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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 예화 69편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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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 예화 69편 모음 


1.봉사


저녁을 가볍게 라면으로 떼운 어느 날 밤, 아무래도 배가 출출한지 아내가 밤늦게 "우리 라면 끓여 먹을까요?" 하고 저를 유혹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찬장과 냉장고를 열어보더니 "에이, 먹고싶기는 하지만 참지요. 마침 라면도, 김치도 다 떨어지고 없네요." 하면서 벌러덩 드러 누워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허전한 배를 무엇인가로 채우지 못한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래, 까짓거 오늘은 내가 당신을 위해서 '봉사'를 하지. 라면 사다가 끓여 줄게" 그리고 냄비에 물을 올려놓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 올라가 어부동상회 문을 두드려 라면을 사오고, 갈릴리마을 식당에 내려가 김치를 가져왔습니다. 오늘따라 가을비가 내리면서 기온이 뚝 떨어져 온몸을 움추리고 덜덜 떨면서 다녔습니다.

드디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을 마누라 앞에 대령하였습니다. 

"미안해요. 날씨도 추운데 오늘 나를 위해서 밤길을 걷게 해서 미안해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밤길을 걸은 것도 당신을 위한 나의 '봉사'속에 포함된거야"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떠나 죄로 가득 찬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기까지 '봉사'하셨습니다.

"아이고, 예수님. 황송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봉사'를 감당하기엔 사실 좀 벅차네요. 어찌 저같은 것을 위해서 세상에까지 내려 오셨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다정하게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그 여행도 너를 위한 '봉사'속에 포함되어 있도다" ⓒ최용우


2.주님에 대한 봉사 


론펠공은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찬식 때 썼던 금잔을 찾아내어 교회에 봉헌하기로 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가 막 성문을 나서는데 한 문둥이가 달려나와 구걸을 하였다. 그는 기분이 상하여 "나는 하나님의 명으로 주님의 금잔을 찾으려고 길을 떠나는 사람이다. 너처럼 더러운 것이 어찌 나를 괴롭히느냐."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급히 지나쳤다. 그 후 그는 생사를 걸고 금잔을 찾아 헤맸으나 헛수고였다. 재산을 다 허비하고 백발이 되어 돌아왔다. 그가 막 성에 들어서는데 또 문둥이가 달려와서 구걸하였다. 론펠공은 오랜 가난신고가 그를 부드럽게 만들어 긍휼의 정신이 그의 가슴속에 일어났다. 그는 그의 전 재산인 빵 한 조각을 주면서 말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빵밖에 없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걸 받게." 그리고 표주박으로 물을 떠다 그에게 주면서 말했다. "은혜로우신 주님의 이름으로 이걸 마시게." 

이때 갑작스레 문둥이가 주님으로 바뀌면서 "보라, 나다. 그 빵은 찢기운 내 몸이며 그 물은 십자가에서 흘린 내 피다. 가난한 이와 함께 하는 식사야말로 참 성찬이다. 네가 찾던 잔은 네 손에 든 표주박이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이웃에 대한 봉사가 곧 주님에 대한 봉사임을 알자.


3.봉사의 사람 


충실한 청지기는 주인의 소원과 뜻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다. 선교사의 4대손인 스티븐 린튼 박사는 최근 자기의 삶을 나귀의 삶에 비유했다. 그리고 모든 선교사의 삶은 주인이 실어주는 짐을 싣고, 주인이 원하는 곳으로 가서 그 짐을 그 곳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나귀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스티브 란튼 박사는 지난 수년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사랑의 구호품을 싣고 북한으로 가서 그 곳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나귀의 역할을 수행했다. 

스티브가 오늘날 하나님이 쓰시는 충실한 나귀로 만들어지는 데에는 10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895년 4월, 스티브의 외고조부인 유진 벨 목사 부부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그들 부부는 평생을 목포, 광주 지역에서 선교하다가 한국에 묻혔다. 벨 선교사부 부의 딸인 사로트는 월리암 란튼 선교사와 결혼하여 일생을 한국에서 보냈다. 그들 2세대 선교사 부부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스티브의 부친인 휴 린튼이었다. 스티브의 어머니 로이스는 순천 기독 결핵 재활원의 원장으로 평생 결핵 환자들을 돌보며 살았다. 로이스는 최근에 호암상을 수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결코 선교사가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다른 나라에 가서 일하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따른 것뿐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사랑을 담는 질그릇일 뿐입니다." 

기도: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살기 원하시는 주님! 주님이 부르실 때에 즐거이 나 자신을 드리며, 주님가신 그 고난의 길을 나도 가게 하소서. 복음이 없어 곤고하며 갈망하며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소서. 


4.서비스 정신 


제임스 스미스는 오리건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류머티즘 치료제를 파는 제약회사의 세일즈맨으로 취직을 했다. 그러나 입사한 지 얼마 안되어 사표를 쓰겠다고 매니저에게 말했다. 1주일이 넘도록 열심히 뛰었지만 전혀 매상을 못 올렸기 때문이다. “저는 세일즈맨으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매니저는 그의 사의를 받아주지 않았다. 스미스는 입사할 때 이미 봉급과 영업비를 전액 가불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류머티즘으로 고생하고 있는 한 중년부인을 만나 상담을 해주었다. 그녀는 스미스와 한참 상담을 하고 나더니 약을 여섯병이나 매입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거액의 수표를 끊어주었다. 스미스는 그제서야 비로소 세일즈의 비결을 발견했다. “팔기 전에 먼저 서비스를 하자.” 그는 가장 매상을 많이 올리는 사원이 되었다. 25년 후에는 세계 굴지의 제약회사 경영인이 되었다. 성공하고 싶은가. 먼저 남을 위해 베풀라. 서비스 정신을 가지라. [국민일보]김학중 목사 (새안산교회)


5.제일 예쁜 손


어떤 가정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멀리 살던 아들딸들이 다 모여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던 끝에 누구 손이 제일 예쁘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며느리와 딸들은 저마다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결국 투표로 결정하자고 하였습니다. 누구의 손이 제일 예뻤을까요? 결과는 압도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주름살이 많이 잡힌 어머니의 손이었습니다. 사랑과 봉사의 수고를 많이 한 손이야말로 제일 예쁜 손인 것입니다. 


