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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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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비에 대하여


 




 





 


 


     가장 위험한 때


 바다의 항해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가진 전문가가 질문한 것은, "혼자서 배를 타고 항해를 할 경우 가장 위험한 때는 언제입니까?"라는 것이었다. 조금도 주저함 없이 모든 사람들이 대답한 말은, "폭풍우의 때입니다"였다.


 그러자 그 전문가는 고개를 흔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혼자서 배를 타고 항해할 경우, 가장 위험한 때는 폭풍우의 때가 아닙니다. 이러한 때는 있는 힘을 다하여 그 환경과 싸우기 때문에 정말로 목숨을 잃을 때가 드뭅니다. 그러나 제일위험한 때는 바람도 잔잔하고 날씨도 쾌청한 때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아무런 긴장이나 조심이 없이 갑판을 걷다가 가장 잘 떨어져 물에 빠지는 때가 이러한 경우인 것입니다."


 평탄할 때에 당신의 신앙을 잘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과일나무를 심는 노인


 어떤 노인이 뜰에 과수 묘목을 심고 있다. 이때 그곳을 지나가던 한 나그네가 말을 걸어 왔다.


"도대체 언제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겠다고 나무를 심는 겁니까?" 그러자 노인이 하던 일을 쉬지 않고, "한 70년 지나면 열매가 열리겠지"하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나그네가, "노인장께서 그토록 오래 사시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제야 노인이 잠시 일손을 놓고, 나그네를 바라보면서 또렷하게 말한다.


"그렇지는 않지요. 하지만 내가 태어났을 때 과수원에는 열매가 풍성했었단 말이오. 그 나무를 누가 심어 놓았겠소. 바로 우리 아버지였단 말이오. 아버지가 자손들을 위하여 과일 나무를 심어 놓았단 말이요. 나도 아버지처럼 하는 것이오."





 


     밤에만 우는 새


 창가의 새장에 갇힌 새 한 마리가, 낮에는 조용히 있다가 밤만 되면 처량하게 울고는 했다. 이를 가엾게 여긴 박쥐가 찾아와 물었다.


"넌 왜 낮에는 울지 않고 밤에만 우느냐?" "다 이유가 있지. 낮에 울다가 잡혀 왔거든."


"지금 조심해야 소용없어. 잡히기 전에 조심을 했어야지."





 


     어느 병원에서


 갑자기 오른쪽 눈이 아파서 어느 대학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시간을 벼르고 별러서 겨우 찾아가 안과 창구에 진찰권을 접수한 것이 오후 3시 35분, 그러나 창구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차갑기만 했습니다.


"마감시간 지났습니다." 거기 창문에 써 붙인 걸 보니 마감시간이 오후 3시 30분으로 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5분이 경과된 것입니다. 사정을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픈 눈을 감싸 쥐고 병원 문을 나서야했습니다. 야속했습니다. 5분이 늦었다고 환자를 돌려보내다니―. 그럴 수가 있는 것일까. 병원 측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것도 예수 믿는 병원.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이 환자를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마음이 몹시 언짢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제 마음 속을 쿵하고 때려 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네가, 천국 문에 들어가려고 할 때 저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되겠느냐”하는 그런 깨우침 말입니다.


“천국 문 마감 시간 지났습니다.” 그러면서 셔터를 꽝 내려버리면, 나는 오늘 안과 창구에서 받은 이 슬픔보다 더 크게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인데..


 마태복음 25장에는 열 처녀 비유가 있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아 연회장에게 들어갔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부랴부랴 기름을 넣어 연회장에 왔지만 이미 문이 닫혔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293장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 날 아침 거기서, 순례자여 예비하라. 늦어지지 않도록.” 마감시간에 늦지 맙시다.





 


      어떤 선원의 경험


 바다를 항해하던 배가 파선되어서 선원 한 사람이 파도에 밀려 어느 섬에 닿게 되었다.


 그 섬의 원주민들이 그를 발견하고는 추장 앞으로 데리고 갔다. 이 선원은 "내가 이제 저들에게 죽게 되는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 도그 섬의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표류하던 그 선원은 왕으로 권세를 누리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상하게 여겨져 하루는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들이 하는 말이 이 섬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왕을 세웠다가 무인도로 보내어 굶어 죽게 만든다는 것이다.


 깜짝 놀라서 구원 받을 길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중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그들에게 명령하기를 배를 한 척 지어서 그 배에 곡식과 과일을 싣고 무인도로 가서 심으라고 했다. 그리고 무인도에 아름다운 집을 한 채지으라고 했다.


