,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수없이 해보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깨닫습니다.
살아있음을 기뻐하고 주어진 저의 삶에 충실해야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행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출발
모든 실패 뒤에는 새로운 기회의 약속이 있습니다. 헨델은 40년 동안 영국과 유럽에서 오페라 음악의 작곡가로 널리 이름을 떨쳤으나 자신이 얻은 명성을 덧없이 느꼈습니다. 1741년 8월, 나이 들고 빈털털이가 된 헨델은 뇌출혈로 몸의 한쪽 부분이 마비되어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찰스 기본이라는 한 시인이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헨델에게 성경 본문을 가지고 작사한 시를 건네주며 그것을 작곡해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처음 헨델은 아무 생각 없이 그 시를 읽었으나 점차 그의 얼굴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를 위로하는 자가 아무도 없으니.” 이 이사야서의 말씀이 헨델의 상처들을 모두 어루만져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의 구원자는 살아계시니 기뻐하라. 할렐루야!”라는 끝 구절을 읽고, 곧바로 펜을 움켜 잡았습니다. 그는 작곡하는 중에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수시로 느꼈고, 그 후 21일 동안 거의 쉬지 않고 “메시야”를 작곡하였습니다. 그는 “나는 내 앞에 천국과 위대하신 하나님을 뵌 것으로 생각됩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메시야”가 처음 런던에서 연주된 후, 그는 장님이 되었지만 마지막 생애 6년 동안 그의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신앙
인도의 어느 선교사가 주님의 고난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힌두교(Hinduism)를 믿던 소녀가 몹시 흐느껴 울더라는 것입니다. 설교가 끝난 후 이 선교사는 그 하염없이 흐느끼는 소녀를 붙들고 무슨 슬픈 사연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소녀의 대답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이토록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참지 못하게 하여 우는 것입니다." 하면서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소녀의 말을 들은 선교사는 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나에게는 이러한 감격과 처음에 믿던 신앙의 열과 체험이 마비되었을까 하면서 자신의 무감각해진 신앙과 마비된 신앙의 체험을 안타까워하면서 회개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위한 10가지 방법
1.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
2. 자신의 입술을 조심하라.
3. 행동은 최선의 동기에 따르라.
4. 적게 말하고 듣는 입장에 서라.
5. 예의 바른 사람이 되라.
6.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
7. 타인을 판단하지 말라.
8. 한시간 이상 독서시간을 가지라.
9.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
10. 맡겨진 것에는 최선을 다하라.
삶의 위기는 새로운기회
1888년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다이나마이트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이나마이트를 제조한 다음에 일약 당대에 명사가 되었고 수많은 돈을 벌고 사람들의 관심과 촉망을 받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언제나 하던 버릇처럼 신문을 펴서 기사를 읽기 시작하는데, 깜짝 놀랄 만한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그 서두에 자기가 죽었다는 기사가 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제가 만일 당신과 저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읽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 신문 기사의 보도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유명한 알프렛트 노벨이 죽다.” 이 기사를 읽은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자기 동생이 죽었는데, 기자들이 혼돈하여 자기가 죽은 것으로 보도를 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망 기사 앞에서 이 사람은 깊은 침묵과 말할 수 없는 도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만들어서 재물을 얻었고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탄을 만든 제조업자가 드디어 죽다”라고 보도한 신문을 찢어 버리면서 그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는 인생의 허무 가운데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복음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자신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삶의 위기에서 겸손히 자신을 볼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그리고 훗날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알프렛트 노벨의 노벨평화상이 시작된 이유임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새로운 결단으로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자
어떤 자매가 목사님을 찾아와 하소연했다.“목사님! 저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기만 합니다.뭔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지만 작심삼일입니다.그래서 새해가 되었어도 새로운 계획 같은 것을 세우기조차 겁이 납니다”
목사님은 그의 말을 듣더니 창고에 가서 먼지가 뽀얗게 서려있는 낡은 소쿠리를 그에게 주며 이렇게 말했다.“자매님! 이유는 묻지 말고 소쿠리에 물을 담아오시기 바랍니다”
그 자매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소쿠리에 물을 담아보려고 했다.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소쿠리에는 물이 담기지 않았다.목사님은 결국 빈 소쿠리를 들고 온 그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비록 소쿠리에 물을 담지는 못했지만 그 안에 있던 먼지는 깨끗이 사라졌지요? 마음먹은 대로는 안되어도 무언가 새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입니다”