6.남을 위해 봉사하라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한 어린이의 상처를 지극한 정성으로 치료해주고 있을 때 이웃 주민이 물었다.“수녀님, 당신은 당신보다 더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 드시나요. 당신은 평생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십니까” 그러자 테레사 수녀는 “허리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테레사 수녀는 젊은 시절 캘커타의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녀는 창문 너머로 거리의 한센병 환자들을 계속해서 주시했다.“나는 그들의 눈에서 두려움을 보았습니다. 적절한 의료 혜택을 받아본 적이 없는 두려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두려움을 보았습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그러한 두려움을 마음속으로부터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침내 결심했고 수녀원이라는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평화의 집을 지었다. 그녀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약 15만 명의 한센병 환자들에게 의료혜택을 주고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었다. 그녀는 이제 하나님 품에 안겼지만 온 세계 사람들이 종교를 초월해서 그녀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다. 남을 위해 봉사하라. 삶을 의미 있게 만들 것이다. 


7.작은 봉사


호화로운 배를 타고 여행하던 한 승객의 이야기입니다. 배가 심한 폭풍 속의 새까만 어둠 속을 질주하는 동안 그는 배멀미를 하여 선실의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놀라운 외마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이 갑판에서 떨어졌다.!" "참 불쌍한 사람이군."하며 이 사람은 혀를 끌끌 찼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있다면 도울 수 있을 텐데. 아무 것도 할게 없잖은가?" 그때 그는 어떤 작은 음성을 마음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선창에서 조명등을 비춰주면 불빛을 보고 배로 돌아오는 방향을 알지도 몰라" 이 사람은 곧 행동에 옮겼습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물에 빠진 사람이 구출되었습니다. 선장이 이 사람의 방에 들어와서 감사하다고 전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빠졌을 때 조명등의 불빛이 선창으로부터 비춰 캄캄한 바다에서 그를 발견하고 구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학생여러분,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큰 일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작은 봉사활동이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봉사의 씨앗을 뿌리자


8. 美 명문대 입학조건 


미국에 이민해서 살고 있는 한인 2세가 명문 컬럼비아대 의과대학에 지원했다. 공부도 잘해서 SAT 시험에 만점을 받았다. 집안 형편도 부유해서 무난히 합격되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불합격 통지서가 날라왔다. 불합격 사유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귀하의 성적은 아주 우수합니다. 가정형편이나 여러 조건들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귀하의 서류 어디를 보아도 헌혈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헌혈한 경험도 없는 귀하가 어떻게 환자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귀하는 의사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교육제도와는 너무나 상이하다. 우리는 오직 공부만 잘하면 합격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 사회는 이기주의자들만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9. 김기창 화백의 봉사


제 5회 인존상 공공봉사 수상자는 78세의 운보 김기창 화백이었다. 그는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인데 궁극적인 아름다움은 남을 위한 봉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작업을 통해서는 정적(靜的)인 기쁨을 얻을 수 있고, 봉사에서는 동적(動的)인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4세 때 홍역을 심하게 앓고 난 뒤, 후유증으로 7세 때 청각장애 증세가 나타나자 그림 그리기를 시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70년간 그림을 그린 그는 돈을 벌어서 청읍 회관을 설립하고, 한국농아복지회 회장이 되어서 매년 1억 원이 넘는 돈을 기부했다. 그래서 불행한 청소년들을 위해서 그 돈을 기부했다.


10.봉사와 건강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암 부스는 매우 병약한 사람이었다. 청년기에 그가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이런 몸상태로 계속 과로하면 1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휴식이 최고의 묘약입니다." 

윌리암 부스는 그 말에 크게 위축되지 않았다. 그대신 규칙적인 생활과 사회의 약자들을 돕는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주위의 우려를 말끔히 씻고 83세까지 장수했다. 

그의 아들 브람웰 부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계단을 오를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스무살을 넘기기도 어려울 것이라며 혀를 찼다. 그러나 브람웰 부스도 73세까지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온통 '봉사'와 '사랑실천'으로 채워져 있었다. 노동은 '장수'와 '건강'을 선물한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누린다. 


11.돌을 치워보니까 


옛날 한 부자가 살았다. 그 부자는 평생을 자신만 알고 살아왔기에 자신의 인생에서 한번쯤은 남을 위해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자는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큰길가에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엄청나게 큰 돌을 올려놓았다. 그 돌을 본 사람들은 "에이, 어떤 놈이..." "어머. 위험하다. 돌아가야겠네." 라고 중얼거리며 치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돌을 본 한 젊은이가 돌을 끙끙거리며 옮기기 시작했다. 꼬박 두 시간이 걸려서 옮긴 돌 밑 구덩이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의아하게 여긴 젊은이가 구덩이에 뭐가 있나 보려고 다가가보니 자루 하나가 있었다. 그 자루를 열어보니 휘황찬란한 보석과 엄청난 양의 금화와 은화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쪽지 하나.

"남을 위해 큰 돌을 치운 사람에게 주는 상이니 받아 가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때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 수도, 행복이 될 수도 있겠지요. 내가 하는 일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 박 계 영 -

내가 하는 좋은 일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고 값비싼 보상도 따르지 않으며, 곧 잊혀져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누군가가 편안해지고 행복해진다면 그 자체가 보상이 아닐까요?


12.주님께 대한 봉사 


론펠공은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찬식 때 썼던 금잔을 찾아내어 교회에 봉헌하기로 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가 막 성문을 나서는데 한 문둥이가 달려나와 구걸을 하였다. 그는 기분이 상하여 "나는 하나님의 명으로 주님의 금잔을 찾으려고 길을 떠나는 사람이다. 너처럼 더러운 것이 어찌 나를 괴롭히느냐."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급히 지나쳤다. 그 후 그는 생사를 걸고 금잔을 찾아 헤맸으나 헛수고였다. 재산을 다 허비하고 백발이 되어 돌아왔다. 그가 막 성에 들어서는데 또 문둥이가 달려와서 구걸하였다. 론펠공은 오랜 가난신고가 그를 부드럽게 만들어 긍휼의 정신이 그의 가슴속에 일어났다. 그는 그의 전 재산인 빵 한 조각을 주면서 말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빵밖에 없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걸 받게." 그리고 표주박으로 물을 떠다 그에게 주면서 말했다. "은혜로우신 주님의 이름으로 이걸 마시게." 

이때 갑작스레 문둥이가 주님으로 바뀌면서 "보라, 나다. 그 빵은 찢기운 내 몸이며 그 물은 십자가에서 흘린 내 피다. 가난한 이와 함께 하는 식사야말로 참 성찬이다. 네가 찾던 잔은 네 손에 든 표주박이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이웃에 대한 봉사가 곧 주님에 대한 봉사임을 알자. 