 1년이 지난 후에도 그는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영원히 갈 준비가.


 옛날에 농군의 머슴이 하도 미련하여 지팡이를 만들어 "미련한 지팡이"라고 쓰고 머슴에게 주면서 너보다 더 미련한 놈을 만나면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주인이 병들어 사경직전에 머슴은 주인에게 "이제 얼마 후면 이 세상을 떠나는데 이제 가면 언제 오시냐" 고 물으니 "이 미련한 놈은 나의 죽음 자리에서까지도 미련을 떤다" 고 하면서 "이놈아, 내가 또 다시 올 수 있는 길이라면 왜 슬퍼하겠느냐" 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럼 영원히 가실 준비는 되었느냐?" 하니 "이놈아, 죽음의 마당에서 준비는 무슨 준비냐" 고 하자 "주인이여 하루아침에 여행을 하는 사람도 준비를 하고 떠나거늘 주인은 영원한 길을 떠나면서도 아무런 준비 없이 간다고 하니 세상에 당신같이 미련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면서 "이 미련한 지팡이는 내 것이 아니라 주인 것입니다" 하면서 돌려주었다고 한다.





 


      왕자의 혼인잔치


 날씨가 매우 무더운 여름철에 미국의 오레곤 주에 사는 어느 부부가 여름휴가를 마치고 캠프용 트럭을 타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운전대를 잡고 남편은 더위를 못 이겨 벌거벗은 채 뒤에서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어느 마을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가게들이 늘어선 번화가 네거리에서 교통 신호가 걸려 잠시 정차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잠이 깬 남편이 밖을 보기 위해 캠프차 뒷문을 열려고 하였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남편은 벌거벗은 몸으로 네거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트럭 뒤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지 못한 부인은 시속 100마일로 신나게 차를 몰았으며 얼마 후에 집에 당도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 남편은 온데간데없고 옷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부인은 의아해 하며 몹시 놀랐습니다. 그 사이 남편은 톡톡히 망신만 당하며 가까운 상점에 들어가 수건을 빌어 겨우 몸만 가리고 만인의 웃음거리가 된 채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다고 해서 자기 혼자만을 생각해 벗은 채 있다가 갑자기 네거리 광장에 드러나게 되면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벌거벗은 부끄러운 달음질에 대해 마태복음22장 왕자의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잘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왕실에서 왕자의 혼인 잔치가 벌어져 닥치는 대로 길거리의 사람들을 초대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초대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예복을 입고 있지 않음으로 내쫓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왕 앞에 나가고 싶었고 또 빨리 달려갔다 할지라도 왕이 원하는 바를 준비하지 못했다면 ‘물러가라’는 책망밖에 들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살아있는 우리 역시 언제 어느 때 하나님 앞에 서게 될지 모릅니다. 그 때 우리 모습은 어떠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복을 입은 모습일는지 아니면 혹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은 아닐는지.





 


     지금이 준비할 때


 한 젊은이가 교수에게 질문했다.


"교수님, 사람이 죽기 얼마 전에 내세를 위해 준비해야 할까요?


"몇 분 전이면 되지" 교수는 쉬운 듯이 대답했다.


"그거 참 좋군요." 자기 앞에 놓인 수십 년의 세월을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젊은이는 유쾌하게 말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교수실을 나가려 할 때 그 교수는, "자네는 언제쯤 죽을 것인지 알고 있나?" 고 물었다.


"그거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젊은이는 마음 내키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준비하는 게 좋은 생각이 아닐까?"





 


      직업을 위한 5가지 준비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준비된 만큼 사용하십니다.


성경 속에 위해한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기 위해 짧지 않은 많은 준비기간을 거쳐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되기 원하는 크리스천이라면 다음의 5가지를 준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직업을 가지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며, 직장을 서로 비교하고, 심지어는 면접에서 좋은 인상을 주고자 성형수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준비는 이와는 달라야 합니다.


 중국에 복음을 전한 허드슨 테일러는 "훈련되지 않은 크리스천은 쓸모가 전혀 없다"고 말했던 것은 진리입니다. 준비 없이 의지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준비 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준비된 만큼 사용하십니다. 성경속의 위대한 인물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기 위해 많은 준비기간을 거쳐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받기위해 2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한 훈련의 기간 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요셉을 사용하기 위해 13년을, 다윗을 사용하기 위해 15년여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30세가 되어 비로소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모세에게도 40세가 되기까지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시고도, 그를 부르시기까지 무의미하게만 보이는 또 한 번의 40년을 기다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 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도 회심한 이후에 예수님의 증인으로 활동했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교사와 선교사로 사용되기 까지는 10여년이라는 침묵의 시간을 더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은 한결같이 많은 준비를 하면서 하나님이 쓰실 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크리스천은 직업을 위하여 먼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되기 원하는 크리스천이라면 다음의 5가지를 준비해야 합니다.


