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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부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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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부인에 대하여


 


깎임을 원함


우리 주님은 어린 양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것 같이 그의 권리와 명에, 또한 그에게 주어진 인류의 자유를 위해 깎임을 받는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그는 공격을 당하여도 반항하지 않고 우리들 때문에 희롱과 조소를 당하여도 잠잠하셨습니다. 그는 너희들은 결코 나를 이렇게 대우할 수가 없다. “너희는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모르느냐?”하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같은 처지를 당했을 때, 아! 아! 우리는 얼마나 아픔을 당하고 권리를 뺏길 때 반항을 합니까? 우리는 주님을 위해 우리들의 손해를 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 얼마나 명예와 지위에 따라 존경받기 원합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반항했고 싸웠습니다. 우리가 어린 양과 같이 깎임을 당하지 않고 잠잠하지 않기에 성령의 비둘기는 날아 갈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잃고 사랑이 없는 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스텐리 존스목사가 벧기에령 콩고의 미국 선교사집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하루는 그 집의 열여덟 살짜리 소녀가 그에게 와서 "여쭈어 볼 것이 있는데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아주 간단하게 말했다. "애야, 그리스도께서 너를 취하셔야 해." 스텐리 존스 목사는 이것이 요점이고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보충 설명이 요구되는데 그는 '당신'의 포기에로 인도하는 다섯 단계의 절차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가까이 다가가는 단계. 이것이 시험적인 탐구 단계이다. 당신은 자신을 내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기를 원하는지 여부를 확신하지 못한다. 그것은 예와 아니오를 앞에 놓은 단계이다.


둘째,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드리려는 내적 결단을 내리는 단계. 결단의 단계.


셋째, 당신은 결단을 이행한다.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내적인 포기를 한다.


넷째,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줌으로 당신도 이제 자유롭게 그 사람으로부터 취한다. 자아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속하고 그 사람은 당신에게 속한다. 당신들은 하나이다.


다섯째, 마음과 마음, 뜻과 뜻, 존재와 존재의 끊임없는 상호교류와 적응이 계속해서 이루어진다."


 


어떤 목사의 깡패 부고


김익두 목사는 1900년대 초 한국교회를 부흥시킨 위대한 부흥사였다.


본래 그는 깡패였다. 그가 얼마나 행패를 부리고 다녔던지 사람들이 장에 갈 때 제발 김익두와 마주치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성황당에 빌 정도였다. 그러던 그가 신앙을 가진 후 완전히 변했다.


어느 날 사람들은 김익두 목사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받았는데 며칠 후 살아있는 그를 만났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사람들이 묻자 김익두는 말했다.


“과거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저는 주안에서 새로 태어났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


웰츠 남작은 그의 작위와 부동산, 소득의 총액을 포기하고 기아나에 가서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며 지냈다. 그의 작위를 포기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예수께로 다시 태어난 지금 가문이 좋다는 것이 나에게 무엇이냐?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자 할 때 귀족의 작위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냐? 내가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할 때 각하라고 불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이 모든 허영을 버리고 나는 경애하는 예수님 발아래 모든 것들을 바치겠다."


 


죽음의 원리


지금 미국 교계에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고 있는 탐 스키너라는 부흥사가 있습니다. 그는 뉴욕 할렘가의 불량 청소년 갱단 두목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홀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영혼과 삶이 뒤바뀌었으나 그가 변화되었다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옛날의 동료 하나가 탐 스키너를 시험했습니다. 지나가는 탐 스키너의 뺨을 한 대 후려쳤습니다. 탐 스키너가 일어나면서 그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친구여 나는 너를 용서하노라."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둔 사람만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본능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본능은 "복수하라"고 말합니다. 본능은 나에게 보복의 원리를 가르칩니다. 본능은 편리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죄에 대해 자신을 죽은 자로 바라보기 시작한 사람만이, 겸허하게 순종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본능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닌 죽음의 원리에 의해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만 합니다.


 


진정한 자유


어느 목사님을 통해서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한국인의 모습을 풍자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각 나라를 대표하는 열 사람이 배를 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배의 수용 인원은 7명이었습니다. 7명인데 정원을 무시하고 10명이 탄 것입니다. 배가 한참 항해를 계속하다가 물이 스며들어 오고 이 배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세 명을 이 배에서 내려놓지 않으면 이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음의 운명 앞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면서 누가 양보를 해 줄 것인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때 맨 처음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말합니다.