13.봉사하는 대통령 


세계 제2차 대전때의 일입니다.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군대로부터 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영장을 받은 젊은이들은 큰 도시로 집결하여 기차를 타고 훈련소로 갔습니다. 워싱턴 기차 정거장에도 수백명의 장정들이 몰려들었고 시민들은 기차역에 나와서 그들의 편의를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 시민들 가운데 다리를 절면서 뜨거운 코코아 잔을 쟁반에 들고 늦은 밤까지 봉사를 하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친히 코코아를 끓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장정 하나가 그 노인을 자세히 보니 그는 다름 아닌 루즈벨트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육체의 불편을 무릅쓰고 밤마다 기차 정거장에 나와 훈련소로 떠나는 청년들에게 뜨거운 코코아를 나르며 봉사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말로만 외치는 선행보다는 말없이 행하는 행동 하나가 더욱 귀감이 됩니다. http://je333.com(한태완 목사 설교 예화 자료집) 


14. 퍼스트 레이디로의 행진


"여러분이 빌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뽑으면 힐러리라는 똑똑한 여성 한명을 덤으로 얻게 됩니다." 지난 92년 미국 대선 유세 중 힐러리 클린턴이 대중연설에서 한 유명한 말이다.

실제로 힐러리는 명문 예일대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두 차례나 '미국의 변호사 1백인'중 한사람으로 뽑힌 능력있는 여성이다. 미국 역사상 전문직을 가진 첫번째 퍼스트 레이디인 힐러리는 교육.아동.법률구조.여성문제 등에 폭넓은 관심과 이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93년 클린턴대통령이 힐러리를 의료보험개혁특별위원장에 임명하자 반대여론이 들끓어 힐러리는 결국 그 자리를 포기했다. 퍼스트 레이디의 바람직한 역할에 대한 논란이 다시 제기되었고..최근에는 제2차 세계대전후 재임한 10명의 미국 대통령과 퍼스트 레이디간의 권력공유의 역사를 밝힌 책 '국사'가 역사학자인 길 트로이에 의해 출간돼 관심을 모은다.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에 관한 이런 논란이 남의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한국에서도 벌써부터 대선주자 부인들이 각광받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지도자들의 면모를 제대로 알기 위해'안팎'을 검증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런 현상은 바람직하다.

아쉬운 것은 아직까지 부인을 대상으로 한 토론회나 인터뷰가 대부분'가정적이다''청렴하다'식의 그렇고 그런 남편자랑 차원에서 끝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들 부인들의 역할은 표밭 뛰기,여성유권자 접촉,남편의 건강관리나 옷차림 돌보기 등 이른바'내조'가 주인 것같다. 이제는 9명이 된 대선후보및 주자 부인중 전문직업인은 의사인 김덕룡의원의 부인 한사람 뿐이다.

최근 리서치 앤 리서치가 한국여성정치연구소의 의뢰로 전국 1천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전화설문조사를 한 결과 절반이 넘는 54.7%가 '대선후보 부인이 선거결과에 영향을 끼친다'고 답해 당사자들을 긴장시켰다.

바람직한 영부인상은 '정치에 관여말고 사회봉사활동에 헌신하는 것'이 47.3%, '내조에만 전념하는 현모양처형'이 29%, '자기영역을 갖는 전문가'는 23.2%였다.

역대 대통령부인중 좋아하는 사람은 육영수 여사가 압도적이었다(76.2%). 대통령제를 실시한지 2백년이 넘는 미국은 대통령과 그 부인의 평가도 활발하고 방법도 세련됐다.

80년대 후반 시에나대의 토머스 캘리교수팀은 역대 퍼스트 레이디에 대한평가작업을 했다. 이때 기준은 국가에 대한 기여도, 지도력, 성취력, 그리고 여성다움, 공적 이미지, 지적수준, 대통령에 대한 헌신 등이었다.

이에 앞서 80년대 초에는 미국 뉴욕에서'퍼스트 레이디'를 주제로 한 회의도 열렸다. 역사학자.작가.언론인 등 1백여명이 참가해 역대 42명의 퍼스트 레이디를 평가했다. 작가인 애비게일 매카시는 퍼스트 레이디의 적절한 역할을' 잠정적(임기가있는) 여왕'으로 규정하고 작고한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비와 재클린케네디를 바람직한 모델로 꼽았다.

반면 전직 백악관 공보비서는 '비전통적인 활동가'를 강조했다.

위의 두 평가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퍼스트 레이디로 뽑힌 사람은 36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으로 헌신적인 사회운동가였던 엘리너루스벨트였다.

반면 한국 유권자들은 부인들이'나대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 한때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그림자 내조'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러나 '그림자 내조'를 내세운 그 당사자야말로 대통령을 통해 각종 이권과 인사에 관여했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우아한 한복맵시로 유명했고'청와대의 야당'으로 자처하면서 남편에게 정치측근들도 할 수 없는 고언(苦言)을 자주 하고 어린이 문제에도 관심이 높았던 고(故) 육영수여사를 바람직한 퍼스트 레이디로 뽑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유권자들은 대통령후보 부인도 독자적 인격체로 보고 인간성. 지도력. 대통령에게 미칠 영향등을 고려해 표를 던져야 한다.


15「큰 사랑」이 있는 작은 공간


"일반 목욕탕에서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오세요. 무료로 목욕과 이발, 세탁을 할 수 있습니다"

지난 1일 서울역 부근 동자동 11번지에 이색적인 목욕탕이 문을 열었다.

"나사로의 집"이라는 현판이 내걸린 이곳은 일반 목욕탕에서 푸대접을 받는 행려자들이 마음놓고 드나들 수 있는 "자유공간"이다.

규모라야 15평 남짓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10명이 이용할 수 있는 샤워시설과 이발실,1시간 안에 건조까지 마칠 수 있는 현대식 빨래방 시설이 갖춰져 있다.

행려자들은 목욕을 끝낸 후에는 말끔하게 손질된 의류 5백여점 중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을 수도 있다.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오후 2~5시에 문을 여는 이 목욕탕은 매월 마지막 목요일에는 외국인 부랑자와 여성 행려자들을 위해 개방된다.

이곳의 설립자는 33년째 만성 신장 결석증을 앓고 있는 김흥용 목사(58).그는 오래 전에 한쪽 콩팥을 떼냈고 86년 나머지 한쪽마저 3분의2를 잘라낸데다 고혈압과 협심증까지 겹쳐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불릴 정도였지만 이웃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한국은행 사서로 일하던 김목사는 93년부터 모 선교회가 서울역에서 매주 목요일 개최하던 철야예배에서 "행려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곳은 있지만 마음놓고 씻을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말을 듣고 나사로의 집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95년 퇴직한 김목사는 서울역과 남대문을 중심으로 행려자들을 뒷바라지하며 목욕탕 건립에 본격 착수했고 2년간의 준비 끝에 마침내 1일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영등포시장에서 청과상을 하는 부인의 도움도 컸다.

