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TOP
DOWN


하나님에 대한 예화 모음

본문

하나님에 대한 예화 모음

 


 


        

 

철학의 하나님

 

   1654년 11월23일. 세계 철학사에 한 획을 그었던 31세의 천재가 오랜 방황

을 끝내고 하나님을 찾았다. 바로 "팡세"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파스칼. 그

로부터 6년 후 파스칼은 "사유의 대상인 하나님"이 아닌 "구원의 하나님"을 생활 속에 체험하는 가운데 삶을 마쳤다.팡세가 죽은 다음 사람들은 그의 옷자락에 봉합되어 있는 "문서"를 발견했다.거기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지 철학대상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서두르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을 자기 아들의 모습으로

빚어내시는 끈기있는 공예가이십니다. 그분은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읍니다. 그 분은  완성품을 즐길 시간이 영원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과 저도 순간적인 방법을 버리고 긴 시간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자세로 돌아서야 하겠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움과 불안감을 모르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 완벽하게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기꺼이 도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조금만 기다리면 주실 그 분의 격려는 생각지도 않고 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만 바라본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

 

 

   한 이교도가 어거스틴에게 자기가 섬기는 작은 나무 우상을 보이며 질문하였다. "나의 신은 여기에 있는데 당신의 신은 어디에 있소?" 어거스틴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하나님은 보일 수 없소.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오." 유명한 설교가인 존 허프먼 목사는 프린스턴 신학교를 나와 12년 동안 목회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목사직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할 만큼 좌절하고 자신감을 잃었다. 그는 모교에서 실시하는 목사 연수 교육에 참가했다. 그곳에서 존경하던 노교수 로버트 윌슨 박사를 만났다. 제자의 상담을 받은 노교수는 "자네는 12년간 작은 하나님을 믿었군. 큰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게"하고 충고했다. 노교수의 표현인 "작은 하나님을 믿는 자"와 "큰 하나님을 믿는 자"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작은 하나님을 믿는 자란 나의 지식과 나의 요구에 하나님을 맞추어 하나님을 나 정도로 작게 만드는 신자이다. 큰 하나님을 믿는 자란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과의 계약

 


   `언약'(covenant), `계약'(contract), `조약'(agreement) 등을로 번역되는 헬라어에는 두 가지가 있다. `디아데케'(δαθηκη<diatheke> 신약에 33회 나옴. 주로 히브리서에서 사용)와 `신데케'가 바로 그것들이다. 그러나 신약 성서는 `디아데케'만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두 단어가 갖는 미묘한 차이 때문이다.

 


   이 두 단어는 우리말로 `언약', `계약'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디아데케' 만이 계약 당사자 중 한편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시작하고 조건을 정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디아데케'는 `유서' 또는 `서약'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재산을 물려 주는 사람이 언약을 결정하고 조건과 상속량을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데케'는 변론과 양보와 타협을 통하여 양쪽의 적정선을 찾는 계약이다.

   그러나 `디아데케'는 단지 한쪽만이 조건과 책임을 갖는 것이다. 이는 성서의 뜻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흥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이나 사람에게 제일 좋은 것만을 정하여 놓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장부 정리에 치밀한 장사꾼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값싼 흥정을 통하여 초자연적인 이익을 구해서 하나님을 영리한 간교로 속이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방적 계약을 의해 그의 자녀가 되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자녀된 권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유산을 허랑방탕하게 써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경륜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하나님의 권위가 인간들의 영리한 꾀로 인하여 빼앗기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의지로 이루어지고 그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로 확실하게 된 은혜의 언약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의 죽음은 새 언약의 확실성을 보증하는 보험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이 같은 계약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반역할 것인가를 결단하는 것이 계약 당사자로서의 우리의 몫일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

      내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한다.

   이것이 언제나 최선이라는 것-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없이도 지낼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

 


   나는 내가 꼭 원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구했다.

   급한 마음으로 그것도 아주 완강하게.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구한 것을 주시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 없이도 지낼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방법을 사랑하게 되었다.

   두려움은 멀리 사라져 갔다.

   내가 가장 원하던 소원은 들어주시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것 없이도 지낼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

 


   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기 원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 나는 그 뜻 안에 거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최선임을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구한 것을 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없이 지낼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을 보고자 한 왕


   하나님을 보길 원하는 어떤 왕이 모든 현인들과 사제들을 위협했습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하는 자에게는 무거운 형벌을 내리겠다고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포기해 버렸을 때 왕에게 어떤 목동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왕을 궁전 밖의 정원으로 모시고 나갔습니다. 정원에서 목동은 태양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태양을 좀 보십시오." 왕은 고개를 올렸다가 금방 내리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서 햇빛을 가리며 소리쳤습니다. "지금 내 눈을 멀게 하려고 하느냐?"

