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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문의 순교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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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문은 아버지 현계흠의 감화를 받아 신앙을 얻었으며 교명 챨스(C-harls)라 하였다. 아버지는 1801년 신유교난 때 순교한 인물로, 1766년영국 군함 프로비덴스호가 경상도 동래에 내항하였을때 이 한척의 이국선이 우리의 전함 백척과 비슷하다고 하여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음을 보아, 그가 상당한 선각자 였음을 알 수가 있다. 현계흠은 부경사절의 역관으로 북경을 왕래하면서 18세기 한국 천주교를 위하여 상당히노력하였다.현석문은 이러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으며 앵베르(Joseph Imbert)주교가 압록강을 건너 입국할 때 길안내를 하는 모험을 감행하였는가 하면, 샤스탕(Chastan,)신부를 위한 보조역할을 하였으며 서울 교우회장이 되어 선교사업을 위하여 맹렬히 활동하였다.1839년 기해교난이 발생하자 누이동생 경련이 체포되어 도끼에 찍혀순교하였는가 하면, 부인 김데레사는 남편의 거처를 말하라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입을 열지아니하여 옥중생활 8개월만에 12월 28 일어린 젖먹이 아들과 함께 생명을 잃었다.모진 박해의 추격을 간신히 피한 현석문은 닥치는 고난을 몸소 체험하면서도 빈사상태에 놓인 교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동분서주 하였다.그는 한국교회 실정을 알리는 서한을 북경 주재 선교사에게 보내기도하였고, 때로는 몸소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을 왕래하기도 하였다. 드디어 그는 1846년 (헌종 12년) 체포되어 7월 29일 새남터에서 참수 효수되어 다사다난했던 일생의 막을 닫았다. 이와 같이 하여 현석문은 부자,부부, 형제가 다 순교자 반열에 참여하였다.그가 쓴 순교전기는 흔히 기해일기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크게 일어나자 조만간에 자신도 순교할 것이라고 각오하고 거룩한 순교의 자취가 영원히 없어질 것을 염려한 나머지 순교의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기록으로 남기라고 현석문에게 부탁하였다.현석문은 교난의 한복판 위험한 와중에서 이 저술을 완성하는데 성공하였다.[현석문이가 순교전기인 기해일기를 저작하기 위해 와신상담하여 그의생애를 다 바쳤기에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의 장엄하고도 빛나는 모습이나타났다. 하겠거니와, 저자가 한 알의 밀이 되어 땅 속에 묻혀 썩을지언정 이 사료가 한국교회를 신앙으로 훌륭히 장성케 하는 동력이 된다면야 이에서 더 큰 보람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위의 인용 글을 필자가 저술한 한국기독교전래사 책의 서문에 있는 내용으로서, 한국 교회사의 저술을 위해 투신하게된 큰 계기가 되었음을 솔직히 증언 고백하는 바이다.기해일기에는 주로 기해교난때 순교한 사람들의 열전이 수록되어 있다.이 귀중한 문헌이 행방불명으로 내려오다가 1904년 서울 어떤 교우 집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책의 첫부분과 뒷부분이 썩어서 없어져 있었다. 뮤텔(Mutel)주교는 책의 첫머리 부분에 자신의 서문을 삽입하였으며 부록으로 순교자 82명으로 하여 정리하였다. 뮤텔주교는 이렇게만든 246페이지에 달하는 기해일기를 1905년에 출판하였다.뮤텔 주교는 이 82명의 순교자의 신앙을 교황청에 보고하였고 그들중의 79명이 1925년 복자의 칭호를 받았다. (아드리앙 로네작,한국 79위순교복자전)이 79명 복자 중에 69명은 현석문의 기해일기에 기록된 순교자들이다.그렇다고 하면 이들이 영광의 순교자 반열에 오르게된 것은, 그토록 험준한 환난가운데서도 난관을 극복하면서 가족의 희생마저 감수하면서기록을 남긴 현석문의 업적의 공이 컸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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