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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예화자료 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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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예화자료 20편



 

부활의 역사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목사가 하루는 새장 속의 새를 괴롭히는 불량

소년을 보았다."새를 어떻게 할래?" 스퍼전이 묻자 소년은 "괴롭히다가

죽일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스펄전은 2파운드를 주고 그 새를 사서 멀리

날려 보냈다. 이틀 후 부활주일. 스펄전은 이렇게 설교했다. "마귀는 인간을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주는 엄청

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요,

부활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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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부활이 있습니다

 

 

 

신혼초기 가난하고 완고한 시집에서 마음고생을 크게 했던 어느 크리스천

미술인의 고백.

이 분은 쥐꼬리만한 남편의 교수 월급으로 시동생들의 학비까지 보태며 살림해야 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는데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출석하는 교회 목회자를 찾아가 상담했다.그날 목회자는 "순교가 따로 있겠습니까. 시집에서 순교하겠다고 생각하고 생활하세요.시집에서 관에 누워 나오겠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죽으면 부활이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이 분은 큰 힘을 얻고 모든 어려움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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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 계란과 예수님의 무덤

 

 

 

 

 

날 때부터 몸이 꼬여진 상태에다 정신 박약아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그는 12살이었지만 아직도 2학년에 속해 있었서 담임 선생 도리스에게는 언제나 큰 부담이 되었다. 더군다나 이 아이는 몸을 뒤틀거나 시끄럽게하여 다른 학생에게 지장을 주며, 학습을 자주 방해하는 것이었다.

도리스 선생은 지미의 부모를 학교로 오라고 하여 이 일을 상의하게 되었다. 도리스 선생은 왜 아이를 특수학교에 전학을 시키지 않는가고 부모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지미의 어머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사무엘의 아버지가 말을 했다.

선생님, 사무엘를 위한 특수학교가 이 근처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미는 이 학교와 친구들을 몹시도 사랑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아이를 먼 곳의 다른 학교로 보내면, 그것은 아이에게 견딜 수 없는 충격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얼마살지 못할 아이를 부모의 심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할수 있기를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느 봄 수업시간의 일이다. 부활절이 가까워 오는 날이었는데, 도리스 선생이 플라스틱으로 된 계란들을 교실로 가지고 들어와서는 19명의 아이들에게 그 플라스틱 계란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그 계란의 중간을 열어 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 플라스틱 계란은 절반으로 잘라지며 열렸고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무엇이든지 생명을 나타내는 것을 그 속에다 넣어가지고 다음날 학교로 가지고 오라고 했다.

이튿날, 학생들이 계란을 모두 선생님의 책상에다 갖다 모아 놓았다. 선생님은 한 개씩 열기를 시작했다. 계란속에는 예쁜 꽃과 물등 갖가지 것들이 하나씩 들어있었는데 한 가지만 텅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무엘것이었다. 선생님은 왜 아무것도 없고 텅빈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왔는가로 했더니,다니엘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무덤이 텅빈 것이라고 했어요!

선생님은 다시 지미에게 물어보았다.

사무엘, 왜 예수님의 무덤이 텅 비었었지?

네 선생님, 나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는데, 예수님의 아버지가 그를 무덤 속에서 살려냈어요!

석달 후에, 사무엘은 하나님 품에 안겼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의 관 위에 나란히 놓여있는 19개의 텅빈 플라스틱 계란들을 바라보며 알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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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서 주일로

 

 

 

 

 

제1차와 2차 유대인 반란 사건 사이에, 회당과 교회는 안식일 예배에 관한 입장의 차이로 더욱 더 멀어지게 되었다. 안식일 논쟁은 교회가 유대교 구조 안에서의 그의 본래의 자리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 시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역사적 예이다. 그러나 추가적으로, 안식일과 그 외의 거의 대부분의 모세의 율법에 대해 기독교가 거부함으로써, 기독교는 이스라엘도 거부했다고 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내보냈다.