 첫째, 경건의 시간을 매일 가져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과 경건의 시간을 갖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큰일을 맡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경건의 시간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위한 가장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유혹이 많은 직장에서 승리하는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하루 15분 이상의 경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만약 당신이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한다면 틀림없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로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둘째, Lordship(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많이 있지만 사용될 만한 사람은 언제나 적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 되려면, 자기 부인의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돈보다 하나님을, 명예보다 헌신을, 직위보다 하나님의 평가를, 안락보다 고난을 선택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독서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위인들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모두 방대한 독서양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열심인 사람이라면 지혜 있는 사람의 책에도 열중해야 합니다. 모세를 크게 사용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대 최고의 학문을 40년간 배우게 하셨고 바울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되기 전에 당시 최고의 율법자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장기간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때 더욱 크게 사용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넷째, 기도하는 것입니다.


직장을 놓고 염려하거나 직장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기 전에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노력보다도 먼저 선행되어야 하고 기도는 노력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항상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며,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알지 못하므로, 나의 미래를 아시고 인도해 주시며, 나를 향한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다섯째, 인생을 계획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발견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생을 계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20세부터 60세까지 네 가지 영역에서 기간별로 계획을 수립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면, 신체적인 면, 영적인면, 사회적인 면 등 누가복음 2장 52절에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성장하게 하시면서, 이 네 가지 영역에서 배려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위의 4가지 계획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리듬에 맞추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사용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준비된 사람인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준비를 계속해온 사람이라면 아무런 염려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훌륭한 사람은 훌륭한 길을 걷도록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준비된 사람을 찾고 있고, 준비된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서 사용될 것입니다.





 


      다다익선


 한(漢)의 고조 유방은 숙적이던 항우를 무찌르고 드디어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함께 공을 세운 장수들이 두려웠다. 그들이 언제 반기를 들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가장 두려운 장수는 韓 信이었다. 유방은 구실을 붙여 한신을 등급을 낮춰 관직을 주었다.


어느 날, 고조가 한 신과 같이 장수들의 통솔 능력에 대하여 담론하였다.


"장군, 나와 같은 사람은 어느 만큼의 군사를 거느릴 수 있겠는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불과 십만 정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臣은 군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사옵니다(多多益善)."


"그럼, 어찌하여 내 밑에서 장수 노릇을 하였는고?"


"폐하께서는 병사의 장은 되지 못하시지만 將의 將은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폐하의 힘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니 인력으로 어찌할 수가 없사옵니다."


과연 명장 밑의 명장이었다.





 


      맹자와 선왕


 어느 날 맹자가 제 나라 선왕과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폐하, 폐하의 신하 한 사람이 그 처자를 친구에게 부탁하고 먼 데를 여행하고 돌아와 보니, 그 처자가 굶주려 울고 있었다면 폐하께서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끊어 버릴 것이다. 신용과 덕이 없는 친구와는 의절할 것이다.


"그러면, 교도소 소장이 그 부하직원들을 잘 부리지 못했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파직시켜야겠지."


"그러면 폐하, 왕이 국가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면 어찌하면 되겠습니까?"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선왕은 얼굴을 돌려 딴 데를 보면서 다른 말로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비판의 첫 열매


 내가 봉사하던 교회와 같은 구역 안에. 놀라운 역사를 가진 교회가 하나 있었다. 그 교회의 목사들 중 한 사람이 그 교회에 왔을 때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났고. 남은 사람들마저도 앞에서 세 번째 줄까지 비워 놓고 드문 드문 앉는 상황이었다. 이 목사가 그 교회에 부임해서 첫 번째 주일을 맞았다. 그는 설교단을 번쩍 들더니 회중석으로 내려와 사람들 가까이에 놓았다. 그 후. 주일을 거듭할수록 그 목사는 그 단을 들고 다시 본래의 위치로 조금씩 돌아가게 되었고. 마침내는 강단 뒤에 있던 성가대석으로까지 밀려가게 될 판이었다.