   그러자 목동은 말했습니다. "임금님, 저 태양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저 태양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희미하게 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 태양도 바라보실 수 없으시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직 만든자만이 잘 안다

 

 

 

   헨리 포드가 경영하고 있는 공장의 발전기가 고장이 나서 공장의 가동이 중지되었습니다. 수리공들을 다 불러댔지만 고장난 발전기는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공장의 손해가 커지자 사장인 헨리 포드는 이 발전기를 제작하여 설치한 유명한 촬리 스타인메츠를 초빙했습니다. 스타인메츠는 몇 시간 동안 이리보고 저리보며 가끔 모타를 여기 저기 두들리고는 스위치를 올리자 요지부동처럼 보였던 그 발전기는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힘차게 돌다가 공장이 다시 정상가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며칠후 무려 만 달러나 되는 청구서를 받고 놀란 헨리 포드 사장은 "촬리, 이 청구서의 금액은 당신이 그 모터를 두들기며 몇 시간 일한 것에 비해 너무 비싼 금액이 아닌가. 명세서를 보내 주게"라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하여 만 달러짜리 청구서를 돌려보냈습니다.

 


   다시 며칠이 지난 후 촬리 스타인메츠로부터 "모터를 두들기며 일한 공임:10달러, 어디를 두들겨야 할지를 알아낸 것:9.990달러, 합계: 10,000달러"라고 쓴 쪽지와 함께 만 달러짜리 청구서가 날라왔고, 이를 본 헨리 포드는 머리를 끄덕이며 그 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합니다.

 


   발전기를 만든 촬리 스타인메츠만큼 그 발전기를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잘 모르는 사람이 망치를 가지고 100년을 두드린다 해도 고장난 발전기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점점 더 고장이 심해질지도 모릅니다.

 

 

 

 


스위치를 누르세요

 

 

 

   전기가 지극히 가까운 곳까지 접근해 와있지만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어둠은 물러가지 않고 불빛은 밝혀지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도 이와같이 항상 우리의 생활을 감싸고 있다. 그러나 ꡐ주여!ꡑ하고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기도가 없을 때에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작은 막이 생겨서 어려운 현실에 접하게 된다. 만일 어두운 방에 앉아서 스위치를 누를 생각을 하지 않고 어둡다고 불평하고, 나에게만 이 어두움이 유독히 기습한다고 실의에 빠져 남을 원망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하면, 얼마나 우매한 일이 되겠는가. 전기는 아주 가까운 데까지 미쳤고 스위치만 누르면 빛이 방안에 가득히 비치도록 구조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을 운명으로 체념해버리는 것은 그 자신에게 원인이 있다.

 


   전기가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듯이,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은 지금도 풍성히 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능력을 내 생활 속에 영향력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기도ꡑ라고 하는 스위치를 눌러야 하는 것이다. 기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문을 열게 되고, 기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내 생활 속에 이끌어 오게 되며, 기도만이 우리 삶의 허다한 문제를 하나님의 소관으로 넘겨드릴

수 있는 방법이 되기  때문에,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서 전기의 스위치를

누르듯이 우리 생활 속에 광명이 있게 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

 

 

 

 

 

 

 

 

 

깨어진 육의 사람

 

 

 

   우리가 세상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건은 금이 가거나 깨어지면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하 하늘 나라에서는 오직 깨어진 사람만이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복주시기 원하시거나 귀하게 사용하기로 작정하시면 반드시 그 사람을 깨뜨리십니다. 인간에게 그것은 참혹한 역경이나 그 역경을 통해 비로소 하늘 나라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내 동창 중에 사업가가 있는데 내가 몇 번씩 전도해도 "이 세상에서 능력대로 살다 죽으면 그뿐이지 무슨 기독교 신앙이야? 기독교 신앙은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사람이나 갖는 것이지 나같은 사람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말하며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 이 친구가 갑자기 교회에 다닌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만나 어떻게 교회에 다니게 되었느냐고 물으니까 불치병에 걸려 절망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는 줄 병에 걸려서야 알게 되었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분이야"라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그냥 깨어지지 않습니다.  위기와 역경을 당해야 비로소 자기가 깨어져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의 사람이 깨어질 때 비로소 영의 사람이 장성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

 


  세상에는 사람에게 이로운 곤충이 있지만 해로운 곤충도 있다.

