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勞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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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勞動)에 대하여
게으른 사람
손 하나 까딱 않고 잠만 자는 놈 꼴 보기 싫어 누룽지 허리춤에 채워주며 밖에 내보냈다. 배가 고파 누룽지를 꺼내 먹고 싶은데 풀기 귀찮아 못 먹고 있는 참에, 저편에서 갓 쓰고 입을 떡 벌린 자가 걸어오는 지라 배고파서 입을 벌리고 있으려니 하고 허리춤에 있는 누룽지를 풀어주면 절반을 주겠다고 했다. 이에 입 벌린 자 가로되, '갓끈이 늘어져 그걸 고쳐 매기 싫어 입을 벌리고 가는 길이오' 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놀기 좋아하는 열자(列子)가 역시 놀기 좋아하는 호구자(壺丘子)를 만나 너는 뭘 하고 노는 게 제일 즐겁느냐고 물었다. '물어보나마나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즐거워 죽겠는걸.' 게으름을 무위(無爲)라는 철학으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서양에서도 에피크로스 이래 게으름의 사상은 유구하다. 공산주의의 아버지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는 <게으름의 권리>라는 저서에서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사회는 궁극적으로 노동을 신성시하는 도그마 때문에 붕괴하고 말 것이라고 예언, 게으름의 권리 선언을 하고 있다.
게으름의 찬양자로 버트런드 러셀을 뺄 수 없다. 그는 <나태 예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하루 8시간 노동해서 핀을 만든 사람들이 있다. 기술의 발달로 같은 인원수로 두 배의 핀을 만들 수 있게 됐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모두가 8시간 노동을 그만두고 4시간 노동을 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노는 것을 부덕시하여 8시간 노동을 지속한다. 그럼으로써 절반은 실직이 불가피하게 되고 경제 혼란이 이로부터 야기된다.'
프로이트의 제자인 빌헬름 라이히는 그의 스승이 성적 원망(性的願望)이 인간 본연의 것인데도 사회적, 도덕적으로 억압받고 있듯이 나태 원망(願望)도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하고, 먹고 입고 살게만 되면 게으르게 된다 했다.
옛날 베짱이는 눈보라치는 날 개미집 앞에서 내쫓겨 처량해졌지만, 현대의 베짱이는 아들개미 딸개미에 환대되어 깡깡이 켜고 디스코 추고 호강하며 겨울을 난다. 이렇게 하여 근면하던 개미 일가는 몰락하고 만다. 개미집처럼 먹고 입고 살 만큼만 가지면 나태 원망이 발로된다.
상공회의소가 엊그제 발표한 한국인의 근로의식을 보면 71퍼센트가 돈 덜 벌더라도 놀고 싶다 했고, 그 비율이 10년 전보다 무려 36 \퍼센트가 증가하고 있다.
그에 걸맞게 과소비가 급증하고 있고. 바로 나태 원망이 국가적 차원에서 발로하기 시작했다는 지표가 아닐 수 없다.
북풍한설 막지 못하고 누더기 이불 둘러쓰고 있는 개미집이 자꾸만 연상되는 것이다
벽돌공의 자세
지혜의 임금으로 알려진 솔로몬이 하루는 성전 건축현장을 방문하고 일꾼들을 돌아보았다.
"왜 당신은 여기서 일을 합니까? " 한 일꾼이 대답을 했다.
"아 그야 뭐 배운 것도 없고 이럭저럭 살아가려니 죽지 못해서 하고 있지요." 얼마쯤 가다가 다른 일꾼에게 똑같이 물었다. 그 일꾼은
"배운 도둑질이 일하는 것뿐이니 놀고먹을 수가 있나요, 그럭저럭 한 세월 보내는 것이죠." 왕은 얼마쯤 가다가 해진 옷을 입고 일하는 청년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왜 여기서 일을 하느냐고요? 정말 난 기뻐서 죽을 지경이지요. 자, 보세요. 나는 지금 하늘나라의 영광을 이 땅위에 드러내는 성전을 바로 이 손으로 돌을 쌓고 있지 않나요? "
이 손으로 쌓는 벽돌 한 장이 이 위대한 성전의 작디작은 부분일지언정 큰일을 이룬다는 것은 소명을 가지고 일하는 자 와 그렇지 못한 자의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만년 청춘
독일의 음악 작곡자 브람스(1833-1897)가 50회 생일을 맞은 어느 날이다. 그 즈음 그는 무언가 머리를 맴도는 악보를 하나 그려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떠오른 생각을 오선지 위에 그려보면 마음에 들지 않아 구겨버리기를 몇 십번, 그는 마침내 붓을 동댕이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젠 나도 끝인가 보다. 예전과 같은 영감도 없고 총명함도 사라졌구나. 나이 50이 되면 이렇게 늙어 쓸모없어 지는가.”
이렇게 자조하는데, 문득 하나의 약속이 떠올랐다. 그것은 며칠 전 친구로부터 식사나 함께 하자며 약속했던 날이 바로 오늘 이라는 것이었다. 브람스가 그 집에 도착해 보니 의외로 많은 친구들도 함께 와 있었다. 브람스는 오랜만에 많은 친구들을 만나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이윽고 모두 식탁에 둘러앉아 주인 친구가 말했다.