 결국 그 교회는 주일 아침마다 가득 차고 넘치게 되었다. 그는 말씀을 선포했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으며.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일했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를 불러내시어 어떤 학교를 맡기셨고. 그 학교는 그의 지도 아래에서 많은 발전을 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그 교회를 맡은 목사는 여러 가지의 학위를 가지고 있었고.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여행도 많이 하였고. 사람들을 지도해 본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임자보다 더 경험이 많고 더 똑똑해 보였다. 그러나 이 목사도 역시 그 교회 교인의 일부로부터 비판과 적의를 경험하였다. 주일이 거듭되면서 공개적인 논쟁과 보복적인 행동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교회는 차츰 비기 시작했다. 분명. 그는 논쟁에서 이겼지만 그 싸움에서 패하고 말았다.


 두 사람이 비판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문제는 대응 방법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비판의 첫 열매는 기도이여야 한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이 원리는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 나는 나의 비판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에 의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설교자의 임무


 우리 교인 가운데 갑자기 교회에 나오기를 꺼려하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부인의 남편을 방문하고 그에게 부인과 함께 교회에 다시 나오시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내가 자꾸 권면을 하니까 그는 마침내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왜 교회 나가기를 싫어하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나는 “네. 알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는 목사님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아내와 여러 번 목사님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매번 갈 때마다 목사님은 성경만 설교하더군요. 목사님이 성경 외에 뭐 좀 다른 것을 설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아. 그렇군요. 그럼 제가 무엇을 설교했으면 좋겠습니까.”하고 묻자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교회 갈 때. 저의 관심사를 잘 설명하고 정치적 상황과 현실적인 사건 그리고 최신의 문학에 대해서 폭 넓게 다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이 오로지 성경만을 설교하는 일에 피곤해 있습니다.”


 나는 그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성경만을 설교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자 교회 나오는 것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에 그와의 대화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그날의 뉴스를 방송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간 신문들은 머리기사나 특집 기사에서 그리고 사설에서 오늘의 사건을 취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교회에 와서 또 다시 재해석된 뉴스를 들으려고 하십니까. 강단에 서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열고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고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가를 말해주는 것. 바로 이것이 설교자의 임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섬기는 은사


 저의 남편과 제가 지난 25년간을 함께 목회하는 동안 저희 교회에 수많은 협동 목회자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들 중에는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떠난 경우도 많았습니다. 후에 우리는 강단에서의 설교 경험이 있고 교회의 궂은일까지 열심히 했던 분들이 성도들을 잘 섬김으로 성공적인 목회를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약 2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봉사했던 한 부부가 다른 도시로 가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강단에서 설교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에 그들이 교회를 개척하려 떠난다고 했을 때. 저는 걱정이 되어 속으로 ‘오. 주님. 이 젊은 목회자들이 주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들이 교회에서 실제로 필요한 많은 일들을 봉사하였지만. 설교 경험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은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성공적인 목회를 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실제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는 능력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들에게 도움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주 유능한 교사나 설교자라 할지라도 여러분의 가르침과 설교를 듣고 있는 회중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가를 볼 줄 모른다면 여러분은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일을 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섬기는 은사를 받은 신자만이 목회자로 부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섬기는 은사를 받은 목회자가 더 유리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목회의 여러 사역 중 어느 부분에 속해 있든지 목회에 진정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종의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섬기는 지도자


 남치례교단의 유명한 빌 핸드릭스라는 교수님이 계신데, 교단 전체에서 존경을 받는 대단한 학자이십니다. 침례교단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이 골든게이트 신학교의 학장으로 모시기 위해서 그분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핸드릭스 박사께서 그 부탁을 거절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저는 교장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가르치는 교수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지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있는 그런 지도력이 저에게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람을 한 분 추천하겠습니다. 제 제자 가운데에 폴랏트 박사라는 분이 계신데 이분은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고 하면서 자기의 제자를 추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분의 추천을 참고해서 폴랏트 박사가 골든게이트 신학교의 학장이 되었답니다. 학장이 된 다음에 폴랏트 박사를 가르쳤던 스승인 핸드릭스 박사는 자기의 제자 밑에서 교수 일을 하면서 신실하게 자기의 제자를 섬기면서 그 학교의 발전에 혁혁하게 기여했다는 간증을 들으면서 제 마음은 찡하고 울려왔습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내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그것을 망각하는 데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어두움이 초래됩니다.