목욕탕은 문을 열자마자 소문이 전해져 문전성시를 이뤘고 한국은행 노동조합과 남대문경찰서는 김씨의 일을 돕겠다며 헌옷 수거에 나서 적지 않은 힘이 되어주고 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장40절을 즐겨 암송한다는 김목사는 "혈압이 2백70~2백80을 오르내리는 위험한 상황인데도 하루하루 생명이 연장되고 있는 것은 욕심을 버리고 나눔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환하게 웃었다.


16. 사회복지시설 '찬바람만 찾아와요'


"좋은 후원자님이 나타나서 내년에는 유치원에 다니게 해주세요."

경기도 고양시 `천사의 집'(02-3158-6501)에 살고 있는 예윤(4)이는 벌써 반년째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하지만 기다리는 후원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인 12월 한 달에만 10여차례 후원자들이 이곳을 찾았지만, 올해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같이 사는 형. 누나들이 직접 사다가 달아준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없었다면 예윤이의 크리스마스는 그냥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천사의 집에선 예윤이 처럼 낳자마자 부모가 버린 두살바기 아기부터 뇌성마비. 다운증후군.자폐아 등 장애인들과 치매에 걸린 87살 할머니까지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이 살아간다. 이들의 엄마노릇을 하는 장순옥(46) 원장도 척추이상으로 등이 굽은 장애인이고, 장 원장의 외동딸도 정신지체장애인이다.

"다들 힘드니까 어디 이런데 찾아오나요. 정을 조금만 더해줘도 살아가는 희망이 생길텐데요." 5년째 혼자서 온 식구들의 빨래를 하고 밥을 해먹이고 있는 장씨의 한숨 섞인 말이다.

"해마다 도움도 줄어들어요. 후원금이 들어오는 대로 방을 따뜻하게 하고 사람 사는 곳처럼 보이도록 만드는데 썼어요. 그런데 `살만큼 해놓고 사니 안 도와줘도 되겠네'하는 거예요."

지지난해 텔레비전에 천사의 집이 소개된 것도 소용없었다. 후원자는커녕 몸이 불편한 사람을 맡기고 싶다는 문의전화만 빗발쳤다.

올 연말 장애자.노인.어린이 등 오갈데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디나 형편이 비슷하다. 특히 규모가 작고 개인이 운영하는 휴식처들은 예외 없이 더욱 추운 겨울을 지내고 있다. `올해처럼 찾는 이 없는 연말은 난생 처음'이라는 말이 자연스럽다.

부모 없는 여자아이들과 여학생 21명이 살아가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김효주 아녜스의 집'(02-690-8461).

"3년전부터 도움도 줄고 찾아오는 사람이 뜸해지더니 올해는 완전히끊겼어요. 와서 돕지는 못할 망정 복지시설 관련 비리가 터질 때면 `돈많이 벌겠네'라고 비꼬지나 않았으면 좋겠어요" 강경숙(37) 원장의 원망 섞인 말이다.

`아녜스집'의 1년 예산은 5천만~6천만원. 이중 2천여만원은 연말 연시두 달간 모금한 돈으로 충당했다. 하지만 이젠 옛말이다. 지금까지 걷힌 돈은 예년의 10분의 1도 채 안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집주인이 바뀌면서 당장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한다.


그래도 규모가 크고 이름이 알려진 복지기관들은 그나마 평년수준을 유지한다. 고정적으로 후원하는 회원들 중심으로 운영하기 때문이다. 홀트아동복지회는 장기후원자가 많아 큰 타격은 없다. 유니세프(국제연합 아동기금)도 올 모금액이 지난해 수준인 27억원 정도는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오래된 기관이나 단체들도 그때그때 부정기적으로 돕는후원자의 숫자는 역시 눈에 띄게 줄었다.

음성 꽃동네 사무장 정광열 신부는 "전체 운영비의 70%를 회원들의 고정후원금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별다른 영향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회원 76만명 가운데 꾸준히 성금을 보내는 이가 3분의 1로 줄었다고 귀띔했다.

나환자 4백명이 살고 있는 경남 산청의 성심원(0596-73-2053)도 후원이 줄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1년 예산 15억원의 절반 가량을 독지가들의 후원금으로 꾸려나가는데, 올해처럼 썰렁해서는 앞으로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한다. 관리를 맡고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박재홍 수사는"생활에 여유가 생겨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 보다는 아무래도 자기복지를 더 챙기는 것 같다"고 말한다.

올해 유난히 후원이 저조한 데는 불경기에다 소쩍새마을 사건이 잊혀질 만 한 때에 터져 나온 뽀빠이 사건의 영향이 컸다.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복지시설을 믿지 않는 분위기가 퍼지면서, 이미 그전부터 줄어들던 도움이 격감했다는 지적이다.

부모 없는 청소년들을 돌보고 있는 부스러기 선교회(02-365-1265)의 경우, 올해 줄어든 1백97건의 후원자 가운데 개인회원은 1백43건이었다. 후원금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천여만원이 줄었다. 때문에 이달 말까지 대주기로 약속한 57명의 학생에 대한 장학 지원금 7백만원을 못 주고 있으며 연료비 2백만원도 밀려있는 형편이다.

이런 추세는 해마다 12월과 1월 두 달 동안 전국 언론사를 통한 이웃돕기운동추진협의회의 모금액에서도 잘 드러난다(그래픽 참조). 93년 1백84억원에 이르던 모금액이 해마다 10억원씩 줄어들어 지난 겨울엔 1백64억원으로 줄었고, 올해는 1백40억여원에 그칠 전망이다. 그나마도 대기업의 성금액수가 많아져 개인 성금의 감소를 상쇄한 탓에 가능하다.

서울방송 모금 관계자는 "매년 각 학교들이 방학 전에 모금액을 보내오는데 올해는 전화도 뜸하고 오는 사람도 없어 모금창구가 썰렁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모은 총액도 지난해 이맘때와 비교해 10분의1 정도로 저조한 수준이다. 한국방송공사 역시 지난해에 비해 성금 총액이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이웃을 돕는 사회의 손길이 줄어드는 이유는 불황 탓도 크겠지만 남에게 무관심한 사회풍조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몇년전만 해도 신문이나 방송에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 이야기가 나가기만 해도 도움을 주겠다는 전화가 불티나게 쏟아졌었는데 요즘은 달라요. 매스컴을 타도 전화 한통 걸려오지 않을 때가 많아요." 부스러기선교회 강명순 총무의 말이다.