뇌염, 콜레라, 말라리아등 병을 옮기고 피를 빨아먹는 모기, 파리, 벼룩 등이 그들이다.  하나님은 왜 이들을 만들었을까? 파리는 새들에게 좋은 먹이이다. 또한 자연계 부패물을 먹어치우며 청소를 하는 청소부이다.

 


  발로 모긴이 쓴 `무탄드'라는 책을 보면 원주민들이 사는 오지의 덤불 속에서는 수 백만 마리의 파리떼가 일시에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입과 귀, 코 속으로 들어가 청소를 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 원주민들은 파리에게 몸을 맡긴체 몸청소를 한다.  이들은 파리가 귀찮은 곤충이 아니라 반갑고 친근한 존재인 것이다.

 


  모기와 벼룩도 사람의 피를 무척 좋아한다.사람들은 모기와 벼룩을 퇴치하기 위해서 약을 뿌리고 모기장을 치기도 한다. 이 모기장은 찬 공기를 차단하여 사람들을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한다. 벼룩 또한 사람들은 싫어하지만 어린이들을 물어서 비만에 걸리지 않게 해준다고 한다.

 


  세상 모든 동물들은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심지어 파리, 모기, 벼룩등 하찮은 곤충들도 사람들에게 꼭 필요해서 만드셨다.

 

 

 

하나님의 자녀 

 


   프레드크래독은 그의 아내와 함께 며칠 간의 휴가를 얻어 산에서 보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루는 그들 부부가 한 작은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는데 마침 한 사람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인사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은 크래독 부부가 앉은 테이블에 까지 오게 되었고, 프레드가 목사님이란 것을 알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사람은 그 동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 너머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때, 그의 어머니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리 그의 어머니에게 하는 비난을 자신도 들으며 자라야 했다.  그의 학교 친구들 은 그들의 부모들이 이들 모자에 대해 비난하는 것을 듣고는 따라하기 시작 했고 그는 결국 학교에서도 외톨이가 되었다.  점심 때도 혼자였고, 소풍을 갈 때도 늘 혼자 걷곤 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견디기에 너무도 지쳐있었다.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의 어머니와 함께 마음에 내려가 장을 볼 때에 사람들이 이 두사람을 복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저 아이의 아버지가 도대체 누구지?"하며 조롱거리며 묻는 말이었다.

   그가 열두살이 되었을 때 그 마을에 새로운 목사님이 오시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목사님의 설교가 뛰어나다고 말을 하기 시작했고, 이 소년도 그의 설교를 듣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소년은 실제로 그 목사님의 설교에 감동되었고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 소년은 예배당에 들어갈 때에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조금 늦게 몰래 들어갔다가 말씀만 듣고 슬그머니 빠져나오곤 했다.

   그러면 어느 주일날, 그가 예배를 마치고 이전과는 달리 조금 늦게 예배당을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얘야 넌 누구니? 네 아버님이 어느 분이시지?"

돌아보니 목사님이 서 계셨다.  소년은 멈칫 하고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목사님은 계속 말씀하시기를 "잠깐만, 네 얼굴을 보니 너를 닮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겠구나. 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지?"

   이 소년은 나중에 테네시주의 주지사로 두번이나 당선된 벤 후퍼였다.  그는 크래독 목사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목사님 하신 그 한 마디가 저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벤 후퍼에게 했던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말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 있다.

 


하루가 천년같아

 


   성경에 보면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 성도가 이 귀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는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는 천년도 하루와 같습니다. 아니 천년이 일분도 되지 않으실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오니 아버지 1만원만 주시옵소서!"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사랑하는 아들아! 네 기도를 들어줄테니 1분만 기다려라!"

 