"여러분, 저는 대영제국의 국민입니다. 제가 신사도를 발휘해서 여러분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맨 먼저 다이빙을 해서 물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 다음에 또 누가 뛰어들 것인가를 눈치를 보는데 두 번째 사람이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아메리카에서 왔습니다. 세계 최대 강국의 제가 양보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도 물속에 뛰어 들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외치고 나서 갑자기 옆에 있는 일본 사람을 쥐어박더니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유를 말할 때마다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시켜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아(自我에 대하여)


 


 


나는 누구인가?


오늘날 한없이 고귀한 존재,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부끄러움의 관계 속에서, 죄를 회개하는 관계 속에서만 발견할 수가 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주님이라 부르는 것은 당신이라는 말이다. 3인칭이 아니라 호격이다. 호격이란 사람이 있어야 호격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의 완전한 인간으로서 선다. 사랑하는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을 때 반가움을 느낀다. 이때 나는 상대적이지만 인간의 본 모습이 된다. 그런데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어야만 우리는 참다운 나, 한없이 가치 있는 나가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의 관계 속에 내가 서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가를 회개하는 순간 나의 참 모습을 발견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존재, 그것이 비로소 '나'이다


 


신비한 자존심


어느 날 아침 한 무리의 노예들이 고된 일터로 끌려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지친 모습들이었다. 얼굴을 아예 땅에 처박고 가는 노예가 있는가하면 한편으론 지쳐 쓰러지는 자도 있고 심지어 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된 자도 있었다. 그들의 절망적인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오직 한 젊은 노예는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밝은 얼굴로 당당히 걸어가고 있었다.


이를 궁금히 여긴 주인이 까닭을 물은즉 어느 한 노예의 대답이 그 젊은 노예는 아프리카 왕의 아들로서 그는 자신이 왕자라는 사실을 자나 깨나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때로 환경이 좋지 않다. 학교성적이 좋지 않다. 건강이 좋지 않다면서 의기소침해 한다. 그리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좌절하며, 급기야는 엉뚱한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한번 인식해보라. 일국의 왕자라는 신분에서도 머리를 꼿꼿이 세울 수 있는 노예의 자존심보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만왕의 왕 되신 이의 아들, 딸이 된 우리의 자존심은 더욱 값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인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의 사실인가. 우리의 인생에서 단순히 세상의 금메달을 쟁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를 영원히 보장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참으로 고상한 자존심을 가지는 것이다.


 


온유, 겸손만이 남는다


중국의 유명한 노자는 상창이라는 스승에게서 도를 배웠습니다. 어느 날 상창이 늙어서 죽게 된 것을 안 노자는 스승을 찾아가서 "사부님, 사부님께서 가상을 뜨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십시오"하고 부탁하자, 상창은 얼마 동안 노자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열고는 "내 이빨이 있는냐?" 라고 물었습니다. 노자가 "사부님 혀는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상창은 "자, 이제 알겠느냐?"고 했습니다. 노자는 "사부님 알겠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하고 큰절을 그리고는 물러나왔다고 합니다.


이들이 주고받은 이야기는 간단명료합니다. 그렇다면 노자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 이빨처럼 굳고 강하고 날카로워서 입술과 혀를 물어서 피를 내는 것은 부러지고 깨지고 빠져나가고 없어집니다. 정치권력, 무력, 돈으로 사람을 물어서 피를 내는 강하고 굳고 날카로운 것은 부러지고 빠져나가서 다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혀처럼 바보스럽게 물리고 피가 나는 것은 남아 있게 됩니다.


노자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만이 오랜 남는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쌓았던 탑


미국의 프랭크라는 사람은 자수성가한, 수천만 달러의 재산을 가진 사람입니다. 훌륭한 기업가로서도 자주 소개된 사람입니다. 그는 자선 사업을 하면서 선행도 많이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에서는 기둥 같은 존재였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가 앞장서서 행사를 주관하고 표창장을 수여하고 한 몸에 존경을 받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기 힘으로 쌓았던 탑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무너지는 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기 자기의 노력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활 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인생을 열심히, 부지런히 살면서 그 수입을 가지고 사회에 되돌려주고 좋은 일 많이 하면 되는 것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정에 어려움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외아들이 마약 소지 혐의로 감옥에 갇히게 되고, 딸은 자동차 사고로 불구의 몸이 되었으며, 그의 아내는 바람이 나서 가출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그의 가정이 걷잡을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게 되자 비로소 그는 자기의 집이 무너져 내려가고 있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 인생의 집들이 모두가 모래 위에 지어졌으며, 여호와께서 그 집을 짓지 아니하시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 객관화


쿠오바디스를 쓴 센키에비치의 작품 중에 '검은 바위 속에 비치는 빛'이란 단편소설이 있다. 주인공인 조각가 카미옹카는 자존심이 강하고 스스로 훌륭한 예술가로 여기고 있었다.