# 유명 정치인 후원회는 '호황'

불황에 밀린 세밑 인심은 꽁꽁 얼어붙었지만 정치인에 대한 후원만큼은 여전히 넉넉하다.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에서는 지난 10월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국회의원 후원행사가 열리고 있다. 내로라 하는 후원인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기부금 불황의 유일한 사각지대다.

신한국당의 한 중진의원 보좌관은 "잘 나가는 의원들이라면 많이 걷히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며 "의원들의 절반 정도가 1억원 정도는 건진다"고 말했다. 야당의 경우에도 실력자들의 후원회는 성황이다.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 야당의원의 보좌관은 올 후원행사에서 2억원 넘게 후원금을 모았다고 밝혔다. 같은 급의 다른 중진의원들도 대부분 "남들 하는 만큼은 모았다"고 밝히고 있다.

보통 경비를 빼고 5천만원 남짓 건지면 `괜찮은 장사'로 치는 통념에 비춰보면 성황이라고 할만하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당에 따라, 국회의원 개인의 정치적 영향력에 따라 행사 규모와 기부금 액수는 천차만별이다.`끗발 있는' 정치인들의 후원행사에는 천명이 넘는 참석자들로 붐비고 몇 억원의 성금이 걷히지만 어떤 후원회장은 파리만 날린다. 50여명만 찾아온 후원회도 있었다고 한다. 


17.국경없는 의사들


지난 92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지구환경회의는 비정부기구(NGO)의 위력을 과시한 회의였다. 1백71개국에서 온 9천여NGO들은 리우회의가 채택한 "의제(의제)21"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21세기는 NGO의 세기가 

되리라는 전망도 있다. 빈곤·기아·환경·난민 등 지구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활약하는 NGO는 지구촌 어두운 구석을 비추는 빛과 같은 존재다.

NGO의 출발은 1948년 유엔에 의해서다. 당시 유엔은 후진국 경제개발을 지원하면서 개발이익이 일반국민에게 고루 돌아가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민간 기구에 맡겼다. 그후 NGO는 그 개념이 확대돼 비단 유엔이 인정한 민간 기구뿐 아니라 국 제협력사업에 참여하는 민간단체들을 총칭하는 용어가 됐다.

지난 71년 프랑스에서 시작한 "국경없는 의사들"(MSF)은 세계 최대 민간 의료봉사단으로 세계적인 NGO로 손꼽힌다. 1백만명 이상이 사망한 비아프라 내전에 참가, 의료봉사활동을 벌이면서 전쟁의 야만성을 체험한 젊은 의사들은 국제의료봉사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MSF를 설립했다. "국경없는"이란 이름은 전쟁 또는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MSF는 정치적으로 피해국가의 영토. 주권을 무시하는 일이 있더라도 인도주의라는 대의(大義)에서 인명구출을 우선으로 한다는 활동목표에서 나왔다.

현재 MSF는 유럽에 6개 지부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 13개 사무국을 두고 있다.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내는 후원자가 약70만명, 연간 5억프랑의 예산을 쓰고 있다.

MSF는 재해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달려간다.88년 이라크가 이란에 대해 화학무기를 썼을 때 가장 먼저 현장에 들어가 이 사실을 전했고, 91년 걸프전 때는 60여대의 전세기를 동원해 난민 7만여명을 구출했다. 94년 르완다 내전에선 구호활동을 벌이는 한편, 투치족의 후투족 양민학살을 폭로해 국제 사회의 여론을 환기시켰다. 지난해엔 북한 홍수피해지역에도 의료진을 파견했다.

서울평화상문화재단은 11일 제3회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MSF를 선정했다. MSF는 이를 반기면서 상금 20만달러를 자신들의 봉사활동에 쓸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수상 결정은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던 서울평화상이 앞으로 제자리를 찾는데 도 크게 기여하리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신문


18.농촌봉사활동의 허와 실


한때 학생들의 농촌봉사활동은 여름 방학을 맞아 농민을 의식화시키는 민주화 투쟁의 일환으로 정부의 탄압을 받았던 때가 있다. 어떤 농촌에서는 제대로 일손도 못도와주고 쫓겨나는가 하면 어떤 곳은 민주화의 기지로 마을을 변화시키는 승리의 활동도 있었다. 비록 정부의 탄압이 집요하였지만 그만큼 학생들의 농활은 위력도 켰고 학생운동의 열정도 뜨거웠다. 그리고 농활은 정부를 반농업적 정권으로 타도해야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농민운동을 지원하는 학생운동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1978년경 아카데미 농민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농촌의 사회구조적 모순을 깨달은 젊은 기독교 농민운동 활동가들은 농촌이 가난한 것은 농민의 잘못이 10%라면 90%는 우리나라의 반민주적 사회구조에서 나온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벌써 기독학생운동 출신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특별히 이들과 기독학생들은 민주화운동에 상호 공감대와 연대를 형성하며 기독학생들의 농활을 주도해왔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기독교농민회가 생기고 전국적 농민운동 단체들이 생겨나며 민주화의 길에 매진하는 열정이 1987년 6.10민주화대투쟁을 기점으로 농민운동 과정에도 형성되면서 학생들의 농활도 아마 폭발적으로 이루어졌고 이 시기가 되면 정부와 학생들이 농촌현장에서 재격돌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민시대가 되었다고 하는 지금, 농민운동도 새로운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다. 학생들의 농촌봉사활동도 예전에 비하면 참여가 줄어들고 있을 뿐 아니라 가기를 두려워하는 회피지역처럼 여기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요즈음 농촌에 가면 여기 저기 빈 농가를 볼 수 있고 젊은 농촌 청년들을 보기는 하늘에 벌따기 보다 힘들다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일손이 모자라는 농촌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일손을 도우려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면서도 왜 학생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농촌으로 변하였는지 궁금하다. 이것은 반농업적이요 반농민적인 소위 신농정으로 부터 오는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농촌을 살리는 대안적 운동에 대한 학생들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가 약해지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학생들의 고민은 21세기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의 시점에서 우리 사회의 미래의 비전을 어떻게 그리느냐가 여전히 명확하게 그들의 손에 잡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대학 기독학생회는 이런 고민 끝에 농활 대신 「전국순례」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돌면서 여기저기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는 지역을 돌아볼 계획을 세웠다.

지금 대학생들은 운동이나 봉사에 앞서서 자신의 진로도 명확히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촌봉사를 가서 농민들의 희망없는 한맺힘과 고달픈 노동의 현실을 바라볼때 자기 자신에게도 아직 대책이 없는 젊은 기독대학생이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보고 외면하려는 도피의식 마져 생길 수 있다.