“각자 자기 잔을 들고 오늘 50회 생일을 맞은 친구 브람스를 축하해 줍시다.” 브람스는 감격했다. 자신은 작곡 때문에 생일도 친구도 잊고 있었는데, 그런 자신에게 모든 친구들이 함께 축하해 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내가 나이 50이 되었다고 작곡을 그만두려 했던 생각은 잘못이었다. 50이든 무어든 죽는 날까지 하던 일을 계속해야한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맹세하며, 친구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했다.
인생 50이면, 젊은 시절에 비교해서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이를 불문하고 그가 맹세한 대로 죽는 날까지 열심히 일해서(교양곡 제4번 마단조)<52세> 등의 명곡과 (11개의 코랄 전주곡) <63세>을 남겼다.
미켈란젤로가 80세에, 모네가85세에 대작을 남겼다든가, 처칠, 맥아더 등등이 나이에 관계없이 죽을 때까지 일했다는 사실을 나열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남아 있을 때까지 일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많고 또 당연한 것이다.
이제 늙었기 때문에 지나온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적어져‘시간의 가치’가 더욱 소중해졌다는 사실이 그렇고, 그동안 이렇게 저렇게 해서 모여진 축적된 경험과 경륜이 사장될 확률도 높아졌다는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사실, 우리 인간들이 자랑하는 오늘날의 문화나 문명도 따지고 보면 조상들의 축척된 지식 덕분이 아닌가?) 그리고 후손들에게 보여줄 떠 하나의 값진 교훈인 ‘유종의 미’를 보여줄 수 있고 스스로 열심히 함으로서 ‘만년청춘’도 구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먹고 놀자 판 사회
흥부가 스물 넷 자식 놈들의 `오매밥...오매밥..'하는 빈곤합창(貧困合唱)에 견디다 못해 놀부 집에 양식 얻으러 가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양식을 얻기는커녕 걷지도 못하게 얻어맞고 개처럼 네 발로 기어 들어오는 것을 흥부 마누라가 동구 밖에서 마중한다.
`몹쓸레라 몹쓸레라 시아주비도 몹쓸레라. 시아주비 집에 다시 가지마사이다. 내가 걷어붙이고 주식(酒食) 장수라도 할테이니...' 마누라 술 밥장수 한다는 말을 듣고 흥부 엉덩방아를 찧으며 자네 그게 웬말인가를 다섯 번이나 외친다. `죽으면 그저 앉아 죽지 자네시켜 술 팔겠나. 그런 말 다시 말게 다시 말게..'
전통 사회에서 술이나 밥을 판다는 직업은 죽지 못해 마지막 하는 직업이다. 그러기에 한국에서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제일 가난하다는 흥부마저도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찌할 수 없이 술집을 냈을 경우도 얼굴을 내지 않고 신원이나 신분을 숨겨 장사하는 내외(內外) 술집이 서울 장안에 많았다. 손님이 문간에 와서 술을 청하면 주인은 안방에 앉아서 `손님께서 거기 있는 자리를 깔고 계시라고 여쭈어라'하면 `술상 내보내라고 여쭈어라'한다. 주인은 안방 문전에 술상을 밀어 내놓는다. 물론 가공의 심부름꾼을 두고 면대 없이 술상이며 술주전자가 들고 난다. `술값이 얼마냐고 여쭈어 보아라' 하고 술상에 돈을 놓고 나가면 방안에 앉아서 `다음에 또 들르시라고 여쭈어라'한다. 술, 밥파는 장사에 대한 기피가 손목만 들락날락하는 세상에도 이상한 술장수를 있게 한 것이다.
외식유흥(外食遊興)을 부덕시 했던 유교 윤리가 유흥업을 사회 인식 속에서 이렇게까지 비가치화했던 것이다. 한데 지금은 도시건 지방이건 도심이건 변두리건 눈에 뛰었다하면 밥집, 밥집 위에 찻집, 밥집 아래 술집, 온통 먹고 마시고 는 업소뿐이다. 유흥 극소화의 전통이 근대화 과정에서 유흥 극대화로 반동(反動)을 한 것일까.
먹고 마시고 노는 유흥업소가 서울에 만도 11만 곳이 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10년 사이에 배가 되었다 하니 비상한 상승이다. 한 업소에 하루 세끼 도합 최저 50명 손님을 받지 않고서야 수지가 맞을 리 없을 것으로 어림하면 11만 업소에 드나드는 손님은 5백여 만 명이 된다. 유동인구를 합쳐서 서울 사람의 절반이 하루 한 번씩 드나든다는 것이 된다.
좁은 국토에 이 많은 인구가 수천 년 살아 올 수 있었다는 가장 큰 덕목으로 검약(儉約)을 드는데 이 역사의 생명선이 뭣인가 크게 잘못되고 있음을 감지케 하는 사회 단면이다. 당국에서는 이 먹고 놀자판의 유흥업소 허가를 중단키로 했다던데, 사또 지나간 뒤 나팔 분 격이다.
3D 기피현상
세상 살아가면서 궂은 일(Dirty)도 해야 하고 힘든 일(Difficult)도 해야 하며, 또 위태로운 (Dange- rous)도 해야 한다. 이 3D현상을 극복해야만 비로소 치열한 인생 경주의 시발점에 달려갈 트랙을 배정받는다.
