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自由)(해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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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自由)(해방)에 대하여
자유의 낱말뜻
1. 히브리어
데도르 - `빨리 움직이다'라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 ; `자유'따라서 유출의 `자연스러움' 그러므로 `깨끗한' ; 자유, 순수한
2. 헬라어
엘류데로오 - `자유롭게 하다'즉(상징적으로)(도덕적으로 의례적으로 혹은 인간적인 책임에서) `면제되 다', 해방하다, 자유롭게 하다.
압해시스 - `자유', (상징적으로) `용서', 구원, 탕감
3. 한자
自由 - 타인에게 구속 받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법률의 범위 안에서 마음대로 하는 말.
자유에 대한 성구
1. 사람이 어디에서 자유를 얻을 것인가?
1) 죄에서 자유
롬6:18 -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6:22 -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이 되고
롬8:2 - 생명의 성령의 법이 사망의 법에서 해방함
롬8:15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않음
2) 율법 의식에서
갈3:13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갈5:1 - 우리로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엡2:15 -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육체로 폐하심
3) 사탄(마귀)에게서 자유
창3:15 -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임
눅10:19 -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심
골1:13 -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심
히2:14 -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함
요일3:8 -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
4) 죽음의 형벌에서
호13:14 -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
사25:8 -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임
고전15:55 -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히2:15 -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를 놓아주심
2. 자유는 누가 주는가
사61:1 - 복음이 자유케 함
요8:32 - 진리가 자유케 함
요8:36 - 그 아들 예수님께서
롬8:2 - 성령께서
고후3:17 - 주의 영이
3. 자유주의와 생활
고전7:22 - 허락된 한도에서
고전8:9 - 약한 자에게 거친 것이 되지 않도록
고전10:29 - 판단을 받지 않도록
갈5:13 -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는 것
벧전2:16 - 하나님의 종과 같이 생활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자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에게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사실과 그 다음은 자유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처럼 만드시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만드셨다. 인간이 공기 없이 한 순간도 살 수 없듯이 자유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자유에는 크게 분류해 보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그것은 정치적 자유이다.
헨리 페트릭은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고 말한바가 있다. 물론 이 자유는 정치적인 자유를 말한다.
이 자유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가. 일제 36년간 얼마나 많은 애국지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피를 흘렸는지.
3.1운동 때만 해도 7천 5백여 명이 죽고 1백 30여만 명이 자유 쟁취에 참가했다.
1956년 10월 폴란드와 헝가리 국민 각각 10여만 명이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수백 대의 탱크를 앞세운 소련군이 무차별 난사를 함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여자들과 13-14세 어린 아이들까지 소련군 탱크에 매달렸다. 그들은
[UN은 무엇을 하느냐. 우리에게 용기를 다오. 우리는 무기도 없다. 다만 피 만이 있다.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그들의 주면 국가들은 모두 다른 공산국가와 접경되어 도망할 길은 오스트리아뿐이었다. 어머니들은 자기 사랑하는 자녀들 가슴에
[우리는 최후 1인까지 남아서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울 터이니 이 아이들을 잘 돌보아 주시오]라는 꼬리표를 붙여 국경까지 보내곤 했다. 참으로 처절한 싸움이었다.
결국 소련 탱크 앞에서 자유의 외침은 침묵당하고 말았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울었다. 그러나 그 피 값은 헛되지 않고 체코와 헝가리는 30년 후 소련종주국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기 시작했다.
참으로 자유란 소중한 것이다. 그러기에 피 흘리며 싸우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신 천하보다 더 소중한 생명을 자유와 맞바꾼 것이다.
둘째로, 종교적 자유가 있다. 종교적 자유는 정치적인 자유 이상으로 소중하다. 성경은 신앙 자유에 대하여 4대 기본 원리를 가르친다.
첫째,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함을 받았다.
인종, 빈부귀천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신 소중한 존재이다.
둘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다.
짐승과는 달리 사람은 불멸의 영과 하나님의 속성인 지혜와 진선미로 거룩한 인격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셋째, 자유를 주셨다.
사람에게 양심을 주셨고 양심위에 자유를 주셨다. 즉, 자유인은 창조함을 받았기에 자유는 사람의 기본 권리이다.
제퍼슨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동시에 자유를 주셨다]고 했다.
넷째, 사람은 평등하게 지음 받았다.
계급(階級)과 귀천(貴賤)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위반된다. 이 지구상에는 같은 동족들 간에도 평등 원리를 위반하므로 계급적 차별로 갈등과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인도에는 4대 계급이 있는데 천민 중에도 불가근, 불가견, 불가촉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병이 나도 의사의 치료를 받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이와 같은 인간에게 기본적인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으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영적인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예수께서 사역 초기에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여 늘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14:18-21)라고 선포 하셨다.