그리하여 어떤 기독학생회는 이제 거창한 농촌봉사 또는 농촌선교 활동이라는 이름보다는 농민들과 함께 어려움을 함께 느끼고 함께 고민하며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선 배움의 현장이라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농촌으로 가려고 하고 있다. 기독학생들이 그들의 활동방향을 「여름생명학교」라고 붙여놓고도 『웬 「여름생명학교」?』라고 부제를 걸고 이 어색한 이름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 기독학생회의 전문성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생명의 삶을 살아가신 그길을 따르는 운동과 실천으로서 환경오염의 현장을 돌아보고 새로운 생명의 삶을 실천하는 공동체나 시민운동들로 부터 먼저 배우고 그 다음 돕는 활동을 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제 농촌봉사활동은 민주화 투쟁의 일환이 아니라 학생들의 꿈과 비전을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모색하는 「열린 현장교육체험활동」이며 그 가운데 농민과 함께 하는 봉사정신,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는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활동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라』는 모토로 새로운 미래를 위한 대안 모색을 위해 여름봉사활동이 기독학생들 가운데 꿈틀거리고 있다고 확신한다. 

한국교회가 이런 기독학생들에게 애정과 사랑을 아끼지 말고 물질적인 도움과 정신적 지지를 보내주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함께 변화를 모색하며 21세기의 예수 사랑의 실천운동이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19.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박사


"죽기전에 이북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 두손 붙들고 예수님 믿고, 예수님 따라가야 한다고 전해야 되는데...그래도 두 어깨가 너무 아파 저녁에 잠이 통안오면 그냥 영원히 눈을 감고 싶어지기도 해."

지난 95년 1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장기려박사의 소망은 단하나, 북녘에 두고온 가족을 전도하여 천국에서라도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었다. 

"저녁에 가서 우리 가족들을 만나면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살건데 그리 안타까울 것도 없지..."

남쪽에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사랑을 몸소 실천한 장박사는 자신이 남을 도우면 누군가도 북쪽에 있는 자기 가족을 돌봐주리라는 믿음으로 늘 기도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끝내 가족과의 만남을 이루지 못한채 세상을 떠난것은 지난 12월 25일 아기예수 탄생의 기쁨으로 온세상이 들떠있을 때였다. 

"나의 비문에 `주를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85세의 나이로 타계한 장박사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돌보라는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한 예수의 참 제자였다.

의술이 아닌 인술을 베풀며 살아온 장박사가 가족과 헤어져 차남 가용(61. 서울대 의대교수)씨만 데리고 월남한 것은 지난 51년 1.4후퇴때다

잠깐 헤어지는 줄로만 알았던 이 이별이 40여년이 넘도록 계속될 줄 그는 꿈에도 생각못했다. 그래서 눈만 감아도 자신이 살던 이북의 고향마을이 눈앞에 아른거린다고 장박사는 밝힌바 있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에서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의 차남으로 장기려박사가 태어났을때 환갑을 맞은 그의 할머니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당시는 이북교회에 부흥운동이 한창이던 때로 장박사가 살던 입암동중앙에도 교회가 들어서 있었고 할머니는 어린 장박사를 등에 업고 교회에 다녔다. 장박사의 믿음은 이렇게 시작됐다.

독실한 신앙과 사랑실천으로 일관해온 그도 삶속에서 잘못을 범한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의 팽이를 훔친일, 송도고보시절 화투놀이에 빠져지내던 일, 일본인 간호원의 빰을 때린일 등 그도 한때 말씀에 어긋나는 행동을 더러 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는 곧 회개했고 기도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의사의 진료를 한번도 못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장박사는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하던 해에 김봉숙씨와 결혼했다.

경성의전 수석졸업생답게 장기려박사는 첫수술때 맹장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후 맹장염을 4년간 실험연구, 나고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3년뒤인 1943년 간암수술을 최초로 성공시키는 등 의학계에 명성을 쌓아갔다.

그의 명성은 두갈래로 갈라지는 조국의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놀아만 갔고 김일성대 의과대학에서 강의를 요청받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박해가 심해지고 끝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아 공산당의 감시를 받던 장박사는 "서울대에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백인제교수의 편지를 기억, 월남을 결심하게 됐고 안타깝게도 뒤따라 올 것이라 믿었던 가족들과는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은 월남후 더욱 빛을 발한다. 부산에 도착한 장박사는 영도제3교회 창고를 얻어 피난민의 무료진료를 위해 복음병원을 개설했다. 그는 "치료는 의사가 하고 병은 하나님께서 낫게 하신다"는 신념으로 환자를 진료하여 악조건속에서도 매일 2백여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순회진료를 다니는 등 의사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던중 장박사는 1956년 더이상 천막병원이 아닌 2백50평규모의 새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게 됐다.

치료비가 없는 입원환자에겐 주머니를 털어 퇴원시켜주고 그도 않되면 "오늘밤 몰래 뒷문으로 도망치게"라며 넌지시 일러주던 장박사의 모습은 의술을 지닌 사람들에게 두고 두고 기억될 모범이 아닐 수 없다.

의료보험의 시초인 `청십자운동'을 벌이며 빈민의 의료구호만을 위해 60여년간 외길을 걸어온 장기려 박사.

지난 91년 미국에 사는 조카를 통해 이북에 있는 부인과 두딸의 사진, 부인의 육성녹음 등을 알아보고 통일될 날만 기다리며 기도하던 장박사는 이제 이땅이 아닌 하늘에서 가족을 기다리게 됐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약속을 위해 혼자살아온 장박사를 두고 세간에서는 "아무리 독실한 기독교신앙인이라도 인간적인 외로움은 마음에 한으로 남았을 것"이라며 섣부른 예측을 한다.

그러나 참신앙으로 예수의 삶을 실천한 장기려박사야말로 주님과 평생 동거하며 누구보다 다복한 삶을 누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환자들을 가족삼아, 환자들을 이웃삼아 살아간 장기려박사에게 위안과 힘이되어 주신 주님이 있었기에 그는 인간적인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저 뒷산의 바위들 처럼 환자들을 위해 항상 서있을 의사가 되겠습니다."

이제 하나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누릴 장박사의 생전의 삶에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많은 사람들이 또 그의 뒤를 이어 참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길 기대해 본다.


20.크리스마스 씰


한국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개발하고 이를 보급, 판매하기 시작한 이는 누구일까? 해마다 12월이면 접하는 이 의문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1890년에 내한한 캐나다 출신 여의사 로세타 셔우드(Rosetta Sherwood)는 한국 최초의 여성을 위한 병원인 보구녀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국 도착 즉시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힘으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여성을 위한 의료교육을 시작하였다.