그래서 이 3D현상을 극복하는 성인식(成人式)이 꽤나 발달했었다. 이 시련을 거치지 않으면 나이 들어도 반말을 들어야 하고 품을 팔더라도 반품 밖에 받지 못했으며 결혼 대상에서 소외당해야만 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시련 방식은 달랐다. 이를테면 나무에 올려놓고 가지를 쥐고 몸을 늘어뜨리게 한다. 그러고서 한 손을 번갈아 놓게 하고서 바짓가랑이를 잡아끌어 반나신이 되게 한다. 이렇게 위험하고 힘들며 창피스러운 고비를 넘김으로써 성인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 해도 이 3D로 시작된다. 정월 대보름날 '아홉 치레'가 그것이다. 이날, 나무도 아홉 짐을 하고 새끼고 아홉 발을 꼬며 빨래도 아홉 가지, 삼도 아홉 바구니를 삼는다. 매도 아홉 번 맞고 심부름도 아홉 번한다. 이렇게 아홉 치례로 고되게 한 해를 시작함으로써 한 해의 일이 수월해지고 따라서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것이다.
동서와 시누이가 짜고 시집온 새 며느리를 골탕 먹이는 의식도 같은 맥락이다. 깊은 오줌 항아리에 호미를 담가놓고 그것을 꺼내 오라고 시킨다든지, 귀신이 득실거리는 상여 집에 신발을 숨겨놓고 야반에 혼자 가서 찾아오라고 시킨다든지...., 또 갓 농사일을 시작한 애송이는 소매(인분) 퍼 다가 거름 주는 일, 외양간이나 돼지우리 치우는 일, 묵정밭의 돌골라 내는 일 등, 궂고 힘들고 어려운 일 3년을 해야 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이렇게 궂고 치사하고 위태로우며 고된 일을 겪음으로써 닥쳐올 인생의 고난에 패배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정신적 기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반드시 모유로 아기를 기르는 것이 법통이 돼 있는 유럽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제들은, 소년의 어느 한 시기를 가난한 농가에 의탁해 기름으로서 3D를 몸에 익히게 하는 것이 가풍이 돼 있다 한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거의가 핵가족화의 진행으로 역(逆) 3D의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리고 공부만 잘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면죄, 면책되는 역시 역3D의 무균(無菌) 상태에서 뼈가 굵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내던져진 세상은 궂고 힘들고 험한 일투성이다. 한데 그걸 감내할 기틀이며 역량이 없다.
열매가 잘 열리는 나무는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메마른 땅과 돌무더기와 그리고 벌레나 세균과 싸우는 뿌리가 무성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경제의 나무도 바로 그 고난과 싸우는 뿌리가 성쇠를 가름한다. 젊은이들에게 팽배돼 가는 3D 기피현상은 바로 그 뿌리가 죽어간다는 말이다. 시름시름 시드는 그 나무를 보고도 속수무책인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베토벤이 음악을 작곡하듯
유명한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이 워싱턴 시를 지나가다가 한 흑인 청소부 청년이 있는 대로 욕설을 퍼붓고 짜증을 부리면서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곁에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보게. 자네는 하나님이 자네에게 맡기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가 없소.” 그러면서 등을 두드리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청소를 할 때 베에토벤이 음악을 작곡하듯.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하듯. 괴테가 작품을 쓰듯.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시오. ”
그 일을 하는 동기가 선할 때. 그리고 올바른 목표 앞에 당신의 삶의 초점을 맞출 수가 있을 때. 내가 하는 그 일은 갑자기 보람이 있습니다.
“오. 주님. 나에게 이 사역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똑 같이 하는 그 일인데. 그 지겨운 일인데 주께서 내 마음에 긍지를 심어 주시는 그 순간 내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내 마음 속에서부터 흘러나기 시작합니다. 성령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주님. 오늘 아침도 일어나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그 일에 뛰어드는 그리스도인의 자부심. 이 그리스도인의 긍지. 여기에 낙심을 이기는. 그리고 독수리처럼 하늘을 비상하며 이 삶을 창조와 능력으로 바꾸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활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과 이 용기와 이 비전. 이 삶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손에 못이 박힌 사람만 먹으라
옛날 한 농부에게 세 아들과 벙어리 딸 하나가 있었다. 두 아들은 무난했으나 막내 이반은 바보였다. 바보 이반과 벙어리 딸은 묵묵히 일만했다. 두형은 재산을 얻어서 낭비해 버린다.
한 신사가 나타나 사람이 머리가 빠개지도록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도깨비가 변장하고 이반의 나라를 망치려고 하는 짓이다. 이반은 광고를 했다.
"훌륭한 신사가 나타나 여러분에게 머리로 일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머리로는 손보다 훨씬 더 많은 벌이를 할 수 있다. 모두들 나와서 배우라"
드디어 높은 망대가 세워지고 그 신사가 올라갔다. 그러나 바보들은 다 일하러 흩어졌다. 신사가 머리로 일하는 법을 가르치다가 굶어서 쓰러지고 말았다. 사닥다리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를 다치고 큰 부상을 입었다.
"아, 머리가 빠개지도록 일하는 것이 바로 이거군!" 하고 모두 빈정댔다.
온갖 인종들이 이반의 나라로 몰려와 먹을 것을 구했다. 그러나 이반의 나라에는 한 가지 엄격한 법이 있었다. 이반은 외쳤다.
"손에 못이 박힌 사람만 식탁에 앉을 수 있소. 못이 박히지 않은 사람은 먹다 남은 찌꺼기를 먹어야 하오"
이반의 나라는 일하는 나라이다. 바보 이반을 비웃으며 일할 줄 모르는 형들이 바보들이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살후3:10)
일과 즐거운 삶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못하게 하라.”는 말이 있다. 물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굶기라는 말은 아니다. 노약자나 환자, 실업자나 죄수는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므로, 이들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는데도 일을 하지 않는 사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애를 쓰지 않는 사람은 먹을 자격도 없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될 뿐이다.