예수님은 6백 년 전의 예언이 자기에게 임하였기 때문에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신적 영적 자유를 주셨다. 그래서 주님은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고 하셨다.
바울은 예수를 전하다가 체포되어 빌립보에 갇혔으나 그의 영은 자유로웠다. 그래서 감사와 찬송하기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했다.
당신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어느 날 장자(莊子)가 활을 메고 사냥을 나갔습니다. 갑자기 이상하게 생긴 까치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날아서 멀리 있는 나뭇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그 모양이 하도 이상해서 그것을 사냥하리라 마음먹은 장자는 까치를 노려보며 조심조심 다가갔습니다.
활을 당기려고 보니까 까치가 무엇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눈길이 닿는 곳을 보니 풀숲 사이에 사마귀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귀는 또 나무 그늘에서 울고 있는 매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사마귀도 까치도 눈앞의 먹이에 정신이 팔려 자기가 죽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한심한 그 미물들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 장자는 그만 활을 거두고 돌아섰습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 사나이가 몽둥이로 자기를 내리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정을 알고 본즉, 까치를 따라가느라 정신없었던 장자가 남의 밭으로 들어가 쑥밭을 만들어 놓았던 탓이었습니다. 결국 사마귀나 까치나 장자 모두 똑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당신의 목전에 놓여있는 탐욕으로부터 자유를 얻지 않는 한 당신은 살았어도 죽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빵과 자유
[빵 없는 자유도 싫지만 자유 없는 빵도 싫다]
2차 대전 이후 폴란드 노동당을 이끌던 고물카의 말이다.
공산주의국가에서 빵이란 말의 의미는 지극히 상징적이고 이념적이다. 그들에게 있어 빵은 바로 그들의 경제 체제이며 그들이 꿈꾸는 유토피아의 내용이다.
부의 균등분배라고 하는 그들의 이상은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당연한 귀결로 노동의 대가는 배급을 통해 보상받게 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굶는 자가 없고 이것은 그들이 내세우는 최대의 자랑거리이며 그들이 말하는 평등사회의 본질이 된다.
그런데 고물카는 빵 속에 자유라고 하는 성분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유가 없는 빵을 배급받는 인간은 한낱 동물적으로 사육 받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흔히 공산국가에는 자유가 없고 자본주의국가에는 평등이 미흡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인류가 자유와 평등을 함께 누릴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으랴만 그렇지 못함은 두 체제의 한계성 때문이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탈 이념적 조류 속에 체제의 선택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최대한으로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의 모색에 기존의 신앙은 변질되어 간다.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이 주로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음은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자유와 평등을 저울질해왔다. 전후 국제화 물결을 타고 그들의 울타리를 넘어온 자유를 통해 그들의 시혜적(施惠的)평등이 인간의 무한적 욕구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자유가 많다.
그들은 데모를 하든, 공부를 하든, 소주를 마시든, 디스코를 추든 마음대로다.
스승을 삭발하는 패륜에서 요즘은 자치학교다 무장봉기다 그야말로 멋대로나.
그들에게 자유란 일상의 공기나 물쯤으로 절실함이 없다. 그들의 눈에는 북쪽의 평등만이 크게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자유를 담보하고 지급받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북쪽에서 보장되는 유일한 자유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는 일임을 우리 학생들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물질에 자유하지 못한 사람
어느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지 못하는 것은 내 것은 어느 놈이 들고서 좋아할 것을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지기 때문이다]고 했는데 자유는 울화통이 아니라 새로운 소유를 향해 달려가게 하고 그것을 인하여 기뻐하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포기하게 합니다.
박약제(博約劑)
퇴계 선생은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큰 그릇이 되라고 건물구조 자체를 공(工)자로 설계해서 지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의실 전관에 '박약제'란 현판을 걸어 두었습니다.
‘박약제'란 말의 뜻은
'박'자는 박사할 때의 박(博)자이고 '약'자는 절약할 때의 약(約)자입니다.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뜻입니다. 이조 5백 년 동안 유교의 예절이 너무 번거로워 백성들의 삶을 위축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퇴계 선생은 지나친 예절의 폐해를 살피시고 후학들에게 학문을 넓히되 예절은 줄이라는. 삶의 큰 길에 대해 바로 가르쳤습니다.
이 '박약제'란 말을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적용하여 봅시다.
학문을 넓히고 예절을 줄이라는 말을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복음'을 넓히고 '율법'을 줄이라는 말입니다.
분명히 복음은 삶을 누리고 자유함을 얻는 정신이어야겠는데, 우리는 옛날 조상들이 예절에 너무 매여 인간성이 억압받았듯이 율법에 매여 즐거운 삶이 제한당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사실 자체는 고통에서 해방된 삶을 누린다는 뜻이며 어느 경우나 매임이 없고 막힘이 없이 당당하고 넓은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복음을 몸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복종이 참 자유
독일의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는 어떤 날 밤 자기 강연에서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야말로 참된 자유라고 외쳤다.
