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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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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툴리안


 


터툴리안은 라틴어로 쓴 최초의 크리스천 작가였다. 그래서 그는 ‘삼위일체’라는 말과, 그 후 신학적 논쟁에서 사용된 그 밖의 많은 ‘전문적’ 인 말들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법률을 공부하던 시절에 그리스도교에 귀의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남아프리카에 있는 그의 고향 카르타고로 돌아온 그는 그곳에서 지혜롭고 유능한 크리스천 교리 교사가 되었다.(교수, 죠지 스코트)


 


▲ 열매로서 나타난 칼빈주의


 


우리는 칼빈의 신조가 논리적이고 성경적인가를 알기 위해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조사해 왔다. 그것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여러 가지로 다르게 본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성에 어긋난 것으로 비난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칼빈주의가 성경을 곡해함으로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했다고 하며 나아가서 그것이 “신학의 망신”을 주었다고 비난한다. 우리가 그것의 진위성을 논증하려면 더 이상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우리는 모든 시험들을 가장 진지하게 대면할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는가?” 내가 손에 씨앗을 쥐고 있다면 그것이 사과 씨앗인가, 배 씨앗인가 이것을 맞춰보아라고 질문하기 전에 그것을 심어라. 그러면 그 열매가 모든 논쟁에 대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칼빈주의는 심겨졌다. 그것은 싹이 나서 자라고 열매를 맺었다. 이 열매는 역사 속에 보존된다. 그것을 조사하는 것과 그 성질을 판단하는 것은 쉽다.(R. C. 리이드)


 


▲ 사도들과 칼빈주의


 


우리는 사도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이 가장 충실한 칼빈주의자였다고 믿는다. 사도요한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후 요한복음 6장과 10장 가운데 어떻게 칼빈주의를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바울이 칼빈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로마서 8장, 9장, 에베소서 1장, 그외 모든 서신들을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베드로가 정통 칼빈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오순절날 그와 같은 설교를 할 수 있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이 명백한 이상 우리는 칼빈주의 열매를 세상에 제시하기 위하여 도처에서 쟁취했던 승리와 함께 영웅적인 고난을 받았던 초대 교회로 구태여 되돌아가지 않는다. 루터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교리를 선포함으로써 교황제도가 흔들렸던 그 시대부터 칼빈주의는 근 200년 동안 로마 교회와 투쟁하기 위해 전쟁을 치뤘다.(R. C. 리이드)


 


▲ 이레네우스


 


초기 몇 세기 동안 크리스천 신앙에 대한 가장 큰 위협 중의 하나는 소위 ‘감추어진 진리’에 그 철학적 바탕을 둔 ‘그노시스파 이단설’ 이었다. 아시아의 미노아지방 사람으로 후에 가울의 주교가 된 이레네우스는 이러한 이단에 대항하여 성서의 역사적 교의를 재조명하였다.(교수. Veronica Zundel)


 


▲ 삼위일체의 의미


 


기독교에서 가장 오해되기 쉬운 개념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이다. 성경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심을 가르치고 있다(신 6:4).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근본적 존재나 본성에 있어 한 분이시지만 세 위를 갖고 계신다(창 1:26, 3:22).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복수인칭 “우리”로 나타나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각각의 인격이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하시는 일도 구분되기도 한다. 예로 구속 사역시에는, 성부는 그것을 계획하시고 성자는 그 계획을 집행하셨으며 성령은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이 세 인격의 하나님은 모두 영원하시다. 영원전부터 존재하셨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성부와 함께 그의 나타나심인 성자도 역시 항상 존재하신다. 항상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고 성자는 성부에게 봉사하시는데 이 사랑의 관계로부터 역시 영원전부터 존재하시고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이 나오셨다. 그렇다고 세 분이 아니고 한 분이시니 ‘단수이면서 복수요 복수이면서 단수’라는 수학적 모순-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을 지니고 있다.