 


      알지만 모릅니다


 이씨조선 세조때 이조판서 이승소는 판서벼슬에 있으면서도 겨우 초가삼간에 살았다. 임금이 불러 공사를 의논하는 자리에 당시 병조판서이던 이모가 입궐하였다. 병조판서는 이조판서와 앞뒷집에 사는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도 이조판서 이승소는 병조판서를 보고도 모르는 체 했다. 세조왕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조판서는 병조판서를 모르는가?" 라고 물었다. 이때의 이조판서 이승소의 대답은 유명하다. "알지만 모릅니다!"


 조정에 판서라고는 6명이니 모를 리가 없다. 왜 모른다고 했을까? 병조판서가 어느 날 누각같이 큰 호화주택을 짓는지라 이조판서인 이승소가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 주택사치를 한다는 건 그만큼 벼슬을 모독하고 백성의 원성을 일으키니 삼가라고 충고를 했다. 그런데 병조판서는 선비로서의 정신적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지 이 충고를 묵살하고 그 집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는 이조판서 이승소는 만백성에게 욕먹는다고 충고를 한 것을 어기는 병조판서를 사귈만한 선비가 못되며 소인으로 간주하고 알고도 모른 체한 것이다. 이 사연을 알고 난 세조는 알면서도 모른다는 말을 씀으로 선비정신에 어긋난 행위를 바로 잡는데 힘썼다고 한다.





 


      여유


 옛날 어느 양반이 귀양도중 사사의 명을 받았다. 신하로서 이 명을 받으면 불평불만을 가질 수 없고 엎드려 그 명에 복종하여 죽는 것이 도리였다. 그런데 이 양반은 북향 사배 한 후 자기가 직접 목을 매겠다고 말했다. 금부도사는 줄을 방에 들여 놓고 있는 힘을 다하여 줄을 당긴 후 시간이 지나 방문을 열어 보았다. 그랬더니 죽은 줄만 알았던 이 양반은 태연히 앉아서 낄낄 웃었다. 그 양반은 자기 목에다 올가미를 건 것이 아니고 베개에다 올가미를 걸고 당기라 한 것이다. 도사는 깜짝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하였더니 "내가 죽기 전에 한 번 더 웃으려고 그랬다. 이제 다시 올가미를 보내라"하고 자기 목에 올가미를 걸어 죽었다.


 죽는 순간까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유머를 할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이야기다.





 


       위대한 왕


 올빼미는 낮에는 볼 수 없고 밤에만 행동하는 야행성의 나약한 동물입니다. 미국 사람들의 귀에는 올빼미의 울음소리가 ‘투우 투우’로 들리기 때문에 이 소리를 ‘투’로 표시합니다.


 어느 캄캄한 밤에 두 마리의 두더지가 먹을 것을 찾기 위해서 아무도 몰래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무 위에 있던 올빼미가 투우하고 울었습니다. 두 마리의 두더지는 아무도 모르게 기어갔는데 우리들이 나왔다고 알아맞히는 기막힌 짐승이 있다고 감탄했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마치 둘이란 의미의 ‘투 ’(two) 처럼 들렸으므로 놀랄 만도 했습니다. 그들은 산중턱 바위 곁에 사는 독수리에게 허둥지둥 달려갔습니다. 그리하여 독수리가 올빼미에게 와서. “지금 내가 감춘 발톱이 몇 개인가 말해보라”하니 올빼미는 항상 하는 그 울음 ‘투’했습니다.


 독수리는 그때 발톱 두 개를 감추었기에. ‘이렇게 똑똑히 알아맞히는 자가 이곳 우리 산중에 있다니’하면서 온 산중의 짐승을 모아 현명하고 위대한 올빼미를 지도자로 추대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왕으로 추대된 올빼미는 왕의 취임식을 해야 했습니다. 찬란한 정오에 올빼미는 한 치의 앞을 볼 줄 모르는 가운데 앞장서서 산으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뒤를 따라 산중의 온 짐승이 열을 서서 갑니다. 올빼미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돌부리에. 나무에 걸려 좌충우돌. 전신에 타박상을 입으면서 걸었습니다. 뒤따르는 짐승들은 그 모습이 도도하고 늠름하며 오히려 위대하게 보여 정말 위대한 왕을 선출했다고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이윽고 내를 건너 길을 건넙니다. 이 길은 얼마 전에 사람들이 뚫어놓은 고속도로입니다. 차량 통행이 심한 곳입니다. 그러나 올빼미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걸어갑니다. 뒤따르는 짐승들이야 위험한 곳인 줄 알지만 자기들이 선출한. 위풍 당당히 용감히 걷는 왕을 보면서 더욱 신이 나고 자신이 생겨 따라 건넙니다.