비록 초기에는 안식일을 지키긴 했지만 때가 되자 교회는 예수가 부활하신 주일에 예배드리기 시작했다(참조, 마28:1). 그러나 유대인과 기독교인 모두 일요일이 로마인들이 태양신 숭배와 연관하여 거룩히 지키는 날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디옥의 주교 이그나티우스는(Ignatius)는 이러한 변화가 A.D.115년 이전부터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마그네시아인들 (Magnesians)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그들에게 "더 이상 안식일을 위해 살지 말고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나게 된 날, 곧 주님의 날을 위해 살 것"을 말하고 있다. A.D. 120년경에 씌어진 교회 훈련 지침서 디다케(The Didache)또한 기독교인들에게 주님의 날에 예배하기 위해 함께 모일 것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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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인도의 전총리 네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천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도의 종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늪지를 메우고 댐을 건설하도록 자극하지 못했다. 그러나 교회가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칭송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교회는 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해 왔다. 교회가 인간을 자극하고 이끌었던 힘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부활의 역사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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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의 유래

 

 

 

 

 

 

 

 

부활절의 원래 명칭은 히브리어의 `유월절'의 의미인 "파스카(Pascha)" 였다. 주님의 고난과 부활이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과 같은 시기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자연스러운 명칭이었다. 이는 유대인이었던 사도들과 개종자 들이 그들의 옛 절기인 유월절에 대한 새로운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 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부활절을 지켰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6장 6.9절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유월절양"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는 말씀이다. 그런데 북부 유럽에서는 봄에 "이스트르(Eastre)" 축제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시기에 "파스카(Pascha)"를 경축하였다. 그 후 기독교인들은 이 파스카 축제를 "이스터(Easter)"라고 부르게 되었다. 어떤 의미로 `파스카'를 `이스터'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봄, 빛의 영광됨이 의미상 일치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짐작만 있을 뿐이다.

파스카는 거룩한 주간으로 지켜졌다. 부활주일 전 주일은 종려주일로 정하고 주님의 승리의 입성을 기념하여 저녁 때 성도들이 감람산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행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며 `호산나'를 불렀다. 목요일에는 `성만찬'과 금요일에는 `성 금요일'을 생각하여 주님의 고난과 관련된 금식을 하였다. 그러므로 부활절 축제는 부활하신 그 날만의 축제가 아니라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의 고난 주간과 연결되어 맞이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난과 부활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하여야 부활의 기쁨이 보다 크게 체험하는 것이다.

현재 지키고 있는 부활절은 325년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부활의 날"을 정하여 주일에 지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날은 일정하지 않았다. 그 후 제8세기부터 3월 21일(춘분)이나 춘분 이후 만월 후 첫 주일을 지키기로 하였으며 만월이 주일이면 그 다음 주일로 부활의 날을 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원칙에 의해 부활주일은 3월 22일과 4월 25일 사이에 결정되는 것이다. 이 부활주일부터 40일째가 주님의 승천하신 날이요, 50일째가 오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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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계란 그림의 유래

 

 

 

 

 

 

 

부활절 계란을 주고받는 풍습은 유럽에서 십자군전쟁이 일어났을 때 시작

되었다고 한다.

로자린드 부인은 남편이 전쟁에 나간 뒤 나쁜 사람들에 의해 재산을 빼앗

기고 산동네에서 살게 되었으나 동네 사람들의 친절로 생활했다.

부인은 이 친절에 보답하려고 부활절을 즈음해, 예쁘게 색칠한 계란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계란에다 로자린드 집의 가훈인 `하나님의 사랑을 믿자'라는

말을 써 넣었다.

이 계란을 받아든 한 소년이 병든 군인을 보고 잘 간호해 준 다음,

계란을 주었는데 이 군인은 그 계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계란에 씌어 있는 글이 바로 그 군인의 가훈이었고, 그 군인이 바로

로자린드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군인은 수소문 끝에 자신의 부인과 함께 만났다.