한 예를 들어 보면, 나는 학교에서는 선생님으로 교회에서는 목사님으로, 그리고 집에 가면 아빠로 불리우며 그 역할도 달라진다. 그러나 나는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도 온전한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으니, 이 교리는 사람의 이성을 뛰어 넘는 영역의 것이기 때문이다.(목사, 이진우)


 


▲ 칼빈과 그리스도교의 원리


 


파리 대학에서의 수학 시절 칼빈은 마틴 루터의 신간 작품들과, 그 안에서 그가 한 말 가운데 “주께서는 나의 영혼을 다스려 온순히 하셨다”라는 구절을 접했다. 그 당시 프랑스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칼빈은 바젤로 몸을 피했고, 그곳에서 1536년 그는 단지 십계명과 사도신경 그리고 주의 기도를 기초로 한 교리상의 가르침으로 6개의 장에 불과한 그의 첫번째 논문인 「그리스도교의 원리」를 완성했다. 그리고 말라리아가 만연하던 시기인 1559년에 18장으로 된 그의 마지막 논문이 완성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아는대로 쓰고 또 쓴대로 아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라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하였다.(교수, Veronica Zundel)


 


▲ 기독교의 교파가 많은 이유


 


“목사님이시죠?”


“네, 그렇소만.”


“어느 교회시죠?”


“네, 저는 침례교입니다.”


“아, 당신들만 천국 간다고 믿고 있는 그 속 좁은 침례교이시군요.”


“나는 그 정도로 속 좁은 것이 아니라, 우리 침례교도들도 다는 천국에 못간다고 믿고 있는 속이 좁고 또 좁은 목사라오.”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는 물론 여러 교파가 있다. 대략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 하나님의 성회, 하나님의 교회, 나사렛 교회, 루터교 등이 있다. 기독교의 교파가 이처럼 천주교에 비해 교파가 많은 이유는 그 ‘성경관’에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1229년 톨로사회의 이후 평신도가 성경 읽는 것을 금지시켜 왔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개혁 당시부터 모든 교인이 각자 성경을 읽고, 각자가 은혜를 받도록 개방되어 왔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서로가 대화하며 토론해 가다가 의견의 일치가 안되면 독자적으로 자기의 신앙체계를 확립해가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그것이 나중에는 하나의 큰 세력을 이루어서 교과를 형성하게된 것이다.(목사, 이진우)


 


▲ 교단마다 다른 교리


 


칼빈의 신학 사상을 따르는 이들이 장로 교회를, 루터의 신앙을 따르는 이들이 루터 교회를 이루었으며, 웨슬레를 중심으로 감리교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들은 다 같은 성경을 믿으며, 같은 신앙고백을 하므로 실상은 하나이나, 각 교파마다 강조하는 교리가 다르고, 교회 정치 형태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들면, 장로교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론을 강조한다면, 감리교나 성결교는 자유의지와 인간 영혼의 구원을 더 강조한다. 구세군은 사회 봉사를, 오순절 교회와 하나님의 성회는 성령을, 침례교는 침례의식을 강조한다. 어떻게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동일한 생각만을 할 수 있겠는가? 교파들은 몸의 각 지체처럼 자기 몫의 일을 하며 결국 하나의 몸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고전 12:12-17).


 


▲ 천주교와 기독교는 다른가


 


한국에서는 천주교를 구교, 기독교를 신교라고 한다. 어떤 이는 천주교가 먼저 생겼기 때문에 좋다고 하나, 천주교보다는 불교가 더 먼저 생기지 않았는가? 문제는 어느 쪽이 먼저냐가 아니라 누가 본래의 진리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본래 오순절 이후,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였다. 그런데 A. D. 500년에 로마 지역의 교회지도자가 자신을 ‘교황’(pope)이라 칭하며 그레고리 1세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교회는 본격적으로 제도와 조직, 형식이 중심되었고 색다른 교리들이 덧붙혀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5세기에 이르면서 부패는 극도에 달했다. 이때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세워서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운동을 일으키셨다. 그것이 1517년에 시작된 종교개혁이요, 그들이 마틴 루터, 존칼빈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이들을 제명처분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개혁의 대열에 호응하였고 교회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기독교회는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렀고, 훨씬 더 많은 사람이 개신교의 진리를 사랑하고 있다.(사실입니까 하나님)