 이윽고 큰 화물트럭이 그들을 덮었고. 왕 올빼미는 박살이 났고 뒤따르던 산중의 짐승들도 전신이 찢어지는 불운을 맞게 됩니다. “위대한 왕이여”. 올빼미에게 찬사를 보내며..





 


     위인과 반성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대 왕 중 으뜸가는 분이다. 그가 왕위에 있을 때 경상남도 진주에 사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죽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왕은 몹시 놀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옛날 중국에 요임금이 있을 때에는 백성이 임금의 마음과 같은 어진 마음씨를 본받았다고 하는데, 내가 임금으로 있는 오늘날, 애비를 죽인 백성이 있다니, 이것은 결국 나의 덕이 부족하여 백성들을 잘 가르치지 못한 것과 잘 다스리지 못한 까닭이다"라고 했다.


위인은 언제나 먼저 자기의 부족을 살피는 것이다.





 


      위인일수록 잘 고치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Lincoln, Abraham)의 국방 장관 스탠튼(Stanton, Edwin McMasters 1814-69)이 일찍이 링컨을 <어리석은 자>라고 부른 일이 있었다. 스탠튼은 링컨이 자기의 사무에 간섭하였다는 이유로 분개했던 것이다. 링컨은 어떤 이기적인 정치가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한 연대를 어떤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명령에 서명하였다. 스탠튼은 링컨의 명령 이행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명령을 내린 링컨을 어리석은 자라고 비난하였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던가? 스탠튼의 말을 링컨이 전하여 들었을 때, 그는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만일 스탠튼이 나를 어리석은 자라고 불렀다면 나는 그러한 인간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의견은 언제나 십중팔구가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직접 그를 찾아가 만나보기로 하겠다" 라고. 사실 링컨은 스탠튼을 찾아 갔다. 스탠튼은 링컨에게 그 명령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따라서 링컨을 그것을 취소하였다. 링컨은 자기에 대한 비판이 진실하고, 학문적 기초위에 서있으며 협조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면, 언제나 그것을 환영했던 것이다(위인일수록 자신의 과오를 잘 인정하고, 고치는 것이다.)





 


     의자 왕의 망한 이유


 의자왕은 적군이 침략해 올 것을 알고 당시 옥중에 있던 설총에게 어떻게 하면 적군을 막을 수 있을 런지 알려 달라고 하자 설총은 흥수에게 물어 보면 알려 줄 것이라고 했다. 흥수는 왕의 미움을 받아 귀양 중에 있었다.


물어 보니 반드시 백마강 하구로 올 터이니 백마강을 막았다가 올 때 터지게 하면 된다고 했다. 또한 길은 고개를 넘어 올 터이니 고개 목만 지키면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간신들 왈;


"설총이나 흥수는 왕의 원수이니 바른 말하겠는가? 속임수일 것이다"고 하여 그 말을 못 듣게 했다.


 흥수의 말대로 적군을 그렇게 들어 와서 정복했다.





 


      제자양육


 북미주에 체류하고 있을 동안,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나의 제자들로부터 종종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목사님이 떠나신 후로 저희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저희는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떠나신 이후에야 목사님없이 지내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4년 전만 해도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자발적으로“아멘”을 외치지도 못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어엿한 목사들이다. 그들이 내 자리를 지켜주는 덕분에 나는 일 년에 여섯, 일곱, 심지어 여덟 달 동안이라도 여행할 수 있다. 내가 교회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그들은 크지 못했으리라. 내가 교회를 지키고 앉아서 코르크 마개 노릇이나 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설교하고 예배를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떠났기 때문에 그들이 나서서 해야 했다.


 예수님도 자신의 회중들로부터 떠나셨다. 아예 이 땅에서 떠나신 것이다. 왜? 자신의 제자들이 홀로 남아 자라야 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큰 일꾼 된 바울과 바나바는 자라나는 살아있는 유실수를 심는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한 곳에 몇 개월 정도밖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거꾸로 되었다. 성공한 목사란 아주 오랫동안 한 교회에서 사역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는 제자들을 빨리, 그리고 잘 양육해 놓고 새로운 과업을 향해서 훌훌 떠나는 사람이 훌륭한 사역자였다. 교인들로부터 쫓겨났던 것이 아니었다. 영적 자녀들에게 교회를 맡기고 다른 곳을 향해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모두 자라야 한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유년기를 청산하고, 우리 스스로 구비된 사람이 되어 또 다른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기까지 단단한 음식을 섭취해야한다.