어느 날 카미옹카는 쇠약한 몸으로 어둠침침한 작업실의 한 낡은 침대에 누워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때 카미옹카는 신비롭고 놀라운 일을 경험한다. 갑자기 창문 밖으로부터 강한 광채가 휘몰아 들어오더니 작업실을 삽시간에 녹여 버렸다. 그 순간 자신은 허공에 떠 있었다. 카미옹카는 시원한 하늘에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언덕기슭에 한 마을이 보이고 회벽으로 된 낡은 집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집 창가에 누워 있는 한 비참한 인간을 보았다. 입을 쩍 벌린 채 이미 굳어 버린 시체였는데, 그가 바로 자기 자신이란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꿈을 깨고 말았다. 작품의 줄거리는 이것뿐이다.


이 작품이 암시하는 것은 작가가 자신의 실존을 객관화시켜 본 것이라는 데 있다. 역사의 진행 속에 있는 자기의 현실과 자신의 미래의 비참한 모습을 동시에 바라보려 한 것이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남에 대해서는 아주 냉정하게 판단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동정 과잉 상태에 빠져 있다. 그래서 역사의 전개과정과 현실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일쑤이고, '무엇이 옳으냐' 보다는 '무엇이 이로 우냐'에 따라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데 급급함을 보게 된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역사의 오점과 아픔을 남겼는가.


예수는 성경 속에서 이렇게 질책하고 있다. “어찌하여 네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7:3 이제 우리는, 특히 한 나라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분들은 역사 속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와 하는 일에 대한 충분한 '자기 객관화'의 시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


[25]시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은 요한 모리츠라는 사람인데 농사를 지으며 무식하지만 순박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세계 2차 대전이라는 혼란의 물결에 휩쓸려 이유 없이 고생을 하게 되는데 한 때는 유태인으로 오해를 받아 이곳저곳으로 끌려 다니며 고문을 다하고 멸시와 박해를 당했다. 또 한 때는 세계 최고의 월등한 민족의 씨라는 평가를 받는 등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받들려지기도 했다.


여기저기로 끌려 다니던 주인공 마침내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재판관이 "너의 진짜 신분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모리츠는 그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 많은 고생을 했고 타인에 의해 멸시 받기도 하고 칭송을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에 살면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자아


의과대학에 자기를 팔아넘긴 어떤 젊은이의 얘기가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의과대학의 생리학 교실에 가서 자기가 죽으면 생리학의 표본으로 자기를 이용토록 팔아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다 탕진한 다음에, 이번에는 해부학 교실에 가서 심장, 간장, 위장 등 자기의 모든 기관을 실험물로 사용토록 팔았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는데 햇빛에 자기 그림자가 비쳐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청년은 그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나는 이제 다 팔아버렸는데 너는 도대체 누구의 그림자냐?"고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젊은이는 "이중 매매 죄"로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재판장의 형(형)이 언도되자 그는 "재판장님, 이 형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이미 다 팔아버렸기 때문에 나는 내가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


영적인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 마음의 중심 보좌에 예수님이 앉아계시고, 나는 그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떡하든지 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대신 예수님이 점점 내 삶을 점령하시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한참 예수님 잘 믿다가도 가끔 육적인 생각이 날 때 가만히 나 자신을 돌아보면 조금 섭섭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내 주장, 내 권리, 내 생각이 점점 없어지게 되니까 말입니다.