사람은 일을 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짐승들의 생존은 본능이나 보호색 등 주로 자연적인 것에 의하여 유지되지만, 사람의 생존은 사람 자신이 의식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할 때에 유지될 수 있다. 사람은 나무와 풀에 저절로 열리는 열매를 따 먹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굴을 파고 사는 것이 아니라, 연장을 사용하여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며, 기후와 환경에 맞추어 옷을 입고 집을 짓고 사는 것이다.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생명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더 맛있게 먹고, 더 멋있게 입으며, 더 안락하고 편리하게 살기 위하여 계속해서 연구하고 실험함으로써 더 많은 지식을 얻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 나아가, 사람은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학문 활동을 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하여 즐기기도 하며, 서로의 관계를 조정하여 사회를 더욱 정의롭게 하기도 한다. 사람의 이런 활동들은 모두 넓은 의미의 문화 활동이다. 문화 활동이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을 사람이 의식적으로 변형시키거나, 전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을 일컫는다. 이런 의식적인 변형이나 창조는, 일을 하는 활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사람에 의하여 이룩된 문화는 사람에게 다시 영향을 끼친다. 한국 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한국인이 되고, 일본 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자란 사람은 일본인이 된다. 사람의 혈통과 얼굴 생김이 그 사람의 어떠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받은 문화적 영향이 그의 정신세계를 형성하고, 그 사람의 인격적 특성을 결정한다. 사람만이 일을 통하여 문화를 창조하고, 사람 자신이 창조한 문화에 의하여 사상과 인격이 형성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일을 통하여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본래, 사람은 일을 하도록 만들어졌다. 우리의 몸은 움직여야 건강하고, 우리의 두뇌는 써야 민첩해진다. 태아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박동하는 심장도, 운동을 하여 더 많이 뛰게 하면 더욱 튼튼해진다고 한다. 과로하지 않는 한, 우리 몸의 모든 기관과 두뇌는 사용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튼튼해지고 민첩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중요한 일을 귀찮아하고, 하기 싫어한다. 그래서 일을 노동이라 하기도 한다. 우리말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언어에서, 일이란 말은 괴롭고 힘든 것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일을 뜻하는 프랑스어 트라바이란 말은‘세 마리의 말’이란 뜻을 가진 라틴 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세 마리의 말을 한데 묶는 것만큼 힘들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독일어의‘아르바이트’란 말도‘갈아 놓은 밭’이란 뜻을 가진 라틴 어에서 유래된 것인데, 이 말 역시 일이란 힘들고 괴로운 것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괴롭게 생각하고 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 왜 괴롭고 싫은지에 대해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물리적인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일이 괴로운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친구들과 어울려 공놀이를 하는 것이 이웃집에 심부름을 가는 것보다 힘이 더 들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공놀이를 하는 것이 심부름을 가는 것보다 더 괴롭거나 싫은 것은 아니다. 공놀이가 오히려 몸을 많이 움직이고 정신 집중이 더 필요한데도 공놀이가 심부름보다 즐거운 것이다.
일이 괴로운 이유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제도에서 찾으려 하였다. 자본주의 생산 체제에서는 일의 대가가 일하는 사람에게 모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이 생산 수단을 가진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또 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분업이 불가피하게 되므로, 일이 단조로워지고 괴로워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모든 사람들을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일은 역시 괴로운 것이며, 분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농사일도 괴롭고 하기 싫은 것은 매한가지다.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괴롭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벌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설명일 뿐, 과학적 사고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 별로 설득력이 없다. 일의 괴로움은 논리적으로 쉽게 설명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은 놀이와 대조된다. 심부름을 가는 것은 비록 힘이 적게 들더라도 그것은 일이고, 공놀이를 하는 것은 아무리 많은 힘이 들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놀이다. 놀이도 일 못지않게 심각할 수 있고, 많은 생각과 물리적인 힘을 요구하며, 문화 창조에도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하지만, 놀이는 그 목적이 놀이 그 자체에 있으므로, 그 밖의 아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은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공을 차는 것은 놀이지만, 돈을 받기 위하여 공을 차는 것은 일이다. 다 같이 몸을 움직이고 생각도 골똘히 하지만,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하나는 놀이여서 재미있고, 다른 하나는 일이라서 괴로운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일생 동안 어떤 종류의 일이든 해야 하고, 또 일을 함으로써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그 일들이 괴롭고 하기 싫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이 가진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다. 일이 놀이처럼 즐거웠다면, 인간의 삶과 문화는 지금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무도 일을 놀이하듯 그렇게 즐겁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좀더 즐겁게 일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사람 자체가 일을 하도록 만들어졌고, 일을 함으로써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때문에, 마땅히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일의 괴로움을 어느 정도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일의 결과보다는 일 그 자체에서의 의의를 발견하게 되므로, 일을 놀이하는 것과 같이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다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불량 식품을 만들거나 화학 무기를 생산하는 것도 일이긴 하지만, 이런 일은 결과적으로 일하는 사람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 그리고 모든 일이 다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부자가 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한 일은 그보다 훨씬 더 큰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일에서 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어진 환경에서,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즐겁고 가치 있는 일을 택하고,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고상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요, 일의 괴로움도 한결 더 덜어 줄 것이다.