그 이후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퍼져 부활절 주일에 색계란이 선물로

나눠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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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달걀의 유래

 

 

 

 

 

옛날 한 곳에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벽에다 "하나님의 보호를 믿으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을 도와주시느니라"라고 가훈을 써붙이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서 남편은 저 멀고 먼 예루살렘에 전쟁을 하러 떠났는데 몇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검은 자들이 부인이 혼자 살고 있는 집을 빼앗았습니다. 마음씨 착한 부인은 싸우지 않고 남편이 돌아올 길목이라고 생각하는 곳으로 이사를 가 거기서 방을 얻어 살았습니다.

 

그 부인의 이름은 '로자린드'였습니다. 로자린드 부인은 날마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어 꼬마 친구가 많았습니다.

부활절이 다가왔습니다. 아이들에게 무슨 선물을 할까 생각하다가 마침 이 동네는 닭이 없으므로 달걀을 무엇보다도 좋아하리라 생각되었습니다.

 

"여러분, 숲속에 들어가 각자 새 집을 지어놓고 그 자리를 잘 봐두고 오세요."

 

상냥한 로자린드가 어린이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어린이들은 그의 말대로 새 집을 하나씩 만들어놓았고, 로자린드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그들에게 먹인 후 그들 몰래 색을 들인 아름다운 달걀을 숲에 있는 새 집에 하나씩 넣고 와서는 말했습니다.

 

"자! 여러분, 이제는 동산에 가서 자기가 만든 새 집에서 무엇인가 찾아보세요."

 

어린이들이 가보니 아름답게 색을 들인 달걀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데 그 중의 한 아이가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다가 지쳐 쓰러진 십자군 패잔병 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그 병정이 불쌍해서 "아저씨 이 달걀을 잡수세요." 하고 주었습니다. 이 십자군 병정은 그 달걀을 받아보고 거기에 자기 집의 가훈인 '하나님의 보호를 믿으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일은 하는 사람을 도와주시느니라'라는 글귀를 발견하고, 이 달걀의 출처를 물어 마침내 자기 아내 로자린드를 찾게 되어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후 계속 로자린드는 색달걀을 아이들에게 나뉘주었습니다. 그후 오늘까지 그 아름다운 풍습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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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뱅이 배추벌레

 

 

 

 

 

 

 

 

게으름뱅이 배추벌레가 여행을 떠났습니다.

누런빛 몸뚱이를 꿈틀꿈틀거리며 아주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긴 여행이라고 하니까 여러분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버스를 타고 가는 것도, 기차를 타고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은 더욱 아닙니다.

 

꿈틀...꿈틀...꿈틀...

마디 마디 이어진 몸뚱이를 움츠렸다 폈다하면서 넓은 신작로를 건너야

하는 여행 길입니다.

가는 곳은 저 길건너 숲속입니다.

오래지 않아 추운 겨울이 오겠기에 나무 위에다 누에집을 지으려는

것이랍니다.

 

하지만 여행 길은 그리 쉽지 않았어요.

조심성 없는 어린이들의 발꿈치, 쉴새없이 오가는 짐차들의 바퀴.

그런 것들에게 밟히거나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되었지만

길건너 예쁘게 피어 있는 노란 들국화를 보니 힘이 솟았어요.

다섯 밤이나 지나서 배추벌레는 겨우 넓은 행길을 다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어요? 5일 전 멀리서 보았던 국화꽃님이

이젠 다 시들어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어요.

"얘, 들국화님이 어디 갔지?"

배추벌레는 울먹이며 종달새에게 물었습니다.

"들국화님은 돌아가셨어요."

"만나보고 싶었는데..."

종달새는 다시 노래하듯 말했어요.

"또 살아날걸 뭐...."

 

하지만 아직 나이 어린 배추벌레는 그 말의 뜻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죽은 게 살아나다니 그럴 수가...'

하는 수 없이 이번엔 푸른 풀밭을 찾아보았어요.

포근한 풀밭은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베추벌레야, 풀님들도 모두 죽었단다. 하지만 다시 살아나겠지."

이번엔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며 속삭였습니다.