새해가 밝았다.새로운 결단으로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자.그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새로운 축복기회를 잡으세요
로마서 8장 18-25절
< 사방에 탄식소리로 가득합니다 >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평화는 깨지고 인간은 다른 피조물을 종처럼 무자비하게 다루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곳곳에 피조물의 탄식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1968년, 최초의 우주인으로서 달을 밟은 암스트롱이 우주에서 보낸 첫 주일 아침에 지상으로 보낸 첫 메시지가 시편 8편 1절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그는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아폴로 호가 달에서 찍어 보내온 사진을 보면 지구의 색깔은 청록색이었는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 지구의 모습은 회색 빛을 띈 죽은 별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대기오염으로 산성비가 오고, 오존층이 파괴되어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삼림은 급속히 줄고 있고, 지구 전체 물의 1%밖에 안되는 강물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하신 것은 자연을 파괴하라는 말이 아니라 "자연을 문화인답게 경작하라(cultivate)"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 말씀을 오해하고 자연을 맘대로 훼손해 환경의 탄식은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처럼 환경의 탄식소리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의 탄식소리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일전에 가난에 지친 19세 소녀가장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침에 신문배달하고, 낮에 약국 점원으로 일하면서 6식구를 부양하던 소녀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탄식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탄식을 들을 때 우리는 "에바다!(열려라!)" 하신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왜 이 19세 소녀가 자살이라는 가장 절망적인 길을 택해야 했을까요?
단순히 "가난하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자기의 탄식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자살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격려와 도움이 있었다면 이런 소녀의 자살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을 살펴 더욱 서로의 격려자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하고, 항상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의 세미한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 주위의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
사도 바울이 깊은 영성을 가졌던 이유는 그 탄식소리를 듣는 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지금 자연도 탄식하고, 믿는 사람들도 탄식합니다. 계속해서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믿는 사람도 겉으로 보면 안 그런 것 같지만 속으로는 탄식할 일이 많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미국의 어떤 목사님에게 한 젊은 여자 분이 와서 남편 자랑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의 남편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 빼고는 정말 나무랄 데 없이 좋아요."
그 말을 분석해보니까 남편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것에 대한 탄식이 배여 있어서 목사님이 슬쩍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자매님! 실제로는 마음이 힘들죠."
그러자 그분이 곧 울먹이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정말 힘들 때가 많아요."
거듭 난 사람과 거듭 나지 않은 사람은 사는 세계가 다른데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성격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면 함께 고쳐 가면 되지만 신앙이 다르면 참 힘듭니다. 신앙이 달라도 마음의 고통이 없다면 내 신앙의 진실성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보면 믿는 사람들에게도 곳곳에서 탄식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탄식소리를 듣고 같이 기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탄식소리를 들을 귀를 예비할 때 신기하게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지 않고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정신적 여백이 없이 너무 바삐 살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 소음은 얼마나 큽니까? 그 소음 때문에 정작 들어야 할 소리를 못 듣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루의 얼마 시간만이라도 내 귀를 소음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합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심장 소리라도 들으려 하다 보면 하나님 음성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었거든 이제 침묵을 끝내고 세상에 사랑과 위로를 전하려고 해야 합니다.
어느 날 꾀꼬리가 풀이 죽어 있어 현자가 "너 왜 요새 노래가 없지?"하고 물었습니다. 꾀꼬리가 불평하며 "개구리 소리가 하도 커서 제 소리가 소용없잖아요?"라고 하니까 현자가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조용히 있으니까 개구리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거야."