1970년대에 제가 어느 미국 텔레비전의 한 시간짜리 대담 프로에 출연해서 진행자와 여러 가지 대담을 나누었는데, 방송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라는 인간은 어느새 간 곳 없고 그저 '예수님이, 바울이, 이사야가, 창세기에'등으로 일관된 저의 사고영역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올 때는 원대한 꿈을 갖고, 내 주장과 내 아이디어를 멋지게 펼쳐 보이는 위대한 교수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는 간 데가 없고 남은 것이라곤 성경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되려고 미국 왔나'싶어 공연히 억울한(?)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그러나 곧 제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직도 더 죽어야 할 나의 자아, 나의 고집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매순간 나의 생각, 행동, 말을 통제하고 관할하셔서 나를 통해 예수님만을 늘 나타내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자랑에 대하여


 


 


자기 자랑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방아깨비는 유난히 벗겨져 있고 고지새라는 새는 별나게 심술궂은 부리를 지니고 있다. 한편 개미의 허리는 끊어질 듯이 잘록하지 않은가?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이들의 모습을 연관 지어 엮어 낸 전래의 고담 하나가 있다.


한 여름 내내 일만 하고 있는 개미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동물이 있다. 방아깨비와 물가에서 물고기 잡아먹고 사는 고지새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개미를 꼬드겨 여름철의 낭만을 함께 즐겨보자고 유혹한다.


남의 호의를 너무 무시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닌 것 같아 개미가 흔쾌히 승낙 하고 함께 즐길 요량으로 신나게 물가로 달려갔다.


경망스러운 방아깨비가 선뜻 나서며 자기가 우선 솜씨를 보여 고기 한 마리를 멋있게 잡아오겠노라고 큰소리치더니 첨벙 물속으로 뛰어 든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큼직한 메기가 입을 벌려 삼켜버리는 것이 아닌가?


친구가 순간적으로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으니 남아있는 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개미는 발만 구르고 안타까워하는데 고지새는 메기를 찾아 천방지축 날뛰더니 마침내 놈을 찾은 모양이다.


잽사개 물속으로 뛰어들어 순간적으로 메기를 물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시간을 지체하면 친구가 죽는다.


고지새는 급히 그 예리한 부리로 메기의 배를 갈라 방아깨비를 구출한다. 여부없이 요나 신세가 된 방아깨비는 메기 뱃속에서 나오면서 어깨를 으쓱하더니


“야, 내가 잡은 물고기 좀 봐 크지? 이 녀석 잡느라고 놈의 뱃속에 들어가 땀을 꽤나 흘렸지”라고 말한다.


친구를 구하기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던 고지새는 너무 어이가 없다.


[은혜를 베풀 적엔 그 은혜를 구하지 말라]는 식의 교훈은 아예 들어 본 적이 없는 고지새가 아니던가? 메기를 제가 잡았노라고 기고만장한 상대를 보고 어찌 그 입이 튀어나오지 않겠는가?


터무니없는 자랑을 계속하는 방아깨비의 행동과 묘한 앙상블을 이루는 고지새의 입술이 어찌나 우스운지 개미는 웃고 또 웃다가 허리가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어울러 고지새의 튀어나온 부리는 그대로 굳어 버렸는데 하나님은 남의 공을 제 것이라고 설치는 공짜 근성의 얌체 방아깨비가 하도 얄미워서 그 이마를 홀랑 벗겨 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자랑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참된 자랑


자랑이 전혀 없는 사람은 자기의 삶이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자랑은 곧 자기 긍정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랑에도 참된 자랑이 있고 헛된 자랑이 있다.


참된 자랑은 삶에 유익을 주고 헛된 자랑은 삶을 해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옛날을 자랑하는 노인, 고국에 있는 황금송아지를 자랑하는 교포, 내일은 자기에게 영광의 날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 자랑하고 있는데 웬일인지 현재 남달리 초라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


잘난 용모를 자랑하고, 미끈한 육체를 자랑하며 호화로운 액세서리, 값비싼 외제 승용차를 자랑하는 사람, 남보다 좀 더 많이 안다고 그 사실을 온 천하에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자랑은 다 잘못된 자랑이다. 실상이 아닌 허상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참된 자랑, 참으로 유익한 자랑이 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못남을 자랑하고 자기의 악함을 자랑하며 자기의 연약함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들이 현재의 자기 삶에 완벽한 행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랑거리가 많았던 사람이다. 훌륭한 가문, 명석한 두뇌, 최고의 학벌, 도덕적인 삶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 진리를 알고 그것을 믿은 다음부터는 지난 날 자랑거리로 여기던 그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오히려 그것을 분토와 같이 부끄럽게 여기면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6:14)고 고백하고 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자기라고 생각하고 살던 하상의 자기를 파괴해 버리고 대신 자기 내면에 형성된 그리스도의 인격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요 허황된 삶을 살던 과거의 자기를 부인하고 참된 진리로 형성된 지금의 자기를 통하여 형언하기 어려운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의미 있는 삶을 가능케 해 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을 뜻한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자기 자랑이 없는 법이다. 꿀에 취한 나비처럼 복되고 보람된 현재의 삶을 음미하느라 전혀 다른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하여