우리는 깨어 있고 긴장되어 있는 시간, 즉 하루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을 일을 하면서 보낸다. 그런데 이 시간을 괴롭고 의미 없게 보낸다면, 우리의 일생이 괴롭고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많은 현대인들은, 일이 아무리 괴롭고 가치 없는 것일지라도 그 일을 통하여 돈만 많이 벌면, 그 돈으로 즐겁고 뜻있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옳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못하다. 삶의 덜 중요한 시간, 즉 일하지 않는 시간을 즐겁고 뜻있게 보내기 위하여 삶의 가장 중요한 시간에 가치 없는 일을 괴롭게 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을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하는 시간을 의미 있고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사람이라야 뜻있고 행복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의의를 가지고 즐겁게 일할 때, 그 일은 능률적이 될 것이요,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사람 자체가 본래 일을 하도록 만들어졌고, 일을 통하여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면, 재미가 있고 의미 있게 일을 하는 것이 즐겁고 가치 있게 살아가는 삶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일하는 삶
어떤 사람이 바쁜 생활에서 벗어나 한 주간 동안의 휴가를 얻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조그만 집을 하나 빌려 쉬게 되었습니다. 복잡하고 공해 심한 도시를 떠나 처음 하루 이틀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가슴이 시원할 정도로 많은 공기를 마음껏 마십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들어 시간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열 시간 이상 잠잘 수가 있습니다. 문만 열면 아름다운 대자연을 만끽하며 도취해 버립니다. 전화가 걸려올 필요도 없습니다. 신문도 배달되지 않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늘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니 잠을 잘 수가 없이 되고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숲속을 걸으며 산책을 하였습니다. 그는 무언가 다른 것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외로운 생각까지 들고 고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그의 세계를 즐기라고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세계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동안 끊임없이 하나님이 재창조하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여가 개발사
남새밭에는 며느리풀이라는 잡초가 있게 마련이었다. 특정의 잡초 이름이 아니다. 며느리로 하여금 풀밭을 매게 하기 위해 시어머니가 손대지 않고 남겨둔 일정 영역의 잡초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흔히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부려 먹고 구박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 며느리풀을 남겨둔다고 하나 그건 오해다. 사시사철 울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며느리에게 할 일이 없다는 것처럼 고통은 없다.
사르트르가 '출구 없는 방(房)'에서 보여주었듯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은 가혹한 고문(拷問)인 것이다. 이 고문을 덜어주려 할 일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남겨두는 시어니의 자비(慈悲)요 배려가 며느리풀인 것이다.
쌀 방아를 찧고, 찧은 알곡을 말로 되어 담을 때 시어머니는 한 말 당 탈곡되지 않은 뉘 한줌씩을 섞어 담은 습속도 같은 맥락이다. 며느리에게 여가가 생기는 족족 뒤주에서 밥쌀을 퍼 다가 뉘를 가리게 함으로써 할 일이 없다는 고통스런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대학(大學)'에 군자는 혼자 있을 때 근신을 하는데 , 소인은 한가하기만 하면 불선(不善)을 저지른다는 대목이 있다. 먹고사는 데 눈코 뜰 새 없는 단계에서는 잠시의 여가도 값지고 소중하지만, 여가가 잦고 길어지면 그 여가가 고통스러워지는 법이요 자칫하면 불선으로 빠지기가 쉽다.
미국에는 복지정책의 발달로 일하지 않고서 실직수당만으로 가늘게 살려는 인구가 기하급수로 늘고 있다던데 남아도는 여가를 처리 못해 적지 않게 마약에 빠지고 있다 한다. 너무 심심하여 하루는 지하철 구내에서 자보고, 하루는 쓰레기통에서 자보고, 하루는 유치장에서 자보고 싶어 일부러 범죄를 저지르는 족속까지 생겨나고 있다.
가전제품의 발달과 핵가족화의 진행으로 가정에서 여가가 급증하고 있으며, 그 여가 급증으로 야기되는 가정. 사회문제도 적지 않다. 며느리풀이나 뉘가리의 옛 지혜가 새삼tm러울 정도다.
그래서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가기 처지나 개성에 맞게 여가를 선용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조언하는 '여가개발사(餘暇開發士)'라는 새 직종이 정식 법적 직종(職種)으로 올라 선망 받는 직업으로 각광받고 있다 한다. 일본에서도 여가개발사를 양성, 시험을 거쳐 자격을 주기로 하고 각 기업체에서 앞 다투어 공부를 시키고 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며느리풀이나 뉘가리의 지혜가 복고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케 해주는 것이다.
여가로부터 탈주
한두 해가 늦다 할 만큼 빨리 변하는 세상인지라 15년 전이면 옛날 일인지 모른다. 여행 중 시카고에서 '내일의 부엌 살림전'이라는 살림에 침투된 전자기계 전람회를 구경한 일이 있다. 부엌에 소형 텔레비전 수상기가 놓여 있다. 스위치만 틀면 갓난아기 방이 비쳐 아이가 울고 있는지, 놀고 있는지, 잠을 자는지 확인할 수가 있다. 텔레비전 곁에 전화기도 한 대 놓여 있는데 버튼을 눌러 놓으면 외부에 나가서 전화로 빵도 굽고 커피도 끓이며 커튼도 걷고 전등도 켜고 끌 수 있게 돼 있다. 뿐만 아니라 증폭기가 붙어 있어 전화가 걸려오면 수화기를 들지 않고도 통화를 할 수가 있다. 밀가루 반죽을 하면서, 또 설거지를 하면서 통화가 가능하다.