세상이 악하다고 침묵만 하는 것도 안되고, 불평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장 소중한 일은 탄식소리가 나는 곳에 가서 내가 희망찬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떠하든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성도란 겨울과 같은 상황에서도 봄을 노래하면서 봄을 준비하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때로 큰 것에 길들여진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작아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작아 보여도 그 은혜가 세상의 탄식을 잠재우게 될 것입니다. 그런 꿈을 꾸십시오. 그리고 헌신하십시오. 길거리에 떨어진 종이라도 주우십시오. 꿈은 꿈꾸는 자들의 헌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작은 몸짓의 중요성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작은 몸짓으로라도 꾸준히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하나의 흐름이 되어 탄식은 곧 생명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
그런데 주변의 탄식소리들을 잘 들어보십시오. 그 속에서 어떤 음성을 듣게 됩니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 즉 우주만물들이 지금 무엇을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 즉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 피조물의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자연과 사람이 한 형제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자연과 우리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사실상 하나라고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강물에 죽은 고기떼가 보이면 그 강이 죽은 것이고, 결국 우리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죽은 강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자연이 힘들면 하나님의 아들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을 애타게 기다리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졌다는 징표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쓰레기를 슬쩍 버리지 않고 자연을 최대한 존중할 것입니다. 또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고대한다는 말은 모두 주님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주만물이 다 주님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에도 주님이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여자 3명이 모이면 이런 이야기를 한답니다. "얘, 너 아직도 그 사람과 사니?" 그 정도로 많은 가정들이 신음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세상에 누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필요하고, 또한 가정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필요합니다. 가정도 사람 사는 곳이기에 부부관계, 부자관계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는 절대 이런 문제는 없을 거야!"라고 하는 미신을 믿으면 불행해집니다. 문제는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과연 예수님이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있고, 예수님을 소망하며 살면 우리의 삶은 빛깔이 나게 됩니다.
"음식을 만들 때도, 화장을 할 때도 남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아주 틀렸다"고 하는 한 이혼녀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아마 거의 모든 이혼녀가 비슷한 고백을 할 것입니다.
옷을 입을 때도, 어디를 갈 때도, 차 사고가 났을 때도 남편이 있으면 확실히 틀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예수님이 있다"는 이 한가지 사실이 얼마나 의미가 큰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있기에 때로 현재의 모습이 참담해도 소망을 가지고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선언합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먼저 "생각건대."라고 말합니다. 이제 좀 생각하면서 믿으라는 말 아닐까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을 비판할 때 주로 '말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비판합니다. 우리는 말을 줄이고 침묵을 통해서 항상 말씀과 진리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처럼 사도 바울은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결론을 얻고 말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는 침착하기 어렵습니다. 정말 내 고난이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한 차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해 현재의 고난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돈과 명예보다 굳건한 내일의 소망입니다. 이웃과 다른 비교는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한 가지 비교할 믿음의 비교가 있습니다. 믿음의 비교란 '현재의 고난'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비교해보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고난 중에 있다"라고 느끼면 분명히 그 고난은 작은 것이 아닐 것이지만 고난 중에서도 동시에 재빠르게 장래의 영광을 생각해보는 민첩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비교하며 살면 소망도 없고 삶이 참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미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며 살면 죽음 같은 고난 중에도 여유가 생깁니다.