모든 것을 아시는 분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교회에서 여름 수련회를 갔었는데 우리가 거처했던 수양관은 마루가 깔려 있고 사면에 여러 개의 유리창이 있는 창고 같은 건물이었습니다. 여장을 풀자마자 우리 옆 수양관에 맹인학교의 학생들이 단체로 왔고 우리는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우리 수양관 쪽을 향해 서있던 한 여학생이 옷을 갈아 입으려 하다가 밖에서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었음인지 일어나 창문을 닫고는 옷을 갈아입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유리창은 투명한 유리창이었기에 그 문은 닫혔어도 그대로 안이 보인다는 것을 그 맹인 소녀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때는 그 일을 보며 깔깔거리고 웃었지만 그 후로는 그때의 생각이 늘 나의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않았습니다. 그때 그 맹인 소녀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며  또 우리 모두의 모습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비록 육신적인 소경은 아니지만, 그 맹인 소녀가 유리창의 투명함을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영적인 세계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관념까지도 다 아는 신령한 세계가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은폐하려고 하며 단정지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게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며 나의 모든 언행심사를 감찰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식인종들에게 선교하셨던 분들 중에 아셀트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선교 활동을 하는 중에 식인종들이 여러 번 아셀트 선교사를 끌고 가서 잡아먹으려고 아셀트 선교사 집을 밤에 침입했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찾아갈 때마다 대문 앞에서 창칼을 들고  지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낮에는 아무도 없는데,  밤에 와서 끌고가 잡아먹으려 하면 그 사람이 창칼을 들고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떨다가 그냥 가고 또 그 다음 번에도  왔다가 그냥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식인종들이 아셀트 선교사를  낮에 찾아갔습니다. ꡒ낮에 가보면 없는데. 이상하게 밤에 가보면 누군가가 칼과 창을 들고 너를 지키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구냐.ꡓ 식인종들의 물음에 아셀트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ꡒ우리집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다.ꡓ그러자 식인종들은 ꡒ거짓말 마라, 한두 번이 아니고  우리가 너를 끌어다 잡아먹으려고 여러 차례 왔는데도 밤만 되면 창칼을 들고 지키는 자가 있어서 무서워서 너한테 갈 수가 없었다ꡓ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아셀트 선교사에게는 퍼뜩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ꡒ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했던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옵소서.ꡓ 아셀트 선교사는  순간적으로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믿는 사람이 가장 약할 때는 자기 홀로 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그러나 가장 강한 때는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믿을 때입니다.

 

 

 

하나님께 쓴 편지

 


   담임인 위버 선생님은 반 학생들에게 누구에게든지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짐은 자기를 제일 사랑해주며. 자기를 위해서 가장 큰 일을 하셨던 분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짐은 드디어 연필을 쥐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짐과 다른 모든 반 친구들이 편지쓰기가 끝나자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각자의 편지내용을 소개하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은 순서대로 일어나서 자기들이 쓴 편지를 읽었습니다. 끝으로, 짐이 읽을 차례가 되자 그는 일어서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ꡒ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저를 매우 사랑하신다는 사실도 압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저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늘 저와 동행해주세요. 제가 잘못을 행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사랑하는 짐으로부터ꡓ 짐이 앉았을 때 교실은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편지를 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담임 선생님은 반 학생들의 편지에 대해 만족하셨으나 특별히 짐의 편지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셨습니다. ꡒ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준 선물들과 은혜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기를 잊지 않고 있었어요. 그러나 짐의 편지는 하나님께도 우리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도록 잊지 않게 상기시켜주었어요. 성경은 '여호와께 감사함이  좋은 일이다'(시92:1)말하고 있어요.ꡓ

 

 

 

 


하나님은 계십니다

 


   동독 멕클렌부르크의 한 기독교 가정의  딸인 10세 된 소녀가 지방 공산당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모두 일어서라고 해서 자신이 말하는 것을 따라하라고 시켰다."하나님은 없다." 그 어린 그리스도인 소녀는 선생님께"그렇지만 저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선생님이 시키는 말을 따라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 선생님은 "너는 오늘 저녁 집에가서'하나님은 없다'라는 문구를 50번 써오도록 해라"라고 아이에게 시켰다. 어린아이는 집에 돌아가 그녀의 부모와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한 후에'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라는 문구를 50번 썼다. 그녀의 선생님은그것을 읽고 크게  분노하면서"내일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없다'라고 101번 써 갖고 와라. 만약  이렇게 계속 반항하면 내가 경찰에 가서 너와 너의 부모를 신고할 테다"라고 소리쳤다.이것은 빛의 세력과 어두움의 세력의 싸움이었다. 그 어린 소녀의 부모는 주님을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고난을 당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그 어린 소녀는 다시"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계시다"라고 101번을 썼다. 다음날 그 선생니은 그렇게 씌어있는 종이를 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치며 "좋아,이제 내가 경찰에 가서 너를 고발할 것인데 너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나 어디  두고 보자"라고 했다. 이 말을 하고 그 선생님은 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자전거를 타고 길 쪽으로 달려나갔다.그러나 그  선생님은 얼마가지 않아서 학교 정문을 지날 즈음 자전거에서 떨어졌다. 이윽고 그  선생님은 심장이 멈취 땅 위에 죽은 채로 누워 있게 되었다. 우리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드릴때 그 어떤 사탄의 세력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주시든지 아니면 그의  이름을 위한 고난을 능히  감당할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