1891년에는 역시 캐나다 출신 의시이자 목사인 홀(William J.Hall)이 내한 하였고, 그는 평양에서 의료활동을 시작하였다. 그후 그는 앞서 내한한 셔우드 와 서울에서 결혼하였다. 홀 의사는 청일전쟁 당시 만연하던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 전염병 치료에 몰두하다가 과로에 학질이 겹쳐 1894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관 34세였다. 한국에 온지 꼭 3년만이었다.

미망인 로세타 셔우드에게는 겨우 돌을 지낸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셔우드 홀이었다. 이때 그녀는 또 임신 7개월째였으므로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1897년 그녀는 아들 셔우드와 딸 에디스를 데리고 다시 한국 선교사로 나왔고 남편을 기념하여 평양에 병원을 설립하였다. 이것이 기홀병원(The Hall Memorial Hospital)이다.

어머니와 함께 평양에서 살던 셔우드는 그의 나이 18세 때인 1911년 미국으로 건너가 마운트 유니온대학을 거쳐 토론토 의과대학에서 의학교육을 받고 의사가 되었다. 역시 의사였던 마리안 버텀리(Marian Bottomly)와 결혼한 그는 아버지를 이어 선교사의 신분으로 1926년 내한하였다.

처음에는 해주 구세병원에서 일하면서 해주 의창학교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그후 그는 조선에서 수많은 사람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결핵의 퇴치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당시 폐결핵은 사형선고와도 같은 것이었기에 결핵퇴치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조선에서는 최초로 결핵요양원인 구세요양원을 1928년 해주 교외 왕신리에 설립하게 된 것이다.

그뒤 결핵협회(The Tuberculosis Association)를 조직하고 1932년 12월부터 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크리스마스 씰의 기원이 되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씰, 그것은 홀 의사의 한국인 사라의 씰이었다. 그는 선교사로 내한한 이래로 1940년까지 14년간 한국에서 값진 봉사를 하였다. 일제에 의해 마지 못해 한국을 떠났던 그는 인도로 가서 23년간 선교사로 봉사한 뒤 1963년 은퇴하였다.

본국에서 노후를 보내던 홀 의사는 여러 사람들의 권유로 1978년 『With Stethoscope in Asia, Korea』라는 자서전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이란 제목으로 역간되었다. 그는 1992년 98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 유해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21.성숙한 사회와 봉사활동


그리스도 교회는 봉사를 생명으로 가르치고 실천해 왔다. 신약성서에서 `디아코니아'(Diakonia)란 낱말은 봉사하는 것, 또는 사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하는 사역을 `미니스트리'라 하고, "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디아코네인"(diakonein)에서 "디아코노스"(diakonos)란 명사가 나왔고 사역자를 "미니스터"(minister)라고 부른다.

"봉사하는 일"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부분은 예수님께서 봉사 하는 일에 분주하여 염려하는 마르다에게 "혹 한가지 만이라도 족하다"(눅10장40절)는 말씀으로 교훈 하신일이며, 또한 봉사의 직무에 대해서도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썩는 삶의 자세(요12:24)를 스스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교훈은 2000년을 지나오면서 봉사를 생명으로 삼고 사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천하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의 활동에 큰 빛이 되어왔다.

이런 봉사활동이 교회 만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던 종교적 영역을 넘어 이제는 사회의 영역으로 확대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정부가 지난 5월31일 "세계화"와 무한경쟁시대를 맞으면서 교육개혁의 목표를 열린사회에서 교육의 목표를 자아실현에 두고 대학입시에도 인성교육을 중시하고 지식중심의 도덕, 윤리교과 교육에서 벗어나 대화, 토론, 수련활동, 특별활동, 자원봉사 활동등 실천적 활동을 강화하여 `종합생활기록부'에 기록하여 입시에 반영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교육개혁에 대하여 우리가 환영하는 것은 단순히 `입시위주의 경쟁교육'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안도감에서라기 보다는 이제 우리사회가 성숙한 사회로 갈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크게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열린 사회를 만들어 가고 그 사회의 일원인 성숙한 민주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평생교육이나 사회교육의 차원에서 볼 때, 인간교육의 목표인 자아실현으로 가능한 것이다. 차제에 우리는 성숙한 사회와 봉사활동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인간은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을 영위하며, 여러가지 생활과업을 갖는다. 인간의 생활은 고금을 막론하고 사회생활을 통하여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서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가정과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대부분의 필요한 자원과 서비스와 기회를 개발하고 공급하는 것이 자연적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생활과업의 달성을 통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러나 행복한 삶은 나 혼자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가정과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와의 공동참여 노력으로 조화롭고,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선진제국의 경우를 볼 때,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은 성숙한 사회형성을 통해서 이룩되며, 성숙한 사회를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봉사활동의 노력이 기본적이고 필수적이다. 따라서 성숙한 사회와 봉사활동은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적 사회형성의 요체이기도 하다. 또한 봉사활동은 자원봉사 정신을 고취하고, 자아실현을 하고자 하는 사회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실천과정으로 가능한 것이다.

성숙한 사회형성을 위해서는 개인과 공동체가 다음의 구성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성숙한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 성숙이란 낱말은 사전적 의미로 볼때, "충분하게 발전된 완전의 상태 또는 완전성"을 말한다. 성숙이란 인간이 완전하게 성취해 보지 못했던 이상적인 정신상태를 말한다. 성숙이란 성숙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정신은 육체와 함께 성숙해가고 있으나, 때로는 개인에 따라서 신체적으로는 성숙했으나 정신적으로는 미숙한 사람들이 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성숙이란 말은 정신적 성숙을 향해서 성장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매슬로(Abraham Maslaw)의 표현 처럼 `자아실현의 정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둘째, 유치증을 극복해야 한다. 유치증(infantaiism)이란 치기, 발육 부진을 말하며, 그 특징으로는 (1) 기본적 충동과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예: 유아나 치기가 있는 어른들의 여러가 행위, (2) 새로운 여건과 변화에 대하여 적응하지 못하는 것(융통성, 상상력 부족) 완고성과 독단적 태도 (3)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에 머물면서 자기 이익과 편의, 기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함 자기중심주의(이기주의)는 미성숙의 표시이다.

세째, 섬기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남을 돌보고, 관심을 갖고, 섬기는 삶의 자세는 성숙의 표시이다. 성숙한 사회는 섬기는 삶의 자세를 갖춘 사람들의 구성을 통해서 이룩된다.

하나의 예화가 있다. 정신병원을 방문한 사람이 정신과 의사에게 물었다. "여기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정신나간 사람)이 있군요." 정신과 의삭: "아니예요, 모두 정신이 말끔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든 관심이 자기에게만 집중된 사람들이지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저사람들 (정신병 환자들)이 여기에 (병원)와 있지요."