 

다시 능금나무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능금나무도 시글어 있었습니다. 그만 눈물이 콱 솟구쳤어요.

"얘야 울지마, 난 다시 살아날 거야."

마지막 능금나무 잎이 땅에 떨어지며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배추벌레는 그 뜻을 알 수가 없었어요. 정말 아무것도...

 

배추벌레는 슬퍼하며 나무 가지 사이에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조그만 누에집입니다.

바람이 차츰 차가와져서 일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어요.

이윽고 새하얗고 둥근 집이 지어졌습니다.

피곤한 몸이 차츰 추워왔습니다.

외롭기도 하였어요.

 

배추벌레는 누에집 속에 들어가 앉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왠지 스르르 눈이 감기면서 몸이 자꾸 얼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저것 봐라 애벌레도 죽었어! 집 속에 들어앉아 죽었어?"

바로 앞을 지나가던 어린이들의 목소리였지만 아주 먼 데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애버레는 "내가 왜 죽어, 이렇게 살아 있는데..."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왠지 그 소리가 나오질 않았어요.

그리곤 자꾸 졸리기만 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하얀 눈을 몰아 왔습니다.

눈이 펑펑 쌓이고 쌓였습니다.

그리곤 긴 겨울이 지나갔습니다.

 

차츰 햇님의 살결이 따뜻해졌습니다.

바람도 부드러워지고 눈도 녹아내렸습니다.

봄이 온 것입니다.

땅이 따스해지니까 땅 속에서 잠자던 씨앗들이 기지개를 폈습니다.

새싹이 귀여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능금나무 가지에도 순이 돋았습니다.

 

애벌레가 들어있는 누에집에서도 안에서 무엇인가

꿈틀 꿈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애벌레가 살아났다! 애벌레가 다시 살아났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속삭이며 지나갔습니다.

 

누에집이 깨지면서 배추벌레가 살아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누렇고 보기 흉한 것이 아니라,

눈부신 날개를 지닌 예쁜 것이 아니겠어요?

금색, 까만색 그리고 빨간 점들...무엇일까요?

네 그래요.

"나비님. 나비님" 종달새가 예쁜 목소리가 불렀습니다.

"난 배추벌레였는데, 왜 날 보고 나비라고 부르지?"

"얘, 이젠 너 벌레가 아니란다. 넌 다시 살아난거야!

자 나비님, 인사 받으세요.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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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벌레와 잠자리

 

 

 

 

 

 

 

 

연못 바닥에 애벌레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연꽃줄기를 타고 물위로 올라간 수많은 자기의 친구들이 함흥차사가 되어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부터 누구든지 일단 물위로 올라간 후에도 반드시 연못 속으로 되돌아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도록 서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연꽃 줄기를 타고 올라와서 물위에 떠있는 연꽃의 넓은 잎사귀 위에 앉아 완전히 탈바꿈을 하여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잠자리로 변했습니다. 그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물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연못 위로 날아다니면서 연못 속에 있는 친구들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비록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발견한다 할지라도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으로 변한 자기가 바로 자기들과 같은 애벌레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죽음도 이와 같은 탈바꿈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비록 세상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또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애벌레와 잠자리 이야기'는 성도의 영적 변화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성령충만을 받아 중생의 감격과 기쁨에 살게 되면 근심하고 염려하고 애벌레같던 옛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의 세계에서 잠자리처럼 훨훨 날며 살게 될 것입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

 

 

"의식(衣食)이 족하여야 예절을 한다"고 맹자는 말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면적인 진리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예절은

의식전에 있읍니다. 그녀는, 자기의 식물을 희생해서라도,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음식물을 준비합니다.

남극탐험에 나선 Robert Falcon Scott 일행은, 음식물에 결핍된 때, L.E.

Grace Oeates 소령의 희생에 의해 구원되었읍니다. 오트 소령은 대원 한

사람이 음식물을 많이 소비하는 것에 의해 전원이 기아사멸 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밤중에 몰래 천막을 빠져 나가 스스로 동사(凍死)했읍니다. 그의

경우, 예절을 알아 대원의 식물을 보급했읍니다. 예절은 식물에 선행했읍니다.