 


▲ 착각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하는 설교나 강의가 왜 좋은 줄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남의 것들은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난 확실한 증거에 의해 그게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 설교가 길다는 평이 있음을 알았다. 길다는 평이 곧 설교가 탐탁치 않다는 걸 반증하는 것임을 너무 잘 아는 나는 아차 했다. 설교가 좋으면, 그것이 좀 길어져도 청중은 탓하지 않는 법이다. 아니, 좀더 듣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길다는 평이 있다 하니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강의도, 직접적인 평은 아니었지만 신학생이었던 우리 교회 전도사에게, 교단의 장학금을 타게 한 데 대하여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역시 아차 했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감화를 주지 못했다는 증거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두 사건 모두 내 교만 때문이었음을 자인하면서 회개했다.(목사, 김병로)


 


▲ 양면작전


 


문단(文壇)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목사인데… ’ 하는 생각을 하고, 교단(敎團)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문인인데… ’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오던 내가 근래에 이르러 그것이 내 교만의 소치임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인 ‘숨은 나’(shadow self)가 내 속에서 그런 작용을 한 것으로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을 교만이라 하였다. 문단에서도, 교단에서도 나를 내세우려 했을 때, 오래 전부터 나 자신도 모르게 내 속에 잠복해 있던 교만의 요소가 기회 닿을 때마다 내 생각을 조종했고, 나아가서는 내 행동까지 마음대로 이끌었던 것이다. 신자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기 속에 숨어 있는 나를 악하게 조종하는 이 ‘숨은 나’를 발견하여 삭제하는데 힘써야 할 것같다.(목사, 김병로)


 


▲ 교만을 버려라


 


노자(老子)는 초(楚)나라 고현(古賢) 사람이라고 하지만 한때 주(周)나라에서 창고지기를 한 적이 있었다. 쌀 창고의 출납관리였다고도 하고 책을 간수하는 서고(書庫)를 맡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한다. 그건 그렇고 공자(孔子)보다 서른 살이 위라 공자가 오십이 가까워서 주나라로 노자를 찾아갔을 때는 그러니까 노자의 나이 여든이 가까웠을 것이다. 공자는 깍듯이 예를 갖추고 노자를 만나 보았다. 공자로 말하면 여러 해 동안 학문을 닦아 인의(仁義)와 도덕과 선왕의 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자기의 사상에 대해서 자신과 포부가 컸다.


한편 노자는 인의나 도덕에 대해서 냉담할 뿐 아니라 회의(懷疑)마저 가지고 있었다. 자연 그대로를 존중하는 노자는 유유히 지내면서 세상 밖에 나서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대조적이다. 공자는 옛날 책 같은 데서 여러 가지를 끌어내어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설명하고 노자의 의견을 물었다. 노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금 당신이 하는 말들은 모두 옛날 사람들이 책에 써 놓은 것들이야. 그런 것이 지금 이 세상 사람들에게 소용이 있겠는가. 나 보고 말하라면 이것을 얘기 하겠네. 군사라고 하는 것은 때를 만나면 벼슬자리를 얻어 세상에 나가고 때를 만나지 못하면 쑥대같이 바람에 쓰러지고 마는 거더군. 크게 장사하는 사람은 곳간에 잔뜩 물건을 쌓아 두고도 겉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보이고 군자는 안에 큰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남이 보면 바보 같다는 거야. 그대도 그 교만과 욕심과 그리고 내노라 하는 태도를 버려야 해.”