넷째, 디아코니아를 실천해야 한다. 디아코니아란 종교적 봉사를 의미한다. 봉사는 궁극적으로 봉사자의 관심이 종교적 영역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봉사활동은 그 의미가 "주는자와 받은자"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일방적이고 자비심, 감상주의 영웅주의에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타인과 더불어 선한 활동을 하는 것을 통하여 자기실현을 위한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으며 자아초월을 지향하는 것이다.

봉사의 정신이 백화점이나 식당에서 처럼 상호간에 이해를 전제로 하여 서비스가 자기 이외의 다른 이웃들에게 봉사 한다든지, 유교의 봉건윤리개념에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 남편-아내, 며느리-시어머니의 관계등 상하, 주종의 관계로서가 아니다. 또는 시간이 있고, 동정심이 많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서비스하는 행위는 자원봉사이다. 진정한 봉사의 의미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인자의 온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눅10장43-45절)는 예수님의 교훈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제 되어야 한다. /한겨레신문


22. [노인문제] 혼자 사는 노인 요구르트 배달원이 살핀다


요구르트 배달원들이 혼자서 쓸쓸히 살아가는 노인들의 안부와 건강상태를 점검하게 된다.

서울 성북구는 거택보호자 가운데 혼자 사는 65살 이상 노인 6백5명에게 요구르트를 무료로 제공하면서 배달원들이 이들의 안부를 매일 확인하는 방안을 마련해 추진중이다. 배달원들에게 대상 노인들의 집을 미리 알게 한 뒤 전날 배달한 요구르트병이 그대로 놓여 있거나 다른 이상이 있을 때 이들의 안부를 확인해 동사무소로 연락을 취한다는 것이다.

구는 이 사업을 주민들의 자발적인 후원사업으로 만들기 위해 노인들에게 요구르트 비용을 대줄 후원자들을 모집하고 있다. 후원자들이 생산 업체에 돈을 내면 이 업체가 요구르트를 배달하면서 배달원으로 하여금 노인들의 건강을 점검하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후원자들은 노인들의 1달 먹는 값인 3천원을 기본 단위로 해서 몇 개 계좌든지 가입할 수 있다.

구 관계자는 "혼자서 어렵게 생활해가는 노인들은 건강이 악화돼 쓰러져도 돌봐줄 사람이 없어 며칠이고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며 "지역 사정을 잘아는 배달원들이 매일 안부를 점검해주면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는 이달 말까지 관내 30개 동별로 대상 노인과 배달업소를 결정하고 

배달원들에 대한 교육을 마친 뒤 다음달 말까지 후원자 모집을 끝내 10월초부터 이 사업을 시행할 예정이다.


23.미전도종족 이렇게 접근하라


미전도종족을 향한 선교관심과 전략은 금세기 선교에 핵심이다. 이를 위한 여러형태의 전략들이 동원되기도 했지만 효과적으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들 지역에 대한 올바른 상황인식과 적절한 전략설정이 필요하다.

이번호에는 미전도종족에 관한 이해와 효과적인 접근방법에 대해 살표보고자 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땅의 모든 종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신다.

1. 미전도종족에 대한 지리적 이해

현재 진행중인 미전도종족 입양운동본부에 따르면 오늘날 전세계에 12,00개의 종족집단이 존재하며 그중 5,310개의 집단이 미전도종족이라 칭하고 있다. "어느 종족이 복음으로 접근되었는가"라고 말할때 접근되었다고 말하려면 그곳에 "외부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도 자기종족을 전도할 수 있는 충분한 인원과 재원을 가진 "가시적인 토착교회를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그렇지 못한 집단을 "미전도집단" 혹은 "미전도 종족집단"이라고 지칭하는데 이는 "그룹들의 그룹"이므로 실제 총수는 수록된 5,310집단의 거의 두 배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한다.

옆에 게재된 지도에 나타난 흑점들은 10/40창 국가들의 지도와 목록이다. 지도에서 보면 10/40창은서아프리카부터 중동을 지나 아시아까지 뻗어있는 북위10도에서 40도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이들은 또한 모두 최소 5,000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국가이다)

2. 10/40창의 특수성

이 창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복음에 저항적인 세력을 포함하고 있다.

회교권, 불교권, 힌두교권의 대부분이 이 창 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선교사 입국 비자로 접근하기 어려운, 새로운 선교전략이 필요한 지역이다. 또한 바렛과 존슨이 "미복음화"된 국가로 구분한 30개 국가중 23개국(약77%)을 포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10/40창은 전세계 빈민의 82%와 전세계 40개 저개발국가중 18개국을 포함하고 있다. 10/40창은 복음도 없고 물질적 빈곤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종족집단을 표적으로 하여 이 두가지 기아를 전문적으로 채우는 사역이 필요하다. 랄프 위터의 말처럼 선교는 진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종족으로 가는것을 의미하기에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이 요청된다.

3. 미전도종족을 향한 접근전략

이러한 특수성을 지닌 지역에 대한 접근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존의 전략이 아닌 새로운 전략을 세워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선 이들 나라들 중 선교사라는 비자를 통해서 입국이 불가능한 지역에 대한 접근이다. 세상의 어떤 나라와 종교, 정치상황하에서도 사랑많으신 하나님의 출입을 제한할 수 없다. 수년전 서구 선교사의 손련입국이 금지되었을 때, 아프리카출신의 그리스도인은 그곳 대학에서 유학하며 동시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회교원리주의 국가인 파키스탄에서는 자선병원을 설립하여 자선 진료를 통한 복음전파를 행하고 있다. 전통적인 선교사로서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을 때 직업이나 학업을 통해 접근이 가능하며 사회봉사요원이나 외교등 접촉가능한 경로를 통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구호와 개발사역과 연계된 전도는 이런 물질적인 궁핍에 처해있는 지역에 가장 효과적인 사역방법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의무로서 궁핍한 자를 도와야 된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지상사역 가운데 이를 손수 실천해 보이셨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계명과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대명령을 내리셨다. 이 계명과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적절한 반을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매우 중요한 의무라 생각한다. 이제 우리앞에 놓여진 마지막 불신의 장벽을 허물고 말씀에 기갈되고 육적으로 굶주린 지역이 영적, 육적인 기아의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24.자원사회봉사 25명중 1명꼴


우리나라의 직장인들은 10명중 6~7명이 직장생활에서 육체,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밝혀졌다.

자원사회봉사활동을 하는 국민은 25명중 1명에 불과해 불우이웃이나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에 매우 인색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말 전국 99개 표본조사구내 2천9벡명을 대상으로 사회적 환경과 가족생활의 관계에 대한 실태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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