이것을 보고서 사주팔자 좋아 명만 길면 별난 세상을 다 살아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한데 굳이 사주팔자가 좋지 않더라도 이 희한한 세상을 미구에 살 수 있을 것 같다. 정부는 집에서 사무를 보고 빈 집에 전화로써 밥을 짓고 소등도 할 수 있는 꿈의 통신망(ISDN)을 추진, 우선 제주도 지역에 85년부터 88년까지 그 시범 단지를 조성키로 하고 세부 계획을 짜고 있다 한다. 이것이 되면 모든 살림을 자동으로 하는 홈오토메이션 시대가 개막되는 것이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선진국에서도 그 편리보다 그 부작용 때문에 홈오토메이션이 주춤하고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그렇게 갈망했던 자유를 얻은 독일 사람들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치스에게 그 자유를 넘겨주었던 역사적 사실을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탈주>에서 적고 있는데, 전자화, 기계화에 따른 홈오토메이션의 진행으로 얻어낸 '여가'도 그 자유와 매한가지 신세인 것이다. 곧 여가가 늘면 상대적으로 주부의 존재 가치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인류가 생긴 아래 유지돼 내려온 이 주부의 존재 가치를 이 전자 제품이 대행하게 되면서 '아내 무용론(無用論)'이 대두되고, 별거주의, 독신주의자가 기하급수로 늘어나며, 따라서 아내들은 불안해지고 우울해진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여가를 오히려 반납하는 '여가로부터의 탈주'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다. 연전 미국의 한 대(大)메이커가 물만 부으면 맛있는 케이크가 되는 인스턴트식품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전혀 팔리지 않아 원인을 조사 했더니,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물만 부으면 된다는 캐치프레이즈에 불안을 느낀 때문으로 조사되었다 한다. 곧 주부의 존재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에서 홈오토메이션은 제한받을 수밖에 없는 숙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여러 해 전에 정해진 시각에 어떤 큰 올간 연주회가 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간에 펌프질을 할 사람이 그만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한 유명한 작곡가가 자신이 그 펌프질을 하겠노라고 자원했습니다. 왜 그런 보잘 것 없고 천한 일을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작곡가는 “나는 음악을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음악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결코 초라하지 않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그를 섬기는 가운데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결코 보잘 것 없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 안에서 행하는 봉사의 일이라면 가장 작고 미미한 일일지라도 모두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조롱(鳥籠) 인간
중국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고향 떠나 사는 한 상인이 닭장만한 조롱을 지어 놓고 많은 고향 새를 기르고 있었다. 그 집 장성한 아들이 새 밥을 줄 때마다 놀고먹는 이 새들을 부러워하고 밤낮 일만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던 것 같다.
이에 아버지는 아들놈이 밥 주러 들어간 틈을 타서 조롱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끼니때마다 진수성찬을 들여 주면서 편히 쉬라고 했다. 하루가 지나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사흘이 가니 발광을 하더니, 이레가 가니 죽을 수 있게 칼 한 자루 넣어 달라고 간청을 하더라는 것이다.
임어당(林語當)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공할 상황이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상황임을 이 `조롱인간(鳥籠人間)'으로 비유하고 있다. 하루 종일 먹이를 찾아 나르는 개미를 일할 수 없는 일정 공간 안에 넣어두고 생존에 필요한 먹이만 적시에 주었더니 닷새 만에 스스로의 발을 자르는 자학(自虐) 행위가, 1주일 만에 상대방의 몸을 해치는 타학(他虐)행위가 시작되었다는 관찰보고도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플라스티에는 그의 저서 `4만시간'에서 20세기 말이 되면 인생 60만 시간 중 노동 시간은 4만 시간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나머지 56만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문명의 가장 큰 숙제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1950년에 프랑스 사람들이 총수입에서 여가에 지출하는 비율이 10%인데, 1989년 곧 금년에는 25%로 상승하고 20세기가 끝날 때는 활동 시간의 10%만 일하고 90%는 여가로 남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만약 이 여가를 슬기롭게 쓸 수 있는 노력 없이는 `조롱인간'이나 일을 빼앗긴 개미 꼴인 `여가(餘暇) 아노미 현상(現象)'이 필연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한데 이 플라스티에의 예측보다 그 여가 위기가 한결 앞당겨 다가오고 있다. 가사 노동에 집약시켜 보아 보자. 가전제품의 발달로 가사의 대종인 취사-세탁-청소로부터 대폭적 여가를 얻어 냈다.
한데 컴퓨터의 도입으로 외출 중에도 버튼만 눌러서 가전제품을 원격 조종하고, 모든 가사를 점검할 수 있게 된 오토 홈(自動家事) 장치가 우리나라에 갑자기 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여가의 홍수 시대가 온 것이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여가의 공포를 예방하고자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일부러 만들어 하는 습속이 꽤 발달돼 있었다. 이를테면 쌀뒤주에 탈곡되지 않은 뉘를 한말 당 한줌씩 섞어 뉘가리는 시간을 여가로부터 구제해 준다든지 .
여가를 벌어주는 생활 문화의 발전은 그 여가를 현명하게 활용하는 여가 문화의 발전이 수반되지 않고는 `조롱인간'을 양산하는 위기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직업관념
우리는 오늘 저녁 난로 가에 앉아서 네 사람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네 사람이 공교롭게도 서로가 다 직업이 다른 친구들이었습니다.