 


 


대립된 현실


현대는 매스컴 시대이며 데모 시대입니다. 각자가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외쳐도 한 사람의 힘 같은 것은 사회나 역사에는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도오꼬오에서 열렸던 빌리 그래함 국제대회의 마지막 집회 일에는 고오라꾸엔 스타디움에 4만 명이 몰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로 그 날 옆의 경마장에서는 그 해 최후의 대 경마가 행해져 역시 몇 만이라는 사람이 모였었는데 나중에 경찰과 소방서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마장은 쓰레기가 산더미, 고오라꾸엔 스테디움엔 먼지 하나 없었다. 두 부류의 군중이 이렇게 판이함에 놀랐다."


그릇된 군중은 확실히 무서운 파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군중이 모였어도 그저 모였다는 것만으로 깨끗하고, 사랑에 충만 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도와서 전진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깨끗한 마음이 한 데 모여야 비로소 깨끗한 힘이 되며 사랑의 마음이 모여야 비로소 사랑의 힘이 됩니다.


 


오소리와 두견새


코뿔소는 시력이 대단히 나쁘다. 그러나 이 동물의 거친 살갗에 몰려드는 새들이 있다.


이 새들은 코뿔소의 등 위에서 곤충들을 잡아먹는 대신 그들의 민감한 감지력으로 코뿔소에게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레이틀이라는 오소리의 일종과 두견새는 모두 꿀을 좋아한다. 그래서 둘은 같이 행동한다.


아주 좋은 시력을 가진 두견새는 꿀이 있는 벌집을 잘 찾아내고 레이틀의 강한 발톱은 벌집을 파헤쳐 같이 꿀을 나누어 먹는다. 서로 도우며 공생하는 것이 자연의 질서인데 이 질서가 이기주의에 의해 파괴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공멸을 의미한다.


 


자연을 사랑했던


일에 쫓기는 세상 사람들은 좋은 취미를 즐길 시간을 찾고자 합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우표를 모았으며 아이젠하위 대통령은 골프를 늘 쳤습니다. 솔로몬 왕은 바쁜 생활 속에서도 자연을 사랑했습니다.


어떤 역사가들은 솔로몬 왕이 아름다운 육계피 나무가 가득한 정원을 가졌었다고 말합니다. 이 귀중한 나무들의 껍질을 쪼개는 솔로몬 왕의 모습을 쉽게 그려 볼 수 있습니다. 그 껍질은 후에 여인에게 바치는 향료를 만드는데 사용되곤 하였습니다.


왕은 때때로 일개미가 곡식을 모으는 광경을 몇 시간 동안이나 바라보곤 했습니다. 후에 그는 잠언에서 이 개미가 훌륭한 일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서운 얼룩 구렁이에 대하여 연구하고는 그 물린 상처에 있는 독을 없애는 약을 개발하려고 시도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그가 엎드려서 진흙 속에 있는 작은 생물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까?


솔로몬은 타조가 그의 머리를 비비는 광경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타조가 모래에 자기의 머리를 처박지 않을지라도 그에게는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많아 세상에서 가장 우둔한 동물이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타조는 빨리 달릴 수 있으나 바람을 거슬려서 달리기 때문에 적이 쉽게 따라와서 타조를 죽일 수 있습니다. 타조는 알을 모래 속에 묻지마는 모래 속 깊이 묻지 않고 다 보이게 묻으므로 쉽게 도둑을 맞습니다. 또 만약 위험이 닥치게 되면 타조는 새끼나 알을 버려두고 도망을 칠 것입니다. 타조의 깃털로는 아주 아름답고 예쁜 부채를 만듭니다.


솔로몬은 자연을 관찰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정원을 만들고 거기에 아름다운 공작새와 같은 희귀한 동물과 나무들을 길렀습니다. 자연을 연구하므로 솔로몬은 사람과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자연에서 배운 많은 것들을 잠언으로 기록하거나 왕궁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후에 바울은 "창세기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롬1:20)라고 말했습니다.