공자는 새삼스럽게 감탄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 천재가 탈


 


하나의 재주가 비상하여 출세한 사람은 많지만 단지 암산이 특출해서 큰 벼슬을 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전한의 상홍양은 본래 낙양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으나 어려서부터 암산을 잘 했다. 암산의 명수는 세 사람이었는데, 모두 어른이었고 홍양만이 어린이었다. 어른들 틈에 끼어 아침부터 밤까지 암산으로 지새울 동안은 좋았는데, 막상 어느 사대부라는 벼슬에까지 출세를 하자 드디어 교만한 마음이 싹텄다. 그는 모반을 계획하다가 끝내는 소제에게 사형을 당했던 것이다.


 


▲ 예술가의 연기


 


르네상스 거장인 미켈란젤로는 훌륭한 조각과 그림을 남겼는데, 구변도 남못지 않게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떤 화가의 유치한 「가련한 성모상」을 보고는 그는 이렇게 비꼬았다. “아 이것이야말로 참된 가련함이다.”


또 어느 날, 안면이 익은 어느 수도사가 사치한 옷을 입고 활개를 치면서 걸어오는 것을 본 그는 아는 체를 하지 않고 지나치려 했다. 그러자, 수도사가 새삼스럽게 공손히 자기의 성명을 대면서 인사를 한즉 미켈란젤로는 놀란 표정으로 “아이쿠! 이거 실례했군, 너무나도 훌륭하게 보여서 설마했었지.”


 


▲ 남아 있는 교만


 


그룬트비는 우선 자기 자신부터 반성해 보았다. “너 자신은 진정한 크리스천이야?” “네 죄는 용서받았느냐?”하고 자문했다. 당시에 그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교만을 꺾기가 어려웠다. 그는 당시의 심령 상태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나 한테서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을 모두 몰아내어도 교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것은 내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인간으로서 기독교를 바로 잡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자처했을 때… 교만은 거룩한 옷을 갈아 입고 등장하게 마련이었다.”


그는 다시 선과 악, 삶과 죽음의 어느 쪽에 자기가 속해 있는가를 깊이 성찰해보았다. 그리하여 죄와 죽음의 편에 놓여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그가 실신한 사람처럼 침상에 누워 고민하자, 친구들은 의사인 그룬트비의 외삼촌 방 교수를 불러다 보였다. 진찰을 마친 외삼촌은 그룬트비에게는 아무 이상이 없고, 단지 영혼의 구원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문이 종교 관계자들의 귀에 들어가 그룬트비에 대한 가벼운 견책을 선고한 다음 1811년 목사 안수를 허가했다.


 


▲ 사실과 의미


 


성서에는 유명한 탑의 이야기가 나온다. 창세기 첫 부문에 나오는 ‘바벨탑’ 의 이야기가 그이다. 군켈이라는 학자는, 여기엔 성의 건축과 탑의 건설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어쨌든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자”(창 11:4)라는 인간의 교만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을 ‘혼잡케’ 하셨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지그라트’ 라는 높은 탑이 솟은 신전이 많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언어의 다른 점과 여러 민족이 분산된 원인에 대해 생각하였다. 특히 바벨론의 ‘지그라트’, 즉 ‘에테메난키’(하늘과 땅의 토대라는 뜻)가 이 이야기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이것은 미완성인 채 오래 방치되어 있었으며, 현재는 늪에 에워싸인 점토의 작은 섬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처럼 폐허가 되어 있는 건조물에 독특한 의미를 부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의 관계보다도 그 의미이다. 성경이 여기서 전하고 있는 인간의 죄는, 인류의 타락의 경우와 같은 성질의 것이다. 자기를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까지 끌어 올리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게 되려는 교만이 아닐 수 없다.


 


▲ 교만은


 


교만은


쉽게 화를 내며


항상 강한 척 자기를 포장하고


자기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하다고 느끼며


스스로에 만족하며


자신의 지혜와 명철을 의지하느니라.