외과의사, 육군장교, 신문기자, 교회를 담임한 목사 이렇게 네 사람이 서로 자기네 직업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세상에 제일 불쌍한 건 의사들일 꺼요! 매일 남의 고름이나 짜주고 밥을 먹어야 하니...'라고 말했습니다.
군인은 '거 무슨 소리요, 군인같이 사람구실 못하는 것이 어디 있소! 가정을 알고 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부럽겠소?'하고 말했습니다.
기자는 '다들 그만 두쇼! 사회의 상처마다 찾아 돌아다니는 우리들이 무슨 무관의 제왕이라, 그건 정말 웃기는 소리요, 세상에 기자를 사람으로 칩디까? 어서 고만 둬야 할텐데...'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는 그냥 허허 웃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도 무지도 미신도 다 내쫓아야 하고 비극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직업관념'이 없거나 잘못된 것이 후진 사회조성의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비극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천직
발명왕 에디슨은 때로는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하루에 18시간씩이나 일했지만 그는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나는 하루도 일한 적이 없습니다. 모두다 재미로 한 것뿐이지요." 라고 했고, 찰스 슈앙도 "사람은 자기가 무한한 열심을 갖는 일에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바른 직업 선택은 건강에도 중요하다. 레이온드 벌박사가 어느 생명보험회사와 함께 조사한 결과 오래 살게 하는 요인 중에 <적합한 직업>이 대단히 중요함을 발견했다.
"복 있는 자는 자기의 천직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에게 다른 축복이 있느냐고 묻지 말라"고 토마스 칼라일은 말했다.
컴퓨터 장보기
지금 여기 두 송이의 패랭이꽃이 있다. 똑같은 꽃송이지만 그 한 송이는 꽃집에서 사온 꽃이요 다른 한 송이는 손수 물을 주고 볕을 쪼이고 잎을 닦아주며 애지중지 기른 꽃이다. 어느 꽃이 보다 소중하고 정이 가며, 보다 곱고 보다 아끼고 싶은가는 자명한 노릇이다. 눈에 보이는 결과는 다를 바 없지만 그 과정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그 꽃에 부가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가 그렇게 다르다.
이 보이지 않는 과정의 즐거움을 데이비드 크라인교수는 `프로세스 알파'란 말로 개념화하고 있다. 프로세스 알파에 꼭 들어맞는 우리말도 있다. `손 덤'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손을 씀으로써만 얻어지는 덤의 즐거움이란 뜻일 게다. 가급적 과정일랑 생략하고 결과를 빨리 얻는 것이 선(善)이라는 현대는 손덤 상실 시대랄 수 있다.
사랑도 그렇다. 그 여인 때문에 편지도 썼다 찢길 여러 번 하고 프러포즈했다가 면박도 당해보고, 그러고는 달보고 한숨도 쉬어 보고 하는 과정주의 사랑과 프러포즈하기 바쁘게 답삭 목에 메어 달리는 결과주의 사랑과는 그 사랑의 질(質)은 천양지차이다.
편리할수록 좋고 간단할수록 가치가 있으며 빨리 얻어질수록 선(善)이라는 현대인은 너나할 것 없이 결과주의라는 폭군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고나 행동도 단락적(段落的)이고 유치화하며 무능인간으로 퇴화일로에 있다고 크라인 박사가 경고하고 있다.
더욱이 결과주의의 최첨단이기(利器)인 계산기 컴퓨터의 등장으로 인간의 분석-종합-판단-창조-심미(審美)같은 사고나 정서 능력까지도 앗아가 버렸다. 선진국들에서는 `테크노 의존증(依存症)'이라 하여 극도의 결과 의존과 과정 미숙으로 불안-분열-조울증이 나타나고, 이는 과정이 소중한 인간관계를 결과로만 처리하기에 부부 사이의 이혼-가출을 유발하는 현대병인 것이다. 우리나라도 안방에 앉아서 컴퓨터를 조작하여 장도 보고 쇼핑도 하게 됐다는 소식은 우리 생활 주변에서 무섭게 증발해가는 손덤의 즐거움을 실감케 해준다.
쇼핑은 필요한 물건을 입수한다는 결과가 전부는 아닌 것이다. 오고가는 재미도 있고 이 물건 저 물건 견주어 보고 헤아려도 보고 사고 싶은데 못 사는 미련도 가져 보고 깎아도 보고 덤도 얻어 보고... 프로세스 알파가 굉장히 많은 생활의 양식인 것이다. 그런 걸 모두 포기하고 상실하고 무슨 재미로 세상 살려고 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풍부로 가는 길
몇 해 전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한때 거대한 도시였던 곳의 발굴 작업이 벌어졌습니다. 그 도시의 이름은 렙티스 마그나로,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가 태어난 곳이었습니다. 한때 그곳은 아프리카 해안에 위치한 로마제국의 중요한 중심지였고, 갤리선(옛 그리스․로마의 군함으로 노예나 죄수들이 노를 저은 돛배)이 원근의 여러 항구로 출발하는 항구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도시에는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파멸의 원인은 화재나 홍수, 지진 등의 재난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침략당하거나 전쟁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항구가 침적 토에 의해서 메워져서 외국과의 무역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무역이 불가능해지자 조금씩 조금씩 그 도시의 주민들이 떠나갔고. 해가 지남에 따라 사막에서 흘러 들어온 모래가 그 도시를 덮어서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그 도시와 비슷한 인간의 영혼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상상력과 공감의 문이 막혀 버린다면. 그래서 하나님께 우리에게 관계를 맺게 하셨던 사람들의 필요와 더 이상 생동감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점차적으로 건조하고 황폐한 사막의 모래가 흘러 들어와서 한때는 우리 것이었던 고귀함을 묻어 버릴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항구가 바다를 향해 열려 있을 때에만. 오직 우리의 욕망의 선박들이 우리 자신의 관심사들에만 닻을 내리지 않고 인생처럼 넓은 곳으로 모험을 떠날 때에만이 우리는 풍부한 인생을 이어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
인간이 하는 일에 하나님의 일이 있고 세상에 속한 일이 있다.