 


      존경받게 하는 결백


 영국의 군인 고든(Gordon, Charles George)장군은, 1860년 청국(중국)에 파견되어,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함으로써, 크게 공을 세운 사람이다. 이제 그가 청국을 떠나려 할 때, 북경정부에서는 막대한 상금을 그에게 드리기로 했다. 그러나 고든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것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빈 손 들고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가 그것이다. 이런 결백으로 인하여 그는 중국인의 존경을 받게 되었으니, 즉 <차이니즈 고든 Chinese Gordon>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사람의 위에 있는 자나,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으려는 사람은, 언제나 결백하여야한다.





 


     좋은 목자


 일전에 대규모 금융 기관의 총재인 밥 게이튼 씨와 점심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식사를 마치고 그와 함께 직원 식당을 나와. 줄지어 있는 사무실들을 지나갔다. 그는 잠시 멈추어 서서 안내계원에게 인사를 하면서. 병원에 입원한 그 여직원의 남편의 안부를 물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에는 대기하고 있던 두 직원의 이름을 부르면서 인사했다. 은행 앞에서는 수위의 이름을 부르면서 역시 그의 아내의 이름을 대며 소식을 물었다. 그 큰 은행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하고 있을 텐데. 최고 상사가 모든 직원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기억력에 놀란 것이 아니라. 모든 직원들의 이름을 실제로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걸어 나갔다. 그는 회사의 중역들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변변치 않게” 대접받는 사람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투로 보아서는 이름만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인격으로서. 그리고 각각 다른 성격과 문제를 갖고 있는 개인으로서 알았던 것이다. 그때 나는 밥이 「좋은 목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0:14,15 예수님께서는 양과 자신의 관계를 말씀하실 때에 단지 이름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신 것 같다. 예수님께 있어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도자


 최근 뉴질랜드 북부 그레이트 베리어 섬 해안에서 142마리의 고래가 뭍으로 올라와 집단 자살을 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고 한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고래들의 지도자가 병들어 방향 감각을 잃고 해안에 상륙하자 다른 고래들도 따라왔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지도자가 잘못 인솔하면 수많은 대중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섬겨야 하는 것이 자녀 된 도리이다.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지도자


 최근에 나는 주일 오후에 밖에 나와서 차를 닦은 적이 있다. 나는 주일 오후에 세차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전혀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수년 동안 그렇게 해왔다. 그러나 우연히 내 친구가 차를 타고 가다가 내가 세차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다음날 그 친구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굉장히 충격 받았다는듯한 목소리로"러쉬 씨, 나는 당신에게 실망했습니다. 당신은 주일에 일하는 게 나쁘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당신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주일 오후에 차를 닦지 않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더러운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판단과는 달리 나는 친구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주일을 피해 다른 요일에 차를 닦는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주일날 차 닦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지도자로서 다른 사람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일은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한다.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이러한 문제를 다루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23,24,2,33).


 바울은 우리가 지도자로서 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당신에게 큰 부담으로 여겨진다면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는 당신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책임 있는 말


 어느 여름날 부호들이 많이 모이는 피서지에서 자선 모금운동이 있었다. 여러 가지 바자회 형식으로 진행된 이날 최대의 행사로는 유명한 사람들의 강연회가 있게 되었다. 거기에는 미국의 대 부호이며 은행가인 벨몬트씨가 참석하여 거액의 기부금을 전달하는 순서가 있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 행사를 위해 초대를 받은 유명한 목사님 한 분이 설교하게 되어 강단에 올라선 목사님이 “도박을 하거나 경마와 같은 오락을 즐기는 사람들이 1년에 한번이라도 자기들이 쓰는 돈의 1/10이라도 내놓는다면 이와 같은 자선 모금운동 같은 것은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도박과 경마를 즐기는 사람들을 맹렬히 공격했다.


 이 설교를 들은 주최 측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날 참석한 은행가인 벨몬트씨는 경마를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의 설교가 그를 노엽게 했을 것을 두려워한 주최자들은. 목사에게 조용히 다가와 설교의 내용을 시정해주던지 아니면 어거스트 벨몬트씨를 찾아가 벨몬트씨 개인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양해를 구해달라고 말하였다. 목사는 마음에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마는 후자의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벨몬트씨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설교가 벨몬트씨를 혹 불쾌하게 하였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였음을 이해하여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벨몬트씨는 오히려 정색을 하면서 대답하기를.


“목사님. 목사님의 설교 내용 때문에 제 마음이 상하였으리라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목사님께서 5분 동안이나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른 말을 하나도 하시지 않았다면 그런 목사를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설교자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만 증거해야 할 것을 알게 하는 말이다.