자유
자유는 위대한 기독교적 단어이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계 최고의 해방가로 묘사하고 있다. 그분은 구약의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시면서 이렇게 주장 하셨다.
눅4:18-19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가난한 자와 포로 된 자와 눈먼 자와 눌린 자를 육체적 범주의 것으로 이해하도록 의도하셨든 영적인 범주로 이해하도록 의도하셨든 아니면 그 둘 다이든 간에 그 생애 후기에 가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는 약속을 덧붙이셨다.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은 기독교적 자유의 투사가 되었으며 이렇게 강조하기도 했다.
갈라디아서 5:1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은 바로 최고의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
사람이 배고플 때에는 코가 예민해지지만, 반대로 배가 부르면 후각이 둔해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 정의감에 강하고 무엇에 건 민감하게 반응을 합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야 세상일이 다 그렇고 그런 것이 아니냐며 대범하게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어도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좀처럼 참아 내지를 못합니다. 자유에로의 열망이 아주 강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십시오. 일본 사람들에게 짓눌려 고생을 할 때에 별다른 의식도 없이 일본 사람들 편에 붙어서 적당히 살던 사람들은 해방된 다음에도 해방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조금 어려운 일만 있으면 “그때가 좋았지”하고 일본 사람들에게 눌려 지내던 때를 속도 없이 그리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곧 자유 의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일제 때에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 가운데에도 그런 분이 계십니다. 박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일제 말년에 7년 동안 감옥에서 고생을 했는데, 그분은 자신의 복부에다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아서 한때는 그 사진이 온 세계에 알려질 만큼 유명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이분을 고문하면서 불에 달군 인두로 배를 지졌습니다. 그래서 배가 온통 만신창이가 된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일제 때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매 맞고 감옥에서 고생하던 분들은 해방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고생을 한 사람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해방된 것, 자유 얻은 것이 좋습니다. 모진 고생을 겪을수록 자유의 진가가 더 절실하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참 자유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 생깁니다.
죄로 인해 고통당해 본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의 참 자유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압니다.
자유를 얻은 새
인디안 부락에서 바자회가 열렸다. 모두가 사고 팔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한 농부가 메추라기 한 떼를 가져왔다. 그리고 새마다 발목에 줄을 매었다. 중앙에 막대기를 세운 동그란 쇠에다 모든 줄을 한 끝을 묶었다. 그리고 메추라기들은 원형 안에서 마치 노새들이 당밀 제분소에서 계속 뺑뺑 도는 것 같이 슬프게 계속 돌면서 걷고 있었다.
독실한 브라만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메추라기를 사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모든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는 힌두교 사상를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 조그마한 불쌍한 동물들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그 브라만은 메추라기의 가격을 묻고 그 상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것들을 다 사겠소." 그 상인은 기분이 좋았다. 그가 돈을 받은 후에 그 브라만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랬다.
"자, 이제 그 새들을 다 놓아 주시요." "뭐라고요, 선생님?" "내가 말하지 않았소. 새 발목의 줄을 끊어 그들을 놓아주란 말이요. 그 새들을 모두 자유케 해 주시오." "아, 네. 선생님, 그렇게 하지요. 그것이 선생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요." 그 농부는 칼로 메추라기 다리의 줄을 끊고 그 새들을 풀어주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 메추라기 떼들은 계속적으로 원형에서 돌고 있지 않은가? 결국 그는 새들을 억지로 날려 보내야만 했다. 어느 정도 멀리 떨어진 곳에 앉은 후에도 그 새들은 행진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몸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아직도 묶여 있는 것처럼 원형을 계속 돌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은 이 장면에 나오는 새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죄로부터 자유케 되고, 용서함 받은 하나님의 아들딸들로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지만 자기 자신을 벌레나 메뚜기 같이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의 낮은 자존감은 사단의 치명적인 심리적인 무기이다.
자유와 용서
자유는 용서로부터 시작이 된다.
자유 얻는 방법
의심과 감정이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의 터 위에 굳게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숙녀는 이것을 행하는 매우 실질적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의혹이 떠오를 때면 그녀는 그 의혹에 관해 말해 주는 성경구절을 찾습니다. 그 구절을 종이에 옮겨 적어서 의심이 생겨날 때 그녀는 그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반복해서 자신에게 말합니다. 그녀가 낙심해 있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의 구세주로 맞아 들였을 때 너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고 확신하느냐.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스며들곤 합니다. 그럴 때 그녀는 성경에서 요일5:14―15 구절을 찾았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그녀는 이것을 베껴 쓰고 그 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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