 


   몇년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을 때, 그 얼마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반대해서 싸우고 있는 아프리카 국민 협회(African NationalCongress)와 접촉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던 한 흑인 그리스도인을 만났습니다. 몇달 동안 그는 심문을 받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갖은 고문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이 사람은 반죽음 상태로 병원 밖의 거리에 버려졌습니다. 내 친구 중의 한 사람이 이 사실을 조사한 결과, 어처구니없게도 이 흑인 그리스도인을 심문했던 책임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어떤 확실한 근거도 없이 소문만 듣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형제를 때리고 고문하도록 도운 사람입니다. 나는 이 흑인 그리스도인의 집에서 그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고충과 그  상황에 저질러진 비인간성을 마음으로부터 해결하고 백인 형제를 용서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깊이 흐느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인간의 속성과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속성과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살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초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ꡒ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 이러한 성품들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열매를 원한다면 그분이 우리의 삶에서 열심히 일하시도록 허락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휴가

 


   어린아이가 하나님께 한 장의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하나님, 오는 금요일에 우리는 두 주간의 휴가를 떠납니다. 그래서 교회를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교회에 계시기 바랍니다. 참, 하나님은 언제 휴가 가시지요?" 어린이답게 순진한 데가 있어 참 좋다. 하나님을 교회에다 떼어놓고 휴가를 가고, 휴가 갔다 왔을 때 하나님께 서 교회에 계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하고, 또 하나님도 휴가를 즐기시는 줄 아는 동심 그대로의 표현이다. 어린아이 생각은 어린아이에게 어울린다. 그런 생각이 어른에게 있다면 큰일이다. 신앙생활을 오래해 온 당신이 휴가 때에 하나님을 떼어놓고 가는 줄로 생각할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행위가 그것을 증명해야 하지 않겠느가? 열번 잡아떼도 휴가 떠난 다음에 하나님을 교회에 떼어놓고 나온 사람처럼 산다면 하나님을 더없이 얕보는 것이다. 어찌 휴가뿐이랴. 교회 밖에서의 당신의 생활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으신다. 어디로 가서 하나님을 피하겠는가? 니체처럼 불신앙으로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지독한 간섭으로 보일 것이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만이....

 


   어떤 사람이 그의 "포드" 승용차를 타고 갈 때 갑자기 이상이 생겼습니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밖으로 나와 엔진을 살펴 보았지만 고장의 원인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엔진 점검을 포기했습니다. 바고 그때 다른 자동차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손을 흔들어 도움을 청했읍니다. 신제품 "링컨" 안에서 키가 크고 인상이 좋은 신사 한 분이 차 문을 열고 나오면서 "무슨 일이 생겼나요?" 하고 물었습니다."이 포드 차가 움직이질 않는군요." 포드를 세워둔 남자의 대답이었습니다. 신사는 엔진 뚜껑 밑을 몇번 조정하더니 "자, 차를 움직여 보십시오"하고 말했읍니다. 모터가 시동되었을 때 남자는 하도 고마와서 자기를 소개하고 나서 신사에게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신사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제 이름은 헨리 포드입니다" 하고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포드"를 만든 사람이 포드를 움직이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나를 만드셨으며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생활과 내 생활을 조정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생활에 이상이 생겨도 그것을 알 수도 없도 또 그것을 고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관리하실 때 모든 것이 순조로워집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태양 앞의 촛불

 


   일전에 칠순이 넘으신 어떤 노신사를 만나 전도를 한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딸이 자기의 힘으로는 부족하니까 아버지가 시골에서 올라 오시자마자 자기 아버지를 전도해 달라고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날 그 어른이 저에게 참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70년이 넘도록 살면서 손톱 만큼도 나쁜 일을 안했오, 내 재산으로 남에게 구제사업도 많이 했오.학교도 세워서 공부도 시키고 좋은 일을 많이 했오. 그러니 천당이 있다면 나를 그렇게 어렵지 않게 들여보내 줄 것이오." 그 말을 듣고 제가 잔인하리만큼 단호하게 한 마디 했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은 너무나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예요. 그래서 선생님이 손톱 만큼도 잘못을 안했다는 그게 정말 별거 아니예요. 마치 태양 앞의 촛불 같다고나 할까요? 어두움에서는 촛불이 굉장하지요? 그러나 태양이 솟아 오르면 촛불은 너무 너무 의미가 없잖아요? 손톱만큼도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은 사람 앞에서는 인정받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가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예요. 사람이 조금 양심적으로 살았다고 하고, 약간 구제사업 했다고 하는 것 전부 촛불이예요. 선생님 그것 가지고는 구원못받아요. 천당 못들어 갑니다. 지금이 성령이 일하시는 시간이구나 생각하고 제가 예수님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씀을 드렸는데 그 어른이 침묵을 깨고 드디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시골에 내려가서 교회에 나가겠오. 가족들과 집안 대소간에 의논해서 나가기로 하겠오."   