---- 가가와 도요히꼬 전집 13권 39 ----

그리스도

 

석가는 자기가 죽는 때에 "나는 죽으나, 내 가르침은 영원히 남는다"고

했읍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17:23)고 하시고, 그대로 무덤 속에서

살아나셨읍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살아계십니다. 다만 그 교훈이 남는다든가,

그 사업이 계속된다든가 하는 것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살아계시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 국립 제1은행의 창립자인 실업가 시부사와 에이이찌(1840-1931)씨가

구미여향을 마치고 돌아와서 귀국담을 하고 있는 중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최초로 연쇄점을 창시하여 성공한 워너메이커(1838-1922)를

만났을 때입니다. 워너메이커는 열심있는 크리스찬으로, 주일에는 상접을

쉬고서 교회에 출석합니다. 체신장관이 되어달라고 한 때도, "교회학교 교장을

하고 있으므로 주일에는 직무를 수행치 못할 것인데 그래도 좋으면 장관직을

수락하도록 하지요"하고 말했을 정도의 열심가였읍니다. 그런 사람이어서

시부사와씨가 방문한 때도, 교회로 인도해 가서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 이 유명한 일본의 실업가의 이야기를 듣게 하였읍니다.

그때 시부사와씨는 학생들에게 말했읍니다. "학생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데, 동양에도 위대한 성인인 공자가 있읍니다. 그 공자라는 분은..." 하고

이야기를 끝냈는데, 뒤에 워너메이커는 학생들을 향해 "공자는 훌륭한 사람인

것이 틀림없으나, 공자는 죽었읍니다. 그 무덤이 있고 참배하는 사람도

많읍니다. 그러나 예수는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읍니다. 그는 무덤에

계시지 않읍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들의 구주로서 여러분과 함께 계셔

주십니다"라는 뜻의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시부사와시는 미국의 회상으로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이 워너메이커씨가 열심으로 예수는 살아계시다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이야기한 광경이었다고 술회했읍니다.

실로 예수는 살아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2천년전의 예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간구하고, 호소하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

 

복음서 기록에서 우리는 다음 세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1)동일성(identity):

이것이 중심점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장사 지낸바 바로 그

예수다. 2) 연속성(continuity): 예수 께서는 육체적 감각으로 감지될

수 있는 신체의 형태로 부활하셨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바울도 부활의

육체적 성격을 강조한다. 3)비연속성(Discontinuity): 비록 육체적 부활을

하셨지만 그 신체는 이전과 똑같은 신체는 아니다. 그것은 이제 새로운

세력을 소유한 변화된 몸이었던 것이다.(93)

 

예수의 부활이 가지는 종말론적인 성격은 바울이 예수의 부활에서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선언하는데서 더

분명해진다(고전15:20). 첫 열매란 오늘 우리에게 별로 명확한 뜻을

전달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고대 팔레스틴에서는 이것이 전달하는 의미가

매우 생생했을 것이다. 첫 열매는 추수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실제적인 추수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약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곧 풍성한 수확을 하려는 추수의 시작이었던

것이다.(95)

부활ㅇ 첫 열매라 함은 1) 신자들의 부활을 확증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부활은 이제 희망 이상의 한 사건이 된다. 모든 것이 이 사건에 달려있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이 첫 열매라함은 우리의 부활을 확증할뿐만아니라 우리의

부활이 그의 부활과 같은 것임을 가르쳐 준다.(빌3:21, 고후5:4)

부활을 설명한다면

 

 

터어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에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람입니까 ? 죽은 사람입니까 ? "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살아 계신 예수님께 찾아가지 않고

죽어버린 마호멧을 찾아가겠습니까 ?"