하나님의 일을 거룩하고 세상적인 일은 저속한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이런 연고로 사람들은 가치있는 일, 즉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 한다. 특히 종교인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지니고 있다.
불제자로 자부하는 사람들이 가정을 버리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이나,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이 일상의 삶을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거나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삶 전체를 자기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다못해 그들의 종교의 전당을 위하여 봉사하거나 그 종교의 지도자들이 원하는 것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했다는 자위를 얻는다.
한국의 일부 몰지각한 부흥사들의 외침을 한 번 보자.
사람으로 태어나서 썩어질 세상의 일만 하다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저주 받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까짓 매일 해야 표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집안 살림하느라 허송세월 하지 말고 전도하고 심방하고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는 것에 전심전력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당신들을 사랑하시겠는가? 당신들이 키우는 아이들도 썩은 세상일 하도록 하지 말고 하나님의 종을 만들어야 신자로서 보람이 있지 않겠느냐? 라고 그들은 입에 가품을 문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무엇이 하나님의 일이냐 하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때 구원 얻는 사람과 구원 얻지 못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때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24:40-41)
이것이 사실이라면 외형상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했고 다른 사람은 썩어질 세속적인 일을 한 것이 분명하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두 가지 큰 사명을 주셨다.
하나는,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는 사명이다.
다음은, “안식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라”는 사명이다.
따라서 신앙적인 자세로 엿새 동안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그것이야말로 거룩한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하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가정주부가 열심히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인 줄 알고 보다 건전한 가정을 꾸미려고 노력하며 그 가정에서 보다 바람직한 인격자가 배출되도록 힘쓴다면, 하나님의 일의 가치가 분명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로 외형적인 것이 아니고 특정한 직책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바르게 신앙적 자세를 지니고 수행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했다. 무엇을 위해 행하느냐하는 동기가 상당히 중요함을 말할 수 있다.
교회에서 일한다고해도 그 동기를 보면 자기의 일을 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분명 나눠진다.
할 일 없다는 공포
희랍신화에서 가장 가혹한 형벌은 무한지옥(無限地獄)에서 무거운 바윗덩이를 영원히 굴려 올리도록 숙명 지어진 시지프스의 형벌이다. 시지프스 왕은 이승에서 살았을 제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살다가 끝내는 제우스 신까지 속인 죄로 이 가공할 형벌을 받은 것이다.
이 시지프스의 형벌을 인간의 실존(實存)에 빗댄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는 유명하다. 한데 사르트르는 시지프스는 그나마 바위를 굴려 올리는 할 일이라도 있다는 점에서 덜 비극적이라고 말하면서 보다 가혹한 책고(責苦)로 아랍인의 지옥 가헤넴을 든다.
아랍 사람이 죽으면 험상궂은 마왕(魔王)의 두 사자(使者)에게 신문을 받고 죄가 확정되면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다리(橋)를 건너는데 악인은 이 다리를 헛디뎌 가헤넴에 빠지게 돼 있다. 가헤넴은 아무것도 없는 출구(出口)없는 방이다. 불교의 지옥처럼 밟고 걸아야 하는 바늘(針)산도 없고 살을 익히는 화염도 굶주린 독사떼도 없다. 시지프스처럼 굴려 올려야 할 바위도 없다. 다만 가헤넴에세는 영원히 죽지 못하고 또 영원히 할 일도 없다.
그렇게 책고가 없는 안락한 지옥도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영원히 죽지 못하고 영원히 할 일이 없는 책고라는 것을 사르트르는 갈파하고 이 가헤넴에서 암시를 받아 희곡 '출구 없는 방'을 저술하고 있다.
이 세상의 그 많은 지옥들 가운데 가장 가혹한 지옥이 할 일이 없는 인간상황인 것이다.
도재승(都在承) 서기관이 피랍 21개월 동안 갇혀 있었다는 감방이 바로 이 출구 없는 방이었다. 하루 한 끼 넣어주는 밥을 먹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도록 해놓은 것이다. 아랍인의 지옥인 가헤넴을 지상에 재현해놓은 것이 된다.
그래서 도서기관은 피랍 21개월 동안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로 죽음의 공포보다 이 출구 없는 방에서 할 일이 없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사람이 살아 겪을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시련과 상황을 살아낸 사람이라는 차원에서 또 다른 정동(情動)이 뭉클하다.
옛 우리 생활 속에서 할 일이 없는 여가(餘暇)의 공포를 덜어주고자 일부러 일을 만들어 하던 풍습들이 새삼스러워진다. 이를테면 쌀 방아를 찧어 담을 때 일부러 쌀 한 말 당 탈곡되지 않은 뉘 한줌씩을 주워 담는 관습이 있었다. 밥 짓기 전에 뉘 가리는 일을 함으로써 여가를 소멸하기 위한 지혜였던 것이다. 일하지 않고 먹고 살기를 바라는 통념에 따끔한 교훈이 되는 도서기관의 뼈저린 체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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