 


하나님의 뜻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1. 당신 자신의 뜻을 내어 맡기도록 할 것입니다. 나는 먼저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주어진 문제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의지라는 것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는 상태에 두도록 힙씁시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 주님의 뜻- 가령

그것이 어떠한 것이라 해도 그것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면, 곤란의 10분의

9는 이미 극복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이러한 상태에 있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까지의 도정은, 그리 대단치 않은 것입니다.

        2. 감정에 의뢰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마음을, 1에서 말한 대로의

상태로 두고, 나는 그 경과를 감정이나 단순한 인상에 맡기려 하지 않읍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는 중대한 과로를 범할 위험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의해, 성령의 뜻을 구하도록 하십시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통하여 혹은 성서와의 관련에 있어서, 성령의 뜻을

구합니다. 성령과 말씀이 결합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약 말씀을 부시하고,

성령에만 주목한다면, 나는 또 중대한 과오를 범할 위기에 놓여지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신다면, 말씀인 성서에 따라 인도하십니다. 말씀에

모순되는 인도법을 취하시는 일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환경에 주의하십시오. 다음으로 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자기의 주위 환경을 고려하게 됩니다. 환경은 말씀이 성령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지시하는 일이 종종 있는 것입니다.

        5. 기도하십시오. 나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내게 뜻을 옳게

계시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6. 기다려라. 이렇게 기도와, 말씀의 연구과, 묵상에 의해 나는 자기의

능력과 지식이 미치는 한의 신중한 판단을 내립니다. 만약 이같이 한 결과, 내

마음에 평안이 주어진다면, 그리고 다시 두세번 하나님께 탄원한 후에도 그

평안이 지속된다면 자기의 판단에 따라 행동에 옮기는 것입니다.

        일상의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또 가장 중요한 일의 처이에 있어서도, 이

방법이 언제나 유효한 것을 나는 발견하고 있읍니다.

        ---- Charles E. Cowman, Mountain trailways for youth ----

하나님의 시각

 


  시각은 관점, 곧 사물을 보는 방식을 말한다. 우리는 유한한 인간인

고로, 우리의 시각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의 세살난

아들은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훨씬 잘 안다. 그의 시각은 그의 나이와 경험에 의해서 제한된다.

  당신의 눈으로부터 약 3cm 정도 거리를 두고 그림을 보려고 해보라.

당신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색깔 혹은 점들의 얼룩진

모습뿐이다. 이제는 그림을 거리를 두어서 잘 볼 수 있도록 해보라.

당신의 처음의 시각은 그림과 너무나 근심했던 까닭에 제한되었던

것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시각은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분은

그것을 전부 보셨으며, 지금도 전부 보고 계시다. 하나님은 그림

전체를 보신다. 그분은 당신의 시야를 넘어선 모든 사건, 상황,

그리고 사람들을 알고 계신다. 잠언 3장 5,6 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길을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약속해 준다. 비결은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하나님 찾기   

   구랍 12월 16일자 타임즈는 `인터넷에서 신(God)찾기'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를통해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에 위치한 바나 리서치의 최근 조사결과를 보도했다.

   이들의 조사에 따르면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독인들도 급속도로 인터넷 온라인 상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향후 사이버 스페이스에 자신의 페이지를 구축하지 못한 교회들은 퇴보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번 조사를 위해 수백명의 기독인과 통신을 통해 인터뷰를 진행한 바나 리서치는 "교회의 퇴보는 기술성장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어떤 조언도 해줄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결론지었다.

   현재 종교단체들은 학교 회사, 정부 등 거위 모든 단체들처럼 월드 와이드 웹(WWW)에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교리를 전달하며 게시판, 대화방 등을 통해 정보와 의견을 주고받고 있다. 인터넷 전자공동체에는 하루에도 수천명의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모여 밤새도록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인 교들에 의해 공개토론을 벌이고 있으며, 이것는 인터넷의 성격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나아가 `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변화시킬 수 있는 기술적 흐르미다.