그리스도와 모하멧

 

 

해리 리머(Harry Rimmer) 박사가 어느날 회교도인 이집트 정부의 한 고위

관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회교도 관리는 "우리도 그 사실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읍니다. 리머박사는 또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회교관리는

"우리도 그 사실을 믿습니다."라고 했읍니다. 리버박사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책 곧 성경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책 곧 코란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셨다고

믿습니다."하고 대답했읍니다. 리머박사는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관리는" 우리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곧 예언자 모하메드를

통하여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읍니다.

리머박사가 말하기를 우리는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회교 관리는 "우리는 모하메드가

그의 백성을 위하여 죽은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읍니다. 리머박사가

말하기를 우리는 예수님이 죽은자들로부터 스스로 부활하셨기 때분에 모든

그의 말씀이 샐제로 증거하실 수있었다고 믿습니다. "라고 말하자 회교 관리는

"우리는 죽은 이후의 우리 예언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정복하고

무덤을 이기신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입니다.

 

부활

 

 

부활에 반대하는 주장, 즉 부활이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논의를

살펴봅시다.

한 가지 논의는, 4복음서의 부활 기사는 모순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에 나타나셨다고 하고,

누가복음에서는 에루살렘 근처라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과 갈릴리에

나타나셨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반대론을 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무덤에서 말을 전해준 사람들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읍니다. 즉 마가복음에서는 무덤에서 말을 전한 사람은 "한

젊은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읍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젊은이"가 무덤에서 말을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읍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무덤에 있는 사람은 "천사 하나"라고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두 천사"입니다.

이와같은 모순이나, 틀림이 있는 이런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확실히 모순이나 다른 점이 있읍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어떤 드라마에 있어서 표현의 문제이고, 사건의 외관 문제일

뿐이지, 우리 주님의 부활의 중심 내용에 관한 문제라고는 할 수 없읍니다.

현대적인 비유로써 생각해 봅시다. 세 사람이 축구 구경을 갔읍니다.

그런데 세 사람은 전혀 별개의 이갸기를 가지고 집으로 갔읍니다. 한 사람은

갑 팀이 꼭 이겼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을 팀이 꼭

이겼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그 아무개 선수는 매우

지저분한 선수라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 선수가 다만 지나치게

열심히 싸우더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에 의하면, 심판이

훌륭했다고 보는데 반해, 한 사람은 때려 죽여야 한다고 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러가지 생각이나 평가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득점입니다.

사람들은 드라마의 형식을 변경할 수는 있으나, 얻은 점수 만은 변경할 수

없읍니다. 부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보는 관검, 외관,

그것은 변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 부활이라는 사건은 시종 불변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한 젊은이"가, 요한복음에는 "두 젊은이"로 되어 있는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마가복음은 주후 60년경에, 요한복음은 주후 1백년경에 기록되었읍니다.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이야기가 40년간, 이야기 또 이야기되었다고 하면,

도중에 그 이적에 대해서 점점 구체적이 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인간의 본성에 의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자체는 시종 변하지

않았읍니다.

유명한 은행가 제임즈 호프 심프슨경과 수표및 수표의 싸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이런 말을 했읍니다.

"동일한 사람에 의해 싸인되었다고 생각되는 두 장의 수표를 손에 넣고,

이것을 햇볕에 비추어 보고, 받쳐보고서, 전혀 틀림이 없고 1미리도 어긋남이

없을 정도로 두개의 싸인이 일치될 경우면, 그 중의 하나는 위조수표라고

믿어도 틀림없읍니다. 누구도 자기의 이름을 똑같이 두 번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학교의 교사는 두 소년이 똑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을

듣거나, 대학에서 두 학생이 꼭 같은 답안을 제출했을 때는 이것을 진실이

아닌 공모나 합작인 것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이야기란 각각 다른 사람에 의해 이야기될 때, 반드시 틀리게 마련입니다.

그 틀림과 모순이야말로 진리라는 증거입니다.

부활의 이야기가 사람의 창작이었다면, 계산이 조금도 어긋남없게

조화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의향대로 계산을 맞추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자기가 알고 있는대로 그

진실을 전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모순 때문에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읍니다.

---- William Barclay, A New People's Life of Jes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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