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씨앗이 뿌린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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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목사와 후손들한국교회사에 우뚝 선 인물 중의 한 사람이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Horace Grant Underwood)목사다.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한국장로교회의 모교회인 새문안교회,현 대한기독교서회의 뿌리인 조선선교서회를세우고 그리스도신문을 창간해 전도와 교육 문서선교에 일생을 바친 벽안(碧眼)의 선교사.언더우드목사 출생 140주년 및 이장기념예배가 19일 오후3시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 내 외국인교회에서 성대히 거행된다. 언더우드는 1859년 7월19일 영국 런던에서 출생해 부친을 따라 1872년 미국으로 이민했으며,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한 후 곧바로 뉴브런스윅신학교에 진학해 1884년 6월 목사안수를 받았다.네살 때부터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그는 안수 후 인도에 가기를 희망했고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의학과 인도어를 공부했다.그러나 당시 주미대사로 있던 민영익을 통해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고 더군다나 한국에 갈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됐다.그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의 초대 선교사로 임명됐으며 그해 말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885년 1월 일본에 도착했다.일본에 도착한 후 한국에 가는 기선을 기다리느라고 잠시 지체했는데,이 때 한국인으로 초대 교인의 한 사람인 이수정씨를 만나 우리말을 배웠고 우리말로 번역된 마가복음을 받아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 인천항에 도착했다.언더우드는 한국에 도착한지 3일만에 의료선교사인 알렌박사가 개설한 제중원(연세대 의과대학 전신)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침으로써 한국에 대한 봉사를 시작했다.또한 정동에 있던 사옥에서도 10여명의 아이들을 모아교육을 시작,근대교육운동의 토대를 닦았다.1886년에는 한국의 첫 고아원을 세웠고 이어 고아학교를 창설했다.이 학교는 후에 경신학교로 발전하게되며 이 때 대학 창립의 계획도 마음에 두었다.그는 1889년 후임 선교사들과 한국 문화의 발전을 위해 ‘한국어 문법’과‘한영사전’을 편찬 간행했다.그리고 기독교 문서운동을 위해 조선선교서회를 조직하고 이곳의 사무를 관장했다.전도 교육 문서선교에 전력을 기울이던 그는 1897년에 ‘그리스도 신문’을 간행해 교계는 물론 사회에도 새로운 지식과 영적 교양을 전달했다.이 신문은 관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1900년에는 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는 데 주도적으로 나서 첫 총무 질렛씨를 미국에서 초청했다.언더우드목사는 1903년부터 소천받을 때까지 이 기독교청년회의 회장으로 시무했다.1904년에는 조선교육협회 회장으로 추대됐고 이듬해에는 한국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공의회 의장으로서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계승,각 교단별 선교구역을 확정하게 된다.1909년에는 조선 장로교노회 회장으로 취임했다.‘한국 개신교 수용사’ ‘동아시아의 종교’등의 저서도 간행했다.이와 병행해 대학 설립에 관한 비전을 갖고 있었던 그는 여러 차례 서울의경신학교를 확장해 구체적으로 대학의 증설을 계획한다.그러나 대학의 설립은 당시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간에 이견으로 비용 문제로 실행되지 못했다.따라서 그는 1912년 봄에 휴가를 얻어 도미해 대학 설립을 위한 5만2천달러의 기부금을 형인 존 T.언더우드씨에게서 받아 귀국했다.결국 한국에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 한 대학설립이라는 비전을 세우고 다방면으로 노력한 그는 1915년 조선 크리스천대학(연희전문학교 전신)을 설립해 오늘의 연세대학교의 토대를 마련했다.31년 동안 한국을 위해 종교 교육 문예 자선 등 다방면에 걸친 봉사를 하다가 발진티푸스병이 악화된 그는 1916년 4월 요양차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세상을 뜨기 전 그는 부인을 향해 “내가 저 먼 나라로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소”하고 말했다고 한다.부인이“거기가 어디예요.한국 말씀이예요”하고 물으니 안색이 밝아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언더우드는 1916년 10월 12일 57세를 일기로 뉴저지주 애틀랜틱시에서 세상을 떠났다.언더우드는 연세대학교에 있는 동상에 새겨진 글귀대로 진정 ‘하나님의사자(Messenger of God)’로 우리나라에 와서 ‘그리스도의 제자(Followerof Christ)’로 살다가 ‘한국인의 친구(Friend of Korea)’가 된 사람이었다.그리고 언더우드가 한국에 심어 놓은 선교정신과 한국사랑의 정신은 그가 서거한 후 80여년 동안 그 후손들에 의해 가꿔져왔다.한편 언더우드의 아들 원한경은 1890년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일하다1951년 한국에 묻혔다.그는 1912년 연세대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평생을 대학에 헌신했다.그는 한글 뿐아니라 한문에도 관심이 많아 한국학을연구해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했다.또한 그는 서해와 남해를 항해하며 이순신장군이 임진왜란시 활동한 해도를 만들었고 ‘조선의 선박’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이외에도 ‘한국어 자습서’ ‘한국의 근대교육’ ‘영한사전’ 등 한국에 관한 저서만 수십종이 된다.원한경의 한국사랑은 그대로 그의 아들 원일한에게 이어졌다.1917년 서울에서 태어나 7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해밀턴대학과 뉴욕대학원을 마치고 1939년 23세의 나이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한 그는 연세대에서 교편을 잡았다.그러나 이때는 일제의 기독교탄압이 극에 달해 있어 1942년 강제추방을 당하기도 했다.해방 후 다시 내한해 백낙준 김윤경박사와 함께학교 복구사업에 전력을 기울여 오늘의 연세대가 있게 했다.4.19 이후에는 총장서리로서 교수 학생간의 갈등 및 교권수호문제 등을 원만히 해결하는 행정력을 발휘하기도 했다.1978년 교수직에서 은퇴한 그는지금까지 연세대 상임이사로서 활동 중이며 최근에는 성서공회 이사로 교회연합사업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원일한의 아들 원한광은 부친이 한국에서 강제 추방된 시절인 1943년 출생해 3세 때 아버지를 따라 내한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1971년 연세대영문과교수로 부임한 그는 올해 안식년을 맞아 잠시 강단을 떠나 지금은 한미교육위원회 총무로 봉사하고 있다.4대에 걸쳐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한국을 사랑해온 언더우드 일가,그들은 푸른 눈을 가진 한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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