   인터넷 상에서 행해지는 종교활동의 징후는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이를 확인하고 위해서는 강력한 인터넷 searchengine인 Alta Vista를 조작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신(God)'에 대한 웹 페이지를 Alta Vista가 찾아내도록 조작한다면 우리는 약 4십1만개의 페이지를 찾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Christ) 라는 페이지를 찾도록 조작한다면 약 14만6천번 정도 Christ를 만날 수 있다.

   현재 인터넷 상에서 가장 야심적인 사이트는 바티칸의 Holy See사이트이다. 바티칸은 지난 95년 개설해 E-mail the Pope 특별 서비스로 폭발적 호응을 얻은 이 사이트를 재구축하기 위해 작년 11월 인터넷에 Benedicitine 홈페이지를 발달시켜왔고, 지금이라도 porter @ christ, desert, org, 주소로 E-mail를 보내면 받을 수 있으며, 얼마전부터 다른 사람의 웹 사이트를 고안. 유지해주는 사업에 착수한 북서부 뉴 멕시코의 예수 수도원 소속 메리 아퀴나스 수도사를 초청했다.

   Holy See사이트를 월드 와이드 웹(WWW)에서 가장 성스럽고 가장 훌륭한 사이트로 재구축하려는 바티칸 측은 현재 라파엘, 마카엘, 가브리엘이라는 별명을 가진 3대의 강력한 컴퓨터를 통해 하루 24시간 바티칸의 보도자료,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스케줄, 6개국어로 번역된 교황의 저작들을 제공하고 있다.

   바티칸의 이런 조치는 인터넷 시대를 맞아 매우 적절한 것으로 평가된다. 앞서 언급한 바나 리서치의 조사결과와 함께 Holy See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주디스 조블린 수녀의 다음과 같은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인테넷은 폭발하고 있으며, 교회는 거기에 존재해야만 한다. 이것은 복음전도의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다."

 

 

 

              

푸대접받는 `하느님 아버지'

 

 

 

 

 

 

 

 

 

 

 

 

 


   대체로 현대는 아버지가 별로 존경받지 못하는 시대이며 비근한 예로 가장 위대한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하느님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기독교 원리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하느님의 아들에 집착한다. 복음주의자들은 하느님의 아들에 집착한다. 구원받으려면 예수를 체험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오순절파 기독교도들은 삼위일체의 하나인 성신을 중시한다. 가톨릭 교도들은 성모 마리아를 기독교의 완벽한 표상으로 삼는다. 여러 개신교 주류 종파들은 남녀성의 구분을 없애겠다는 일념에서 찬송가와 기도서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부분을 열심히 삭제하고 있다. 뉴에이지계 유대교도들 역시 신성한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에서 남성을 연상시키는 부분을 끊어내고 「야」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추세다. 모든 사람은 천국에서 하느님의 「영적 자식」으로 태어난다고 믿는 호르몬 교도들만이 하느님의 부성을 인정할 뿐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성자와 완전한 동정녀 성모마리아 및 반가부장적인 시대정신과 어떻게 겨룰 수 있을까?

   성서조차도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에 대해서는 냉담하다. 하느님 호칭면에서 「거룩한 분」, 「왕」 혹은 「주님」이라는 표현을 가장 많이 쓰는 것은 헤브루 성서다. 시편의 일부 내용을 제외하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예는 거의 없다.

   물론 예수는 자신의 모든 기도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드렸고 제자들에게도 본받도록 가르쳤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람어로 「아빠」와 비슷한 뜻을 지닌 애칭인 「압바」(Abba)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신약은 대부분의 서구 문학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관점에서 서술됐으며 그의 신성을 찬양하고 있다. 기독교 미술에서 가장 자주 묘사되는 대상은 예수와 성모 마리아다. 어쩌다 성부인 하느님이 등장하는 경우엔 예수나 성령과 함께 묘사된다. 초기 기독교도들은 성부를 성자와 아주 비슷한 젊은이로 생각했다. 후대의 기독교 미술은 성부를 구름 속에서 뻗어 내려온 한 개의 손으로 축소했고 15세기에 이르러서는 턱수염을 기르고 르네상스 시대 교황의 복장과 비슷한 옷을 입은 노인으로 그렸다. 시스턴 성당의 천장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전능한 창조주는 박력 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미국 가톨릭 신학회 회장인 엘리자베스 존슨 수녀와 같은 여권주의자들은 그런 모습이 현대의 감각으로 볼 때 지나친게 「남성중심적」이라고 본다.