 


       청종하는 능력


 몇 년 전 나는 대규모 청소년 집회에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했던 경험을 했다. 집회 조직자들은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목회 사역에 응답하여 헌신을 결단하도록 하길 원했고 나는 엄청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집회에서 설교하기로 한 그날 오후에 하나님의 음성이 느껴졌다.


“얘, 존, 나는 오늘밤 너의 메시지를 사용하지 않으련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메시지를 사용하지 않으실 거란 사실을 깨닫게 되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더 좋은 계획을 믿고 머물렀다. 그분은 고린도전서 1:1을 봉독하도록 시키셨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신 전부는 성경을 봉독하고, 기도하고, 초청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순종하지 않았다. 나는 그 성경 말씀을 봉독한 뒤 생각했다. '글쎄, 서너 가지 강해를 덧붙이면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내 딴에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 나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첫 번째 강해를 했으나 실패였다. 두 번째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마침내 나는 “우리 머리를 숙이십시다”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러자 놀라운 평안이 나를 감쌌고, 이제 나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시키신 것을 시작했다. 1,500명의 젊은이들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저를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나는 기뻤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위해 성공적인 목회자가 될 것이라면, 나의 설교 능력이 아니라 그분을 청종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었다.





 


      체면유지


 로랑장군은 프랑스의 황제 "샤르마뉴"대제의 12용사 중의 한 사람이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로랑이 이끄는 군대가 포위당하고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옛날 전쟁에서, 이런 경우에 구원 군을 부르기 위하여 뿔 나팔을 대장이 휴대하였었다. 그러나 로랑은 자기의 체면 때문에 뿔 나팔을 불지 않았다.


 결국은 부하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고 아주 위급해졌지마는, 로랑의 고집은 자기 자신이 죽을 순간까지 뿔 나팔을 불지 않고 만 것이다. 로랑의 체면 유지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부하를 전멸 시키고 말았다.





 


      크리스천 리더십


 본인은 콜롬비아 신학교에서 스티븐 올포드박사와 함께 가졌던 집회를 잊을 수 없습니다. 모임이 끝난 후에 두 명의 학생이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희들에게 크리스천 리더십의 비결이 무엇인지 좀 말씀해 주십시오! 본인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올포드 박사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한마디로 꿇은 무릎과 젖은 눈과 깨어진 심장이오!”


 더 이상 첨부할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리더십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기꺼이 섬기려는 마음입니다.





 


       큰 축복


 유명한 스펄젼이 그의 장막성전에서 평생을 사역하다가 이제 늙어 몸이 쇠잔해지니까 사역에 대한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그랬더니 온 성도가 일어나서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자 스펄젼이 “제가 이 건강으로는 한 달에 한번 설교를 할 수 있을까 말까입니다. 그처럼 불충하게 목사일을 하는 것보다 나를 쉬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온 교회가 안 된다고 떠들었습니다. “목사님. 한 달에 한 번밖에 설교 못하셔도 좋으니 제발 그만 둔다는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라고 교인들이 완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스펄젼목사는 “지금이야 한 달에 한 번이라고 제가 말했지만 그 다음 달에는 한 달에 한 번도 설교를 못할 터인데.”라고 하자 온 교인들이 울면서 “목사님. ‘우리 교회 목사님이 스펄젼이다’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저희들은 만족하겠습니다. 제발 그만둔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온 교우가 울며 말렸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하려는 사람에게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일까요. 많은 축복 중에 하나는 좋은 신앙의 지도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축복입니다.





 


       하늘나라의 상급-지도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목사나 교회 지도자에게 퍽 경고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천당 문에 서서 천당으로 들어오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의 구원받은 무리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얼마 후에 저 멀리 세상에서 목사였던 한 사람이 구원받은 무리에 끼어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너무너무 기뻐서 팔을 벌리고 쫓아 나가서 반가와 하시면서 목을 쓸어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성도들이 예수님께 불평을 하였습니다.


"주님, 너무하십니다. 세상에서 목사와 평신도를 구별하시더니 아니 천당에 와서도 그렇게 구별하십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퍽 미안해하시면서


"얘들아, 참 미안하다. 그런데 내 마음을 좀 이해하여 다오. 사실 내가 지금까지 천당에 오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목사는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가 지금 이 사람이 처음이야. 그러니 내가 얼마나 반갑겠니?"


 세상에서는 목사가 되어 일하고 교회의 지도자 일을 보지마는 예수님 앞에 서게 될 때는 어떨까? 하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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