 


자연의 질서


독일의 담스타트라는 곳에 슐링크라는 분이 개설한 신교 수도원이 있습니다. 그는 철학박사이며 심리학 박사로서 이 수도원을 운영하는데 직접 농사를 지어가며 약 200명의 식구들을 자급자족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농약을 많이 쓰며 지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기를 "너희들만 먹고 살려고 하느냐, 새도 먹고 벌레도 먹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아무리 어려워도 농약을 전혀 쓰지 않고 그대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벌레가 많이 끼어도 내버려두니 자연히 새들이 모여들고 새들이 모이니 농사가 잘되고 공기는 맑아지며 결과적으로는 공해 없는 좋은 농사가 되어 200명이 건강하게 잘 사는 수도원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다 하나님은 보너스까지 주셨습니다.


그 땅은 원래 메마른 곳으로 버려둔 땅인데 농장 한가운데서 샘이 솟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샘을 기적의 샘이라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갈 정도입니다. 사람들의 근시안적인 식견으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면 오히려 더 크게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믿는다면 먹을 것도 겸하여 주셨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밀림지대인 아프리카의 나무들은 사람들이 마구 잘라내어 아프리카 밀림의 1/3이 모두 사막화가 되고 말았다니,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목숨을 내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목숨을 보존하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자비에 대하여


 


 


진정한 섬김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자비와 긍휼을 추구해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성도의 마음속에 자비가 없어 사나우며, 용서함이 없어 언제나 남을 비평하고 정죄한다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끝없이 자비하셔서 우리를 불쌍히 여 기시고 끝없이 긍휼하셔서 우리를 언제나 용서하십니다.


인간은 죄를 짓고 불의하며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하나님의 무궁하신 사랑과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받은 인간은 이웃과 사회에서 이 하나님의 성품을 실천해 용서해 주고 자비를 베풀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이기적인 욕심에 불과합니다. 희생과 헌신을 갖고 부모와 남편과 아내와 자녀와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이것이 진정한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희생과 헌신 없이는 하나님과 대화 할 수 없고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자신감에 대하여


 


 


자신감을 키우는 5단계 비법


1. 자기가 성취한 것을 소중히 여겨라.


실패한 것에만 매달려 자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놈이라고 주저앉지 말라. 당신의 역사 가운데 실패한 것만 있는가? 성공한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성공 한 것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져라.


2. 일상생활에서 작은 목표를 세우고 실천해 나가라


단기적인 목표가 좋은데 구체적이고 단순한 것이어야 한다. 가령 매일 30분씩 운동을 한다거나 하루 한 시간씩 독서를 한다거나 음식을 먹고서 아내에게 ‘참 맛있다. 잘 먹었다.’고 칭찬의 말을 잊지 않는다거나 하는 목표를 세워보라. 일단 그 목표가 달성되면 목표를 달성한 것을 보람 있게 여겨라.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3. 일상 업무에서도 목표를 세워라


둘째단계를 성공적으로 해낸 경험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업무에서도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이 역시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자기 처지와는 동떨어진 목표, 실현 가능성이 없는 목표를 세워놓고 그것이 잘 안된다고 자학하는 것이 자신 없는 사람들이 하는 방법이다. 외판원이면 한 달 동안 매상을 5% 올린다거나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불량품을 과거보다 50% 줄인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라.


4. 목표달성을 위한 계획을 짜라


1) 목표달성을 위해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라


2) 목표를 달성하는 몇 가지 방법을 검토하고 성공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법을 선정하라.


3)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단계별로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 계획을 세워라.


4) 예상되는 어려움이 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세워라.


5) 일단 계획이 서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신중히 검토하고 그 계획이 현명한 것임을 확인하라. 자신이 생길 것이다.


5.일을 시작하라. 이렇게 목표를 세워두고 일을 계획하고 실천해 나가면 망설임도 없을 것이고 자신감이 점차 생길 것이다. 한 가지 목표가 달성되면 그 성취를 대견하고 기쁘게 여기는 버릇을 가져야한다. 그리고 다음의 목표를 세우고 계획하고 실천해 가라.


자기의 능력이 정말 모자라서 자신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기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마음의 자세가 문제이다. 자기를 형편없다고 보면 정말로 형편없게 된다. 자기 능력을 올바로 보고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그 인생은 자기 능력을 100% 발휘하면서 사는 멋진 인생이 될 것이다.


 


 


 


 


 


 


 


 


자족에 대하여


 


 


 


은혜 받은 자의 자족


크로스비(Fanny J.Crosby)라는 여자는 앞못보는 소경으로서 9,000여 편에 달하는 찬송시를 쓴 사람입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등 은혜로운 찬송시를 많이 쓴 사람으로서 식모의 부찰로 소경이 되었으나 어려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를 듣고 영의 눈이 열려서 기도하는 중에 신령한 노래를 많이 썼습니다.