   어떤 종교체제에서든 우주의 창조주를 가부장으로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슬람교의 알라는 전능하고 자비로운 신이지만 그의 호칭 99개 중에 「아버지」는 들어 있지 않다. 힌두교의 창조주는 브라다마. 그러나 인도 전역에서 브라마를 모시는 신전은 불과 몇 개 안 되는 데 비해 아들 비슷한 그의 화신들인 비슈누와 크리슈나, 라마를 모시는 신전은 수천 개도 넘는다. 불교에서 창조주가 없다.

   대부분의 기독교도들과 유대교도들은 아직도 하느님 아버지에게 기도를 울린다. 그러나 여권주의 신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그런 날도 많이 남지 않았다. 미국의 여러 명문 신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비유함에 있어서 조심하라고 가르친다. 이제 「하느님 아버지」는 「하느님 어머니」와 대등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었다. 존슨 수녀는 되도록 여성 호칭(She Who Is)을 쓰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성표시 문제를 피하기 위해 단순히 「하느님 자신」(Godself)이란 호칭을 사용한다. 오늘날 주도권을 행사하며 책임을 지고 자녀들을 위해 싸우며 강한 요구를 내세우고 거절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자녀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벌을 주기도 하는 한마디로 아버지 노릇을 해주기를 하느님에게 기대하는 신학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의 음성

 

 

 

  

   어미박쥐는 동굴안에 있는 수천마리의 새끼들중에서 어떻게 자신의 새끼들을 찾아낼수 있을까요. 새끼박쥐들은 어미가 돌아올 즈음에는 큰 입을 벌려 힘껏 울어댑니다. 각각 독특한 파장을 발산하는 초음파를 내서 어미와 교신합니다. 초음파를 감지한 어미박쥐는 자기 새끼들을 찾아내 젖을 먹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어야 합니다.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위해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함께한 신성

 

 

 

 


      1900년 하늘이 맑은 어느 날,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튼 들판.

      형제가 연과 글라이더를 제작,

      비행에 성공했다.

      동생 오빌은 글라이더에 엎드려 탔다.

      이들이 인류 최초로 비행기를 만든 라이트형제다.

      "인간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새처럼 날 수 없을까" 이들은 이런 의문을        가지면서 비행기를 연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뒤에는 목사였던 아버지 밀턴 라이트의 기도와 격려가 있

      었다.

      "두려움을 버려라. 언제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내 생명의 아버지

 

 

 

 


  링컨이 변호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한사람이 찾아와서 재판에서 자기를 변호해달라고 했습니다.

  링컨이 그 사람으로부터 사건 내용을 듣고 보니 불의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당신의 잘못입니다.

  나는 변호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그 사람이 소리치며 "변호사란 돈   받고 무엇이나 하는 것이 아닙니까?"

  링컨이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저는 거절하겠습니다. 내가 평생 먹을 것은   나의 아버지께서 이미 약속해 주셨으니 걱정 없고, 아버지께서 원치 않는   불의를 변호 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당신 아버지는 가난한 통나무집에 살았다는데 무슨 유산을   받았다는 거요?" "당신은 아직 모르시는군요? 통나무집에 사시던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내 생명을 보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법

 

 

 

  '법의 정신'을 저술한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이자 법학자였던 몽테스키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 자신에 유익해도 내 가족에게 해로우면 하지 말아야하고, 내 가족에게 유익해도 내 나라에 해로운 일을 하지 말아야하며, 내 나라에 유익해도 전 인류에게 해로우면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오늘날의 정치인들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명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하나님의 백성들은 단순히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성경 진리는 가장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더 말하고 있습니다. 전 인류에게 유익해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청의 신

 

 

 

  겁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계속되는 지진, 끔찍한 전쟁, 반인륜적인 살상, 대형 비리, 무너지는 경제, 파괴되는 가정 등 어떻게 보면 살맛 안 나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과연 계시는가. 도덕의 윤리를 양심의 자유에서 구하고 그 위에 종교를 구축했던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요청의 신'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계 질서와 평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

 

 

 

   고대 그리스에 키소이테스와 파라시우스라는 두 화가가 있었다. 사람들은

두 화가의 우열을 시험했다. 먼저 키소이테스가 포도 그림을 나무에 걸어놓

았다. 그러자 새가 날아와 그것을 쪼았다. 다음은 파라시우스가 엷은 커튼 그

림을 창문에 걸고 키소이테스를 초청했다. 진짜 커튼으로 안 키소이테스가

걷으려고 손을 댔다. 아테네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속인 파라시우스가 새

의 눈을 속인 키소이테스보다 뛰어나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하나

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3,499 건 - 5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