캘빈은 죽을 때 이 18절 말씀을 25번이나 외우면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정말 크다면 오히려 현재의 고난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기독교의 생명은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믿는 사람답게 사는 것에 있지 않습니까? 캄캄한 밤에 별이 더욱 빛나듯이 성도들의 신앙도 어려움 속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잘 믿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어려움을 잘 이겨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낼수록 우리의 믿음은 소중해지고, 내일의 영광은 찬란해집니다. 서울에서 새벽기도로 유명한 큰 교회를 담임하시는 K 목사님의 경험담입니다. 그분은 청년 때부터 목회를 했는데 어느 날 아이가 첫돌 지나면서 병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진찰비가 70원이었는데 70원이 없어서 아이를 1년 동안 병원에 못 데려갔습니다. 어떤 분은 "그 70원 어디서 빌리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돈 때문에 사람에게 구차한 손을 벌리는 것처럼 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돈 빌리는 것이 자존심 상하고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주의 종 되더니..."라고 하면서
예수님 부끄럽게 하는 말을 할 수도 있는데 목사가 어찌 그런 말을 듣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없어도 있는 척, 굶어도 먹은 척'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세미한 탄식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도 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목회자는 좀 낫습니다. 선교지에 있는 선교사님의 아픔은 3배는 더할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꼭 필요한 것이 있지만 마치 구걸하는 것 같아 후원요청도 제대로 못합니다. 저도 몽고에서 김재호 선교사님이 3개의 교회와 신학교를 돌보는데 차가 없어서 아주 고생한다는 것을 선교사님 본인이 아닌 다른 목사님을 통해서 자세히 알았습니다. 꼭 필요하지만 제대로 후원요청도 못할 때 우리는 그 내밀한 탄식을 얼마나 듣습니까? 이제 축복의 말씀에만 열린 귀를 구하지 말고 이웃의 탄식에도 열린 귀를 구해야 합니다. 며칠 전 김재호 선교사님이 두 달 전에 몽고에서 당했던 일을 지금에야 공개했습니다. 몽고의 수도 울란 바타르 시내 버스 안에서 술 취한 두 몽고 사람에게 발길질을 당해 선교사님은 가슴을 맞고 입술이 터져 두 달간 앓았고, 사모님은 어금니 두 개를 빼고서
몽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열매맺기도 전에 고향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사연입니다. 저는 그 소식을 접하고 그 동안 모은 차량헌금을 하루라도 빨리 전달하기 위해 온누리 교회 선교협력 목사로 계신 김사무엘 목사님을 통해 선교사님에게 전달했습니다. 우리는 영적 싸움의 최전방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님의 탄식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선교사님의 탄식이 바로 병원비 70원이 없어 애끓던 K목사님의 탄식 아니겠습니까?
<선교사님 후원하실 분 연락주세요. 국민은행 284-21-0264-873 이한규(요삼일육선교회)>
그때 K목사님도 걱정은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데려 가실까?" 하는 마음으로 있다가 1년이 지난 후에 아이가 너무 아파해서 할 수 없이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말했습니다.
"정말 미련합니다. 아이가 이런데 1년만에 병원에 데려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말을 듣고 "당신은 내 사정을 너무 모른다!"고 한 마디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차비가 없어 아이를 자전거에 싣고 올 정도였는데 어찌 병원에 갈 엄두가 나겠습니까? 결국 아이는 죽었고, 죽은 후에 아이 시신을 찾는 것도 돈이 없어 힘들었다고 합니다. 너무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그 아픔이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때로 우리에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찾아오지만 주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너무 억울해서 "주님! 억울합니다"라고 하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억울하니? 나는 죄가 없이 인류 죄를 다 덮어써도 한 마디 하지 않았단다." 우리가 "너무 힘듭니다" 하면 주님은 "나도 십자가에서 힘들었단다"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움이 있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때 믿음을 나타내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에게 어려움은 기득권의 상실이지만 믿는 사람에게 어려움은 산고의 진통입니다.
산고의 진통은 극심한 고통이지만 사실상 고통으로 여겨지지 않는 기쁜 고통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주어진 고난의 체험은 오히려 '희망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보다 실천을 앞세워야 합니다. 작은 실천을 통한 '희망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고 한 달 수입의 30분의 1을 따로 떼어 보냅니다.
그 돈은 큰 금액은 아니어도 남을 위해 내 것을 도려내는 그러한 작은 실천을 통해서 우리가 체험하는 희망의 체험은 곧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
그처럼 고통이 축복의 통로라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24-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인간에게 소망은 산소 같이 중요하지만 소망의 근거는 눈에 보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기에 항상 참고 기다리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저 사람은 싹수가 노래. 저 사람은 가망이 없어."
그러나 우리는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녀에게도 해서는 안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