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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학의 개척자 오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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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분방정식 등 창안 큰업적 남겨/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23세때 물리학교수/실명·자녀8명 잃는 역경 믿음으로 극복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셨다.성막과 성전과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의 치밀한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다.우주에 편만한 조화와 대칭과 상호 의존성은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한다. 그런데 이와같은 질서에는 반드시 수학적 해석과 설명이 가능하게 마련이다.그렇다면 수학이야말로 하나님의 솜씨를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풀어주신 계시요,은혜요,표적인지도 모른다. 수학적 질서로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통하여 사람들에게 수학적 안목을 베풀 것이라는 소박한 희망을 가져볼 수도 있다.그렇다! 그것은 사실인지도 모른다.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오일러야말로 하나님께 선택된 수학자일 것이다. 오늘날 근대 수학사에 있어 그 기본체계의 가장 많은 부분이 오일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데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오늘날 수학책에서 쓰이는 많은 기호는오일러가 도입한 것인데 수학에서 가장 유명한 기호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문자 2를 지름(직경)에 대한 원주율(22)로 표시한 것도 오일러였다.레오날드 오일러(1707-1783년)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그의 수학적 안목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아버지에 의하여 싹튼 것으로알려지고 있다.아버지는 칼뱅파의 목사였다. 13세가 되던 1720년 오일러는아버지와 본인의 의사에 따라 유명한 바젤대학에서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였다.그러나 오일러는 곧바로 자신의 사명이 신학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를 통하여 흥미를 가지고 있던 수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의 수학적 재능은 일찍이 동향의 유명한 수학자 베르누이(그의아들 다니엘 베르누이가 바로 유체운동을 수학적으로 나타낸 [베르누이정리]를 발견한 사람)의 눈에 띄게 되고 그는 약관 20세에 러시아의 성 페테르스부르크 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23세가 되던 1730년에는 페테르스부르크대학의 물리학 교수,26세인 1733년에는 다니엘 베르누이의 후임으로 수학과 주임을 맡았다. 이렇게 보면 그는 그저 단순히 순탄한 가도를달린 천재 과학자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그렇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역경을 신앙으로 극복하며 과학자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었다.28세때 그는 한쪽 눈을 잃게 된다.그리고 1766년에는 다른 하나의 눈마저잃게 되었다.그는 또한 13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8자녀를 어려서 잃는 비운을 맛보기도 했다. 이런 고난 가운데서도 그가 현대수학사에 있어 가장 뛰어난 금자탑을 이루었다는 것은 그가 한때 신학을 공부했을 만큼 도길한칼뱅주 의자였기에 고난을 신앙을 통한 불굴의 의지와 인내로 극복할 수있었기 때문이다.그는 특히 수학의 미적분학,미분방정식,무한급수,해석기하학 등에 흥미를갖고 많은 공헌을 남겼다.그의 뛰어난 업적은 지나치게 전문적이고 난해하여 필자의 빈약한 지식으로는 이 난에서 자세히 언급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역학에 있어써의 오일러­그랑주의 방정식, 무한급수에 있어서의 오일러의 변환,오일러의 정수 오일러의 수,강체운동에 있어써의 오일러의 각,오일러의 방정식등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더라도 언젠가 한두개 정도는 귀에 익은 법칙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이런 모든 과학적 열매들이 과연 우연하게 스위스의 이 한 과학자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오일러의 수학적 발견들은 그가 아니었더라도 훗날 누군가가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신학을 원하던 이 칼뱅파 목사의 아들을 오히려 위대한 수학자로 선택하였던 것이다.<조덕영·한국창조과학회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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