그는 아홉 살 때 기도하기를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시력을 허락해 주신다 해도, 나는 안 받으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밝은 눈을 주실 터인데, 세상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눈으로 우리 주님의 얼굴을 보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내 눈을 멀게 한 그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그에 한없는 감사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은 불평, 원망 대신에 감사와 자족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자족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시각 장애로 고생해 왔는데 이로 인해 좌절도 많이 했고 또 한쪽 귀가 전혀 들리지 않아 곤란을 겪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게 있는 신체적인 결함들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어느 날 나는 내 방 거울 앞에 서서 내 몸을 비춰 보며 누가 봐도 "특이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부위들을 일곱 군데나 찾아냈습니다. 그것들은 예전부터 나를 괴롭히며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곤 했습니다. 그날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으며 또한 이와 같은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가 제게 넘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이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나는 그것들에도 자족하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나도 이 놀라운 원리를 언제나 적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진리이며 또 언제 어느 때나 통용될 수 있습니다. 자족의 비결은 이것입니다. 곧 날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살아가며, 또 어떠한 형편에든지 성령을 통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하늘에 속한 능력을 힘입어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인정함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족의 비결


제리 브릿지즈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시각 장애로 고생해 왔는데, 이로 인해 좌절도 많이 했고, 또 한쪽 귀가 전혀 들리지 않아 곤란을 겪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게 있는 신체적인 결함들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어느 날 나는 내방 거울 앞에 서서 내 몸을 비춰 보며 누가 봐도 '특이하고' 밖에 볼 수 없는 부위들을 일곱 군데나 찾아냈습니다.


그것들은 예전부터 나를 괴롭히며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곤 했습니다.


그 날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으며, 또한 이와 같은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가 제게 넘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이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나는 그것들에도 자족하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나도 이 놀라운 원리를 언제나 적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진리이며 또 언제 어디서나 통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족의 비결은 이것입니다. 곧 날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살아가며, 또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성령을 통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하늘에 속한 능력을 힘입어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인정함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족의 정신


자족의 생활은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현실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므로 인해 우울증에 빠져 고민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베아트릭스 여왕이 되는 기쁜 날, 암스베르크 공은 우울증에 걸려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아내가 여왕이 되자, 남편인 암스베르크 공은 어깨가 축 늘어지고, 발을 질질 끌면서 침을 흘리는 괴상한 증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결국 정신병원에 갇혀, 자살 방지의 치료를 받으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자기가 처한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족의 정신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정신병자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삶의 성공과 실패는 빈부나 귀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처지에서라도 자족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이며 승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어진 환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포자기에 대하여


 


 


 


구소련에서 있었던 이야기 하나.


철도국에서 일하는 한 직원이 냉장고 화차 속으로 들어간 후 그만 실수로 밖의 문이 잠겨 냉장고 화차 안에 갇히고 말았다. 그런데 이 냉장고 화차는 고장이 나 있었다. 작동이 안 돼 공기도 충분했고, 온도도 섭씨 13도의 알맞은 체감온도였다. 그러나 몇 시간 후 다른 직원이 이 사람을 찾다 찾다 냉장고 화차의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죽을 만한 환경이 아니었는데 왜 죽었을까?


사람들은 그 사람(죽은 직원)이 고장 난 냉장고 벽에 남긴 글을 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점점 몸이 차가와진다. 나는 점차 몸이 얼어옴을 느낀다..........아마 이것이 마지막일는지 모른다....." 자포자기와 절망이 그를 죽인 것이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버리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다.


어느 교회 젊은 집사님이 담배를 끊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집사라는 사람이 담배도 끊지를 못한대서야 체면이 서질 않는다고 생각한 끝에 고심하다가 금년 여름휴가를 기해 보따리를 꾸려가지고 철원에 있는 모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자기 생각엔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하고 담배를 끊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가도 이틀이 가도 남들 다 받았다고 날뛰는 성령도 못 받고 담배는 여전히 피고 싶어서 숲속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 담배를 피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피우긴 하면서도 자신의 모습이 그토록 처량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왕에 결심하고 올라온 걸음이니 도중에 내려갈 수도 없고 해서 다시 도전하기로 하고 기도 중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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