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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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주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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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 한 지방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일할 때다. 오케스트라는 한 기획사가 준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느라 여러해 동안 지방을 돌며 연주했다. 그 기획사는 많은 일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다 급기야 파산했고, 마지막 연주료를 오케스트라에 지불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단원들의 일부는 이성을 잃은 채 흥분하며 기획자로 하여금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법에 호소해보았자 당시로선 연주료를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기획사는 여러 관계까지 한꺼번에 잃게 되니, 한번 더 기회를 주고 기다리는 아량과 여유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오히려 필자는 기획사를 옹호한다 하여 연주료를 받았다는 의심과 오해까지 사게 되었고, 기획사의 대표는 결국 돈 대신 복역을 통해 연주료를 지불하게 되었다.세월이 흘러 그 기획사의 대표가 재기할 즈음 필자를 찾아왔다. 그는 오랜 기다림에 감사한다며 새 회사의 후원자가 되어 달라고 했다. 손에는 몇해 전 지불하지 못한 연주료의 일부라며 봉투가 들려 있었다. 나머지는 계속해서 갚겠다는 말과 함께 그는 내게 봉투를 건넸다.극한적 상황에서 피해를 당할 때 분노보다는 참고 기다리는 여유를 갖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인내와 아량없이 극한 상황에 대처한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낙오자로 만들어, 당연한 자기 몫 뿐 아니라 동료까지 잃을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함께 발견하고 공유할 미래 역시 얻지 못하는 게 아닐까.(지휘자·경희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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