 


교만은


독립정신의 가면을 쓰고


자기 자신을 능력자로 여기며


스스로를 높여


칭찬과 명예와 명성을 추구하느니라.


 


교만은


비교하기를 좋아하고


판단하고 분석하고 평가하기 좋아하며


남이 높아지는 것을 참아내지 못하며


불만족과 불평 속에


스스로를 끝없이 채찍질하여 자책하느니라.


 


교만은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주기보다 받는 것을


칭찬하고 격려하기보다 시기하고 질투하며


핑계거리를 찾아 합리화에 능숙하니라.


 


교만은


인내하지 못하고


외로움에 휩싸여 자주 고독감에 빠지며


언제든지 두 가지 마음을 품어


상황과 환경에 집착하며


이웃의 평가에 예민하고


끝까지 자기만을 고집하느니라.


 


결국


교만이 불안정한 정서와


열등의식의 뿌리로부터 빚어진


사생아임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자기를 깨닫게 되리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니라.


 


▲ 박사의 교만과 겸손


 


어떤 곳에 박사 한 분이 있었다. 그는 박사라 해서 가장 교만하였다. 안하무인격이라 하룻밤에 어떤 흰 옷입은 사람들 몇 명이 와서 네가 박사가 된 것 중에 아무것은 내 것이라 하면서 찾아가고 또 한 사람이 같은 말로 아무 것도 내 것이니 찾아간다 하고, 또 다른 한 사람도 그것은 내 것이니 찾아간다 하여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것을 다 찾아가고 보니 자기에게 남은 것은 박사라는 이름뿐이요 속은 텅 비었다. 그래서 이것이 웬일인가 하며 고함을 치다가 깨고 보니 꿈이라 그 후부터는 나의 산 것은 이름뿐이요 나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 하여 겸손해졌다고 한다.


 


▲ 교만의 결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신격화시킬 때 혹은 국가를 신격화시키거나 민족을 신격화시키거나 우상화시킬 때 엄하게 벌을 내린 것을 구약성경의 예에서 볼 수 있다. 벨사살이라고 하는 바벨론 왕은 자기가 천하의 왕이 된 것이 자기의 힘으로 된 것인양 하나님을 무시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많은 성전 기명들이 있었는데 그 금은 보화를 가지고 신하들과 처첩을 모아 놓고 주연을 베풀었다. 그리고 망언을 했다. “내가 신인지 어디 신이 따로 있나 내가 신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신이나 한테 이기지 못하고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 잡아와 나를 섬기게 하지 않았느냐?”하며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던 제사 기명들을 술잔으로 쓰며 잔치를 벌였을 때 벽에 글씨가 나타났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썼다. “너는 저울에 달아 보니 모자란다. 너의 날이 다 되었다. 너는 한도가 찼다. 그러므로 너의 나라를 메대와 바사에게 나눠 주겠다”는 파멸의 선언이었다. 그 날밤에 하나님의 채찍이 임했다. 페르시아의 대군이 몰아 닥쳐서 대바벨론 제국은 하루 아침에 망하고 그는 전쟁에서 불에 타서 전사를 하고 말았다.(목사, 김준곤)


 


▲ 교만한 사나이


 


중국의 전한(前漢)이 멸망하자 군웅이 할거하여 세상이 소란했다. 이때 공손술(公孫述)이라는 자가 득세하여 황제라고 자칭했다. 어느 날 옛 친구 마원(馬援)이 그를 찾아 갔더니 이미 천하를 장악한 듯이 황제처럼 호위병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그런 공손술에게 마원은 정떨어져 “아직 진짜 황제도 아닌데, 함부로 우쭐해서야 되겠나”라고 말하고는 집으로 곧장 돌아왔다. 과연 공손술은 그 후의 전쟁에서 적에게 패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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